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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태13,1-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21 조회수3,22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7월 21일 수요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태13,1-9)

   

 

1독서<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리라.>(탈출16,1-5.9-15)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는 엘림을 떠나엘림과 시나이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다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둘째 달 보름이 되는 날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이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하였다.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이렇게 하여 나는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다.

엿샛날에는그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주님께서 너희의 불평을 들으셨으니그분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하고 말하십시오.”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말하고 있을 때그들이 광야 쪽을 바라보니주님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났다.

1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12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3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다그리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다.

14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15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

 

화답송 시편 78(77),18-19.23-24.25-26.27-28(◎ 24ㄴ 참조)

◎ 주님은 하늘의 양식을 주셨네.

○ 그들은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시험하며욕심대로 먹을 것을 달라 하였네하느님을 거슬러 그들은 말하였네. “하느님이신들 광야에다상을 차리실 수 있으랴?” 

○ 그분은 높은 구름에 명하시고하늘의 문을 열어 주시어만나를 비처럼 내려 그들에게 먹이시고하늘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네

○ 천사들의 빵을 사람이 먹었네주님이 양식을 넉넉히 보내셨네하늘에서 샛바람 일으키시고당신 힘으로 마파람 몰아오셨네

○ 그들 위에 먼지처럼 고기를바다의 모래처럼 날짐승을 내리셨네그들 진영 한가운데에천막 둘레에 떨어뜨리셨네

 

복음<열매는 백 배가 되었다.>(마태13,1-9)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어떤 것은 백 배어떤 것은 예순 배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제1독서 (탈출16,1-5. 9-15)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나는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다.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 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  (4-5)

 

'이제 내가'로 번역된 '히느니'(hinni; Behold,I) '나를 보라, 내가 이제 중대한 일을 너희 앞에 보일 것이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에 대해 하느님께서 이제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기적을 통해 그들의 원망을 해결하시겠다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비처럼 내려줄 터이니'로 번역된 '마므티르'(mamtir)는 '(비를)내리다'(창세2,5; 이사5,6)라는 뜻을 지닌 동사 '마타르'(matar)의 강조 능동형 분사이다.

이처럼 행동의 계속을 나타내는 분사형이 사용됨으로 인해 '계속해서 (비를) 내릴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원문은 동사 자체에 '억수같이 쏟아지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하느님께서 양식을 계속적으로 그리고 풍성하게 공급하실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지금 주님께서 원수 이집트를 징벌하시고 그 백성들에게 권능의 은총을 베풀어 노예의 신분에서 구원해 내신 하느님의 손을 원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양식을 비처럼 충분히 내려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 백성에 대한 오래 참으심(예레15,15; 로마9,22; 2베드3,9)과 더불어 하느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자비로운 보살핌을 보여주는 것이다(느헤9,15; 시편78,24-25 ; 105,40; 요한6,31.32; 1코린10,3).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로 번역한 '웰라케투 떼바르 욤'(wellaqetu debar yom)에서 '모으다', '거두다'로 번역된 '라케투'(laqetu)의 원형 '라카드'(laqat) '모으다'(gather)(창세31,46)라는 뜻으로 광야 지면에 흩어져 있는 만나를 모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떼바르 욤'(debar yom) '일'(1열왕15,5), '것'(탈출9,4)등을 뜻하는 명사 '떼바르'(debar)와 '낮'(창세8,22), ''(창세1,5)를 뜻하는 명사 '욤'(yom)이 함께 쓰여 '날의 것' 즉 '하루의 것'이라는 뜻이며, 이것은 곧 '하루 동안 먹을 분량의 양식'을 의미한다.

 

'시험해 보겠다'라고 번역된 '아낫쎈누'(anassennu; I may prove them)는 '시험하다'(창세22,1; 1열왕10,1)라는 뜻을 지닌 '나싸'(nassa) 강조 능동형 1인칭 단수 미완료형에 대명사 접미어가 불은 형태 '내가 그를(그 백성을)시험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시험하다'로 번역되는 '나싸'는 '유혹하다'라는 의미보다는 '입증하다'(prove), '검증하다'(test)라는 의미를 지니는 동사인데, 여기처럼 강조형으로 사용될 때는 대개 어려운 상황을 통해 그 대상의 진가를 입증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구절은 매일 하루 분량의 양식을 거두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고 쉽지만은 않은 일임을 암시한다.

