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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땅의 용사와 하늘의 용사 (판관6,19-2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17 조회수3,895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8. 17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도란도란글방

 

 땅의 용사와 하늘의 용사 

 

(판관6,19-27)

19 이 말을 듣고 기드온은 물러가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잡아 요리하고 가루 한 에바로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기를 바구니에 담고 국물은 그릇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에 있는 그에게 가져갔다. 그가 오는 것을 보고 20 야훼의 천사가 그에게 일렀다. '고기하고 누룩 넣지 않은 떡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물은 그 위에 부어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자, 21 야훼의 천사는 손에 든 지팡이를 뻗쳐 그 끝을 고기와 누룩 넣지 않은 떡에 대었다. 그러자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누룩 넣지 않은 떡을 살라 버렸다. 야훼의 천사는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22 그제야 기드온은 그가 야훼의 천사라는 것을 알고 말하였다. ', 주님 야훼여, 제가 주님의 천사를 대면해 뵈었군요!' 23 야훼께서 '안심하여라. 너는 죽지 않을 테니 두려워 말라' 고 하셨다. 24 그리하여 기드온은 거기에서 야훼께 제단을 쌓아 바치고는 그 제단을 '안심시켜 주시는 야훼' 라 이름지어 불렀다. 그 제단은 이날까지도 아비에젤의 성 오브라에 서 있다. 25 그 날 밤, 야훼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네 아비의 일곱 살 된 살진 소를 끌고, 네 부하 열 사람을 데리고 가서 네 아비의 바알 제단을 허물고 곁에 있는 아세라를 찍어라. 26 그리고 이 산성 꼭대기에 너희 하느님 야훼께 바칠 제단을 차곡차곡 쌓아라. 그리고 그 살진 소를 잡고 찍어 낸 아세라 목상을 태워 번제를 드려라.' 27 기드온은 부하 열 사람을 데리고 야훼께서 시키신 대로 하였다. 그러나 집안 사람들과 성읍 사람들이 두려워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 해치웠다.

 

우리는 지난번까지 기드온과 300용사의 이야기를 구속사적 측면에서 개괄적으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결국 기드온의 이야기는 야훼의 천사, 야훼의 진짜 예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아 세상으로 보내지는 성도의 이야기였습니다. 사실상 기드온의 이야기는 야훼의 참 예언자가 이 세상으로 보내지는 두 예언자(묵시11:10)의 세상 용사됨의 추구를 박살을 내시고, 그들의 가슴 속에 하느님의 주권과 하느님의 열심과 하느님의 은혜만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버리시는 구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 본문에서 보았던 것처럼 야훼 使者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는 별명을 붙여 줍니다. 그 큰 용사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큰 용사는 어떠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연역적 포석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 세상 큰 용사의 정체를 폭로시키고 그들을 하늘의 용사로 만들어 내시는 하느님의 열심을 보여주기 위한 이름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보았던 것처럼 기드온은 하느님의 큰 용사로서의 역할을 잘 해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큰 용사는 자신의 상황이나 조건이나 처지나 능력이나 지혜를 다 부정당하고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능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말도 안 되는 방법, 나팔, 항아리, 횃불, 소리의 방법으로 적과 대전을 치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큰 용사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기드온처럼 하느님과 관계없이 자기 자신의 외모와 조건을 보고 일의 성패를 가늠하고 자신의 가치를 매기는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입고 난 이러저러한 못난 자이니 다른 사람을 부르세요.’라고 한 것이 겸손이 아니라 교만의 극치를 보여준 행동이라 했지요? 성경은 그러한 세상 용사들의 잘못된 판단을 이렇게 지적을 합니다.

 

(신명10:17) 17 세상에 신도 많고 주도 많지만 너희 하느님 야훼야말로 신이시요 주이시다. 크고 힘있으시며 지엄하신 신이시요 뇌물을 받고 낯을 보아 주시는 일이 없는 신이시다.

