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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한 알의 밀 알이 되어(요한12:20~2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10 조회수3,708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8. 10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도란도란글방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12:20~25)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을 하십니다. 아마 오늘 본문에서 제일 유명한 구절은 24절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구절일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헌신과 희생의 관점에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한알의 밀알' 이 구절은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한 알의 밀알로 희생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희생하여 많은 열매를 맺자라는 그런 부담스러운 구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쁜 교훈은 아니지만 우리가 거기에서만 머문다면 자칫 그 구절이 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를 놓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면 그 구절은 2021절과 아주 긴밀한 연계가 되어 있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과월절(過越節) 명절에 그리스인 몇 사람이 예배(禮拜)를 하러 성전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한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그들이 필립보에게 가서 뭐라고 했다고 합니까? '선생님, 예수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 지금 요한이 이곳에 그리스인들의 출현을 굳이 기록 한 것은 선민(選民)이라 자처했던 유대인들이 버린 예수를 이방인인 그리스인들이 찾아옴으로 해서 구속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들만이 선민이라고 자처했던 유대인들이 개라고 여겼던 이방사람인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유대인들이 버린 예수를 찾으며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라고 간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제 때가 왔다라고 말씀을 하시고는 그 때가 어떤 때인지를 설명하시는 부분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방인을 대표하는 그리스인들이 예배를 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왔다는 것과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찾아왔다는 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나라를 모델로 사용하여 인간 측에서의 불가능함을 폭로하고 구원(救援)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하느님이 선물해 주시는 그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구약이 끝나고 그 구원이 하느님이 모든 백성들에게 가시적으로 적용이 되고 실행이 되는 신약의 은혜(恩惠)의 때가 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가릴 것 없이 하느님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율법도 아니고 제사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고지하는 것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인 것입니다. 바오로가 역시 이방인들이었던 에페소 교회에게 쓴 편지를 보면 좀 더 실감나게 그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페2:11~13) 11 그러므로 이민족으로 태어난 여러분은 한때, 사람 손으로 몸에다 행하는 이른바 할례를 받은 자들에게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2 그때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약속의 계약과도 무관하였고,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3 그러나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할례당이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고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도 외인이었던 이방인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에 이르게 될 그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 24절은 성도의 헌신을 강요하는 구절이 아니라 예수님이 왜 그리고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를 설명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오히려 그 구절은 우리의 헌신과 희생을 강조하는 것과 정반대로 너희들이 너희들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으므로 이제 내가 십자가를 지고 너희들의 모든 죄를 품어 안고 죽는 것으로 너희를 구원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 입증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밀알이 되어 죽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먼저 선택을 받은 민족적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바람에 얼떨결에 이방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모든 민족들에게 공히 주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미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창세12:1-3)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은 분명 하느님의 복이 이스라엘만이 아닌 모든 족속에게 적용이 될 것임을 이렇게 처음부터 밝히셨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라는 조상에게서 시작이 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영적이스라엘 즉 교회를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지 그 민족만이 선민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로마4:16~18)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로마9:6-7) 6 그렇다고 하느님의 말씀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7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로마10:11~13)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내가 처음 들었던 하느님 말씀. 보세요. 구원은 창세전에 택해진 모든 족속 안에 흩어져 있는 하느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수여 방법이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으시는 십자가(十字架)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주된 메시지 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리스인들이 당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人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영광은 하느님의 성품과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이 밖으로 드러난 상태를 말해요 지금 예수님은 당신의 죽으심을 가리켜 당신의 영광이라고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에 하느님의 영광(榮光)이 드러나 있다는 말이 되지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하느님의 공의와 사랑과 은혜와 용서와 오래 참으심 등의 하느님의 성품과 하느님 되심이 농축이 되어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십자가를 가리켜 하느님의 영광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용어들이 얼마나 많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걸핏하면 하느님의 영광 주님의 영광을 찾으면서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해 드려야 하는지를 고민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으로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오직 하나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로부터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진심으로 깨닫고 그 분의 사랑 앞에 온전히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로 서는 것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가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느님의 임금 되심을 인정하는 것으로만 우리 주님은 우리로부터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느님의 성품과 하느님 되심을 드러내시고 그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의 구별 없이 당신의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부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미하게 하시는 것으로 영광을 얻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방인인 그리스인들이 찾아와서 주님을 만나겠다고 하시자 그들을 만나겠다 혹은 만나지 않겠다는 대답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시는 당신의 십자가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사역이 절정에 이르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나타나게 되는 하느님의 영광은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반복되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영광이 최초로 제자들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난 곳이 가나의 혼인잔치였습니다.

