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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왜 대단한 믿음인가?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03 조회수3,519 추천수2 반대(0) 신고

중국 당나라의 관리 누사덕(婁師徳)은 마음이 넓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성품이 따뜻하고 너그러워 아무리 화나는 일이 생겨도 흔들림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동생이 높은 관직에 임용되자 따로 불러 우리 형제가 함께 출세하고 여황제(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으면 남의 시샘이 클 터인데 너는 어찌 처신할 셈이냐고 물었습니다.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화내지 않고 닦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형은 동생에게 조언을 했습니다.

 

침 같은 것은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자연히 마를 것이야.” 화가 나서 침을 뱉었는데 그 자리에서 닦으면 더 크게 화를 낼 것이니, 닦지 말고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이 고사에서 유래한 게 타면자건(唾面自乾)’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나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어땠는지 한번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여인의 딸은 호되게 마귀가 들렸던 것입니다. 그러한 딸을 위해 어미로서 예수님께 간청을 드린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방여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여인의 절규에 예수님께서는 보통 때와는 다른 태도를 견지하십니다. 보통 때에 이런 일이 있으면 측은한 마음에 어떻게 치유를 해 주셨을 법도 한데 말입니다. 그러다가 제자들이 와서 조금은 성가신 모양처럼 생각을 했는지 여인을 돌려보내자고 말씀을 드립니다. 이때 예수님은 또 한 번 매몰차게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만을 위해서만 오셨다는 취지로 말씀을 하십니다. 이때 이 여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참으로 참담했을 겁니다. 이때 아픈 딸을 둔 어미로서의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이었습니다. 이방 여인이면서 예수님의 신원을 오히려 알아봤다면 오히려 예수님께서 더 감탄하셔야 하는 게 좀 더 자연스러운 태도인데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보통 사람과 같았다면 낙담을 했을 겁니다. 간절하게 호소를 했는데도 처음엔 침묵으로 일관하셨고 또 당신의 사명이 이방인과는 관련이 없다는 뜻으로 말씀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에 낙담하지 않고 또 다시 예수님께 청을 하게 됩니다. 이때 자세가 엎드려 절을 하였던 것입니다. 원어에는 이때 절을 하는 게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 차례 절을 계속하며 간청을 했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이런 모습을 상상해보시면 얼마나 절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절박하게 애원을 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이젠 매몰차다고 하기보다는 모욕에 가까운 말씀을 하십니다.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십니다.

 

모욕에 가까운 말을 들었지만 이 여인은 설령 자신은 그런 모욕을 받아서 모멸감을 느낄지라도 자기의 딸을 살릴 수 있다면 그런 모멸감도 감수하겠다는 굳은 각오가 서 있었던 것입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먹는다고 하는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탄복을 한 것입니다. 이 부스러기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단순한 부스러기가 아니였을 겁니다. 말이 부스러기였지 사실 불결한 부스러기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에 빵 같은 걸 먹을 때 빵을 떼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떼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소스와 같은 게 묻으면 빵으로 닦는 게 관습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서 그걸 개에게 던져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빵이 얼마나 더러운 것이었겠습니까

 

여인이 그와 같은 말을 한 의도는 이런 것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지금 그런 빵도 절실하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상징적으로는 위생상 불결한 빵과도 같지만 내면적인 뜻은 그만큼 자신에게는 예수님의 은혜가 절박하다는 심정을 단적으로 묘사를 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제자들에게 무언으로, 간접적으로도 구원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 민족만에게만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비록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믿음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구원의 문은 열려 있다는 걸 자각시켜주는 면도 있었을 겁니다. 이 여인은 물론 절박해서도 그랬겠지만 그런 굴욕을 감수하면서도 그런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단순히 굴욕으로만 볼 게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에도 나옵니다. 겸손을 배우는 데 아주 좋은 스승이 굴욕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우리 보통 사람은 그게 굴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여인은 굴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겸손으로 자비를 청했을 겁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청했기도 했지만 자비를 입는 대상은 자신의 딸이 아니고 자신이었습니다. 그 뜻은 자신의 딸이 당하는 고통을 자신이 똑같이 겪고 있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미의 간절한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믿음의 기적은 희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도 매달리는 모습에서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타면자건과 같은 고사에서처럼 믿음은 굴욕 속에서도 인내를 해야 그게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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