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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6주일]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마르6,30-3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18 조회수2,217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7월 18일 주일

[연중 제16주일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마르6,30-34)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2012년 7월 22일 연중 제16주일

 

1독서<양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세워 주리라.>(예레23,1-6)

불행하여라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주님의 말씀이다.

2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주님의 말씀이다.

그런 다음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그러면 그들은 출산을 많이 하여 번성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주님의 말씀이다.

보라그날이 온다주님의 말씀이다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화답송 시편 23(22),1-3.3ㄴㄷ-4.5.6(◎ 1)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주님은 나의 목자아쉬울 것 없어라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당신 이름 위하여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당신 함께 계시오니두려울 것 없나이다당신의 막대와 지팡이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원수들 보는 앞에서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제 한평생 모든 날에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2독서<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2,13-18)

형제 여러분, 13 이제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복음<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마르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연중 제16주일 제1독서(에레23,1~6)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1~2ㄴ)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될 심판의 원인과 결과를 강조한 12개의 단편 예언이 수록된 예레미야서 제2장~25장 중에서, 예레미야서 23장 1절부터 8절까지는 아홉번째 예언 속한다.

즉 남부 유다의 왕가에 대한 예언이 수록된 예레미야서 21장 1절~23장 8절의 마지막 단락을 이루고 있다.

 

앞선 에레미야서 21장, 22장에서는 치드키야, 살룸(여호아하스),여호야킴, 콘야(여호야킨 혹은 여콘야)등 남부 유다 왕국 마지막 통치기의 인물들이 직접 거명되는데, 이들의 죄악상과 더불어 그들 각각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 심판의 메시지는 각각의 왕들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남부 유다 왕국과 유다 백성들 모두에 대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는 여호야킴의 아들 콘야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남부 유다를 다스릴 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예언되었다(예레22,30).

 

이 콘야 왕은 당시 남부 유다 백성들에게 다윗의 계보를 잇는 정통성있는 왕으로 여겨졌으므로, 이같은 메세지는 남부 유다 왕국에 아무런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매우 절망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남부 유다 왕가에 대한 예언을 마무리하는 예레미야서 23장 1절 이하 8절에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되어 남부 유다 백성들에게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 전달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예레미야서 21장, 22장과 달리  예레미야서 23장에서는 남부 유다 백성이 이제까지 백성들을 잘못 인도한 여러 유다 왕들과 공동 운명체로서 다루어지지 않는다. 

심판은 유다 민중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각각의 왕들에게 주어질 것이며(1~2절), 포로로 잡혀간 선민들은 귀환하게 되고,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왕 세워주실 것이라고  예언된다(3~4절).

 

그리고 이어지는 예레미야서 23장 5,6절 단락에서는 이 새로운 왕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예레미야서 23장 7,8절 단락에서는 장차 도래할 포로민의 귀환과 남부 유다 왕국의 회복을 확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인간의 패역부도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주도적인 권한으로 역사하시고 자비와 은총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면모를 드러내 보여주며, 보다 거시적인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모든 성도들의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예표하고 있다고 하겠다.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버린 목자들!'  

본문은 하느님의 저주와 심판의 대상 밝히고 있다. 이것을 나타내는 '목자들'에 해당하는 '로임'(roim)은 '목자'라는 의미를 가진 '라아'(raah)의 복수형이다. 

즉 '목자들'이라는 의미로서 남부 유다 말기의 왕들, 특별히 에레미야서 21장, 22장에서 언급된 네 명의 왕들 더불어 예레미야 예언자 당대의 왕국 관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국가의 왕을 '목자'로 나타내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드문일은 아니었다. 특별히 목축업과 상당히 많은 권력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자'라는 단어는 보호와 인도와 돌봄의 이미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치는 가축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들을 잘 돌보는 역할을 하는 목자의 이미지는 하느님의 양 떼를 불행의 길로 인도한 남부 유다의 왕들과 대조되면서 그들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목자들이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인 목자들의 행태가 두 가지 동사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각각 '파멸시키고'와 '흩어버린'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중에서 '파멸시키고'에 해당하는 '메압베딤'(meabbedim)의 원형 '아바드'(abad)는 '죽다', '사라지다'라는 의미이며, 본문에서처럼 강조형으로 쓰일 경우 '죽게 하다', '멸망케 하다'라는 사역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흩어버린'에 해당하는 '우메피침'(umephitsim) '푸츠'(phuts)의 사역형으로서 '널리 흩어 보내다', '몰아내다', '쫓아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전쟁에 패하여 뿔뿔이 흩어지는 것(2열왕 25,5)과 더불어 이방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느헤1,8)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결국 이 동사는 남부 유다 왕국의 왕들이 패전으로 인한 백성들의 죽음 남부 유다 왕국의 멸망 및 남부 유다 백성들의 바빌론 유배의 원인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왕들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평가와 대조적으로 남부 유다 백성들을 상징하는 '양 떼'에 대해서는 '내 목장의'라는 표현으로 수식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1인칭 접미어 즉 '나의 소유'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은 남부 유다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5ㄷ) 

