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고향 방문 (마태13,54-5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30 조회수3,65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7월 30일 금요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고향 방문 (마태13,54-58)

   

 

1독서<너희는 주님의 축일들에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한다.>(레위23,1.4-11.15-16.27.34-37)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4 “너희가 정해진 때에 소집해야 하는 거룩한 모임곧 주님의 축일들은 이러하다.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 어스름에 주님의 파스카를 지켜야 한다.

이달 보름에는 주님의 무교절을 지내는데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이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0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가서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너희 수확의 맏물인 곡식 단을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

11 사제는 그 곡식 단이 너희를 위하여 호의로 받아들여지도록 주님 앞에 흔들어 바친다사제는 그것을 안식일 다음 날 흔들어 바친다.

15 너희는 안식일 다음 날부터곧 곡식 단을 흔들어 바친 날부터 일곱 주간을 꽉 차게 헤아린다.

16 이렇게 일곱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오십 일을 헤아려새로운 곡식 제물을 주님에게 바친다.’

27 또한 일곱째 달 초열흘날은 속죄일이다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고행하며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34 ‘이 일곱째 달 보름날부터 이레 동안은 주님을 위한 초막절이다.

35 그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6 너희는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이날은 집회일이므로너희는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7 이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로서이때 너희는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과

희생 제물과 제주를 주님에게 화제물로 바쳐야 한다.’”

 

화답송 시편 81(80),3-4.5-6ㄱㄴ.10-11ㄱㄴ(◎ 2)

◎ 환호하여라우리의 힘 하느님께!

○ 드높이 노래하여라손북을 쳐라고운 가락 비파와 수금을 타라나팔을 불어라초하루에보름에우리의 축제 날에

○ 이것은 야곱의 하느님이 내리신 명령이요이스라엘에 세우신 규정이라네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그분이 요셉에게 주신 법이라네

○ 너에게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너는 낯선 신을 경배해서는 안 된다내가 주님너의 하느님이다너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 올렸다

 

복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요셉시몬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제1독서 (레위23,1.4-11.15-16.27.34ㄴ-37)

 

 

"첫째달 열나흗날 저녁 어스름에 주님의 파스카를 지켜야 한다이달 보름에는 주님의 무교절을 지내는데,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5-6)

 

 

'첫째 달 열나흗날'에 해당하는 '빠호데쉬 하리숀 뻬아르빠아 아사르 라호데쉬'(bahodesh harishon bearbaah asar lahodesh; on the fourteenth day of the first month)에서 '~한 때'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전치사 '뻬'(be)는 시기를 알리는 명사 즉 년, 월, 일 앞에 관용적으로 붙는다.

 

여기서도 ''을 가리키는 '호데쉬'(hodesh)와 ''을 가리키는 '아르빠아'(arbaah) 앞에 '뻬'(be)가 붙어 있다.

'호데쉬'(hodesh)는 '회복하다', '갱신하다'라는 뜻을 지닌 '하다쉬'(hadash)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새 달'(new moon)을 뜻하지만, 본문에서는 '달', '월'(month)로 번역했다.

이것을 볼 때 고대 히브리인들은 태양력이 아니라 태음력, 즉 월력(月曆)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첫째'에 해당하는 '하리숀'(harishon)은 정관사 '하'(ha)와 '라숀'(rashon)이 합하여진 말인데, 여기서 '리숀'(rishon)은 '머리'라는 뜻의 '로쉬'(rosh)에서 파생한 형용사로서 '시작하는', '최초의'란 뜻을 가지는데, 따라서 '빠호데쉬 하리숀'은 한 해를 시작하는 달 (the first month) 즉 정월을 말한다.

 

한편 '저녁 어스름에'에 해당하는 '뻰 하아르빠임'(ben haarbaim)은 직역하면 '그 저녁들 사이에', '두 저녁사이에' 이다.

대부분은 해가 지는 때와 어두워지는 때 사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정통 유다인들은 두 저녁이 해지는 때와 완전히 어두워지는 때라고 한다면, 출애굽 당시의 유다인들이 파스카(유월절; 해방절; 과월절) 양들을 모두 잡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므로(탈출12,6) 정오 이후, 즉 해가 기울기 시작한 때부터 해가 지는 시기까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의 하루는 저녁 여섯 시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의 시각은 정월 십사일이 아니라 정월 십삼일이 된다. 

따라서 '두 저녁 사이에'라는 말은 정월 십사 일이 시작하는 저녁 여섯시부터 십사일이 끝나는 그 다음 날 저녁 여섯 시까지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러나 통례적으로 파스카절은 정월 십사일이 시작하는 저녁 시간만을 가리킨다.

 

'주님의 파스카'에 해당하는 '페싸흐 라이흐와'(pesah laihwah)에서 '파스카이다'라고 번역된 고유 명사 '페싸흐'(pesah)는 '넘어가다', '뛰어넘다'라는 뜻의 동사 '파싸흐'(pasah)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바로 뒤에 나오는 '~에 속한'이란 뜻의 소유 전치사 '레'(le)가 '예흐와'(yehwah)란 말과 함께 쓰인 '라이흐와'는 '주님께 속한'이란 의미를 가진다.

