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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마태19,3-1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13 조회수2,96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8월 13일 금요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마태19,3-12)

   

 

1독서 <나는 너희 조상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왔다.> (여호수24,1-13)

그 무렵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며 나호르의 아버지인 테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들은 강 건너편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런데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다가온 가나안 땅을 돌아다니게 하고 그의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였다내가 그에게 이사악을 주고,

이사악에게는 야곱과 에사우를 주었다그리고 에사우에게는 세이르 산을 주어 차지하게 하였다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내려갔지만,

나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이집트 가운데에서 그 모든 일을 하여 그곳을 친 다음너희를 이끌어 내었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렇게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다그 뒤에 너희는 바다에 이르렀다그런데 이집트인들이 병거와 기병을 거느리고 갈대 바다까지 너희 조상들의 뒤를 쫓아왔다.

그래서 너희 조상들이 주님에게 부르짖자주님이 너희와 이집트인 사이에 암흑을 갖다 놓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그들을 덮쳐 버렸다이렇게 내가 이집트에서 한 일을 너희는 두 눈으로 보았다너희가 광야에서 오랫동안 머무른 뒤에,

나는 너희를 요르단 건너편에 사는 아모리인들의 땅으로 데려갔다그때에 그들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으나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어너희가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패망시킨 것이다.

그 뒤에 모압 임금치포르의 아들 발락이 나서서 이스라엘에게 맞서 싸웠다그는 너희를 저주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을 불러왔다.

10 그러나 나는 발라암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해 주었다나는 이렇게 너희를 발락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

11 너희가 요르단을 건너서 예리코에 이르렀을 때에는예리코의 지주들곧 아모리족프리즈족가나안족히타이트족기르가스족히위족여부스족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다나는 그들도 너희 손에 넘겨주었다.

12 나는 또 너희보다 앞서 말벌을 보내어아모리족의 두 임금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었다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

13 그러고 나서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

 

화답송 시편 136(135),1.2.3.16.17.18.21.22.24

◎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주님을 찬송하여라좋으신 분이시다

○ 신들의 하느님을 찬송하여라

○ 주인들의 주님을 찬송하여라

○ 사막에서 당신 백성을 인도하셨네

○ 힘센 임금들을 내리치셨네

○ 뛰어난 임금들을 죽이셨네

○ 그들 땅을 재산으로 물려주셨네

○ 당신 종 이스라엘에게 유산으로 주셨네

○ 원수에게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네

 

복음 <모세는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마태19,3-12)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제1독서 (여호24,1-13)

 

"나는 또 너희보다 앞서 말벌을 보내어, 아모리족의 두 임금을  너희 앞에서 몰아 내었다. 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   (12)

 

여기서 '말벌' 혹은 '왕벌'로 번역된 '핫치르아'(hatsirah; the hornet) 정관사 '하'(ha)와 '말벌류'를 의미하는 명사 '치르아'(tsirah)가 결합된 형태이다. 명사 '치르아'(tsirah)는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자생하는 '말벌'로서 숲이나 덤불에서 서식하며 행인이나 군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본문의 말벌도 일차적으로는 팔레스티나 지역에 흔히 있는 말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하느님께서 아모리족의 두 임금을 말벌로 쫓아내신 일은  탈출기 23장 28절이나 신명기 7장 20절에서 하느님께서 말벌을 가나안 족속들 중에 보내어 그들을 멸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실제적 성취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의 표현은 수사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말벌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대해 갖게 된 공포와 두려움을 상징한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서편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예리고 성의 주민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 즉 홍해 도하 사건이나  요르단 강 동편의 두 임금을 패배시킨 일 등을 통해 간담이 녹을 정도였다(여호2,8-10.24; 5,1; 6,27).

 

본문을 수사적 표현으로 본다면, 전쟁에서 적군에게 쫓겨 달아나는 모습이 갑작스럽게 벌떼를 만나 도망하는 모습으로 비유된 데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신명1,44).

 

 

'아모리족의 두 임금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었다'

 

 

여기 아모리족의 두 임금은 헤스본에 살던 임금 '시혼'(여호12,1-2)과 아스타롯과 에드레이에 살았던 바산 임금 '옥'이었다(여호12,4.5).

 

'몰아내었다'라고 번역된 '왓테가레쉬'(wathegaresh)는 계속적 '와우'(wau) '추방하다', '몰아내다', '격리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까라쉬'(garash)의 강조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동사 '까라쉬'(garash)는 '분리'나 '추방'을 나타내므로(탈출23,31) 이 구절을 통해 일방적인 전쟁에 의해서 쫓겨 추방당하는 아모리 족속들의 비참한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

 

 

'그렇게'라는 부사는 원문 성경에는 없는 단어이고, '한 것은 아니다'에 해당하는 '로'(lo)는 두 번 기록되었지만 한 번밖에 번역되지 않았다.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로'(lo)를 두 번씩이나 사용한 것은 강조를 위한 것이다.

 

또한 수단이나 방법을 나타내는 전치사 '뻬'(be)도 두 번이나 사용되었지만, 단순히 '~도'로 번역해서 강조적인 뉘앙스가 제대로 살려지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여 다시 번역하면 '너의 칼을 가지고 하지도 않았다. 또한 너희 활을 가지고 하지도 않았다'이다.

