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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라지도 처음엔 가라지가 아니였을 수도 있습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27 조회수5,110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에서는 밀에 대한 언급은 돼 있지 않습니다. 지난 토요일 복음에 이어서 나온 복음입니다. 이 앞전 복음에서 나오는 밀과 가라지 복음의 비유는 문자 그대로 액면적인 내용만 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복음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복음을 잠시 간단하게 한번 살펴보시면 원래는 밀이 있었는데 나중에 가라지가 생기게 되었고 그래서 가라지를 뽑아야겠다고 하는데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다가 잘못해서 밀까지 뽑을 수 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좀 색다른 관점에서 이 복음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그럼 처음엔 밀만 있었고 나중에 가라지가 생겨서 밀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했다고 생각한다면 이 복음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다른 관점에서 한번 이 복음을 들여다 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분명히 비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와 예는 성질을 달리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실을 설명을 할 때 비유와 예를 들어 설명을 하곤 합니다. 그 이유는 좀 더 어떤 현상의 본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는 거의 일대일처럼 들어맞는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유는 일대일처럼 단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도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실에만 국한해서 이 비유를 묵상한다면 묵상의 범위를 제한하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제가 묵상한 내용의 의미를 좀 더 편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a,b,c,d....... 라는 밀 씨앗이 뿌려졌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각각 다른 개체였습니다. 이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밀로서 온전히 잘 성장한다면 그건 분명 밀로서 존재할 것입니다. 근데 만약 b라는 씨가 처음엔 분명 밀이었습니다만 이 씨가 제대로 성장을 하지 못해서 가라지로 변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관점에서 복음을 묵상했습니다.

 

복음에 보면 왜 가라지를 미리 뽑지 말고 추수할 때까지 기다려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었지는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도 하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추수를 하다가 실수로 가라지를 밀로 착각하여 뽑을 수도 있을 확률도 있습니다. 단순히 이런 확률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게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본성 자체가 기다림입니다. 원래 세상 자연계에서는 밀이 가라지가 될 수는 있지만 가라지가 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근데 복음은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연계의 현상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중의적인 의미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밀에서 가라지로는 될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이 비유에서는 이 가라지가 밀로 변할 수 있을 여지나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굳이 추수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추수 때까지 기다리면 확실히 구분될 수도 있지만 그때라고 해서 그럼 완벽하게 밀과 가라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구분할 수 있다고 장담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간단하게 다시 정리를 한번 해본다면 이렇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선인이 없습니다. 처음엔 선인이었다고 해도 환경적인 여타 다른 이유로 악인과 같은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악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설령 악인으로 산 사람도 나중엔 회개를 하고 다시 악인의 삶에서 참회를 하며 선인으로 선회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인이라고 해서 계속 선인이라고 할 수 없고 지금 악인 같다고 영원히 악인으로 산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이해하고 묵상한다면 좀 더 색다른 묵상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하는 묵상도 설득력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오늘 복음 40절 이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다음과 같은 묵상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라지는 분명 불구덩이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 이 불구덩이는 지옥을 상징할 것입니다. 지금은 개신교도 마찬가지이고 천주교도 지옥에 대해서는 언급을 잘 안 하는 추세입니다. 일부 개신교 목사님도 그렇고 일부 천주교 신부님도 이런 부분에 대해 교회가 잘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려를 하시는 것을 유튜브 강론이나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표명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사실 어떤 게 맞는지는 각자 개인이 판단해야 할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마지막 심판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실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로마에서 성서를 전공하신 대전 교구 신부님의 오늘 복음 강론을 봤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신부님이 아니라서 언급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 신부님의 강론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묵상한 내용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도 언급하셨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고는 하지만 하느님께서도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강론에서 언급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자비도 회개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원리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모르고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예전에 경남에 있는 용국사라는 절에 가면 절 입구부터 참회문이 스피커로 나옵니다. 그 당시 그 참회문을 들으면서 생각한 게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라는 것을 모르고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지르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린 처음엔 다 밀과 같은 씨앗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밀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밀이 아니고 가라지의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린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밀로서 남아 있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밀이 오늘 복음에서 보면 바로 하늘 나라의 자녀라고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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