 

(요한2:11) 11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요한복음의 일곱개 표적 중에서 제일 첫 번째 표적인 가나 혼인잔치의 표적에서 예수님의 영광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나의 혼인잔치에 나타난 표적이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영광의 내용과 동일한 것이라는 말이 되지요?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를 잘 기억해 보세요.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요한2:4) 4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과 비교해 보세요. 오늘 본문에서는 때가 왔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가나 혼인잔치에서는 그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가나 혼인잔치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으로 끝이 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시점에서는 최종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 사건이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그 영광의 사건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지는 간접적으로 알려 주셨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징을 통하여 제자들이 믿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지요?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 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참된 잔치로 완성해 내실 것임을 보여준 표적이 바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내신 사건입니다.

그 집에는 정결예식 때 쓰는 물을 담아두는 항아리가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항아리에 물이 하나도 없었지요? 그것은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키고 있노라고 너스레를 떨던 유대인들의 율법의 행위가 실은 겉만 번드르르한 외식의 행위였음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항아리들을 물로 채우라 하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바꿔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완성의 숫자 안식의 숫자는 7입니다. 그렇다면 항아리가 하나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 마지막 일곱 번째 항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헌신인 십자가에 의해 완성이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표적인 죽은 나자로의 부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건도 역시 하느님의 영광으로 끝이 납니다.

 

(요한11:39~40) 39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40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보는 바와 같이 죽은 나자로가 살아난 사건에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죽은 나자로가 살아난 사건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것에 관한 신기한 기록이 아니라 요르단강을 건너서 아무도 이길 수 없는 죽음이라는 대적을 파하시고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당신의 백성을 일으키시는 구원의 이야기지요.

그렇게 모형으로 그림자로 설명이 되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제 실제로 골고다 언덕에 설 때가 되었다는 것이 人子榮光을 얻을 때가 왔다' 인 것이며 그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 축약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불가능한 자들이었는데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열매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밀알에 의해 맺혀진 열매는 역시 밀알 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죽는 밀알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죽도록 헌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 알의 밀알로 땅에 심겨지는 에 관한 비유가 있지요? 바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그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을 그림으로 훌륭하게 설명해 놓은 비유입니다.

그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좋은 밭이 되자거나 우리 마음속의 돌밭이나 가시 떨기 밭을 갈아엎자는 권고가 아닙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돌밭이나 가시 떨기 밭이나 길가 밭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 속에서 좋은 밭에서나 나오는 열매를 맺어내시는 하느님의 열심에 관한 것이지 절대 우리에게 어떠한 행위를 요구하는 비유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13:18~23) 18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해서 백배의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루가복음에서는 그 좋은 땅을 가리켜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서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하고 계세요? 항상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서 인내로 결실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돌밭처럼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곧 넘어지고 가시떨기처럼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번번이 넘어져 결실을 못하고 계십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후자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열심히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어서 하느님의 열매가 풍성히 맺혀지는 좋은 땅으로 기경을 해야 합니까? 그게 가능한 것이면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겠습니까? 채찍하나 들고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도록 가르치고 독려하시면 될 것을.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비유는 이사야서에서 인용을 한 비유입니다. 먼저 이사야서 7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이사7:23-25) 23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값이 은전 천 닢이나 되는 포도나무 천 그루가 있는 곳이 모두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덮이리라. 24 온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여 살과 활을 가지고서야 그리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25 괭이로 일구어 오던 모든 산에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무서워 너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다만 소나 먹이고 양이나 밟고 다니는 곳이 되고 말리라.

