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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판관(判官)과 함께 살고, 죽고 (판관2,6-2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16 조회수3,852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8. 16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도란도란글방

 사사기 주석 설교, 사사기 1장1절~36절, 2장10절~23절 '배교 행위의 뿌리, 배교 행위'

판관(判官)과 함께 살고, 죽고 

 

(판관2,6-23)

6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흩어져 갔다. 유산으로 돌아 온 자기 땅으로 가서 저마다 그 땅을 차지하였다. 7 여호수아 생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줄곧 야훼를 섬겼다.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에도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해 주신 큰 일을 목격한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은 줄곧 야훼를 섬겼다. 8 눈의 아들, 야훼의 종 여호수아는 백 십 세에 죽었다. 9 사람들은 그의 상속지인 에브라임 산악지대 가스산 북편 딤낫헤레스에 그를 묻었다. 10 그의 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그가 죽어 조상에게로 돌아 간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야훼를 모르는 새 세대,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일을 해 주셨는지 모르는 새 세대가 비롯되었다. 11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들을 섬겨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못할 짓들을 하였다. 12 자기네 조상들을 에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조상의 하느님 야훼를 저버리고, 주위 백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며 절하여 야훼의 노여움을 샀다. 13 그들은 야훼를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14 야훼께서는 크게 화를 내시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적에게 침략을 받아 노략질을 당하게 하셨다. 또한 둘러 싸고 있는 원수들 손에 팔아 넘기셨으므로 그들은 도저히 원수들과 맞설 수가 없었다. 15 그들이 출정할 적마다 야훼께서 손수 그들을 치셨던 것이다. 야훼께서 경고하시며 맹세하신 대로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심한 곤경에 빠지면, 16 야훼께서는 판관들을 일으키시어 약탈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 내시곤 하셨다. 17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을 이끄는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신들에게 몸을 팔아 그 신들을 예배하였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야훼의 계명에 순종하며 걸어 온 길을 그대로 살지 못하고 그렇게도 쉽사리 떠났던 것이다. 18 야훼께서는 그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판관들을 일으키시고는 언제나 그 판관들과 함께 해 주셨다. 그리하여 그 판관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거듭거듭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주셨다. 야훼께서는 원수들에게 억눌려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엾게 생각하셨던 것이다. 19 그러나 그 판관이 죽으면, 그들은 다시 다른 신들을 따르고 그 앞에 절하며 섬겼는데, 그 하는 짓이 조상들보다도 더 나빴다. 굽힐 줄 모르고 못된 길로만 가는 버릇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20 그리하여 야훼께서는 몹시 화가 나셔서 이렇게 생각하셨다. '내가 이 백성의 조상들과 계약을 맺을 때 명령한 대로 이 백성은 살지 않는다. 통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21 그러므로 나는 여호수아가 채 몰아내지 못하고 죽은 민족들을 이 백성 앞에서 결코 몰아내지 않으리라. 22 그들을 시켜 이스라엘을 *시험해 보리라. 이 백성이 조상들처럼 내가 가르쳐 준 길을 명심하고 바로 가는지 시험해 보리라.' 23 야훼께서 그 민족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붙여 한꺼번에 몰아내지 아니하시고 남겨 두신 것은 이 까닭이었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상위의 선()을 선점하여 누구를 가르치거나 훈육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의 됨됨이는 내가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됨됨이가 나에게 사유된 것이라면 인간은 그 것을 사유한 이후에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인간도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수시로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됨됨이는 인간이 사유하여 자신을 증명하고 드러내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 어떤 선한 행위를 내어 놓는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사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폭로당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인간은, 그게 성도라 할지라도, 죽는 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추악한 실체를 폭로당하면서 하느님의 은총(恩寵)의 필연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는 것이지, 다른 말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사는 것이지, 착함이나 선함을 사유하여 그것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이나 첩경을 제시하고 가르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건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6:63) 63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여기서 살리는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빵을 구하러 온 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 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인간을 살려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그 인간에게 사유화 되어 그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죽은 인간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근거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데 도구로까지 쓰는 아주 악독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내가 먼저 선점하고 사유한 착함과 깨끗함 앞에서 넌 무릎을 꿇으라는 것이지요. 그게 이 세상의 지배구조입니다.

