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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보고 들은 것' (사도4,14-2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23 조회수4,028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7. 23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도란도란글방

 

 '보고 들은 것'

(사도4,14-20)

14 그러나 전에 불구자였던 사람이 성한 몸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의회에서 나가게 한 다음 자기네끼리 대책을 의논하였다. 16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 사람들이 놀라운 기적을 나타냈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이면 다 아는 터이고 우리도 또한 그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17 그러니 이 일이 더 이상 백성 가운데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다시는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시다.” 18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19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20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멘

 

관원들이 재판장에 베드로와 요한을 세워 놓고 예수의 이름으로 이제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아라. 라고 요구를 했어요. 예수의 이름으로. 그랬더니 베드로와 요한이 하느님 앞에서 내가 니들이 가르치지 말라고 하는 니들 말을 들어야 되냐. 아니면 가서 가르치라고 나에게 말씀을 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냐?’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지금 중요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들이 공부한 어떤 헬라의 철학이라든지 (이 사람들은 그런 것도 몰랐지만) 세상적, 어떤 학식이라든지 정보, 여러가지 정보 이런 것들을 동원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설득하는 방법으로 가르친 게 아니라 그냥 '보고 들은 것'을 가르쳤어요.

"보고 들은 것"이라는 건 그리스도교의 역사성을 가리키는 거예요. 역사성이라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 "복음이 역사 속에 실제로 일어났다" 라는거에요.

그러니까 영적으로 영원 속에서 하느님이 창세전에 내가 요러요러한 백성들은 요렇게 구원해 내야지. 그걸로 그냥 완성이에요. 전지전능한 분이 영원 속에서 시간과 공간 위에 있는, 그런 영역 속에서 어떤 계획과 뜻을 펼쳤다는 건 그 자체로 완성이거든요? 그런데 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이 역사 속에서 바로 그 복음의 현실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구약 창세기1장부터 시작해 가지고 말라기까지 계속 율법이 주어지고, 제사가 주어지고, , 여러가지 전쟁이나 포로기 이런 것들을 다 동원을 해서 왜 인간은 예수만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고 예수만을 의지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역사로 보여 주신 거죠.

그래서 바벨론 포로나 아시리아의 공격, 아람의 공격, 애굽의 공격 이런 것들을 들어서 하느님이 하느님만을 의지하지 않는 죄에 대해서 얼마나 진노하시는가를 보여주고 그게 [복음의 실제화] 라는거예요. 그 담에 말라기에서 "~이제 성전 문닫자" 그런다고요. . 인간의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주신 게 성전이에요. 성전이라는 것 그 자체가 예수님의 삶이에요.

근데 이제 그 성전을 인간의 힘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그러한 시도들을 인간들이 했죠? 그래서 그 성전을 닫아 다오.’하고 이제 이 성전, 옛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안에 새 성전을 짓는다라고 하신 그 예수님. 그것은 성전이신 자기 몸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러잖아요?

성전의 진짜 원형이 오셔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해 내는가를 액츄얼라이징해서 설명하는 거죠.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신약에서도 빛이 왔는데 , 진리가 왔는데 죄인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 배격해요. 쫓아 냅니다. 못박아 죽여버려요.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박아 죽이는그들을 위해 예수님이 쏟아붓는 사랑과 은혜의 (그러한)모습들을 계속해서 신약의 4복음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서신서에서 계속 설명을 해 주는거죠. 그러니 성경 전체는 그냥 예수에 관한 책이에요.

 

루가복음24장에 보면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죠? '성경이 기록한 바는 전부 나에 대해 기록된거다' 그래요. 그 때의 성경은 구약이죠. 아직 신약이 안 써졌을 때니까. 구약 성경조차도 그렇게 나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라면 신약은 더할 나위가 없죠. 신약도 역시 예수에 관해서만 기록이 되어 있는거예요.

근데 그렇게 제자들에게 여러가지 복음의 현실이 예수님과의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주어졌어요. 근데 제자들이 하나도 못 알아먹었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혈루병 않던 여인을 일으킨 것, 38년된 병자를 일으킨 것 전부 다 구원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거 였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냥 그 기적 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누가 높으냐를 갖고 싸웠던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이 나는 곧 십자가에서 수난 받고 죽어야 돼. 그랬는데 그 요한과 야고보, 두 형제가 다른 제자들 다 있는 데서 낯짝도 두껍게 우리들 영의정, 좌의정 시켜주세요. 라고 얘기를 했죠. 근데 나머지 열 제자 어떻게 했다 그래요? 분노했다 그래요. 싸운 거예요. 자기들끼리 .

