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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9주일] 살아 있는 빵 (요한6,41-5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08 조회수3,38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8월 8일 주일

[연중 제19주일살아 있는 빵 (요한6,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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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엘리야는 하느님의 산에 이르렀다.>(1열왕19,4-8)

엘리야는 하룻길을 걸어 광야로 나갔다그는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죽기를 간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다그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웠다.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갈 길이 멀다.” 하고 말하였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화답송 시편 34(33),2-3.4-5.6-7.8-9(◎ 9)

◎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 주님을 바라보아라기쁨이 넘치고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행복하여라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2독서 <그리스도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4,30-5,2)

형제 여러분,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복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6,41-51)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42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연중 제19주일 제1독서(1열왕19,4~8)

  

그 무렵 엘리야는 하룻길을 더 걸어 광야로 나갔다.그는 싸리 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이렇게 말했다."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4)

 

'엘리야'는 해당하는 원문은 '자기는'으로 번역되는데, '자기는'에 해당하는 '웨후'(wehu)는 인칭대명서 '후'(hu)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형태로서 '그러나 그 자신은'(but he himself)이란 뜻이다.

 

앞선 3절에서 시종을 브에르 세바에 남겨 두고, 엘리야 자신이 홀로 광야로 들어갔음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문장에서 인칭대명사는 생략됨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굳이 사용되어서 동사 앞에 인칭 대명사가 주어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엘리야 자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엘리야가 스스로 혼자 광야로 들어간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가 무엇인가 결단을 하고 광야로 들어갔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엘리야는 단순히 이제벨의 추적을 피하기 위함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함도 아니며, 오직 하느님만을 만나 무엇인가 극단의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스스로 광야로 들어갔던 것이다.

 

여기서 '하룻길'은 구약 시대 히브리인들이 거리를 나타낼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표현이다. '하룻길'의 정확한 거리를 환산하기 여렵지만, 대충 32~40km 정도의 거리를 나타낸다.

 

엘리야가 북부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유다의 최남단 브에르 세바에서도,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까지 단독으로 계속 여행하는 것에서 독자들은 긴장감을 느끼고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게 된다.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싸리나무'로 번역된 '로템'(rothem; juniper tree)은 사막의 메마른 골짜기나 하천 바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목이다.

콩과의 식물로 흰 꽃이나 연보라색 꽃을 피우는데, 대개 1~2m 정도의 크기로 자란다. 이 나무는 잔가지가 많아서 바람과 햇볕을 잘 막아준다.

한편 욥기 30장 4절에서도 '싸리나무'로 번역했다.

 

본문에서는 '로템' '유일한', '하나의'란 뜻을 갖는 '예하트'(ehath)로 수식하고 있으나, '로뎀나무'(싸리나무)를 가리키는 '로템'이 남성 명사이므로 이것을 남성형으로 '예하드'(ehad)로 읽을 것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어쨌든 본문은 광야에 유일하게 한 그루만 있는 싸리나무(로뎀나무) 아래 힘없이 앉아있는 엘리야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으로  충분하니'

 

'충분한'(enough)에 해당하는 '라브'(rab)는 형용사로서 '많은'(창세13,6), '너무 많은'(풍부한)(창세36,7), '많은'(번성한)(1역대4,27), '많은'(족한)(창세33,9) 등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서 이 말은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표현에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가 충분하므로 더 이상의 은혜를 바라지 않으며,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분히 감당했다는 의미로, 자신으로서는 더 이상의 일을 감당할 수 없으니, 이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가 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엘리야는 하느님이 주신 큰 능력으로 갖가지 기적을 일으켰고, 카르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 숭배자들을 척결하는 큰 일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신이 이제벨에게 쫓기는 처지가 되자 자신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하느님을 향해 이처럼 복합적 의미가  담긴 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ki)가 사용된 본문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취하여 가시기를 간구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자신이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지금 당장 죽기를 간구했던 것이다.

 

'나을 것이'에 해당하는 '토브'(tob)는 '좋은'(창세27,9), '선한'(2사무2,6), '아름다움'(2사무11,2)등으로 번역되는 형용사인데, 여기서는 질이나 가치에 있어서 상대적인 우수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본문에서 엘리야는 죽기를 간청하면서 '조상'과 자신을 비교하는데, 여기서 '조상'은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어떤 특정한 조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문에서 강한 부정의 의미를 갖는 부정 부사 '로'(lo)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결코 자신이 모든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이들 조상들이 이미 고인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죽을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무기력한 고백은 당시 엘리야가 얼마나 낙담하였으며,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깊이 비관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하고 말하였다." (5)

 

앞선 3~4절에는, 엘리야가 자신의 목숨을 취하고자 하는 아합의 처 이제벨을 피하여 긴급히도망하였으며, 하느님을 향하여 낙심에 찬 절규를 하였음이 보도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5~8절에는 절망 가운데 있는 엘리야에 대한 하느님의 위로와 엘리야의 호렙산 도피사건이 기록된다.