그렇게 언제 어디서나 의 위상만을 걱정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판관기(判官記)는 그런 인간의 무력함과 추악함을 아주 적나라하게 지적 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야훼를 잘 섬기고 야훼의 명령에 순종하여 대적의 손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이유에 대해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건 하느님에 의해 판관(判官)이 세워졌을 때입니다.

 

(판관2:18) 18 야훼께서는 그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판관들을 일으키시고는 언제나 그 판관들과 함께 해 주셨다. 그리하여 그 판관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거듭거듭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주셨다. 야훼께서는 원수들에게 억눌려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엾게 생각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주셨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구원 아래 놓여 집니다. 왜일까요? 이스라엘에게 판관이 주어지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이 그 판관의 말을 잘 듣고 순종했기 때문일까요? 본문 16절과 17절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판관2:16-17) 16 야훼께서는 판관들을 일으키시어 약탈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 내시곤 하셨다. 17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을 이끄는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신들에게 몸을 팔아 그 신들을 *예배하였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야훼의 계명에 순종하며 걸어 온 길을 그대로 살지 못하고 그렇게도 쉽사리 떠났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주셨을 때에도 이스라엘은 판관을 청종(聽從)치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돌이켜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쫒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판관이 있었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대적의 손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일까요?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판관으로 예표 되는 메시아의 공로에 의한 것임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판관기 내내 계속해서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들은 판관이 있건 없건 자기들의 유익만을 위해 삽니다. 판관이 있을 때에는 판관의 말을 청종치 않고 판관이 죽으면 더욱더 악하고 패역하게 패괴(敗壞)를 일삼았습니다.

 

(판관2:19) 19 그러나 그 판관이 죽으면, 그들은 다시 다른 신들을 따르고 그 앞에 절하며 섬겼는데, 그 하는 짓이 조상들보다도 더 나빴다. 굽힐 줄 모르고 못된 길로만 가는 버릇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요? 판관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이스라엘은 패괴와 음란과 불순종의 역사를 토해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판관이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행위가 어떻든 간에 그들을 구원해 내십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하느님 앞에서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나 효용이 없습니다. 그냥 주인이 두는 곳에 두어지는 신세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라는 존재의 가치나 효용을 챙기거나 자랑 할 수 없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라는 존재의 행위나 됨됨이 등으로 자기의 가치를 매기거나 자랑을 하는 자기규정의 일은 인간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규정이란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나는 이런 사람이야, 저런 사람이야하고 자신을 스스로 평가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인간을 꾈 때 인간에게 바로 그 자기규정이라는 매력적인 당근을 던진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느님처럼 되고 선악을 아는 일에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이게 바로 자기규정(自己規定)에로의 유혹입니다. 라는 존재가 하느님처럼되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선악을 아는 일에도 하느님처럼 되어 이 세상의 모든 판단의 주체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인간을 꾈 때 선악과를 따 먹으면이라는 인간 행위를 조건으로 겁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인간은 인간이 행한 행위에 의해 자기가 규정되고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두시는 곳에 존재함으로 그 존재 가치가 결정 되고 규정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어떤 행위가 요구되고 있고 그 행위에 의해 하느님처럼이라는 인간의 자기규정의 열매가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그렇게 자기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하느님처럼이라는 자기규정의 장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기규정의 장 안에서 자기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자기 자신을 벌거벗은 부끄러운 자로 규정해 버립니다. 그리곤 하느님을 피해 숨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인간은 자기의 행위로 규정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이 두시는 손바닥()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규정이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에 의해 라는 존재가 규정되는 것이지 내가 속한 환경을 라는 존재의 행위로 뒤집어 엎을 수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 환경을 성경은 은총(恩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 안에서라는 어구를 습관처럼 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 주님 안이라는 것이 환경입니다. 구조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느님에 의해 어떤 환경과 구조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존재가 규정되는 자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능동적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분히 수동적이며, 피동적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그러한 무력한 피조물임을 깨닫고 하느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자각하고 가는 과정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것을 깨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들에게, 인간은 환경이나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그런 바보 같고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인간들의 자존심을 부추겨 줍니다. 아담이 받은 시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아담 안에 들어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떨어지는 시험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라는 존재가 주체가 되어 살겠다고, ‘스스로 규정하며 살겠다고, 마귀의 편으로 몰려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자기규정의 장으로 넘어가 버린 아담을 찾아오십니다.