저것들 봐라 이거. 우리들 앞에서 지들이 더 높아지겠다고 하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 돌아가실 때까지 그냥 자기 자신에 관해서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랑 별반 다를 바 없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전부 우리는 나 자신을 우상삼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라고 해도 부정되지 않는, 본인에게는 부정되지 않는 사실이잖아요. 그렇게 그러한 자들에게 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성경을 풀어 해석을 해줬어요. 그리고 그 성경을 그들이 겪은 일과 연결하여....이게 이거구나..라는 깨달음을 주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 거예요. 우리들에게도 성령이 오셨죠?

그럼 우리가 지금 겪는 삶은 그 성령에 의해서 어떻게 해석이 되어야 됩니까. "복음이 액츄얼라이징, 실제화 되어져 내 삶 속에서 이렇게 살아지는구나"로 해석이 되야지. 왜 내 문제는 이렇게 항상 막힐까. 왜 나는 이렇게 예수 잘 믿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병이 걸릴까. 왜 나는 이렇게 망하지? 그 현실만을 바라봐선 안되는 거예요.

우린 그 복음을 그대로 살고 있어요. 예수의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삶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하느님의 말씀과 우리의 삶을 통하여 계시를 받는 거고 그걸 통하여 우리도 사도들과 똑같이, 하느님께 받은 걸 전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릴 열두 사도 안에 넣어서 "너희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라고 이렇게 증인이라고 말씀을 해 주시고 하느님이 올라가신 거 거든요.

 

우리는 그 어떤, 누가 써 놓은 책이나 누가 써놓은 논문이나 누가 써놓은 주장이나..이런 것들..그 사람이 뭐 아무리 훌륭한 신학자요,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전하는 게 아니라 우리들 안에서 깨달아지고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바로 복음의 현실을 전하는거예요.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무슨 교리나 신학을 정립을 해서 전할 생각을 마시고 우리의 삶 속에 지금 예수의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삶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먼저 깨달아야 해요.

왜 예수의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줄줄이 구약부터 신약까지를 줄줄이 꿰면서 복음을 설명하는 데도 왜 사람들이 코도 찡끗 안 하는줄 아십니까? 삶 속에서 경험이 안됐기 때문에 그래요. 내 삶을 해석하는 눈이 아직도 나에게 없어요. 그런데 무슨, 뭘 전합니까? 전해지지 않아요. 우리들 자신 안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해야 돼요. 우린 이 세상의 힘의 원리가 어떻게 십자가의 원리를 공격하는 지를 지금 체험해야 돼요.

그 삶이 이게 패배의 삶이 아니라 저주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고 이게 진짜 승리의 삶이구나 라는것을 우리가 스스로 깨달아야 돼요. 그 때에 진짜 전도가 나오는 거예요. 전도라는 단어 자체가 "설교"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 설교를 하는 분이어야 돼요. 전도의 미련한 것. 모든 인간은, 모든 하느님의 백성은 다 설교를 해야 되는데 사도들처럼. 그 설교는 자기의 삶 속에 일어나는 이 복음의 현실을 성경과 연결시켜 이게 바로 이러한 거구나를 깨달은 다음에 그 생생한 계시를 갖고 나가는 걸 전도,설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힘들다라는 건 공부를 많이 해야 되고 뭐 기도를 많이 해야 되고 가정을 희생해야 되고 잠을 뭐 제대로 못자고. 이게 아니예요. 그건~ 이 세상에 나가서 일하는 분들이 더 많이 고생하죠. 하루에 열네 시간, 열다섯 시간씩 일하는 분도 계시잖아요. 거기에 비하면 설교자가 뭐 대단히 고생하는 사람입니까?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만 하면 되요. 그리고 설교원고 쓰면 됩니다. 그러나 그 삶 속에서 십자가. 설교를 하려면 그 설교가 그 사람의 몸에서 살아져야 돼요. 하느님이 그렇게 검증을 한 다음에 위에 세우신다는 말입니다.

사랑을 설교하려고 할 때는 사랑이 뮌가를 절절히 경험하게끔 그리고 얼마나 인간은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폭로시킨 다음에 올려요. 인내를 설교할 때는 그 인내라는 것이, 그 예수님의 인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었는가를 경험하게 하고 올리세요.

예수님의 마음을 설교할 때는 그 분이 배신당했던 그 배신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었는가를 경험하고 올라가는 거예요. 설교자는 그래서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당신하고 나하고 삶. 당신이 얼마나 처절하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당신과 나와 삶을 하루만 바꿔서 살아봅시다. 얘기하는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설교자 뿐만 아니라 우리도 지금 하느님의 부탁의 말씀을 우리가 너무 경홀히 여겨서 그렇지, 우리 모두가 전도하는 자요 증인이요, 설교자예요.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바로 거기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자신의 그 삶이 분명히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강력하게!