본문은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에 새로운 왕을 세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은유적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싹'에 해당하는 '체마흐'(tsemah)는 나무 줄기나 땅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이사야서에서 두 번 사용되었는데(이사4,2; 61,11), 특히 이사야서 4장 2절의 문맥에서 본문의 예언과 동일하게 장차 하느님의 나라를 이끄실 메시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즈카리야서 3장 8절과 6장 12절에서도 이 용어의 사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표현이 이상적인 왕 메시아를 나타내는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처림 메시아께서 한 싹으로 나신다는 비유 두 가지 의미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이전의 왕들과 전혀 다른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남부 유다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의 주도적인 능력에 의해 새로운 왕이 나타나실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이다. 

사실 남부 유다 왕조의 역사는 패역부도한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로서 인간 왕에게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여호야킨이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바빌론 땅에서 그 삶을 마무리하고, 그나마 왕으로 세워진 치드키야 마저 바빌론으로 끌려갔을 때, 다윗 왕조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왕조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과거에 있었던 패역부도한 이런 왕들의 흐름을 끊고,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갈 진정한 왕을 세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관련해 세례자 요한의 부친 즈카리야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다윗 집안에 일어날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한다(루카1,69.78.79).

 

 

 

 

 연중 제16주일 복음(마르6,30~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4)

 

여기서 '목자'로 번역된 '포이메나'(poimena; a shepherd)는 '포이멘'(poimen; 1베드2,25)의 목적격 단수이다. 

신약에서 '포이멘'(poimen)이 여기처럼 단수형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마태26,31; 히브13,20).

 

하지만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목자'는 예수님처럼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를 뜻한다. 

당시 군중들을 인도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즉 당시에 존경받던 랍비들이나 말씀을 가르친 율법학자들은 참된 의미의 목자가 아니었다.

 

마르코 복음 6장 34절(ㄴ)에서 동사 두 개가 하나는 직설법으로 쓰였고, 다른 하나는 분사로 쓰였다. 

'목자 없는'의 '없는'에 분사로 쓰인 '에콘타'(echonta; having)의 시제는 현재이며, '같았기 때문이다'의 '같았기' 직설법으로 쓰인 동사 '에산'(esan; they were)의 시제는 미완료 과거이다.

 

이것은 벳사이다 들판에 몰려든 큰 군중들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삶', 즉 참된 영적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채 목적없이 방황하는 삶을 살아 왔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들에게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은 더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애끓는 감정을 묘사한 단어가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이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gchnisthe; was moved with compassion) 원형 '스프랑크니조마이'(splagchnizomai)는 '창자' 혹은 '내장'을 의미하는 '스플렌'(splen)에서 유래했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내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이 용어는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사랑이 전제되어 상대에 대해 주체할 수 없는 애끓는 '측은지심'(연민의 정; 동정심)의 마음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마태9,36).

이것은 이 용어가 루카 복음 15장 20절에서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아들임을 알아채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가 가졌던 마음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도 바로 이같은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애끓는 사랑의 마음이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복음 선교와 선행과 치유의 밑바닥에는 이같은 측은지심이 깔려 있어야 하고, 전제되고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군중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신다. 

여기서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의 '가르쳐 주기'에 해당하는 '디다스케인(didaskein; to teach; teaching)은 현재형으로서, 그 가르침이 쉬지 않고 계속 베풀어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마르6,35).

 

그리고 본문과 병행 구절인 루카 복음 9장 11절에서 이 가르침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으며, 여기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목자로서의 첫번째 행위가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4장 14절에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으로 되어 있고, 루카 복음 9장 11절에서는 말씀과 치유가 둘 다 언급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로서 자신을 찾아온 가엾은 양들에게 영적 양식과 육적 회복을 다 베푸셨던 것이다.