 

이것은 하느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 아시리아를 시켜 그들을 침공케 하실 하느님의 심판의 날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니까 가시덤불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 죄에 빠져 심판에 이른 모든 죄인들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말이 어디에서 나오지요?

창세기 3장에서 하느님이 아담을 심판하실 때 그의 죄로 말미암아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라 하시지요? 바로 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에 놓여있는 그러한 죄인들의 상태. 그렇다면 돌밭은 어떤 밭인지 볼까요? 역시 이사야서에 나옵니다.

 

(이사8:13~15) 13 너희는 만군의 주님만을 거룩히 모셔라. 그분만이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고 그분만이 너희가 무서워해야 할 분이시다. 14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 성소가 되시고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가 되시며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덫과 올가미가 되시리라. 15 많은 이들이 거기에 걸려 비틀거리고 넘어져서 깨어지며 걸려들어 사로잡히리라

 

율법을 의지하고 자신들의 불가능함을 인정치 않는 이스라엘은 돌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딪치고 넘어지고 부러지고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은혜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예수라는 돌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서 열매는커녕 함정(陷穽)과 올무에 빠져 넘어지고 부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돌밭입니다.

이렇게 돌밭 역시 심판받을 자들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전부 심판을 받아 거치고 넘어지고 부러지고 걸려서 다 죽어야 하는 자들 중에서 어떤 자들이 은혜를 입어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6:9~13) 9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10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11 그래서 내가 아뢰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성읍들이 주민 없이 황폐하게 되고 집집마다 사람이 없으며 경작지도 황무지로 황폐해질 때까지다. 12 주님이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 이 땅에는 황량함이 그득하리라.13 아직 그곳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다 하여도 그들마저 다시 뜯어 먹히리라. 향엽나무와 참나무가 잘릴 때 거기에 남는 그루터기와 같으리라.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 자기가 세상의 임금이 되어 살겠다고 하는 모든 패역한 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할 뿐 아니라 열매를 맺을 수도 없어서 전부 황폐한 땅이 되어 멸망으로 떨어져야 하는데 하느님께서 거룩한 씨를 하나 심어서 그 땅의 그루터기를 만드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땅은 다 길가 밭이요 돌밭이요 가시 떨기 밭이어서 모두다 심판과 저주 속으로 던져져 멸망을 받아야 하는데 하느님이 거룩한 씨를 준비하셔서 그 씨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거룩한 씨라고 번역이 된 제라라는 단어는 창세기 3장의 여인의 후손에서의 그 후손과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의 언약에 나오는 그 후손과 갈라디아서 316절의 자손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 후손과 자손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까?

 

(갈라3:16) 16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을 뜻하는 후손들에게가 아니라, 한 사람을 뜻하는 너의 후손에게라고 하셨습니다. 이분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분명하지요? 영생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 황폐한 땅에 심겨지는 거룩한 씨는 곧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그 씨를 말씀이라 하지요?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라는 씨는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에 도저히 심겨질 수 없는 씨입니다. 왜냐하면 그 밭들이 그 씨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죄인들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셔서 그 안에다 그 거룩한 씨를 심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밭이 좋은 땅만이 맺을 수 있는 영생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은 이사야서 69절 이하의 말씀처럼 열매는 고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 밭이 얼마나 추악한지 하느님이 그 밭을 갈아엎는 것 정도로는 그들을 옥토로 만들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도 없을 만큼 더럽게 타락해 있습니다. 도저히 구제불능이라는 것입니다. 그 황폐한 땅에서는 절대 열매가 맺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러한 황폐 속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한 거룩한 씨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황폐한 땅에다가 심어버리신 것입니다. 그게 주님의 성육신입니다. 그 거룩한 씨가 십자가를 통하여 그 황폐한 땅의 더러운 가시와 돌들 가운데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저히 불가능(不可能)한 상태에서 하느님이 준비하신 거룩한 씨가 영생’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고야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알아듣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 이사야서의 내용을 그대로 들고 다시 마태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그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기 전에 주님이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보세요.