근데 우리들은 듣고 나에게 유익만을 챙길려고 앉아 있기 때문에 내가 나가서 나도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새창조에 기여를 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 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나는 그냥 말씀을 계속 받아서 나는 이 세상에서 그거를 갖다가 교훈삼아, 아니면 힘 삼아 남들에게 존경받고 그냥 편안하게 잘 살거야. 이 상태에 머물러 있으니까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겪어야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교는 다이내믹이 있는 거예요. 역동적인 거예요. 복음은 논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초창기에 설교를 할 때는 그런 책들을 두루두루 정말 지금보다도 몇 배는 더 연구를 하고 해서 짜집기를 해서 제 설교를 만들었어요. 그것도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립니다. 많이 걸려요. 왜냐면은 테두리에서 벗어나면 안되니까 일단. 초보 설교자가 자기 것을 내놔선 안돼요. 처음부터.

그런데 그렇게 연구를 하다가 그 사람들 것을 하나하나 내가 이제 갖게 되면 아 나에게는 신학의 울타리가 생기게 되는 거예요. 그리구 그 울타리 속에서 이 성경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는 이제 내 몫이란 말입니다.

그 때 설교자는 성경을 다 머리 속에 다~ 떠올려 놓고요. 그리고서 오늘 내가 설교할 본문의 이야기를 그 성경 안에 들어 있는 구절들을 하나하나 찾아내고 꿰어서 그걸 여기 앉아 있는 성도들에게 하느님의 성경은, 말씀은 어떻게 유기체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면 되요.

그런데~ 그걸 어느 책에서 보고 그렇게 한거냐구...묻는 건 아직도 자기는 권위 있는 신학자나 권위있는 목회자의 그런 이론, 그것만, 거기 안에서만 안전하게 전하고 배우고 하겠다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나중에 우리가 성경 전체의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하느님 나라, 은혜라는 주제로 꼭 붙들고 하나로 꿸 수 있는 실력이 되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다른 참고 도서를 볼 필요가 없어요.

 

사도 바오로는. 베드로나 요한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소크라테스같은 헬라의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었고요. 아테네에 가서 실지로 그들이 거기에 있는 스토아학파나 에피크로스학파 사람들이 흔히 논쟁의 주제로 내놨던, 그런 어떤 철학적 이야기를 갖고 설교를 한 적도 있잖아요. 엄청 깨졌죠? 근데.ㅎㅎ

갔다 와서 한 말이 뭐에요.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겠다.” 라고 한거죠? 하느님의 복음은 그렇게 전해지지 않아요. 그 담부터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이야기 했어요. 내가 십자가 외에는 알기를 원치 않는다 라구.

그냥 신문에서 본 얘기, 영화 본 얘기 이걸 갖고 어떤 사람은 진짜 지금 한국에, 워싱턴에 있는데 굉장히 존경받는 신학자였고 교수였고 지금도 거기에서 큰 교회의 목회를 하는데 소설책 갖고 설교를 해요. '엄마를 부탁해' 갖고 여섯 개, 신경숙의 소설을 갖고 여섯 편의 설교를 하더라구요? 아바타 갖구 몇개 설교를 하구. 여러분, 그런 것들은 설교의 주제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전부 스크랩을 해다가 '야 이런 진리가 있어?' 라고 광분을 해요~

 

우리 사도들은 그렇게도 똑똑하고 명석한 사도 바오로조차 아폴로 같은 사람도 굉장히 훌륭한 사람인데 십자가 이외에는 다른 걸 전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에게 계시해 준 것만! 전했어요. 삶을 통하여 자기가 깨달은 것만!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고린도교회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습니까? 말에 졸하고 미련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그 똑똑한 사람이요. . 그 사람도 이 세상의 철학이나 아니면 자기가 배웠던 학식 같은 거 내 놓으면서 다른 이들과 논쟁을 하고 또 설교를 할 때 그런 것들을 적당히 섞어서 썼으면 미련한 자라는 소리 절대 안 듣습니다.

가말리엘의 수제자였다니깐요? 쉴라이까 샤마임을 하나로 통합한, 철학으로 따지면 칸트같은 사람이에요 가말리엘이.. 그 사람의 수제자란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그런데 그까짓 거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이론같은 걸 몰랐겠어요? 플라톤은 뭐 대단한 사람인 줄 아세요? 그 사람은 레슬링 선수였어요. 그리스 헬라에서 가장 유명한, 레슬링 챔피언이었습니다. 뭘 그렇게 대단히 공부를 많이 했겠어요.