 

(창세3:8~13) 8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느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9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10 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따 먹지 말라고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구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12 아담은 핑계를 대었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 13 야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물으셨다.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에게 속아서 따 먹었습니다.'

 

아담이 자기규정의 장으로 들어가 자신을 벌거벗은 부끄러운 자로 규정해 버립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그에게 오십니다. 그리고는 아담을 찾으시는데 그 질문이 아담아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가 아니라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아담은 지금 자기가 한 행위로 인하여 자신을 부끄러운 자로 규정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에 대하여 숨어 버렸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을 떠나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게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규정하여 숨어있는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아 담의 환경과 구조에 대한 질문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라는 구조 안에 있을 때 그의 행위 여하에 관계없이 된 자가 됩니다. 하느님의 은혜의 구조 속에서는 모든 행위가 하느님에 의해 발생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모든 행위의 주체가 하느님이시고 그 행위의 책임도 하느님이 지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혜 안에 들어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의 행위는 하느님의 도구로 쓰여 지는 하느님의 행위라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의 은혜 밖에 있을 때 그는 그의 행위 하나 하나를 전부 카운트 당하게 되고 그 행위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안이라는 구조와 하느님 밖이라는 구조 둘 중 한 곳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종류의 인간 중 하느님 안이라는 구조 속에 값없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 은총이고 바로 그게 구원이라는 것이구나를 깨닫는 자들이 하느님 안에 속해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그의 위치를 물으시는데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당신이 먹지 말라고 하신 그 열매를 먹어서라는 행위를 근거로 한 자기규정의 대답을 합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 밖에 있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하느님 밖의 존재의 행위를 하느님 은혜 안의 존재들이 행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안의 존재들이 하느님 밖의 존재들의 행위를 함으로 해서 자신들의 무력함을 깨닫게 되고 거기에서 하느님의 은혜를 절절하게 붙들게 되는 교육의 장 속에서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의 행함이 됨으로, 역시 하느님께서 다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 안에 있는 자인가, 아니면 하느님 밖에 있는 자인가인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는 나의 외부에서 환경으로 나를 감싸서 나의 무력함을 증명하는 도구인 것이지 내 가 개별적으로 챙겨서 사유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은혜(恩惠)는 받은 자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暴露)하는 도구인 것이지 그것을 받은 자들의 위상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야기를 대주제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판관기는 전체가 죄(sin)- 슬픔(sorrow)- 간구(supplication)- 구원(salvation)構造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구조가 열 네 명의 판관를 중심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판관기 내내 죄(sin)- 슬픔(sorrow)- 간구(supplication)- 구원(salvation)의 구조가 열네 번 이상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구원의 서정이 그대로 그려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슬픔과 간구의 부분에서는 인간들의 회개와 기도가 행위로 전제되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래야 구원이 올 것만 같지요? 슬픔과 간구가 전제되지 않으면 구원은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구조지요? 아닙니다. 이 구조는 인간의 무력함을 폭로하는 구조입니다. 슬픔과 간구의 회개도 인간은 여전히 자기의 유익을 위해 울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부르짖습니다.

절대 회개가 아닙니다. 죄 앞에서의 인간의 슬픔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슬픔이지 하느님 앞에서의 통회 자복이 아닙니다. 간구도 하느님 잘못했습니다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하느님 여기에서 구원해 주세요의 외침입니다. 여전히 가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그들을 구원하신단 말입니다. 왜일까요?

하느님 앞에 서 그들의 속셈이 뻔히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지요?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를 한 것이 아님은 지난 시간에도 분명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보김에서 하느님의 사자의 전갈을 듣고 마치 크게 회개한 것처럼 슬피 울었잖아요? 그래서 그 자리 이름을 보김(우는 자들)이라고 지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보김의 울음이 오늘 본문 11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판관2:11-15) 11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들을 섬겨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못할 짓들을 하였다. 12 자기네 조상들을 에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조상의 하느님 야훼를 저버리고, 주위 백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며 절하여 야훼의 노여움을 샀다. 13 그들은 야훼를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14 야훼께서는 크게 화를 내시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적에게 침략을 받아 노략질을 당하게 하셨다. 또한 둘러 싸고 있는 원수들 손에 팔아 넘기셨으므로 그들은 도저히 원수들과 맞설 수가 없었다. 15 그들이 출정할 적마다 야훼께서 손수 그들을 치셨던 것이다. 야훼께서 경고하시며 맹세하신 대로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심한 곤경에 빠졌다.

