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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하늘나라의 열쇠 (마태16,13-2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05 조회수4,17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8월 5일 목요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하늘나라의 열쇠 (마태16,13-23)

 

1독서<바위에서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민수20,1-13)

그 무렵 이스라엘 자손들곧 온 공동체는 친 광야에 이르렀다그리하여 백성은 카데스에 자리를 잡았다그곳에서 미르얌이 죽어 거기에 묻혔다.

공동체에게 마실 물이 없었다그래서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갔다.

백성은 모세와 시비하면서 말하였다. “우리 형제들이 주님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어쩌자고 당신들은 주님의 공동체를 이 광야로 끌고 와서우리와 우리 가축을 여기에서 죽게 하시오?

어쩌자고 당신들은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고약한 곳으로 데려왔소여기는 곡식도 무화과도 포도도 석류도 자랄 곳이 못 되오마실 물도 없소.”

모세와 아론은 공동체 앞을 떠나 만남의 천막 어귀로 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너는 지팡이를 집어 들고너의 형 아론과 함께 공동체를 불러 모아라그런 다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저 바위더러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이렇게 너는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여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마시게 하여라.”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주님 앞에 있는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10 모세가 아론과 함께 공동체를 바위 앞에 불러 모은 다음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반항자들아들어라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가 마실 물을 나오게 해 주랴?”

11 그러고 나서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치자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물을 마셨다.

12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13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과 시비한 므리바의 물이다주님께서는 이 물로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셨다.

 

화답송 시편 95(94),1-2.6-7ㄱㄴㄷ.7-9(◎ 7과 8)

◎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어서 와 주님께 노래 부르세구원의 바위 앞에 환성 올리세감사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세노래하며 그분께 환성 올리세

○ 어서 와 엎드려 경배드리세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로세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므리바에서처럼마싸의 그날 광야에서처럼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였고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 

 

복음<너는 베드로이다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16,13-23)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너는 행복하다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너는 베드로이다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주님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내게서 물러가라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제1독서 (민수20,1-13)

 

모세가 아론과 함께 공동체를 바위 앞에 불러 모든 다음,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반항자들아, 들어라.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가 마실 물을 나오게 해 주랴?" 그러고 나서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 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물을 마셨다.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10-12)

 

'이 반항자들아'로 번역된 '함모림'(hammorim)은 '기억하다'(1사무12,5), '배반하다', '거스르다'(이사1,20), '반항하다'(시편78,40) 등으로 번역되는 동사 '마라'(mara)의 분사형 남성 복수형에 정관사 '하'(ha)가 결합되어 '배반한 자들','거역한 자들'이란 뜻의 명사적 용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보통 '마라'(mara) 동사는 거의 모든 용례에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여기서의 '이 반항자들'이란 말도 모세와 아론에게 반항하고 대든 것을 지적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께 반항하고 대적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언뜻 보기에 이 말은 모세가 하느님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민수기 20장 8절에서 단순히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저 바위더러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 고 말씀하셨을 뿐이지, 백성들을 질책하라는 말씀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세 개인의 감정적 발언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마도 모세는 물이 없음으로 인해 원망하고 시비하는 이 백성들을 보면서 지난 40년간 수없이 자신과 하느님께 대들었던 광야 1세대를 떠올렸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불신앙과 죄악으로 결국 가나안 땅 목전에서 돌이켜야 했던(민수14장) 쓰라린 과거가 다시 연상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출애굽(광야) 2세대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아버지때에 있었던 지난 40년의 역사를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모세의 반응은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만을 순종하여 그대로 준행했어야 했다.

 

모세와 아론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하며 바위를 두 번인 친 까닭에 가나안 땅으로 백성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완수하지 못하게 된다.

 

'두 번 치자'로 번역된 '와야크 ~파아마임'(wayak ~paanaim)에서, '두 번'에 해당하는 '파아마임'(paamain)은 '한 번', '한 차례'를 뜻하는 '파암'(paam)의 쌍수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몇 번의 횟수를 사실적으로 나타내기보다는 그 횟수를 특별히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파아마임'은 단지 '두 번'이란 횟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두번 씩이나'라는 의미가 강조되어 드러나는 것이다(창세27,36; 41,32; 1열왕11,9).