즉 파스카절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파스카절이 히브리인들의 달력이 시작되는  정월의 첫 절기라는 것과 함께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인 파스카절은 (탈출12장, 13장) 인간의 힘이 조금도 포함되지 않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을 기념하는 날이다.

 

'뛰어넘는 것'이란 뜻을 가진 '페싸흐' 즉 파스카절은 문설주와 문상인방에 파스카 희생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사람의 집에는 맏아들을 죽이는 재앙이 미치지 않고, 그대로 뛰어넘어 간 주님의 전적인 구원의 행동을 반영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페싸흐 라이흐와'라는 말은 구원하는 일이 전적으로 주님께 속하였다'라는 뉘앙스를 가진다.

 

그리고 파스카(유월절) 절기가 속한 달이 본래는 히브리인들의 민간 달력으로 제7월이었으나,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해 제1월로 삼았다(탈출12,2).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하느님의 구원 행동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주님의 무교절'

 

'주님의 무교절' 해당하는 '하그 함맛초트 라이흐와'(hag hammatsoth laihwah)에서, '절'(節), '축제일'로 번역된 '하그'(hag)는 '춤추다', '혹은 '긴 여행을 하다', '순례 길을 떠나다'라는 뜻의 동사 '하가그'(hagag)에서 파생되었다.

 

이 단어가 사용된 절기는 '무교절', '초막절'(탈출24,34), '주간절'(추수절,오순절) (탈출34,22; 신명16,16)뿐이다. 이 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이 절기들의 축제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 절기들은 모두 기쁨의 축제였으며 더불어 순례의 축제였다.

 

후대에 이 절기들은 언제나 예루살렘에 있는 중앙 성소에서 지켜져야 했으며 따라서 그 절기에 참여해야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가 지방에 있든 외국에 있든 언제나 순례 길을 떠나야 했다.

 

한편 '무교'라고 번역된 '맛초트'(matsoth)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라는 뜻의 '맛차'(matsa)의 복수형이다.

이처럼 복수형이 쓰인 것은 이 절기가 하루로 끝나지 않고 칠일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교절에 대해서도 파스카절과 마찬가지로 '주님께 속한'이라는 뜻의 '라이흐와'(laihwah)가 붙어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무교절을 지키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 하느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구원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

 

출애굽때에 주님의 구원을 바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했던 행동 중에 하나였던 누룩없는 빵을 먹는 일을 재현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 일어난 주님의 구원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탈출12,15.18.20).

 

하느님께서는 무교절이 당신께 속하였다고 말해 주심으로써 그들이 단지 누룩없는 빵을 먹을 뿐만 아니라 그 누룩없는 빵이 상징하는 출애굽의 구원 역사를 기억하고 더욱이 그 일이 하느님께 속한 것임을 기억하며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주신 것이다.

 

후대에는 파스카절(유월절)이 무교절과 동일한 기간으로 묘사되었으며(에제45,21), 파스카절과 무교절이 동일하게 무교절로 불리기도 했다(2역대30,13.21).

 

이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지키던 많은 절기 가운데서 두 절기에만 '주님께 속한'이란 말이 붙어 있으며,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이 두 절기가 동일하게 주님의 전적인 구원역사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누룩없는 빵'으로 번역된 '맛초트'(matsoth; unleavend bread; bread made without yeast)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란 뜻의 '맛차'(matsa)의 복수형이며, '완전히 물기를 뺀'이란 뜻의 '마차츠'(matsats)에서 파생되었다.

 

이처럼 빵을 변질시킬 수 있는 외부적인 요소가 완전히 제거된 순수한 빵을 먹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받은 구원이 전적으로 주님의 능력의 역사요, 은총이라는 사실을 기억케 하려는 뜻도 있다.

 

즉 무교절에 먹을 빵에서 '누룩'이 제거되어야 헀던 것은 그들과 주님 사이에 어떠한 불순한 것도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순수한 빵을 먹음으로써 주님 대전에 순수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누룩이 들어가지 않아 딱딱한 빵인 누룩없는 빵은 '고난의 빵'(신명16,3) 으로도 불리워지는 것으로서, 이 빵을 먹을 때마다 이집트에서 겪었던 온갖 고난을 기억하며 이러한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하느님 대전에 겸손하게 하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또한 '고난의 빵', 누룩없는 빵은 파스카절(과월절) 어린 양과 더불어 장차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그리스도와 성체성사를 예표한다(요한6,30-59; 1코린11,23-24).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흘리신 피로써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의 백성들이 구원에 동참하는 것이, 고난의 빵인 누룩없는 빵을 먹고, 파스카절 어린 양의 고기를 취함으로써 맏아들 재앙으로부터 구원받은 사건으로 예표되었던 것이다.

