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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용서(容恕) (마태18,21─19,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12 조회수3,59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8월 12일 목요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용서(容恕(마태18,2119,1)

   

 

1독서 <주님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여호수3,7-10ㄱㄴㄹ.11.13-17)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내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너를 높여 주기 시작하겠다그러면 내가 모세와 함께 있어 준 것처럼 너와도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너는 계약 궤를 멘 사제들에게, ‘요르단 강 물가에 다다르거든 그 요르단 강에 들어가 서 있어라.’ 하고 명령하여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였다. “이리 가까이 와서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라.”

10 여호수아가 말을 계속하였다. “이제 일어날 이 일로써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면서가나안족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1 온 땅의 주인이신 분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

13 온 땅의 주인이신 주님의 궤를 멘 사제들의 발바닥이 요르단 강 물에 닿으면위에서 내려오던 요르단 강 물이 끊어져 둑처럼 멈추어 설 것이다.”

14 백성이 요르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천막에서 떠날 때에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백성 앞에 섰다.

15 드디어 궤를 멘 이들이 요르단에 다다랐다수확기 내내 강 언덕까지 물이 차 있었는데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물가에 발을 담그자,

16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멈추어 섰다아주 멀리 차르탄 곁에 있는 성읍 아담에 둑이 생겨아라바 바다곧 소금 바다로 내려가던 물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그래서 백성은 예리코 맞은쪽으로 건너갔다.

17 주님의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한복판 마른땅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동안온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건너서마침내 온 겨레가 다 건너간 것이다.

 

화답송 시편 114(113 ),1-2.3-4.5-6

◎ 알렐루야.

○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야곱 집안이 낯선 말 하는 민족을 떠날 때유다는 그분의 성소가 되고이스라엘은 그분의 나라가 되었네

○ 바다가 보고 달아났으며요르단이 뒤로 돌아섰네산들은 숫양처럼 뛰어다니고언덕들은 어린양처럼 뛰놀았네

○ 바다야너 어찌 달아나느냐요르단아어찌 뒤로 돌아서느냐산들아어찌 숫양처럼 뛰어다니고언덕들아어찌 어린양처럼 뛰노느냐

 

복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제1독서(여호3,7~10ㄱㄴㄹ.11.13~17)


"이제 일어날 이 일로써,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면서, 가나안족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 온 땅의 주인이신 분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 온 땅의 주인이신 주님의 궤를 멘 사제들의 발바닥이 요르단 강 물에 닿으면, 위에서 내려 오던 요르단 강 물이 끊어져 둑처럼 멈추어 설 것이다." (10.11.13)


여호수아는 '주님은 구원이시다'는 뜻이다. 희랍어의 '예수스' 즉 '예수'와 같은 말이다. 여호수아기는 모세가 죽은 다음부터 여호수아가 죽어 묻히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한 무리의 노예 집단은 모세라는 출중한 지도자의 인도을 받아 시련의 땅 시나이 반도를 거치면서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고, 종교 제도와 행정 체제를 나름대로 갖춘 민족 공동체이자 예배공동체로 발전했다. 

이로써 성조들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 가운데 '후손의 번성'이 실현되었고, 이제는 그들이 차지할 땅에 대한 약속이 실현될 차례이다. 


여호수아기는 모세오경 다음에 나오는 첫번째 책으로 오경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고, 특히 신명기의 신학 사상이 그대로 반영된다. 신명기에서 그토록 중요시한 시나이 계약은 여호수아기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계약에 대한 충성은 하느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이집트 탈출 사건을 이집트 파라오 라메세스 2세 치세(B.C.1304~1238년)때 일어난 것으로 보면, 여호수아기에 나오는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떠나온지 40년이 지난 다음인, 기원전 1250~1200년 사이가 될 것이다. 


반유목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땅에 정착하는 일, 소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정착은 그냥 그곳에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정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은 소규모의 국지적  전투와 더불어 강력한 도시 국가들과는 평화 조약을 맺어가며 약속된 땅에 서서히 진입해 들어간다. 