말하자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쳤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것은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겸손히 따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었음을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노여움이나 의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경험과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에서 드러나지만, 모세가 바위를 두 번 치자마자 곧바로 바위에서 많은 양의 물이 나왔음을 보여준다.

 

전에 르피딤에서 지팡이를 가지고 바위를 침으로써 물을 내게 했던 자신의 경험(탈출17,6)만을 의지하여 바위를 내리쳤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바위에서 갈증에 목말라 있던 이스라엘 공동체와 그 가축들이 마시기에 충분한 양의 많은 물이 나게 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 없는 연약한 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게 된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12)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로 번역한 '레하크띠세니'(lehaqdisheni; to sanctify me)는 '거룩하다'라는 뜻의 동사 '카다쉬'(qadash)의 사역형 부정사 연계형에 전치사 '레'(le)와 1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것으로 '나를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라는 뜻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시고 내적 영광은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새 성경처럼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여기서 거룩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하느님의 외적 영광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믿지 않아'로 번역된 '야안 로 헤에마느템 삐'(yaan lo heemanthem bi; because you did not trust in me)의 뜻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분명히 '나의 말'이 아니라 '나를'(삐; bi)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과 구원 계획을 믿지 않았다는 말로 알아 들어야 한다.

당신 백성을 햔한 하느님의 뜻과 특히 출애굽(광야) 2세대를 향한 구원 계획, 바위에서 물을 내게 하심으로써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 하느님을 확인시키시고(탈출17,7), 또한 당신께 가까이 나아오는 자들을 통해 거룩하다 하심을 얻으시려는(레위10,3) 하느님의 뜻과 믿음으로 구하는 자에게 구원의 생수를 주시려는(요한4,10.14; 1코린10,4) 놀라운 구원 계획을 모세와 아론은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모세와 아론은 '우리가 ~나오게 해 주랴?' 하며 노기가 서린 눈빛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망각한 채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셨던 모든 영적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믿지 않았던 광야 1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모세와 아론은 그 모든 영적들 가운데 나타난 하느님의 능력과 뜻과 계획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와 아론이 광야 1세대와 마찬가지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모세와 아론은 주님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그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했다.

 

르피딤에서의 물 사건(탈출17,1-7)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물을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갈증의 해결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여전히 하느님의 인도 아래 있는지 즉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고 계시는지 확인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탈출17,7).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6,13~23)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7~19)

 

'시몬'은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즉 '시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쉬므온'(shimon)은 '듣다'(신명5,23)라는 뜻을 가진 '샤마'(shama)에서 유래하여 '들음'이라는 뜻을 가진다.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빠르'(bar)와 '요나'(yonah)란 이름이 결합된 형태인 '바르요나', '즉 '요나의 아들'이나 '시몬'이라는 호칭은 모두 히브리적 어원을 가지며, 친밀성과 더불어 베드로의 유대인으로서의 혈통적 신분을 강조한 호칭이다(요한21,15).

 

마태오 복음 16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깨달음이 혈육이 아닌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신 것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베드로를 향해 이런 호칭을 사용한 것은 연약한 인간 스스로 이러한 진리를 깨달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너는 행복하다'에 해당하는 '마카리오스 에이'(Makarios ei; Blessed are you)에서 '행복'('마카리오스'; Makarios)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함을 통해 오는 커다란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낸다(마태5,3).