 

 절기의 기간은 이레(칠 일)로서 제15일부터 제21일까지 계속되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 '칠'이라는 숫자가 절차상의 '완전'을 의미했으므로, 축제 기간이 7일로 정해진 것에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온전하게 기억케 한다는 의미가 있고, 동시에 그 구원을 기억하는 자들의 모습 또한 온전해야 함을 상징한다.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복음(마태13,54-58)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7)

 

'그분을'에 해당하는 '엔 아우토'(en auto; in him)에서 '엔'(en)은 '~안에'(in)이라는 영역의 내부를 가리키지만, 아주 드물게 '~로 말미암아'라는 원인의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는 '그로 말미암아'라는 뜻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걸림돌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못마땅하게 여겼다'에 해당하는 '에스칸달리존토'(eskandalizonto; they were offended; they took offence)의 원형 '스칸달리조'(skandalizo)는 '길 가운데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놓다', '걸림돌이 되다'는 의미의 동사이다.

 

여기서는 3인칭 복수 수동태로 사용되어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져 배척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런 표현은 예수님의 말과 행위로 인해 신앙이 불타올라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에 대하여 닫혀 있음으로 인해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 범죄에 빠지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로마9,33; 1베드2,8).

 

여기서 '스칸달리조'(skandalizo)는 3인칭 복수 수동태 뿐만 아니라 미완료 과거 시제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공생활 3년간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점점 완고하고 사악해져 갔음을 암시한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구약 시대 예언자가 고향과 집안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자신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수용하셨다.

 

특히 여기서 '존경받지 못한다'로 번역된 '아티모스'(atimos; without honor)는 '비천한'이라는 의미도 가지는 형용사이므로(1코린4,10), 나자렛 사람들이 다만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천히 여기기까지 했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예언자라는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요한6,14). 

그리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염두에 둔 예언자는 예레미야라고 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고향 아나톳 사람들로부터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우리 손으로 죽이겠다'(예레11,21)는 말까지 들으면서 심하게 배척받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남부 유다 사람들의 죄상을 공격하며 회개를 촉구하다가 많은 고난을 당했을 뿐 아니라, 전승에 의하면 우상숭배를 반대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장차 동족들에 의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까지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복음 (마태13,54-58)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지혜의 말씀이셨던 것이다. 말씀을 인간의 뜻을 위한, 인간의 지혜로만 들었던 그들이 놀란 것은 당연하다.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 그 놀라운 지혜를 전하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다. ? 말씀이 그들의 속마음을 찔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것을 무력하게 하신다. 인간의 모든 것은 어둠, , 없음이며 하느님만이 빛, , , 진리이심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 명예(, )는 죽음의 열매, 곧 구원이 없음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 인간들의 뜻, 생각, 지혜를 부수시러 오신분이 예수님이시다.

 

(루가12,51)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1코린2,6-7) 6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7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거룩)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 미리 정하신 하느님의 지혜는 죄인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시고 그 죄인들에게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에페1,4) 그러니까 인간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못마땅하게 여긴다.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사람의 욕망, , 명예를 위한 말을 하면 존경했을 것이다.(요한15,18참조) 그러나 그 반대의 말씀을 전하기에 싫어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 사람의 욕망, , 명예를 위한 그 세상의 말로는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곧 죄인들의 용서, 생명, 구원을 신비롭고 감추어져있는 그 하느님의 지혜를 줄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그들의 믿음 없음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요한2,22참조) 그러면 놀라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 놀라셨다(다우마죠)는 칭찬하다. 찬양하다는 뜻이다. 더욱 이상하다.

그러니 그 말은 피조물인 흙의 티끌인 그 어둠의 인간들이 창조주 하느님의 기적과 같은 지혜의 말씀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그 지혜, 빛이신 예수님께서 그 흙, 어둠들로 들어가시어(신의 죽음) 그 어둠들의 빛, 생명이 되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께서 창조이전 계획하신 구원의 신비롭고 감추어져 있는 지혜인 것으로 그 모든 것을 예수님 당신(십자가)을 통해 이루실 그 하느님을 찬양하셨다는 것이다.

 

병행복음(마르6,6-7)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7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제자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시다. 제자들은 앞5장의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믿으면, 말하면) 사람들의 칭찬과 대우를 받을 줄 알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파견(다음절)하시기 전에, 당신께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사람들의 칭찬, 대우가 아닌, 무시와 박해를 각오하고 사람의 듯을 위한 사람의 길, 방법으로 전하지 말라고,~

 

(마르6,8-9)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 지팡이, 신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말씀이다.

 

(에페6,14-17) 14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16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17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 사제께서 혹은 구역. 반모임에서 세상이야기, 사람 이야기를 하면 좋아한다. 그러나 올바른 하느님 말씀을 말하면 듣기 싫어한다. ? 사람들이 하늘의 대속, 그 진리, 지혜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힘(, 명예)의 원리인 그 세상의 말(지혜)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멸망, 영원한 죽음에 갇힐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이세상에 속죄 제물로 구원의 새 계약으로 보내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요한8,15) 15 너희는 사람의 기준(선악)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 예수님의 대속(십자가)으로, 곧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씻겨 없어졌기 때문이다.

 

(2코린5,16-19)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새계약)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새계약)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구원의 새 계약, 그 십자가의 복음 말씀으로 사람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겠다고 하신 그 하느님의 은총(은혜)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