 

(마태13:10~18)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18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지금 우리가 함께 살펴 본 이사야서의 내용이 그대로 다 들어 있지요? 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12절에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는 많이 들어서 머릿속에 쌓아놓고는 있는데 그 말씀의 진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넉넉하게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들은 나중에 그들이 들어 놓은 것마저 다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씨에 의해 열매가 된 사람 이외에는 하느님의 말씀의 진의(眞意)를 깨달을 수도 없고 그 분이 원하시는 열매를 삶으로 맺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성당 안에서 열심히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나중에 그 들어놓은 것마저 다 빼앗기게 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10:16~17)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도(聖徒)에게 믿음이 주어지게 되는 과정이 잘 설명이 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16절에 순종(順從)’ 이라는 단어가 있지요? 그 단어와 역시 16절의 전하는 바라는 단어는 듣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17절에도 역시 아코에’ ‘듣다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두 구절에 듣다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오는 것입니다. 도대체 듣는다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해서 사도 바오로가 연달아 네 번이나 반복해서 그 단어를 썼을까요? 믿음이라는 것은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여 듣고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절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당 안에서도 성경 지식은 많은데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정말 하느님의 복음을 알아듣고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미하는 자들이 열매로 맺혀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십자가에 의해서. 한 알의 밀알에 의해서. 하느님은 저주받아 황폐해져 버린 죄인들의 밭에 거룩한 씨를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필코 열매를 맺어내시고야 마셨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聖徒인 것입니다. 결코 우리가 잘한 것이 있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결코 우리가 좋은 밭이 되어서 영생이라는 열매가 맺힌 것이 아닙니다.

 

(로마9:25~28) 25 이는 바로 호세아서에서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사랑받지 못한 여인을 사랑받는 여인이라 부르리라. 26 그들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 하던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27 그리고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28 주님께서는 말씀을 온전히 또 조속히 세상에 실현시키실 것이다.”

 

(베드후1:3) 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고린전1:30)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경건이 되시고, 우리의 거룩이 되셨으며 ,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함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그냥 거저 받은 것뿐이고 순전히 한 알의 밀알의 수고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육신적으로는 좋은 밭도 아닙니다. 예수가 맺으신 열매 때문에 좋은 밭이라고 여겨지는 것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출애굽기로 가보겠습니다.

 

(출애14:10~14) 10 파라오가 다가왔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이집트인들이 그들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몹시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다. 11 그들은 모세에게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12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 13 그러자 모세가 백성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오늘 너희가 보는 이집트인들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않게 될 것이다. 14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기만 하여라.”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한 뒤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홍해라는 난관이 닥치자 곧 하느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돌밭이며 가시떨기 밭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뭐라고 하세요?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내가 싸우리라하십니다.

그 돌밭과 가시떨기 밭을 기경(起耕)하여 좋은 밭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직접 열매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심겨진 씨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돌밭 같고 가시떨기 같은 우리 인생 속에 심겨진 거룩한 씨는 그 껍질과 씨젖을 양분으로 삼아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왜 주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을까요? 그 반대로 죽은 씨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땅에 그대로 묻혀 있게 되는 것이고 살아 있는 씨가 열매를 맺는 것 아닙니까?

식물의 씨앗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맨 바깥에 껍질이 있고 그 껍질 안쪽으로 씨젖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쌀로 치자면 우리가 밥으로 먹는 그 부분이 씨젖입니다. 그리고 그 씨젖 맨 위쪽으로 조그마한 씨눈이 있습니다. 쌀을 너무 씻으면 그 씨눈이 다 떨어져 나간다고 하지요? 그러한 씨가 땅에 심기우면 껍질과 씨젖이 죽어 씨눈의 양분이 되어 싹이 트게 되고 급기야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씨눈이 죽어 있는 씨는 절대 싹을 틔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열매가 맺힌다고 하셨을까요? 씨눈이 죽어 버리면 절대 열매가 맺혀질 수 없잖아요? 그건 주님이 우리 교회에게 무언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씨눈이 살아있는 씨는 이 땅에서 죽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된다는 진리를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도 씨앗처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씨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씨눈이 대지와 교통하며 그 대지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영이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이라는 대지에 심겨져 그 분이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생명력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는 삶을 사게 됩니다.

