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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5(녹) 연중 제17주일 ... 독서,복음서 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24 조회수3,746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먹고도 남을 것이다.>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4,42-44

그 무렵

42 어떤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하고 일렀다.

43 그러나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44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엘리사 예언자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인다.

 

 

2독서<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1-6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독서 주해(해제.역주 김영남 신부님)

1

권고합니다로 번역된 파라칼레인은 바오로 서간들에서 공동체에 대한 권고의 특수용어처럼 되었는데 권고하다외에도 간청(부탁)하다또는 위로(격려)하다의 의미가 있다.

 

권고부분의 첫 명령문인 이 문장은 이어 나오는 많은 권고의 근본을 표현하다. 하느님이 신앙인들을 불러 복음과 만나게 하셨다.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이라는 말은 사족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강조한다. 이미 과거에 일어난 각자의 소명에 합당하게 미래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살아가다로 번역된 페라파테인은 본디 거닐다, 산착하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로서 2.2.20이 보여주듯이 삶의 온 영역을 포괄한다.

 

2

골로 3.12-13‘갈라 5,22-23;필립 2.3에도 나오는 덕목들 참조, 겸손과 온유와 인내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없어서는 안될 덕목이다. 이 모든 덕목의 바탕은 사랑이다. 사랑의 결핍이야말로 공동체의 일치를 해치는 가장 큰 원인이다. 겸손은 대표적인 성서적 덕목이다.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겸손이란 노예나 하는 비굴한 태도로서 추구할 만한 덕목이 아니었다.

 

3

2.14에 따르면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시다. 골로 3.14에 의하면 사랑은 완덕의 끈이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평화는 교회 안에서 일치로 나타난다.

 

유지하도록 힘쓰시오로 보아, 공동체의 일치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 안의 일치는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이 선물의 보존을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4

4-6절의 짧은 글 안에 하나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나오면서 교회의 일치를 강조한다. 이 구절은 교회의 일치를 강조한다. 이 구절은 신약성서에서 교회일치에 관한 가장 명백하고 강한 호소다.

 

4절의 한 몸. 한 명. 한 희망이라는 3중개념이 5절의 한 주님. 한 믿음. 한 세례라는 3중개념에 상응한다. 4-6절 문장 리듬의 장점은 6절이다. 일곱 차례의 하나중 맨 마지막으로 한 분 하느님이 언급되는 그 짧은 문장에 네 번이나 모든이 사용됨으로써 6절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4,6절 첫머리의 몸도 하나라는 표현에는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교회의 일치란 오직 그리스도를 근거로 할때만 의미있고 하나인 희망이 주어졌다.

 

5

주님도 한 분.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라는 3중개념은 원문에서 하나를 뜻하는 낱말이 남성, 여성, 중성,으로 젼화하면서 표현되어 독특한 느낌을 준다. “주님도 한 분이라는 고백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네가 믿는 주님을 주변세계 사람들이 경배하던 수많은 주님들과 구별하는 데 사용된 일종의 표시였던 것 같다.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라고 믿음과 세례가 직결되어 있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초기 그리스도교를 주님으로 믿는 세례 때 지망자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신앙고백을 하는데 5절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런 신앙고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하나인 믿음은 세례에서 신앙고백으로 표현되고 성령의 날인을 받으며 신앙인들을 새로운 일치로 묶어준다. 주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는 신앙인들을 한 분이신 주님을 알려 주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준다.

 

6

한 분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신약성서 서간들에 일관하여 나온다. 이런 신양고백은 다신교 환경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여기서 그리스어 디아는 수단적 에서의 통하여보다는 관통하여의 뜻을 다 갖고 있다.

 

6절에 네 번 나오는 모든 이의 그리스어는 문법상 남성복수로도 중성복수로도 이해할 수 있으므로 해석을 둘러싸고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일치를 권고하는 문맥에서보면 일차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은 듯하지만, “하나이신 하느님이라는 주제가 구약성서 배경에서 전통적으로 창조주를 연상시킨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만물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배제할 수는 없다. “모든 이(만물) 위에, 모든 이(만물)를 통하여 모든 이(만물)안에계시고 활동하시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야말로 교회일치의 궁극적 근거다.

 

 

 

복음<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이영헌 신부님)

1

티베리아는 17~22년 사이에 헤로데 안티파스가 갈릴래아 호수 남서쪽에 세운 도시로서 갈릴래아 수도였다. 이 도시명에 따라 갈릴래아 호수를 티베리아 호수라고도 불렀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명칭이다.

 

호수 건너편이란 호수 동편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한적한 곳이었다. 일부 필사본에 따라 티베리아 도시와 멀지 않은 호수 서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2

2.23;4.45에도 나오는 저자의 설명으로서 군중이 예수를 만나 따라나선 이유나 동기를 비판적으로 묘사한다. 깊은 믿음에서가 아니라 외적 선생 또는 이기적 생각이나 감성적 호기심에서 예수를 따라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빵의 기적을 본 군중의 반응, 표징에 대한 이해부족, 완고한 불신에 연결된다.

