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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하면 정말 눈이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21 조회수2,900 추천수0 반대(0) 신고

 

지금 작성하는 글은 엄청난 용기를 가지고 작성합니다. 사오정 같은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지는 여러분 각자가 이 글을 다 보신 후에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말씀드리려고 하는 주제는 사랑하면 눈이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말하는 남자와 여자간에 하는 이성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한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사랑입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형제와 형제간의 사랑입니다. 이 형제는 남성인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 자매를 포함하는 형제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용어인 형제애를 말할 때 이때 형제애는 남자를 상징하는 형제의 그 형제를 의미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육적으로는 피가 달라도 영적으로는 다 같은 하나의 형제입니다. 신앙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제외하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하는 이성간의 사랑을 한번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인간으로서 이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본능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할 때도 인간의 이성(이때의 이성은 남녀간의 이성이 아닌 사고의 이성을 말합니다)을 초월해서 사랑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숭고한 사랑이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을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같은 사랑 말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육적인 형제가 아닌 영적인 형제 사이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용납이 어려운 사랑이라면 더더욱 그럴 겁니다. 만약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걸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어떤 사람은 나이를 떠나서 성별을 떠나서 그 삶이 타의 모범이 되면 그 사람을 존경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개념으로 신앙 안에서 존경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을 제가 예전에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본당에 계신 자매님이십니다. 우리 가톨릭은 다양한 호칭이 없어서 조금 불편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적당한 호칭이 없어서 자매님이라고만 표현하겠습니다.

 

세상적인 나이로는 제보다 스물 둘이라는 세월을 더 사신 분이십니다. 평소에는 그냥 좋은 자매님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어머님과도 같은 분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뵈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느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에겐 그렇습니다. 그건 예전에도 어떤 글에서 언급을 한 적이 있지만 특별히 그분이 저한테 뭔가를 해 주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저를 대하는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 한마디에 사랑이 묻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변덕스럽기 마련입니다. 자기한테 섭섭한 일을 누가 하면 섭섭한 감정을 느끼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분은 다른 사람에게는 모르겠지만 근 10년 동안 본당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항상 늘 같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절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아주 열열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이분을 보면서 열열히 평일 미사와 오랜 시간 동안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해도 그런 모습에서 좋은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게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차라리 이분은 그런 신앙생활과는 조금은 차이가 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런 분들보다 오히려 더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을 저는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그 자매님을 존경합니다. 제가 만약 그분을 이런 이유로 존경한다고 말을 한다면 제 본당 신자들이 조금은 이해를 하지 못할 겁니다. 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그분만의 특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그분 스스로도 열심히 하는 또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신심이 훌륭한 신자라고는 생각을 하시지 않을 겁니다. 근데 제가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마음을 잘 모르지만 저는 하느님이 그분을 보시면 그 자매님의 신심이 더 좋다고 말하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리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횟수가 많아도 기도와 미사의 효력을 부정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분은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오히려 신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더 훌륭한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도와 미사도 중요하지만 그것도 냉정한 의미에서는 성화를 하기 위한 수단이고 도구일 수 있습니다. 학생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실력이 우수하면 조기 졸업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과 신심을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적인 모습에 초점을 둘 수 있습니다. 그걸로 신심과 믿음을 판단하는 게 보편적입니다. 만약 그걸로 신심과 믿음을 판단하게 된다면 그런 판단 기준이 단순한 종교행위에 초점을 두게 된다면 믿음과 신심은 종교행위로 결정이 되는 것처럼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는 존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이 존경이라는 표현 대신 짝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정확하게는 기억을 할 수가 없지만 언젠가부터는 이분을 보면 마치 성모님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마치 다음에 혹 성모님을 만약 만나게 된다면 성모님이 이분처럼 생기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나 신자라면 성모님을 사랑하려고 할 겁니다. 저도 그런 마음으로 이분을 성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처럼 사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사랑이 마치 우리 사람이 하는 짝사랑 같은 것과 같습니다. 짝사랑은 어떤가요? 말 없이 혼자만의 사랑입니다. 설령 상대가 그런 마음을 안다고 해도 그건 단순한 사랑 정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짝사랑은 가슴 아픈 사랑입니다. 왜 가슴 아픈 사랑일까요? 혼자만 하는 외로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짝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이 짝사랑은 마치 이런 사랑입니다. 옆집 누나를 짝사랑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스물 두 살이라는 차이를 두고 아무리 신앙 안에서 하는 아름다운 형제애로 사랑하는 사랑이라고 해도 그걸 짝사랑이라고 표현한다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이걸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면 이해를 하는 게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장황하게 설명해드린 내용을 잘 이해하시면 조금은 이해를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사실 이 짝사랑 이전에 이미 이분을 흠모했습니다. 흠모하는 감정이 어느 날 짝사랑 같은 감정으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육적인 눈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눈으로만 가능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게 되면 육적인 눈은 장님이 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이 저한테는 미스코리아보다도 더 미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이분은 어떤 경우 핸드폰 문자에 스스로 할머니, 심지어 늙은이라고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이분이 만약 염색 같은 걸 하지 않으신다면 할머니처럼 보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지금 저한테는 이분이 아직까지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희망사항입니다. 저는 이런 사랑을 하는 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을 겁니다.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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