 

그 가운데 본절은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잘 때, 천사가 그를 흔들어 깨우며 먹을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엘리야를 위해 파견한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졌음을 보도하는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런데 이것을 보라! 천사가 그를 만지고 있었다'로 번역된다.

 

새 성경이 번역을 생략한 '웨힌네 제'(wehinne ze)에서 '웨힌네'(wehinne)는 '보다'

뜻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감탄사 '힌네'(hinne)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한

형태로 '그런데 보라!'란 뜻이며, '제'(ze)는 '이것'이란 뜻의 지시 대명사이다.

 

저자가 이처럼 '그런데 이것을 보라!'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엘리야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죽기를 간청한 후 지쳐서 로뎀나무 아래서 잠이 들었을 때, 하느님의 사자(천사)가 엘리야를 만진것이 전혀 뜻밖의 사건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흔들면서'에 해당하는 '노게아으'(nogeah; touched) '만지다', '닿다'(레위15,23), '접촉하다', '건드리다'(시편144,5), '괴롭히다', '건드리다'(2사무14,10), '치다' (창세32,32)란 뜻을 지닌 '나가으'(nagah)의 분사형이다.

 

여기서 분사형이 사용된 것은 천사가 엘리야를 만지고 있는 상황을 현장감있고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 '나가으'(nagah)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그런데 이 동사가 하느님께 대하여 사용되면, 그 대상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한다.

 

하나는 악인을 '만지시는'것이다. 이것은 악인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한다(창세12,17; 32,25; 1사무6,9).

그러나 악인이 아닌 다른 대상에 대한 만지심이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만지심은  권한을 부여하는 상징성을 가진다(이사6,7; 다니10,16; 예레1,9).

그것이 산이든(시편104,32), 제물이든(판관6,21), 사람이든(1사무10,6) 간에 이러한 하느님의 만지심을 통해 그 대상에게 권위가 부여되는 것이다.

 

여기서 엘리야에 대한 하느님의 사자(천사)의 어루만짐은 후자에 해당한다.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졌다고 하는 사실은 그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는 행위일 뿐 아니라 그가 다시 사명감을 회복하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능을 부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느님은 실의와 절망에 찬 그의 종을 위로하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새 힘을 주시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과 애정의 표현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2코린1,3~4)

 

"엘리야가 깨어 보니,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웠다." (6)

 

천사는 단순히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말로써 위로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엘리야가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음식을 공급하였다.

즉 지쳐 누워있는 엘리야의 머리맡에 빵과 물을 가져다 둔 것이다.

 

여기서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으로 번역된 '레차핌'(retsaphim)의 원형은 '레체프'

(retseph)인데, 구약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사용되는 단어이다.

말하자면 '뜨거운 돌 위에 구운'(baked on hot stones)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의 유목민들은 돌을 불에 달구어 뜨겁게 한 후, 그 위에  빵을 구워 먹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허기에 지쳐 누운 엘리야를 위해 친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비하여 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전에도 도피중에 있는 엘리야의 일용한 양식을 까마귀를 통해서(1열왕17,6)

혹은 가난한 사렙타 과부를 통해서(1열왕17,13~16) 공급하신 적이 있는데, 이제는 초자연적 존재인 천사를 보내셔서 공급하시고 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웠다'

 

'다시'로 번역된 '와이야사브'(waiyashab) '돌아가다'(창세18,33), '돌아오다'(창세18,10)란 뜻을 지닌 '슈브'(shub)의 미완료형에 접속사 '와우'(wau; and)가 결합되어 '와우' 연속법으로 사용되었고, '누웠다' 역시 '눕다' 란 뜻의 '샤카브'(shakab)의 미완료형에 '와우' 접속사가 결합되어 '와우' 연속법으로 사용되었다.

 

이 두 동사 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나오는 '먹고 마신'에 해당하는 '와이요칼 와이에셌테'(waiyokal waishethe)도 역시 '와우' 연속법으로 사용되어 엘리야의 행동이 중단없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야는 천사의 어루만짐 및 빵과 물을 공급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력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눕고 만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그가 영육간에 지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하느님의 계속적인 돌보심이다.(7절)

 

루카복음 22장 43절에는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시며 고뇌에 싸여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그분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라고 나온다.

 

우리도 하느님의 일과 뜻과 사명을 수행하다가 엘리야 처럼, 예수님 처럼 한계에 도달할 때가 있다. 

그렇더라도 절망하거나 낙담하거나 우울해 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 순간에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끝까지 보고 계시며 동행하시고, 당신의 천사들을 통해 위로해 주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느님 아버지의 일이시기 때문이다.