 

3

의 명칭도 없이 막연히 언급한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짐 산을 제외하면 산이란 신학적 의미가 없다. 이에 반해 공관복음에서는 산의 신학적 의미가 다양하게 언급된다. 예컨대, 예수의 거룩한 변모, 열두 사도 선발, 복음선포, 치유, 파견 등이 산과 연결된다. 아마도 여기서는 공관복음 전승사 맥락에 따라 특별히 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삽입했을 것이다. 모여드는 군중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거나 아니면 하느님의 선택된 자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선포하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오른 것을 연상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4

이 설명은 요한복음의 신학적 의미를 내포한다. 연대기적 설명이 아니다. 유다인들은 해방절에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사실을 회상하고 기념한다. 빵에 관한 예수의 계시 말씀 가운데서도 만나에 대한 말이 언급된다. “해방절은 그런 맥락에서 언급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빵이 새로운 해방절 빵이라는 저자의 예시인 셈이다.

 

5

상황 설명에서 예수의 행동 설명으로 전환하는 문맥상 표징이다.

눈을 들다란 셈족 계통의 표현으로서 기도자세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모여든 군중을 본 예수는 이제 그들에게 요기할 빵을 줄 결심을 한다. 이 결심은 공관복음에서처럼 때나 위급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군중이 예수를 따라나섰고 또한 예수에게 모여들었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예수는 그들에게 모든 굶주림을 풀어줄 으로서 자기 자신을 보여주고자 한다. 자기 스스로 빵을 주고자 필립보에게 물어 본다.

 

공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사다가 먹도록 한다”(마르6.37).“어디서”(마르8,4)란 표현은 전승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

필립보에게 물은 예수의 말에 대한 오해가 없도록 저자가 설명한다. 제자들을 가르치려는 예수의 의도적 물음이라는 것이다. 필립보는 예수를 신뢰하는 믿음을 시험받는다. 예수의 물음은 믿음에 관한 것이고, “어디서의 대답은 예수에 대한 믿음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립보의 대답은 예수의 질문을 오해한다.

 

7

필립보는 예수의 물음이 믿음에 관한 것임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대답한다. 필립보 대답의 역점은 그렇게 많은 군중에게 빵을 사서 먹게 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기적이 없이는 불가능함이 시사된다.

 

9

안드레아도 예수 자신이 군중을 먹이겠다는 의도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보리빵밀빵보다 못한 주로 가난한 자들이 먹는 빵이었다. “생선은 구운 것을 가리키며 빵과 함께 먹는 음식이었다. 보리빵 기적 이야기는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안드레아가 제기한 물음과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으로 보리빵만 언급된 점이 비교해 볼 만하다.

 

10

예수는 자신이 그 많은 군중을 먹이겠다는 의도를 이제 구체적으로 밝힌다.

야훼가 목자로서 인도하는 푸른 초원을 연상시킨다. “풀이 많다는 사막과 대조되는 상황묘사로서 축제 분위기를 돋운다. 예수가 많은 군중을 먹인 기적을 해방절과 연결하므로 양떼에게 목초를 제공하는 목자, 곧 메사아적 목자로서 예수상을 시사하는 데도 기여하는 상황묘사다.

 

11

당시 유다인 식사 예절에 따른 예수의 동작들이 묘사된다. 성찬례와 직결되지는 않지만 그 배경임은 배제할 수 없다. 공관복음과 달리 예수 자신이 빵을 주는 분으로 강조되기 때문이다. 이 예수상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길이 남아 있을 양식을 주는 분 세상의 생명을 위해 ”,을 주는 분으로서 예수의 정체를 예시한다.

 

12

예수로 인해 빵의 기적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묘사한다.

남은 조각들이 아니라 예수로 인해 먹게 된 기적의 빵자체에 역점이 있다. 예수가 제공한 이 기적의 빵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길이 남아 있을 양식으로서 표징적 의미를 지닌다.

 

빵의 기적을 재확인한다. 빵조각들로 가득 찬 열두 광주리는 기적행위의 위력을 묘사하여 동시에 열두 제자을 시사한다. 제자마다 광주리 하나씩 빵조각들을 모아들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14

예수가 모세에 의해 약속된 예언자, “종말론적 예언자라는 이 고백은 공관복음에는 없고 요한복음에서만 있다. 요한복음은 빵의 기적을 메시아로서 예수의 자기계시가 이루어진 표징으로 설명한다. 예수의 신비를 드러내는 이런 고백 형태는 요한복음에서 더러 볼 수 있다. “세상에 오시기로 된 분이라는 표현과 그 예언자란 칭호도 요한복음의 주된 관심사다.

 

15

빵의 기적을 체험한 자들이 예수가 행한 표징의 의미를 참으로 깨닫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들의 오해는 그 표징을 지상 정치와 관련지은 데 있다. 예수를 억지로 메시아 왕”,곧 민족해방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참된 왕국에 대한 불신자들의 오해와 같은 맥락이다. 특히 유다인들의 왕이란 칭호는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의 왕에 비해 항상 부정적이다. 여기서 언급된 유다인뜰의 왕이란 뜻과 동일한 의미다.

 

일부 사본에는 물러가셨다대신 피해 가셨다로 되어 있다. 아무튼 이 구절의 강조점은 예수 혼자서산으로 갔다는 데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는 의식적으로 외로이 하느님 가까이 갔다는 것을 시사한다. 예수 홀로 있다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의 이런 모습은 자기계시의 오해 또는 몰이해에 대한 일종의 행위로 볼 수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예수님은 신성,인성을 모두 가지신 분이시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십니다.   외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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