 

어떠세요? 실컷 울어놓고 그 울음이 악을 행하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우상 섬김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회개의 울음을 운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나요? 그런데 왜 은혜가 부어지는 것입니까? 말씀드린 대로 은혜는 그 받는 대상이 무엇을 잘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특이성이나 차별성의 차원에서 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는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자라는 전적인 타락의 확증의 차원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판관기 전체의 구조인 죄(sin)- 슬픔(sorrow)- 간구(supplication)- 구원(salvation)의 구조 내내 인간의 행위는 로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변화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계속 의 장() 안에서 라는 존재의 유익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러한 자들의 정체를 폭로시키시고 그것을 덮는 하느님의 은혜를 드러내시기 위해 죄(sin)- 슬픔(sorrow)- 간구(supplication)- 구원(salvation)의 구조 안으로 인간들을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이 한 일이라고는 죄를 지은 것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죄 속 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무력함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간들에게 율법과 제사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왜 구원자가 와야 하지요? 율법과 제사가 주어진 상태에서 인간들에게 구원자가 와야 했다는 것은 인간들의 모든 행위가 완전하게 기각되고 부정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은 판관으로 예표 되는 메시아에 의해 구원되는 것이고 그 구원은 완전히 완료된 구원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구원자가 와서 그 인간을 구원해 내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죄와 슬픔과 간구와 구원의 모든 과정 속에 전부 인간의 전적인 타락만이 드러날 뿐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침노해 들어 온 하느님 나라가 어떤 모양일 것 같으세요? 그걸 알려면 하늘의 양식(樣式)대로 만들어진 성막의 구조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성막 중에서도 하느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를 한 번 생각해 보자고요. 출애굽기 2510절 이하에 보면 지성소에 들어갈 증거 궤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증거궤(證據櫃)는 속죄소라는 뚜껑으로 덮여 있는데 그 속죄소 밑에 증거판, 즉 십계명 돌 판을 넣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2장으로 가면 모세가 바로 그 속죄소 아래에 들어갈 증거판을 받아서 시나이 산에서 내려오는데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느님을 모독하지요? 그때 심판이 일어납니다.

돌 판이 죄와 맞닥뜨리게 되자 심판의 깨어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돌 판은 다시 만들어 집니다. 이번에는 모세가 돌 판을 준비하고 하느님께서 쓰시는 돌 판입니다. 하늘의 것과 이 세상의 것이 연합 되는 형국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끌고 광야를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죄소 밑에 들어가게 되는 증거판은 인간의 죄와 불가능을 전제할 뿐 아니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속죄소가 덮고 그 속죄소 위에 흠 없는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덮은 어떤 존재의 피가 그 죄인들을 가려버리는 모습입니다. 그게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계속 용서하는 분으로 남고 백성들은 그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 자들로 존재하는 곳을 하느님 나라라고 합니다. 그 둘 사이에 흐르는 용서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가서에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말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을 용서로 덮어 버리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 나라의 구조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들어온 하느님 나라 또한 罪人은 계속 죄인으로 남아야 하는 것이고, 하느님은 그것을 덮는 분으로 영광스럽게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속죄소라는 뚜껑이 되어 죄를 눌러 버리면 죄로 가득 찬 성도라는 깡통이 그 속에 숨겨 둔 죄를 들켜 버리는 것이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 속에서 판관으로 쓰인 자들까지도 결국에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으로, 무력한 자로 폭로가 되고 모든 인간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쓰레기라는 것이 만천하에 폭로되는 것입니다.