 

또한 '너는 ~있도다'에 해당하는 '에이'(ei; you are)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eimi)동사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이것은 그 말하는 동작과 시간적으로 일치하는 동작 혹은 사건을 나타낸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16장 17절은 베드로가 내세의 영광스러운 약속인 종말론적인 축복을 획득하게 되었음을 뜻하기 보다는, 오히려 베드로의 현재의 상태, 즉 예수님에 대해 신앙을 고백한 그 순간에 하늘로부터 오는 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17절은 예수님께서 16절에서의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사실로 받아들이신 간접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해서 칭찬을 넘어선 최고의 축복을 선언하시며, 이것을 인정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메시야이시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엄숙하게 선언하고 계신 것이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려 주셨기'에 해당하는 '아페킬륍센'(apekalypsen; has revealed it)의 원형 '아포칼륍토'(apokalypto)는 '~로 부터'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아포'(apo)와 '가리우다'(2코린4,3)라는 뜻을 가진 '칼륍토'(kalypto) 결합된 단어로 '드러나다'(루카12,2), '계시되다'(갈라3,23)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인간에게 밝히 나타내시는 하느님의 계시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에 대해 베드로에게 밝히 알도록 계시해 주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비록 베드로가 뛰어난 신앙고백을 했지만, 이것 또한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말인 것이다(에페2,8).

 

'살과 피'에 해당하는 '사륵스 카이 하이마'(sarks kai haima; flesh and blood)는 유대인들이 '죽어야만 하는 존재인 인간'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관용적 용어이다(코린15,50; 갈라1,16; 에페6,12).

 

따라서 이것은 타락한 본성을 지닌 죄스런 인간 자체의 지식과 지혜로는 결코 알 수 없으며, 오로지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실 때만이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통찰이나 이성으로는 예수님을 위대한 예언자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 그분께서 거룩한 하느님의 아드님되시는 신성(神性; 천주성)까지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18)

 

'너는 베드로이다'에 해당하는 '쉬 에이 페트로스'(sy ei Petros; you are Peter)에서 '~이다'에 해당하는 '에이'(ei; are)는 '에이미'(eimi) 동사의 2인칭 단수로써 그 자체로서 '너는 ~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너'에 해당하는 단수 2인칭 대명사 '쉬'(sy)를 추가함으로써 '너는'을 강조하고 있는데, 다시 번역하면 '바로 너는! 베드로이다'이다가 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던 말씀이(마르코3,16; 요한1,42)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이전에 시몬을 만나신 후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You shall be called Cephas)라고 예언하신 사실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케파'(kephas)는 아람어의 희랍어 음역이다.

아람어 '케파'(kepha)는 '바위'(rock)를 뜻하며, 이것은 희랍어로는 바로 이어 나오는 '페트라'(petra)인데, 베드로의 이름 '페트로스'(Petros)와 어원 및 뜻이 동일하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18)

 

'교회'에 해당하는 '엑클레시아'(ekklesia)라는 단어는 4복음서 중에서 마태오 복음만이 이 구절을 포함해서 유일하게 3회를 기록하고 있다(마태18,17에 2회).

이것은 '~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에크'(ek)에 '부르다'(마태2,7)라는 뜻을 가진 '칼레오'(kaleo)가 결합된 단어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렇게 어원적 의미로 볼 때는 교회 일차적으로 세상으로부터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엑클레시아'(ekklesia)는 구약에서 '모임', '집회'(창세49,6), '총회', '공동체'(민수16,33)라는 뜻을 가진 '카할'(qahal)의 70인역(LXX)의 번역이다.

히브리어 '카할'(kahal)은 본래 여러 종류의 '집회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가 점차 하느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이와 같은 구약의 히브리어와의 상관성을 고려해 볼 때, 여기서 사용된 '엑클레시아'(ekklesia)는 제도, 조직, 예배 형태 또는 예배의 장소로서의 회당('쉬나고게'; synagoge)에 대한 강조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것은 예수님에 의해 확립된 공동체가 구약의 이스라엘과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긴밀하게 연결되다는 것을, 즉 하느님의 공동체가 곧 예수님의 공동체임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마태오 복음 16장 18절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기대에 부합하는 신앙 고백을 하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신분을 밝히시며, 그에 부합되는 그리스도 공동체, 즉 당신 자신의 백성 곧 당신의 교회를 세울 것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반석위에'에 해당하는 '카이 에피 타우테 테 페트라'(kai epi taute te petra; and on this rock)에서 '그리고'(and)라는  뜻을 가진 등위 접속사 '카이'(kai)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너는 베드로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본문이 상호 긴밀하게 연관된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본절의 '페드로'('페트로스'; Peteos)와  '반석'('페트라'; petra)를 완전히 구분하고,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페트라'(petra; '반석')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베드로와 아주 관계 깊은 그 무엇인, 바로 마태오 복음 16장 16절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는 교회 출발을 이루는 중요한 고백이며, 또한 그의 고백이 만세대에 계속 이어질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가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신앙고백도 베드로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마태오 복음 16장 17절에서 예수님게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볼 때에도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라는 것은 보잘 것 없었다.