 

(로마2:11-12) 11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대하시니 말입니다. 12 율법을 지키지 못한 채 죄를 지은 사람들은 율법과는 관계없이 망할 것이고 율법을 가지고도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 율법에 따라 심판 받을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외모는 단순히 사람의 겉모양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보이는 행위, 업적, 공로 등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조건이나 지혜나 능력을 보시고 그 사람을 택하시고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찾아가셔서, 하느님의 능력을 쏟아 부어, 당신의 일군을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는 자들을 이 세상의 용사라 하는 것이고, 하느님에 의해 깡그리 비워지고 십자가의 자리로 내려가서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입니다.’라는 문둥병자의 고백을 하며 낮은 자리로 내려가 하느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자를 하늘의 용사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내가 죽어서 상대방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이 역사의 삶의 원리는 를 살리기 위해 인위적 연합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것을 부수시는 것입니다. 바벨탑에서 인간들이 하나가 되었을 때, 어찌 보면 그것은 기특한 시도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하나가 되어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하자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인위적 연합을 하려는 시도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기드온이 불러 모은 32천 명을 다 흩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전혀 쓸모없는 300명을 남기시고 그들의 손에 나팔과 항아리를 들려 전선으로 내 몰아 버리신 것입니다. 그들은 300명이서 똘똘 뭉쳐서 미디안을 격파한 것이 아니라 300으로 죽음으로 해서 예수와 연합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판관기는 그렇게 이 세상 용사들을 부정하고, 하늘의 용사로서 하느님에 의해 쓰임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판관들을 들어서, 예수를 설명하는 책인 것입니다. 즉 십자가 구원에 관한 이야기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판관 기드온이 야훼 천사 앞에 예물을 가져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가져온 예물이 무엇입니까? 어린 염소와 누룩없는 떡입니다. 예물이 조금 특이하지요? 어린 염소와 누룩없는 떡은 과월절을 상기시키는 예물입니다.

 

(출애12:5~11) 5 흠이 없는 일년 된 수컷이면 양이든 염소든 상관없다. 6 너희는 그것을 이 달 십사일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여서 해질 무렵에 잡도록 하여라. 7 그리고 그 피를 받아, 그것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라고 하여라. 8 그 날 밤에 고기를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도록 하는데, 9 날로 먹거나 삶아 먹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도 반드시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10 그것을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도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살라 버려야 한다. 11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나 야훼에게 드리는 과월절이다.

 

성경은 지금 이 기드온의 이야기를 야훼의 천사에 의해 주도되었던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연결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양이나 어린 염소, 그리고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은 인간의 힘과 노력이 닿지 않은 순수한 하느님의 열심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기드온의 이야기를 통하여 바로 그 출애굽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계신 것입니다.

잘 보면 야훼께서 그 예물을 받으시지요? 예물이 불에 살라졌다는 것은 야훼께서 그 예물을 기쁘게 흠향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예물을 흠향하시기 위해서는 예물이 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예물이 어떻게 타지요? 반석에서 나온 불에 의해 탑니다. 그러니까 야훼께서 받으신 예물은 단순한 염소 새끼와 누룩없는 떡이 아니라 반석에서 나온 불에 의해 살라지는 염소 새끼와 누룩없는 떡인 것입니다. 그걸 마태오가 이렇게 기술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23:19) 19 이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아니면 그 제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제단이냐?

 

제물은 제단 위에서 태워질 때 그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그냥 한 마리의 염소요 양인 것이니까요. 제물은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창세전 언약 속에서만 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훼 하느님은 단순히 기드온의 예물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반석에 의해 불살라진 예물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평화, 야훼 샬롬이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불을 뿜은 반석은 히브리어로 -인데 그 단어는 보호하다, 감싸 안다, 품어 안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쭈르에서 파생된 것으로 바위의 움푹 파인 곳혹은 바위 틈’ ‘피난처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세라라는 단어와 혼용되어 쓰이는데 뜻은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 물을 내어, 죽어야 할 그들을 살린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입니다.

 

(출애17:6) 6 내가 호렙의 바위 옆에서 네 앞에 나타나리라. 네가 그 바위를 치면, 물이 터져 나와 이 백성이 마시게 되리라.' 모세는 이슬라엘 장로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다.

 

오늘 본문에서는 반석에서 불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반석에서 물이 나오지요?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그 물과 불은 같은 것입니다. 아울러 모세가 영광의 하느님 앞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곳도 바로 그 반석 틈입니다.

 

(출애33:21-22) 21 야훼께서 이르셨다. '여기 내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서 있어라. 22 내 존엄한 모습이 지나갈 때, 너를 이 바위굴에 집어 넣고 내가 다 지나가기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가리리라.

 

잘 보면 그 반석이라는 것이 죽어야 할 것들을 보호하고 살려내는 역할을 하고 있지요? 판관기 15장에서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도륙하고 숨은 바위틈도 바로 반석입니다.(판관15:7) 바울로는 그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고전10:4) 4 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주님께서도 당신을 가리켜, 생수를 내어 죽어야 할 자들을 살리는 반석으로 표현을 하신 적이 있지요?