 

 

 

그분 안에서의 쉼

 

2021년 7월 18일 [연중 제16주일]

 죄인들의 달려야 할 저주의 십자가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대신 달리셨기에 십자가가 하느님의 영광인 것이다.

(마르6,30-34)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 외딴 곳(에레모스 - 廣野)에서 음식, 곧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쉬라고 하신다.(안식) 먹을 물도 양식도 없는 곳이 광야, 외딴 곳이다.

 

(신명8,2-3) 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만나(성체)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뜻한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 배(敎會, 하느님백성)는 세상과 따로 분리된, 구별된 외딴 곳의 음식, 곧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쉼, 안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17,28) 28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 예수님은 왜 그들을 목자 없는 양들 같이 보셨을까? 앞13절 이하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었다는 그 소문을 듣고, 그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시려던 외딴 곳을 陸路(땅, 세상)로 달려 먼저 다다른 , 쫓아온 그 헛된 열성이 목자 없는 양 같아 보이신 것이다. 다른 말로, 배(교회)의 길, 곧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대속, 그 진리의 길이 아닌 인간들, 자신의 뜻을 위해 그 자신의 방법(계명), 길로 찾아 온 그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셨던 것이다.

 

(티토1,14) 14 유다인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던 것은 회개의 선포와 기름 부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앞에서 기름은 하느님의 빛이며 성령이라 묵상했다. 그 하늘의 빛, 성령으로 마귀(뱀)의 유혹, 그 거짓에 속아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인간들의 뜻, 욕망을 위한 말, 法, 敎理로 들어 헛된 신앙으로 병든 이들을 고쳐 주었던 것이다.

곧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하늘의 생명, 구원을 준 것이다. 그런데 그 眞實, 그 주님의 길이 아닌 肉의 길로 肉의 치유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따라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목자 없는, 참 가르침, 참 진리의 말씀을 받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35절 이하에서 구원의 진리, 생명의 가르침을 주신다. 곧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의 양식,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시고(먹고) 대신 하늘의 양식, 당신의 생명(빵)으로 바꾸어 먹이시고 오천 명을 살리시는 구원의 가르침인 것이다.

 

(요한10,11)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우리의 죽음을 먹으시고(죽으시고), 대신 당신의 생명으로 영원히 살게 하시는 그 계약의 그리스도, 우리의 主人 주님이시다.

 

(히브13,20) 20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 끌어 올리신(아나고- 법정 용어로 죄에서 풀어주셨다) 곧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그 저주(詛呪)에서 풀어주셨다는 것이다.

 

(필리2,6-11)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주인)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이라 하셨다. 그 목적을 우리가 이루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시고 하느님께서 예비하셨다는 것이다. (에페1,4~참조)

생각해 보자, 하느님께서 당신 외 아드님을 우리의 속죄 제물로 내어주신 우리의 지각(知覺)으로는 알 수 없는 그 사랑으로, 地獄에 가야 할 우리가 天國을 살게 되었으니 어찌 感謝로 드리는 榮光이 나오지 않겠는가.

 

(히브13,2) 21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통하여) 당신께서 기뻐하실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영원 무궁토록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 온갖 좋은 것, 앞에 하느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 구원에 이루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 그분의 대속의 피로 모든 죄, 더러운 양신까지 씻겨진 그 사람만을 하느님은 마음에 들어 하신다. 예수님의 영광, 곧 예수님께만 있는 영광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들릴 수 있는 것이다.

*영광(히브리어-독사(δόξα))은 어떤 존재의 내용이 밝혀져, 밝히 드러난 것을 독사, 榮光이라 한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속성, 거룩하심, 아름다우심, 존귀하심, 그러한 하느님에 대한 내용이 신자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인 것이다. 곧 우리의 죄가 드러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다. 十字架는 죄를 벌하시는 하느님의 公義다.

 

(골로1,21) 21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 반드시 죽어야할 원수(怨讐), 죄인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아들(獨生子)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게 하시어 건져 내시는 하느님의 사랑, 자비. 그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 그분의 성품, 속성이 함축되어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십자가 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예수님의 영광, 하느님의 영광’ 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한12,23) 23(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코린4,6)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달리는 것,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곧 인간들의 길이 구원의 진리가 아님을 깨닫고 인정하는 그 自己否認, (버림,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천주의 성령님! 성령님의 충만으로 십자가 그 영광 속으로 들어가 쉼(안식)의 삶을 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저희 마음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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