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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앎과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묵상해봤습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30 조회수3,460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은 서울교구에 계신 어떤 신부님의 신앙칼럼을 진지하게 여러 번 읽어봤습니다. 에릭 신부님이십니다. '신앙은 지속될 수 있을까?'라는 책을 번역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이분의 칼럼과 어제 부산교구 소속 신부님이신 장재명 파트리치오 신부님의 강의도 몇 편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습니다. 사실 목요일 복음묵상을 했습니다만 하고도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묵상한 내용을 그대로 올리게 되면 약간 현학적인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 그래서 올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목요일 복음에 마르타와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르타의 믿음에서 부활에 대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복음입니다. 에릭 신부님의 칼럼은 복음묵상을 한 후에 인터넷에서 본 것입니다. 저녁에 두 신부님의 글을 통해서 두 시간 동안 목요일 복음을 다시 한 번 더 묵상해봤습니다.

 

전체 카테고리는 네 영역이 어우러진 묵상 같기도 합니다. 제일 큰 주제는 신앙은 지속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근원적인 답은 있다 없다 하나로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문현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에 대한 답은 있다가 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없다면 굳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물론 없다고 하는 결론이 있다고 한다고 해도 그 결론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져가면서까지 애써 논리를 설명한다면 그런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시지 않을 거라는 전제를 한다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분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에릭 신부님께서 외국에서 오랜 세월 공부를 하셨기 때문에 신부님의 학식을 바탕으로 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지속적인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여러 가지 답이 있을 겁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답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목요일 복음을 먼저 언급하겠습니다. 시간으로 보면 이제 10분만 지나면 금요일이 됩니다. 아는 것과 믿음은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 됩니다. 아는 것과 믿음이 동일할 수 있을 때도 있고 동일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저는 요한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가 왜 마르타의 입을 통해서 이런 말을 복음에 언급했을까를 고민해봤습니다. 만약에 숨은 뜻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혹시 만약 숨은 뜻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를 오늘 고민해본 것입니다. 그에 대한 저의 묵상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믿음은 아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예수님과 마르타의 대화를 통해서 알려주려는 의도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런 추론을 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목요일 복음 22절과 23절 사이에는 복음에는 없지만 그 사이엔 많은 사연이 숨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왜 마르타는 22절에서 예수님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했을까를 고민했고 또 그 요한복음사가의 의도도 한번 상상해봤습니다. 마르타의 의도는 예수님께 희망을 가지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려고만 하시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불가능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예수님이시라면 오빠를 살려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예수님께 자신의 믿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마르타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왜 마르타가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인지 마르타의 마음을 이미 간파하신 것이었습니다. 

 

마르타는 오빠를 살려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을 예수님께 간청을 드린 것이었습니다. 근데 여기서 마르타는 지금 예수님께서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마르타는 마지막에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물론 자기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고는 있지만 마르타는 마지막 때가 아니고 그 시점이 지금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희망사항을 품고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자기의 믿음이 '지금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걸 보면 마르타의 절박한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의 마르타의 믿음은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어도 부활신앙을 아는 것에 그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는 말씀에서 아느냐라고 하시지 않고 믿느냐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면 부활신앙을 알고 있다는 것과 믿는다는 사실과는 간극이 있다는 걸 이 말씀에 그런 의미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건 제가 성경에 대해 지식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에릭 신부님의 칼럼을 바탕으로 생각한 게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생길 수 없다고 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렇게 저는 생각해봤습니다. 아는 것은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가능하지만 믿음은 이런 것을 초월한 것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때 우리의 믿음이 단순히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믿음으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 중 하나가 지식을 연마하는 것도 해당하겠지만 그런 지식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앞서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게끔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을 키우는 하나의 길이지 않을까도 생각합니다. 

 

이제 시간상으로보면 새벽 12시 35분이 되었습니다. 금요일이 되었습니다. 오늘 금요일 복음에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하는 말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하는 말을 한번 생각해보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목수의 아들이고해서 배운 것이라면 목수의 일이 고작 전부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들의 생각을 뛰어넘은 지식을 가지고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고 한 말이니 우리는 이 속에서 이 말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은 넌센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결론입니다. 신앙에서 믿음은 우리의 인식과 인지의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에 있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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