 

(요한7:37-39) 37 그 명절의 고비가 되는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는 일어서서 이렇게 외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 나올 것이다.' 39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그 때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와 계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목이 타서 죽어야 할 자들이 주님으로부터 생수를 받아 마시고 살아나게 되면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넘치게 되는데(충만하게 되는데), 그 생수가 바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을 종종 불로 표현을 하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의 반석과 그 반석에서 터져 나온 불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교회에게 주어지게 될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 도저히 자격이 없는 교회가 하느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물이 된다는 은혜의 복음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인 것입니다. 반석이 맞아서 물을 내고 그 물이 죽어야 할 자들을 살리는데, 그 물이 성령의 불로서 교회를 창조해 내는 것이라는 이 새 창조의 내러티브가 이해가 가시지요? 그것은 이사야서에도 동일하게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

 

(이사55:1~3)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 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 2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 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 데 써 버리느냐?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 보아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3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라. 다윗에게 약속한 호의를 지키리라.

 

보세요. 반석에서 나오는 물, 반석에서 나오는 불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언약,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란 말입니다. 요한묵시록에 보면 그 많은 반석의 이야기들이 이렇게 결론이 납니다.

 

(묵시21:5~7) 5 그 때 옥좌에 앉으신 분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하고 말씀하신 뒤 다시금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6 또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생명의 샘물은 거저 마시게 하겠다. 7 승리하는 자는 이것들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그 많은 반석의 이야기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되는 새 창조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새 창조는 예수님의 공로와 예수님의 은혜로 값없이 거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용사로서의 기드온이 죽고 135천 앞의 300으로, 다시 말해 하늘의 용사, 비워진 그릇으로, 기드온이 다시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기드온과 300 용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반석 이야기 끝에 야훼의 천사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판관6:21) 21 야훼의 천사는 손에 든 지팡이를 뻗쳐 그 끝을 고기와 누룩 넣지 않은 떡에 대었다. 그러자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누룩 넣지 않은 떡을 살라 버렸다. 야훼의 천사는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분명 야훼의 천사는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판관6:16) 16 야훼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미디안을 한 사람 해치우듯 쳐부수리라.'

 

여기에서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은 임 하야인데 거기에서 쓰인 동사는 미완료 시제로서 계속해서 함께 하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라진 거죠? 그게 바로 야훼의 예언자에게 보내심을 받은 이 세상의 두 예언자들, 곧 교회들의 현실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전쟁을 치르는데 전혀 하느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너무 많지요? 심지어 두 예언자가 바벨론길 가에서 죽는데도 안 말려 주십니다. 그게 뭐가 함께 함 입니까? 스테파노가 고작 설교 한 편하고 돌에 맞아 죽을 때 하느님께서 그걸 안 말려 주십니다. 제자들은 어때요?

 

(마태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 하시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어떤 삶을 살다가 어떻게 죽었나요? 세상의 미움을 받다가 결국 모두 순교를 당했습니다. 바울로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수차례 맞을 때도 주님은 안 말려주셨고, 요한이 늘그막에 파트모스(Patmos)섬으로 유배를 갈 때에도 안 말려 주셨습니다.

 

결국 야훼 천사의 함께 하심은 그 함께 하심으로 함께 하는 자를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135천 앞의 300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리시고 결국 죽여 버리시는 것으로 그 함께 하심의 열매를 거두어 가십니다. 오늘 본문 25절 이하를 보면 하느님의 그러한 인간의 육적 자아 파괴 전쟁으로서의 구원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암시가 됩니다.

 

(판관6:25~26) 25 그 날 밤, 야훼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네 아비의 일곱 살 된 살진 소를 끌고, 네 부하 열 사람을 데리고 가서 네 아비의 바알 제단을 허물고 곁에 있는 아세라를 찍어라. 26 그리고 이 산성 꼭대기에 너희 하느님 야훼께 바칠 제단을 차곡차곡 쌓아라. 그리고 그 살진 소를 잡고 찍어 낸 아세라 목상을 태워 번제를 드려라.'