 

(예레5:1-9) 1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 다니며, 너희 눈으로 찾아 보아라. 장마당마다 찾아 다녀 보아라. 바르게 살며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나는 예루살렘을 용서하리라. 2 나를 두고 맹세하면서도 속에는 사기칠 생각밖에 없구나.' 3 '야훼께서 눈여겨 찾으시는 것은 신용을 지키는 사람인데, 이 백성은 얻어 맞으면서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죽도록 맞고서도 타이르시는 말씀을 귓전으로 흘려 버립니다. 얼굴에 쇠가죽을 쓴 것들, 도무지 하느님께 돌아 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4 백성이야 어차피 야훼께 배운 길을 모르고 저희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법을 모르는 미련한 것들 아닙니까? 5 그래도 지도층은 야훼께 배운 길을 알고 저희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법을 알 것 같아 찾아 가 말을 건네 보았지만, 그들도 하나같이 굴레벗은 말이 되어 고삐를 끊고 날뜁니다. 6 그래서, 사자가 숲에서 뛰어 나와 사람들을 물어 죽입니다. 벌판을 쏘다니던 늑대가 덤벼들고 표범이 성읍 밖에서 노리다가 나오는 사람을 모두 잡아 갑니다. 그렇게 거역하기만 하고, 그렇게 배신만 하더니 이 꼴이 되었습니다.' 7 '너 예루살렘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용서해 주겠느냐? 너의 자식들은 나를 저버리고, 신 아닌 것을 걸어 맹세하였다. 배불리 먹여 놓았더니, 간음이나 하고, 창녀집에나 몰려 다니는구나. 8 먹음새 좋은 말이 성욕이 동하듯 남의 아내를 후리려고 힝힝거리는구나. 9 그러는데 내가 벌하지 않고 내버려 두겠느냐? 내가 똑똑히 일러 둔다. 이런 족속에게 분풀이를 않고 내버려 둘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 유대교의 중심을 가리키며 그 안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선언해 버리십니다. 그럼에도 그 예루살렘에서 판관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들어 쓰시기도 하시고 구원을 얻는 사람과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구분하시어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와 하느님 은혜의 필연성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묵시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땅에 심어서 그 묵시를 세상이라는 공간 속에 확 펼쳐낸 것입니다. 묵시라는 씨 속에 역사가 들어 있는 것이고 역사를 축약하면 묵시로 축약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의 말씀, 언약 속에 이미 다 들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묵시의 만개인 역사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비밀인 묵시를 드러내는 도구로 쓰이는 것이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도구에 불과한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자기들이 은혜와 구원과 믿음과 선함과 착함 등을 미리 선점하고 사유한 것으로 착각하여 누군가에게 선함에 이르는 길, 은혜에 이르는 길, 착함에 이르는 길, 됨됨이에 관한 조언 등을 한다는 것이 너무 우습지 않습니까? 주인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 도구로 쓰이는 자들이 저마다 자기의 가치를 챙기고 나서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가르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냥 하늘의 묵시를 깨달은 만 큼 선포할 뿐입니다.

 

이처럼 성경(聖經)은 하느님의 존재와 그 앞에서의 피조물의 실체에 대해 낱낱이 해부하여 독자인 성도에게 제시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그 성경을 근거로 하여 영위해 나가게 되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 세상의 허황됨과 덧없음과 죄인들의 더러움과 쓰레기 됨을 올바로 자각하고 하느님의 크심과 그분의 영광 앞에 항복하는 자가 되는 것임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느님께서 경륜(經綸)하시며 하느님께서 완료하시는 역사와 영원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식하는 과정이 신앙생활이지 내 구원과 내 영생과 내 유익과 내 가치를 챙기는데 도움이 되는 어떤 힘을 구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것에 관해 단 한 절도 할애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올바로 전달이 되어지면 모든 인간이 다 일단 아파야 합니다. 자존심 상해서 아프고, 감추어 둔 자기 실체가 폭로되어 아프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는 것 같지 않는 게으름과 추악함 때문에 아파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 이런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사50:4~8) 4 주 야훼께서 나에게 말솜씨를 익혀 주시며 고달픈 자를 격려할 줄 알게 다정한 말을 가르쳐 주신다. 아침마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배우는 마음으로 듣게 하신다. 5 주 야훼께서 나의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꽁무니를 빼지도 아니한다. 6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 7 주 야훼께서 나를 도와 주시니,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어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줄 알고 있다. 8 하느님께서 나의 죄 없음을 알아주시고 옆에 계시는데, 누가 나를 걸어 송사하랴? 법정으로 가자. 누가 나와 시비를 가리려느냐? 겨루어 보자.