사실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물위를 제대로 걷지 못하고 파도에 겁먹고 물에 빠졌으며, 예수님 앞에서 다른 이들은 다 도망가고 배반해도 자신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주님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지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했다.

그 이후 성령의 시간인 초대 교회 시기의 박해 때에도 사도직을 지키기 위해 로마를 피했던 장본인이었으니, 그의 신앙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로마를 떠나기 위해 압비아 가도를 가다가 십자가를 지고 다시 로마로 들어오시는 주님을 뵙고는, 자신은 아직도 주님의 뜻을 못 알아 듣는 자여서 십자가에 바로 못 박혀 죽을 자격도 없으니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고, 그의 무덤 위에 지금의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의 제단이 마련되어 있지만 말이다.

 

사실 희랍어 원문을 보면,  이 구절의 '베드로'(petros)와 '반석'(petra)은 등위접속사 '그리고'(kai; and)로 이어지는 같은 의미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성경에서 사도들을 반석으로 지칭한 사례가 있기에(갈라2,9; 에페2,24; 묵시21,14). 교회가 베드로라는 약한 자의 인격(persona)위에 세워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그를 은총으로 채워 주면서 주님께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승해 가도록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오늘날까지 첫 교황인 베드로로부터, 법적 후계자이며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의 교황께서 교회의 사목권, 교도권, 사제권을 가지고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반석'으로 번역된 '페트라'(petra)가 여성 단수형으로서 남성 단수형인 '베드로'와는 성(性)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에 해당하는 지시 대명사 '타우테'(taute)또한 여성 단수형이라고 하며, '이'라는 지시 대명사가 '베드로'가 아닌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를 가리키고 있어서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고한다.

 

여기에 대하여, 1517년에 마르틴 루터에 의해 개신교가 생기기 전에는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해 물어 보고 싶다. 이것은 모(母)교회인 가톨릭을 뛰쳐나온 개신교를 정당화, 합리화 하기 위한 해석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저승'으로 번역된 '하두'(hadu; of Hades; of hell)의 원형 '하데스'(hades)는 '보다'(요한1,39)라는 뜻을 가진 '에이도'(eido)에 부정의 뜻을 가진 접두어 '알파'(a)가 결합된 형태로, 문자적으로는 '불가시적인 것'을 말한다.

 

이것은 히브리어 '스올'('셰올'; sheol)에 대응되는 단어이다(요나2,3).

히브리어 '스올'은 '저승', '음부'(陰府)(창세37,35)뿐 아니라 '죽음'(시편89,49) 으로도 번역되었다.

또한 '세력도'에 해당하는 '퓔라이'(pylai; the gates)는 '문'(루카13,24)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퓔레'(pyle)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그리고 저승의 문들이 그것에 대항하여 이기지 못하리라'이다.

 

여기서 '저승의 문들'은 사탄과 그 졸개들의 세력을 나타내는 말로 간주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퓔레'(pyle)는 '성문'(루카7,12), '성전의 아름다운 문'(사도3,10), '성안으로 통하는 쇠문'(사도12,10) 등 특별한 권세가 없는 사람이라면 열고 닫을 수 없는 특별한 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세우신 것이기에 인간에 비해 큰 힘을 가졌고, 피조물에 불과한 사탄의 권세로서는 도저히 이것을 무너뜨릴 수가 없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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