민병대 수준의 이스라엘 병력으로서는 튼튼한 요새와 왕정 제도를 갖춘 가나안의 도시 왕국들을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기에 때로는 엄청난 살육이 자행된 가나안 점령은 야훼 하느님의 적극적인 지원과 비호 아래 이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호수아기의 저작 연대가 바빌론 유배(B.C.578~539)가 끝날 즈음이니, 실제 여호수아기의 내용이 전개된 시기와는 거의 600여 년이 차이가 난다. 

남부 유다와 그 수도 예루살렘의 함락을 목격하고 남의 나라 땅에 사로잡혀 와서 살던 유다인들은 민족적 대재앙 앞에서 깊은 반성을 한다. 

하느님께서 왜 우리 백성을 치셨을까? 그것은 주님과의 계약을 저버리고 가나안의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는가? 그것은 가나안들과 혼인하고 그들의 풍습과 문화와 종교를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이제 유배가 풀려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다시는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가나안의 모든 것과 철저히 단절해야 하겠다는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이런 신학적 명제가 여호수아기 저자로 하여금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하고 없애버리는 것으로 묘사했다고 본다.  


이런 입문적 개요를 가지고, 오늘부터 제1독서에 읽혀지는 여호수아기를 묵상하자.  

구약성경을 소홀히 하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출애굽 이후 모세의 지팡에 의해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알면서도, 가나안에 들어가기전 사제들이 멘 계약궤에 의해 요르단강이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마른 땅을 밟고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오늘 독서의 여호수아기 3장 9절과 11절을 보면, 온 땅의 주인이신 분의 계약 궤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르단강을 건너게 한 사건이 바로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일어날 일, 즉 가나안족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쫓아낼 일의 징조라는 것이다. 계약 궤를 통한 요르단 도강 사건을 보고, 앞으로의 가나안 정복을 믿으라는 것이다. 

오늘은 여호수아기 3장 11절의 '온 땅의 주인이신 분의 계약 궤'가 눈에 많이 들어 온다. 


'계약 궤'가 무엇인가? '만남의 천막'안의 '지성소'안에 있는 하느님 '현존'과 '임재'와 '함께하심'의 자리가 아닌가? 

히브리서 9장 4절에 나오는 대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과 '만나가 들어있는 금항아리'와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아론의 감복숭아 나무 가지'가 들어있는 것이 '계약 궤'가 아닌가?  

바로 '말씀'과 '성체성사'와 '사제직'(성사은총)이 이 땅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하는 구체적인 방법임을 알려주는 게 '계약 궤'가 아닌가? 

'계약 궤'안의 주님이, 그위에서 거룹(케루빔)들 사이에서 현존하시는 주님께서 직접 요르단강의 장애를 뚫었듯이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 알듯이, '이집트 노예생활'은 '세례받기전 죄악과 어둠과 사탄의 노예생활', '홍해사건'은 '세례성사', '광야 40년'은 '세속과 마귀와 육신과 싸우는 지상의 순례생활', '요르단강'은 '죽음', '가나안땅'은 '천국'을 예표하고 상징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음의 요르단강을 건너 천국의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려면, '계약 궤'와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과 노자(路資) 성체와 고백성사와 병자 성사의 은총을 사제를 통해 받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

 