 

하느님의 말씀을 맡아 그 말씀을 올바로 전했더니 사람들이 등을 때리고 뺨을 때리며 얼굴의 수염을 뽑고 침을 뱉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땠나요?

 

(예레20:7~10) 7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8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9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고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들고 맙니다. 10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립니다. '저자야말로 사면초가다. 고발하자, 고발하자.' 저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모두 제가 망하기를 바라 모의합니다. '걸어 넘어뜨리고 잡아 족치자. 앙갚음을 하자'

 

7절에 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파타유혹하다, 속이다, 설득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오죽했으면 예레미야가 자기는 하느님한테 속았다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말씀을 전했더니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힘이 들어서, 내가 다시는 야훼 말씀을 쫒아 야훼를 선포하지 않겠다고 하면, 또 그 삶 자체가 골수에 사무치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세상은 호시탐탐 그의 실수와 타락을 기다리며 그를 고소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끌려가며 하느님의 말씀을 삶으로 입으로 살아내며, 그것을 전하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도 시험하시고, 권징하시는 삶이며, 세상으로부터도 조롱과 멸시와 미움을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게 바로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인 것이며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여러분의 삶이기도 한 것입니다.

판관기의 판관들이 바로 이런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에 의해 사용은 당하는데 그 자신이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자신도 죄인으로 계속 폭로당하는 과정 속에서 하느님의 일에 동참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챙겨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을 때는 아주 달았는데 그 말씀이 자신의 삶 속에서는 고통으로 번역이 되어 나오더라는 넋두리를 한 것입니다.

 

(예레15:16~19) 16 말씀 내리시는 대로 저는 받아 삼켰습니다. 만군의 야훼 하느님, 이 몸을 주님의 것이라 불러 주셨기에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도 기쁘고 마음에 흐뭇하기만 하였습니다. 17 저는 웃으며 깔깔대는 자들과 한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았습니다. 주님 손에 잡힌 몸으로 이렇게 울화가 치밀어 올라 홀로 앉아 있습니다. 18 이 괴로움은 왜 끝이 없습니까? 마음의 상처는 나을 것 같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물이 마르다가도 흐르고, 흐르다가도 마르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도랑같이 되셨습니다.' 19 '그렇다면 이 야훼의 말을 들어 보아라. 너의 마음을 돌려 잡아라. 나는 다시 너를 내 앞에 서게 하여 주겠다. 그런 시시한 말은 그만두고 말 같은 말을 하여라. 나는 너를 나의 대변자로 세운다. 백성이 너에게로 돌아 와야지 네가 백성에게로 돌아 가서는 안 된다.

 

예레미야가 하느님으로부터 기쁨의 말씀을 받아먹었는데 그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마치 하느님의 분노처럼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의해 고통이 계속되었고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물이 마른 시내와 같았답니다. 그렇게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육의 무익함과 육의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면서 하느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삶으로, 경험으로 깨닫고 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인간은 생래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합니다. 신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며 우리를 은혜로 당신 자녀 만드시는 그런 하느님이 아닌, ‘를 위해, 내 소원과 문제를 해결해 주고 성취해 주는 그런 힘으로서의 신을 찾는 정도입니다. 그건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들이 찾는 신은 자신들이 조작한 라는 일 뿐입니다.