그러나 영이 죽은 사람은 절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는 껍질과 씨젖을 먹고 맺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이 살아있는 사람은 육신 즉 옛 사람을 부인하며 그것을 양분삼아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세요. 예수님은 씨눈이 살아있는 분이셨습니다. 그 씨눈이 열매를 맺기 위해 그분의 육체가 죽었습니다. 예수라는 씨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 이 세상의 죄인들이 예수 안에서 모두 십자가에서 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라는 거룩한 씨가 심겼습니다. 그 거룩한 씨는 씨눈이 씨젖과 껍질을 양분삼아 열매를 맺듯이 우리의 육신을 기각하고 부정하며 그것을 양분삼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체가 부정되는 것은 우리가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가 맺힌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안에 심겨진 거룩한 씨의 열매 맺음을 위해 우리의 육신을 자꾸 부인해 가야 하는 이들입니다. 아니 우리 안에 심겨진 거룩한 씨에 의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고야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씨가 싹을 틔우겠다고 씨젖과 껍질을 요구할 때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그것들을 내 놓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 그렇게 수동적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모습이 세상에서는 섬기는 모습으로 용서하는 모습으로 인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성경은 그것을 옛 사람의 죽음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디모후3:1-5) 1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마지막 때에 힘든 시기가 닥쳐올 것입니다. 2 사람들은 자신과 돈만 사랑하고 허풍을 떨고 오만하며, 남을 중상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하느님을 무시하며, 3 비정하고 매정하며, 남을 험담하고 절제할 줄 모르며, 난폭하고 선을 미워하고 4 배신하며, 무모하고 교만하며, 하느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면서, 5 겉으로는 신심이 있는 체하여도 신심의 힘은 부정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멀리하십시오.

 

이게 바로 거룩한 씨가 심겨지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며, 거룩한 씨가 심겨진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악의 잔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밀알이 자기를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리의 옛 육신을 부인시키며 그것을 양분으로 삼아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25절에서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옛 사람에 대한 자기 부인이 없이 여전히 자신의 육신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거룩한 씨는 그렇게 무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호두 씨가 발아할 때 그 딱딱한 호두의 껍질이 박살이 나는 걸아십니까? 그런데 여전히 옛 자아를 사랑하고 그 옛 자아를 살찌우는 삶을 살면서 내 안에 거룩한 씨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否認)해 가는 성도만이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랑이 부정된다는 것은 곧 이웃 사랑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느라 이웃을 모두 적으로 경쟁자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이웃 사랑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씨가 우리의 옛 사람을 부인해 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 세상조차도 품에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디오게네투스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것을 보면 당시 초대 교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육체와 그 지체들을 사랑하면서도 그것들에게 미움을 당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한다.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으면서도 육체를 온전히 붙들어주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마치 감옥에 갇혀 있듯 세상에 억류되어 있으면서도 가슴으로 세상을 품는다.

그게 거룩한 씨에 의해 열매를 맺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알의 밀알의 죽음에 의해 열매가 된 이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그 밀알의 삶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은 강요나 억압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심겨진 거룩한 씨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의 삶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용서하고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인내하고 포옹해 주느라 세상 사람들에게 약자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게 죽어가는 밀알입니다. 그렇게 신앙인 각자가 자기의 자리에서 죽는 밀알로서의 삶을 살게 될 때 그 밀알이 속해 있는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천국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천국을 망각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이데거가 그랬지요? 철학의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요.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천국 망각(妄覺)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天國은 하느님백성들이 밀알이 되어서 죽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거기서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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