 

이것은 양식을 거두는 노동이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하루 분량 이상의 식량을 거두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심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하루 분량을 거둔다 하더라도, 다음 날을 위해 그것은 남기거나(탈출16,19.20) 엿샛날에 안식일을 예비해서 이틀 분량을 거두지 못해서 안식일을 어기는(탈출16,27)등 만나와 관련된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여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입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날 거두어 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장만해 보면'으로 번역된 '웨헤키누'(wehekinu)는 '세우다'(잠언3,19), '견고케하다', '존속하다' (시편89,37)란 뜻의 동사 '쿤'(kun)의 강조 능동형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이렇게 강조형으로 사용될 때는 '준비하다', '장만하다'(창세43,16; 시편147,8)라는 뜻을 지니게 된다.

 

이처럼 엿샛날(제 육일)에 거둔 것을 미리 장만해야 했던 이유는 그 다음 날이 안식일이므로 만나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안식일에 대한 규정이 율법으로 명문화되지는 않았지만, 6일간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신 하느님의 창조의 원리와 질서에 의해(창세2,1-3) 하느님의 경건한 백성들은 제 7일에 안식하는 규정을 지켜왔을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출애굽하며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공식 출발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에 관한 규정을 가시화하고 계신 것이다.

 

이처럼 점진적으로 계시가 발전되면서 마침내 탈출기 20장 8-11절에서 안식일 규정이 십계명으로 성문화 된다.

 

'날마다 모아 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  (5)

 

'될 것이다'로 번역된 '웨하야'(wehaya; and it shall be)에서 '존재하다', '있다'는 뜻의 동사 '하야'(haya)가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비록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틀림없이 갑절이 될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렇게 갑절이 되는 원인이 엿샛날에 거두는 양을 배로 늘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평상시와 다름없이 거두었는데 결과적으로 갑절의 양이 되었는지 탈출기 16장 5절의 원문상으로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엿샛날에 거둔 만나가 그 다음 날이 되어도 다른 때와는 달리 전혀 상하지 않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며, 이러한 일의 배후에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역사하심이 있었다.

 

"엿샛날에는 한 사람에 두 오메르씩, 양식을 갑절로 거두어들였다." (탈출16,22)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 (13-15)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진영 위로 갑자기 올라오는 메추라기 떼의 모습은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더우기 그 메추라기 떼의 규모가 '진영 이쪽과 저쪽으로 하룻길 되는 너비로 떨어뜨려, 땅 위에 두 암마 가량(약 90cm) 쌓이게 하며'(민수11,31) 엄청난 것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광경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메추라기'를 뜻하는 '셀라웨'(sellawe; the quail)는 짧은 날개와 작고 둥근 머리와 통통한 몸집을 가진 '꿩'과의 철새이다.

이 메추라기는 팔레스티나를 중심으로 봄에는 아프리카에서 떼를 지어 북쪽으로 날아왔다가 가을쯤 아바리아와 시리아 쪽으로 이동해 겨울에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간다.

 

이 메추라기 떼가 이스라엘 진영에 내린 것은 단순히 철새 이동에 의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고, 마치 이집트에 메뚜기 재앙을 몰고 오신 것처럼, 하느님 당신 자신의 초자연적 권능으로 바람을 불러 일으키시어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오신 것이다(민수11,31).

 

그런데 이 메추라기는 40년간 내렸던 만나(탈출16,35)와는 달리 1개월 동안만 내려졌다(민수11,21).

 

'진영 둘레에'로 번역된 '싸비브 람마하네'(sabib lammahane)는 '그 진을 향하여 둘레에'라는 뜻이다.

 

'싸비브'(sabib)는 원래 '~둘레에'(round about)라는 뜻이고, '람마하네'는 '진'을 뜻하는 명사 '마하네'(mahane) '~쪽으로', '~을 향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레'(le) 결합한 것으로, 진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이슬이 진 둘레에 내렸다는 말이다.

 

메추라기가 진 안에 덮인 것과는 달리, 만나가 이처럼 진 둘레에 내린 것은 사람의 발에 밟혀서 쓸모없게 되는 것을 미리 방지하신 하느님의 세심한 배려가 있는 것이다.

또한 진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내렸다는 것은 만나를 거둘 때 각 진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깝고 편한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연중 제16주간 수요일복음(마태13,1~9)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았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3ㄴ~8) 

 

마태오 복음 13장 1~52절 '하느님 나라에 관한 7가지 비유'의 말씀이며,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스런 성격을 매우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등을 말씀하신 이유 중에 하나는 말씀의 씨를 뿌려도 바리사인들과 같이 완고하고 사악한 무리들의 마음 말씀을 거부함으로인해 결실을 하지 못하는 밭인 반면에, 말씀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듣는 제자들과 같은 무리들의 마음은 결실을 맺는 밭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비유'로 번역된 '파라볼라이스' (parabolais)의 원형 '파라볼레'(parabole) 원래 어떤 것을 다른 것의 곁에 놓음으로써 비교한다는 뜻을 지닌 명사이다.

 

 '파라볼레' 심오한 사상이나 어려운 이야기를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실례에 빗대서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이야기 진행 방법이다.