그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고 하지요? 바알과 아스다롯은 풍요의 신입니다. 그런데 바알이 수놈이고 아스다롯이 암놈입니다. 그 둘이서 교접을 하게 되면 다산과 풍년이 세상으로 쏟아지게 된다는 것이 바알과 아스다롯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전에서도 신전 제사장들과 신전의 사제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의 성욕을 돋우기 위해, 그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의 대리자로서 성행위를 했고 사제들이 제사를 드리러 오는 남자들과 신전에서 매춘 행위를 함으로 풍요와 다산을 빌었습니다. 그건 자신의 유익, 즉 이 세상에서의 풍요와 다산을 구하는 모든 인간들의 종교 행위가 바로 그러한 매춘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 바알과 아스다롯을 우상으로 섬겼다는 것이 이해가 가십니까?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하느님이 찾아가셔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 40년을 지키시며 요르단강을 건너게 하시고 예리고를 한순간에 무너뜨리신 후 가나안에 정착을 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다니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하느님을 섬 길 수 없음이 폭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어떤 기적이나 신비를 체험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자기만의 신을 조작해 냅니다. 인간은 은혜의 구조 속에 무기력한 자로 서는 것을 절대 용인하지 못합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는 존재의 주체를 살찌우고 강화하여 세상의 지배구조 속에서의 우위를 챙기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신을 조작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이 원하는 신은 의 삶에 주체로 개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체는 어디까지나 여야 하고 내가 조작해 낸 신은 그 주체인 를 열심히 도와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간에 의해 조작된 신은 늘 달램의 대상이 됩니다. 먹을 것으로 달래주고, 치성으로 달래주고, 제물로 달래주면 됩니다. 그러면 각자가 가진 특기를 발휘하여 인간을 돕는 방식으로 인간과 신의 관계가 정립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인간의 조작된 신을 향한 신앙 행위를 자연주의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간들의 신앙행위는 초월을 인정하고 초월에 복종하는듯 보이지만 사실은 초월을 조종하고 부리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신의 반대편에서 자연과 자신을 교활하게 합일시킵니다. 신의 반대편에 선 자들은 항상 신을 대항하여 하나로 뭉치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자연을 설득하고 복종하는듯하지만 결국에는 자연과 합일된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챙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풍요와 다산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살찌우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풍요와 다산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되는 것입니다. 동양 사상의 음양의 조() 같은 것이 바로 그런 유의 사유의 열매들입니다.

자연은 음과 양, 암컷과 수컷으로 되어 있는데 그 암컷과 수컷의 조화로 인하여 풍요와 다산이, 빈곤과 결핍이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암 수의 조화를 인간의 치성으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도 드리고, 치성도 드리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신앙행위의 주인공은 인간 자신입니다. 따라서 자연주의는 초월과 초월자를 인정하고 그분께 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초월과 초월자를 무시하고 자연의 조화를 조종하여 이 세상에서의 를 살찌우고자 행하는 모든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게 라는 제한 적 존재와 이 세상이라는 한시적 공간에 매여서 초월과 초월을 보지 못하는 자연주의에서 이신론이 파생이 되는 것이고, 진화론이나, 역사 낙관론에 근거한 역사 진보주의도 그러한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화론(進化論)의 시작이 태양, 즉 양이, 대양, 즉 음에 비추자 유기적인 분자 생명체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 음과 양의 조화, 동일한 발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스스로 발전하고 진화를 하게 된다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은 철저하게 신의 존재와 간섭을 배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역사 낙관론이나 역사 진보주의가 나온 것입니다.

이신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창조에만 관여를 했고 나머지는 자연의 법칙에 맡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신론 하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아주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슬람 교인들이 왜 알라를 위해 스스로 인간 폭탄이 되는지 이해가 가시지요? 그 모든 것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이라는 암컷과 수컷 신에게 의존하던 고대시대의 우상 섬김과 일맥상통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우상 섬김은 고대 시대에 잠깐 나타났다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집요하게 인간들을 사로잡고 있는 인간의 자아숭배 사상인 것입니다. 그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오늘날 성당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 초월과 초월의 하느님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현실 속의 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판관기는 바로 그 인류 역사 전체를 아우르며 흐르는 인간의 자기숭배, 자기규정의 장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로 수렴 되는 모든 신앙의 행위는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것마저도 덮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판관(判官), 즉 메시아를 그 불가능한 자들에게 보내셔서 결국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필립보서 33절 이하를 읽고 마치겠습니다.

 

(필립3:3~9) 3 영적으로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며 세속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진정한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4 하기야 세속적인 면에서도 나는 내세울 만한 것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 든다면 나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더 많습니다. 5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모든 행사와 언행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우리를 살린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좋아 보이는 것도 우리를 살려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살 수 있는가만 잘 배우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많이 낙담도 하고 절망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수고도 하면서 예수의 필연성만 잘 배우면 됩니다. 그렇게 잘 살아 계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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