동시에 '계약 궤'는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고 '감실'(tabernacle)을 의미하니, 예수님의 십자가상 유언 말씀대로 사도 요한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주셨듯이 (요한19,26) 어머니를 통해 가장 빠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고,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신 성모 마리아의 성덕을 본받으며, 묵주의 기도로 강력한 성모 마리아의 전구와 중재를 받을 때, 우리는 가장 완벽하고 안전하게 예수님을 모시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란 인간의 노력과 무한한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인간은 그럴 용서의 힘능력이 없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된다용서란 영원한 약속인 예수님의 대속그분의 십자가로 받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용서를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그것이 일흔일곱-(7)ⅹ (7) = 사십구(49.) 곧 희년의 정신으로 용서를 받고 주는 것이다속죄의 나팔이 불면곧 십자가의 대속 그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해방과 자유가 있는 희년의 정신이다.(레위25,8-10) 인간은 창세전 그리스도(십작사의 대속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에페1,4)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사랑으로(십자가로)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만달란트는 당시 이스라이 로마에 바쳐야 할 年稅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으로 개인이 갚을 수 없는 금액이라는 것.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갚을 수 없는 돈을 자신이 갚겠다고?~그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이다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허언장담하는 그 모습입니다그러나 할 수 없음을 잘 아시는 주인주님이시기에~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가엾은 마음측은지심애가 끊어지는 사랑그 주님의 마음이 그냥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그것이 우리 주님이신 아버지의 마음자비 이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는 희년의 용서곧 속죄의 나팔 어린양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그 십자가의 복음으로 받는 용서인 것입니다.

 

(골로2,14)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만 달란트를 용서받은 자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작은 백 데나리온을 용서 못한다그것이 인간의 욕심고집에 약한 마음인 것이다우리는 누군가 한 사람에게 그 악한 고집의 마음을 부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 악한 마음이 내 안에 있음을 고백한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 많은 죄를 용서 받은 나는 왜 작은 잘못을 용서 못하는가그것은 하느님의 탕감그분의 용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지그분의 외아들 예수님을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십자가의 죽음그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높고 깊은지 모르기에 잘못한 형제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어떻게 갚아야 하나다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죄 뿐만 아니라 형제와 이웃의 잘못까지 다 대속하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로 오늘 다시 돌아가마음으로부터 다시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다.

 

(요엘4,16) 그러면~16 주님께서 시온에서 호령하시고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를 치시니 하늘과 땅이 뒤흔들린다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피난처가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새가 되어 주신다.

 

(나흠1,7) 7 주님은 선하신 분 환난의 날에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분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을 알아주시는 분이시다.

아멘.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8,21~19,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22)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에 해당하는 '아페소'(apheso; I forgive)의 원형 '아피에미'(aphiemi)는 '~으로부터'라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보내다', '가게 하다'는 뜻을 지니는 동사 '히에미'(hi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일차적으로는 '보내 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아내와의 인연을 끊어버린다는 뜻에서 '이혼하다'는 용례로 사용되었고(1코린7,11), 또한 숨이 완전히 떠나 버린다는 의미에서 '죽는다'는 용례로 사용되며(마태27,50), 그리고 채권자로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탕감하다'는 용례로도 사용된다(마태18,30). 

그러니까 '아피에미'(aphiemi)라는 단어는 원래의 상태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잘못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잘못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이것은 형벌을 유보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타키스'(heptakis; seven times)는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셰바'(sheba)와 마찬가지로, 동 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는 제7일에 천지 창조를 완성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7일은 거룩한 안식일이며, 제7년은 거룩한 안식년으로 지켜졌던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거룩'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대속죄일에 피를 일곱 번 뿌린 사실과(레위16,11이하) 관련해 볼 때, 이 숫자는 죄 용서의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 세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대단한 관용으로 평가했으며, 이것을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관용의 자세를 보이기 위해 히브리인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숫자인 '7'을 염두에 두고일곱 번이나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고 볼 수 있다.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일흔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도메콘타키스 헵타'(hebdomekontakis hepta; seventy -seven times)에서 '헵도메콘타키스(hebdomekontakis; seventy times)는 '70'을 의미하며, '헵타'(hepta)는 '7'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숫자가 합쳐진 이 표현은 해석상 다소 문제가 있다. 이것을 '490'(70×7)으로도 볼 수 있고, '77'(70+7)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용도로 '헵도메콘타키스 헵타'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490'이나 '77'이라는 특정한 숫자의 크기에 의미가 있지 않다. 

베드로는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7'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70'과 '7'이란 숫자를 겹쳐서 사용한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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