 

'씨뿌리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스페이론'(ho speiron; a sower)에서 '씨뿌리는'으로 번역된 '스페이론'(speiron) '씨를 뿌리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스페이로'(speiro)의 현재분사로서 앞에 있는 관사 '호'(ho)와 함께 분사의 독립적 용법으로 쓰였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자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씨뿌리는 사람'(파종하는 자) 즉 농부(a farmer)를 가리킨다.

 

농경사회에서 밭에 파종하는 자의 모습 흔히 볼 수 있는 낯익은 풍경인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농경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복음 전파와 그것의 결실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농부 복음을 전하는 자를 가리키고, 씨 뿌리는 네가지 밭 복음을 전해 받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등장하는 네가지 밭은 별개의 각각의 밭이 아니라 한 밭에 있는 다양한 땅의 상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원래 팔레스티나에서는 밭을 경작하기 전에 씨 뿌리는 풍습이 있었으며, 씨가 떨어지는 밭은 대부분 돌이나 가시도 섞여 있었고, 잡초도 어느 정도 나 있었기 때문이다.

 

농부는 자신이 뿌리는 씨가 어떤 땅에 떨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씨앗을 이곳 저곳에 뿌린다.

 

그러던 중 씨앗의 일부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게 된다.

 

여기서 '길에'에 해당하는 '파라 텐 호돈'(para ten hodon; along the path)인데, 씨앗의 일부가 밭 사이의 길 내지는 밭을 가로지르는 딱딱한 길을 따라 뿌려진다.

 

말하자면, 여기서 '길'이란 밭 사이에 나 있는 좁은 길이나 농부들이 밭일을 하기 위해 자주 걸으면서 다져져 길과 같이 된 땅을 말한다.

 

그래서 밭 사이에 나 있는 다소 딱딱한 좁은 길에 떨어진 씨앗은 땅을 뚫고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농부의 기대와는 달리 결실은 커녕, 뿌리 한 번 제대로 내려보지 못하고, 그 주위에 날아다니고 있는 '새들'('타 페테이나'; ta peteina; the birds)의 눈에 띄게 되고, 결국 그들의 먹이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새들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버리는 악한 자를 상징한다(마태13,19).

 

또한 '흙이 많지 않은 돌밭' '흙으로 얇게 덮인 바위가 많은 밭'이라는 말인데, 밖으로 싹이 돋지만, 곧바로 무섭게 뜨거운 태양이 솟아올라 그 열기와 빛으로 말미암아 메말라 죽게 된다.

 

이 비유에서 '솟아오르는 해' '환난이나 박해'로 상징되고 있다(마태13,21).

 

우리의 내면이 마치 돌밭과 같이 깨어지지 않는 완고한 자아로 가득 차 있으면, '환난이나 박해'가 신앙을 단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자체를 소멸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세번째로 '가시덤불'로 번역된 '아칸타스'(akanthas; thorns) '가시'나 '가시덤불'을 뜻하는 명사 '아칸타'(akantha)의 목적격 복수형으로서 '가시들' 내지 '가시덤불'을 의미한다.

 

 '가시덤불'위에 떨어진 씨앗은 그보다 먼저 높이 자라버린 가시에 찔리고 그 그늘에 막혀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고사(枯死)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우리의 내면을 기도와 말씀과 성체로 일구고 돌보지 않으면, 우리 마음의 내면은 이미 선점하고 있는 가시와 같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무성해질 것이다(마태13,22).

 

그래서 그 마음에서 복음의 씨앗은 자라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말게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좋은 땅'에 해당하는 '에피 텐 겐 텐 칼렌'(epi ten gen ten kalen; on good soil; into good ground)에서, '좋은'으로 번역된 '칼렌'(kelen)의 원형 '칼로스'(kalos)는 기타 다른 것보다 더 우수하고 좋은 모든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이다.

 

이것은 씨앗이 자라기에 '적합하고'(suitable),'쓸모있는'(useful) 땅을 말한다.

 

이 땅은 위의 세 가지 종류의 땅보다 훨씬 우수하고 좋은 땅으로서 씨앗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식물 경작에 매우 적합한 땅'을 말한다.

 

여기서 '어떤 것'에 해당하는 '호'(ho; some) 지시 대명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호스'(hos)의 주격 중성 단수로서, '어떤 것 하나'라는 뜻이다.

 

이것은 각각의 씨앗들이 좋은 땅에서 나름대로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보여 주며, 또한 씨앗들의 조건이 동일한 땅에 떨어져도, 그 결실의 양은 씨앗의 '질'(質)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종합하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씨앗이 아무리 부실해도 열매맺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과 결실의 양은 씨앗의 질에 따라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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