 

 

 

 

  [연중 제19주일]

주님은 나의 힘

(요한6,44-51)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 죄의 대속 속죄 제물로 보내셨다.(요한3,16 마르10,45참조) *이끌어(휄퀴오)-어부가 그물에 잡힌 고기를 끌어올릴 때 사용되는 단어다. 물고기가 스스로 배 갑판에 올라올 수 없듯이 구원은 그렇게 하느님께서 이끄심에 의해서만 이뤄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처한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지 알지도 못하며 왜 구원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러한 전적인 타락속에 처한 인간들에게 하느님이 찾아 오셔서 택한 백성들을 그물로 강제로 끌어 올리는 것을 구원이라 한다.

 

(로마3,10-12) 10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1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12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요한15,16)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말씀)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 하느님의 말씀, 계명, 율법, 그 모두는 죄인들의 대속 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말씀이다.

 

(로마10,4) 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 끝(헬라어-텔로스, 멀리있는 목표 히브리어- 토라, 손가락으로 무엇을 가리키다) 예수님은 심판을 받아야 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들을 건져 내시려 이땅에 오신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의지를 발동하여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면 왜 주님이 죽으셔야 했겠는가. 그럴 수 있다면 계속 교육하시고 설득 하셔야 했다. 인간은 절대 설득이나 교육으로 하느님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해 버렸기에 예수님께서 죽음(대속)이라는 방법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성경 전체의 말씀이다(루가24,27.44 요한5,39 사도28,23 등)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기쁜 소식, 福音인 것이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 ‘생명의 빵’은 예수님의 *말씀이고 *가르침임을 묵상했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 이집트를 탈출할 때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잠시 배는 불렀을지 몰라도 결국은 모두 죽었다. 주님은 먹고 죽을 만나 정도가 아니라 ‘먹으면 영원히 죽지않는 생명의 빵’을 주시러 오신 분임을 또다시 하느님의 뜻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나는 전에도 설명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복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만나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오직 하느님의 은총, 은혜로 그들의 결핍과 굶주림이 해결되는 모양을 통해 죄와 허물로 죽은 이들이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 하늘의 빵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쓰인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죄인들은 절대 이 세상의 배부름에 의해 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신명8,2-3) 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만나가 하느님의 말씀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몰라 다 죽었다는 것이다.

 

(묵시2,17) 17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숨겨진 *만나를 주고 *흰 돌도 주겠다. 그 돌에는 그것을 받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

= 보호자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성령의 귀로 들어 인간들의 말(뜻)에 넘어가지 않는 승리하는 이는 만나 안에 숨겨진 뜻, 곧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말씀)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신 흠도 티도 없는 돌이신 그리스도를 깨달아 새 이름- 그리스도인, 하느님의 백성, 자녀, 아들이 되는 것이다.

 

(요한1,12)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테크노)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갈라3,26) 26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휘오스)가 되었습니다.

= 테크노(혈연적 자녀), 휘스오(법적 자녀) 곧 혈연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만나, 성체를 하느님의 뜻, 말씀으로 구원의 진리로 깨달아 받아들이면(먹으면)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깊이 깨달았으니 온갖 오류에서 벗어나 진리의 말씀을 더욱 충실히 따라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연중 제19주일 복음(요한6,41~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1)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주실 빵이 당신 자신의 살이라고 주장하심으로써, 당신 몸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실 것을 내비치셨다(마르10,45).

 

하지만 이러한 선언은 영적 지각력이 결핍된 유다인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하고,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었다.

 

여기서 '내가 줄'에 해당하는 '에고 도소'(ego doso; I will give)는 '나는', '내가'라는 뜻을 지닌 인칭 대명사 '에고'(ego)가 생략되어도 의미 전달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세상의 생명을 위해 '살'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강조 용법이다.

 

이것은 요한 복음 6장 51절 서두에 나오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에서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자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나는~이다'의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가 사용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요한 복음 6장 51절 전체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유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 모세보다 월등히 우월하심을 나타낸다.

 

모세는 하느님의 집에 종으로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안을 맡은 아드님으로서 자신의 직무를 행하신 것이다(히브3,5.6).

 

모세나 다른 어떤 사람도 하느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을 가지고 '에고 도소'(ego doso)즉 '내가 준다'거나 '내가 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에고 도소'(ego doso; I will give)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의 소유자, 주인뿐이다.

 

여기서 '도소'(doso; will give)는 '디도미'(didomi)의 미래 시제로서 예고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진행적인 의미도 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빵은 예수님만이 지금 현재도 주시고, 앞으로도 주실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것이다.

 영혼의 구원은 우리를 위한 화해의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사도4,12).

 

요한 복음 6장 51절에서 당신 자신의 살을 빵으로 비유하고, 이것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된다는 예수님의 언급은 성만찬에서 빵을 나누는 의미와 같다(마태26,26).

 

요한 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성체성사 제정 기사를 생략하였다.

하지만 요한 복음 6장 51절과 더불어 55절 이하에 기록된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교훈으로 성체 성사 제정 기사를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공관 복음서와 중복을 피하면서도, 자신의 독특한 기록 방법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진수와 신비를 설득력있게 전달하고 있다.

 

 

2015년 8월 9일 연중 제1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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