 

이렇게 두 가지의 짧은 문장을 통해 이스라엘이 이방 족속들에 대해 승리한 것이 전쟁의 무기나 군사력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서 24장 8절에 나오는 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패망시킨 것이다" 라는 말씀 그대로인 것이다.

 

여호수아서 24장 8절의 '내가 그들을 ~ 패망시킨 것이다'에 해당하는 '와아쉬미뎀'(waashimidem)는 계속적 와우'(wau) '멸하다'(2사무22,38), '죽이다'(2사무14,11)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샤마드'(shamad)의 사역 능동형이 결합된 것이다.

 

동사 '샤마드'(여호9,24; 11,20)는 갑작스런 큰 재해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실제로 가나안 정복 전쟁에 있어서 예리고는 이스라엘의 함성을 통한 하느님의 역사로 갑작스럽게 무너졌고(여호6,20), 예루살렘 임금을 비롯한 가나안 남부 연합군과의 전쟁이 진행될 때에는 그들의 군사들이 모두 죽임을 당할 때까지 태양이 머무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났었다(여호10,3-13).

 

하느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싸우는 영적인 싸움은 세상의 어떤 수단과 방법에 의해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한 것이다. 

그외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부차적 도구일 뿐이다.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19,3-12)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8)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11ㄴ)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12)

 

마태오 복음 19장 8절에서 '너희'라는 복수 2인칭 대명사가 원문에는 세 번 나오는데, 모세 율법을 들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폄하하려는 소위 선민이라는 '너희'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의 피폐함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영적 피폐함은 '마음이 완고하기'로 번역된 '스클레로카르디안'(sklerokardian; hearts were hard)이라는 단어에서 드러난다.


이 단어의 원형 '스클레로카르디아'(sklerokardia)는 '딱딱한', '거친', '엄한', '잔인한' 등의 뜻이 있는 '스클레로스'(skleros)와 '마음'이란 뜻을 가진 '카르디아' (kardia)의 합성어로서 '완고한 마음', '냉담한 마음', '잔혹한 마음'을 뜻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처럼 완고하고 잔혹한 마음을 품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내를 내어쫓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책으로 이혼을 하려면 최소한 이혼증서만은 반드시 써주라고 하셨던 것이다.


당시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했던 근동에서 여자들은 남자들로부터 소유물의 일부처럼 취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 마땅히 종사할 직업도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남자들의 일방적인 횡포에 의해 이혼당한 여자가 다시 결혼하지 못하면,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폐단을 막고 이혼당한 여자도 최소한 다시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갖도록 하기 위해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 율법은 바리사이들이 주장하듯이 이혼을 합법화하기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무분별한 이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며, 법 제정의 동기로 볼 때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할 수 있는 여성에 대한 보호법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율법의 대가들이었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던 실정법이라고  할 수 있는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창조의 원리와 근본에서부터 점검되어야 하는 법 제정의 정신을 밝힘으로써 이것을 비판하신다.

즉 인간이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려 죄를 짓고 타락하기 전에 에덴 동산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혼인법에는 둘이 완전히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는 내용 (창세2,24)만 나올 뿐, 이혼은 그 가능성 조차도 비치지 않는다.

 

하지만 후대에 인간의 타락 이후에, 이혼 문제에 있어서의 일방적인 여성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약자 보호 차원에서 이혼 문제를 거론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락한 사회를 전제로 한 방편적인 이 법을 절대화시키려는 바리사이들의 시도는 혼인의 신성함을 전제로 한 하느님의 혼인법을 뒤엎을 수는 없는 것이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서 '허락된'으로 번역된 '데도타이'(dedotai; it has been given) '주다'라는 뜻을 지니는 '디도미'(didomi)의 완료 수동형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과거에 그렇게 타고난 것을 계속 유지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혼인 생활의 번거로움 때문에 오히려 독신 생활을 선택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독신은 인간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밝히신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19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독신으로 지낼 수 있는

세 가지 경우를 말씀하신다.


즉 선천적인 성불구자와 궁중의 내시나 이교 사원에서 거세되어 바쳐진 자와 같이 후천적으로 성불구자가 된 자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의도적으로 독신으로 지내는 경우를 말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특별한 경우이기에, 독신은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에 해당하는 '호 뒤나메노스 코레인 코레이토'(ho dynamenos chorein choreito; the one who is able to receive it let him receive it)에서 '들일 수 있는'으로 번역한 '뒤나메노스'(dynamenos)의 원형 '뒤나마이'(dynamai)는 '~할 수 있다',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할 수 없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또한 '이 말을 받아'에 해당하는 '코레인'(chorein)과 '받아들여라'에 해당하는 '코레이토' (choreito)의 원형은 '도달하다', '차지하다'는 뜻이 있는 '코레오'(choreo)이다.


이것도 역시 독신이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자가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자도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도달할 능력이 있는 자만 도달하라'는 명령으로서 독신은 인위적인 강요로 되어지는 일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2017년 8월18일 가해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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