사도 바오로는 적어도 그 사람보다 더 많은 깨달음이 있었을 거예요. 열심도 있었고 근데 미련하게 매일 똑같은 얘기만 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던 자들인데 그래서 아무런 희망이 없던 자들인데 예수님이, 말씀이신 그 분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내려오신 말씀이신 그 분이 너희들에게 맞아 죽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너희 죄가 다 해결이 되었고 또 그 분이 사신 의가 너희에게 전가되어서 너희들은 이제 구원을 받게 된거야 그걸 믿기만 하면 돼. 더 이상 너희들은 율법이나 제사에 묶여 있지 않아도 돼. 매일 똑같은 얘길 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할 말이 저렇게 없냐? 그래서 '말에 졸()했다' 뭐 말을 더듬었다가 아니예요. 십자가와 예수만 전하니까 말에 ()한 거예요. 그러고 미련하다 취급을 받았어요. ? 딴 걸 다 배설물로 여겼어요. 그가 갖고 있던 철학적 지식, 세상적, 인문과학적 사고 다 버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졸한 사도 바오로의 설교를 통하여 초대교회가 성장해 나아간 것입니다.

그런 거예요, 설교자가 갖고 있는 어떤 지적 정보의 전시장이 되어서는 안돼요. 어렵고 힘든 단어들을 막 나열한다고 해서 '아우 저 설교자님 참 똑똑해. 참 공부 많이 했어.' 이리로 가면 안돼요. 그 입에서 예수가 나오는지를 봐야 됩니다. 십자가가 나오는지를 봐야 되는 거예요. 그거 이 외의 딴 거는 복음 아닙니다.

다른 정보는 책을 읽으세요. 좋은 비디오들 많으니까 비디오들 보세요. 교양비디오 같은 거. 그냥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특히 공부 많이 하잖아요? 그니까 그들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은 그들이 다 교사가 되고 신학사가 되어서 교회의 목회도 하고 신학교에서 교수도 하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놓고는 무슨 뭐 현대 설교자들의 설교를 비판하는 책도 써 내고 '설교는 이래야 된다. 그리스도교인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 근데 이 시대의 교회가 그것들을 다 베스트 셀러로 만들어 주고 있어요. 교회를 비판하면 다 옳은 줄 알아요. 그게~.그걸 개혁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절대 아닙니다. 정말 위험한게 정용석 목사라고 대구성서 아카데미, 그 양반은 책을 두권을 냈는데 그 양반은 조직 신학자예요.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자입니다. 절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인정하지 않아요. 그리고 근데 그런 말을 안하죠. 거기는요. 예배가 끝나면 장로님들하고 목사하고 앉아 가지고 식사시간에 동동주를 따라 마셔요. 자유하라는 거죠. 그건 만용입니다.

그리고 그냥 삶 속에서 예수라는 본을 쫒아 깨끗하게 살면 된다. 이거에 머물러 있어요. 근데 그 양반이 다른, 뭐 한국의 유수의 목사들을 비판하는, 그런 책을 썼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슨 개혁자인 줄 알아요. 신학생들조차도. 그 양반이 비판했던 책을 제가 비판을 해서 그 사람 웹사이트에 올렸어요.

'당신의 설교는 이 사람들의 설교의, 발톱의 때 만큼도 안된다' 라고 제가 아주 난도질을 했어요. 예수가 없어요~~. 적어도 신비나 기복을 외치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기본은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있어요. 그게 예수와 십자가와 보혈입니다. 심판!이예요. 그런 것도 없이 열심히 몸을 정신을 수련하고 공부해서 깨끗하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잘 살자! 그게 무슨 성경 해석입니까. 그걸 복음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잘 분별해야 돼요. 삶 속에서 복음을 살면서 끊임없이 고민해야야 돼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되며 왜 내 삶 속에 이러한 일이 찾아오는가? 절대 멍하니 살지 마세요. 하느님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내일 오실지 모레 오실지도 몰라요. 사람들이 하느님 오실 때 쯤이 되면 무슨 대단한 징조가 보일 거라고 생각들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노아의 때처럼 온다고 그랬어요. 그 때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밭에 가서 밭도 갈아야 되고 소()도사야 되고 그래서 아무도 노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잖아요. 그 때 불현듯 내려온 게 저주의 홍수였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그 삶이 언제 닥칠지 어떻게 알아요. 오늘 돌아가다가 무슨 사고를 당해서 이제 경황없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 자체! 그 날이 심판이거든요? 영원 속에서는 시간의 순서가 없기 때문에.. 근데 그 심판대 앞에서 자신있냐고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도대체 나는 왜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지를 설명할 수 있을 만한 경험과 체험과 우리의 복음에 대한 그 지식이 없으면 하느님 나라에 가서 절대 천국못 들어갑니다. 그 복음을 열심히 살란 말이에요. ''에서 벗어나서 하느님과 그 하느님이 사랑하는 다른 이들에게 ''를 향했던 사랑을 어떻게 옮길까를 고민하면서 그게 안 될 때 엎드려서 기도하며 사는 거예요. ..오늘 하루 그런 하느님의 은혜와 은총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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