 

하느님께서 기드온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리시는데 그때가 밤입니다. 구원의 언약이 암시될 때는 항상 밤이라는 무대장치가 등장합니다. 빛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400년 간 암흑기가 계속 되었지요? 그건 빛을 진짜 참 빛으로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던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 때도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로 창조의 하루가 마감이 되잖아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새 창조는 저녁에서 아침을 만들어 내시는 하느님의 능력과 주권과 열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25절 이하에서 기드온에게 내려지는 명령은 밤인 기드온이 아침이 되는 방법이요,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먼저 기드온 아버지 집의 소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거기에 라카후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그 단어는 잡아 죽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잡아먹어라도 아니고 잡아서 제물로 바치라도 아닌 잡아 죽이라입니다. 그런데 그때가 어떤 때였습니까? 수시로 미디안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들이닥쳐서 이스라엘의 곡식이나 가축들을 소가 핥듯이 훑어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 기드온의 아버지 집에 소가 있었다는 것도 기적인데 그 소를 죽여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는 항상 가족의 생계와 생존을 지켜주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엘리야를 따라 갈 때 소를 죽이고 쟁기를 태워 버린 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무엇을 끊어내고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 하나의 실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도 그들이 애굽에서 섬겼던 풍요의 신인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를 모형 하여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는 가족의 생계와 생명에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묵시록에서 네 짐승이 등장할 때면 항상 가축의 대표로 소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기드온에게 아버지집의 소를 죽이라고 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행복과 만족과 생계와 생명, 즉 인간의 구원은 소(세상의 힘이나 세상의 가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걸 죽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소가 기드온과 이스라엘의 실체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지금 소를 죽이라는 명령 속에 기드온과 그 안에 담긴 이스라엘의 육적 힘 죽음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그 소가 칠년 째 되는 소라는 그 다음 어구에서 확인이 됩니다. 그 칠년이 어디서 나왔었지요? 기드온의 이야기 제일 첫머리에 나온 단어입니다.

 

(판관6:1) 1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자, 야훼께서는 그들을 칠 년 동안 미디안족의 손에 붙이셨다.

 

이스라엘이 야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칠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여졌습니다. 그렇다면 칠년 된 소가 함의(含意)하고 있는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하느님이 보내신 자에 의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는,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 세상의 힘과 가치를 의지하고 의존하는 소와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바로 그것을 죽이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300으로 밀려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가 첫째 소가 아니고 둘째 소입니다. 둘째 소는 항상 첫째 소를 대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율법에도, 또 형사취수 제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소가 바쳐져야 할 곳에 첫째 소가 바쳐지지 못할 사정이 생겼을 때 항상 그 첫째를 대신하여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둘째 소입니다. 그 둘째 소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상징하는 것입니까? 예수지요.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지금 기드온에게 내리시는 명령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도말(塗抹)이 될 것이고, 어떻게 그들이 회복(回復)이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드온을 통해 보여 졌던 이스라엘의 죄는 하느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가시적인 힘과 가치를 의존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선악과 성패를 판단하고 추측하는 인본주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것을 부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 집의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소를 죽이시는데 그 소가 바로 이스라엘의 죄를 상징하는 칠년 된 수소였던 것이고 그 중에서도 둘째 수소를 잡아 죽임으로 말미암아 대신 죽음의 십자가 복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밤, 암흑기에 이 세상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대신의 죽음, 즉 보잘것없고, 가치 없는 둘째의 죽음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진짜 하늘의 장자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기드온의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도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장자의 축복을 받은 진짜 하늘의 장자 야곱은 이 세상에서 에사오에게 무릎을 꿇고 차자의 삶을 삽니다. 뿐만 아니라 폼 안 나게 환도 뼈가 위골된 상태에서 지팡이만을 의지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진짜 하늘의 장자의 삶입니다. 진짜 장자인 아벨이 가짜 장자인 카인에게 맞아 죽는 것도 그런 맥락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의해 큰 것, 맏이로 판단이 되는 것들을 유기시켜 버리시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차자나, 약자들이 하느님의 장자로 편입이 되는 그림들을 보여주곤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되심과 하느님의 주권과 하느님의 열심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장자들은 이 세상에서 죽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결국 그것이 진짜 사는 것이며 그것을 성경이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의 죄가 되셔서 죽으시고, 둘째가 되셔서 대신의 죽음을 담당하셨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폭로 당하고 그 죄가 역사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경험(십자가의 실제화)을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자, 300으로 내려가는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걸 깨는 게 바로 바알과 아세라라는, 성도 안의 우상을 깨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기드온 아비의 집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가 소와 함께 박살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깨져야 할 큰 용사의 이야기는 노아의 홍수 사건을 비롯해서 성경의 여러 곳에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열왕기 하로 가서 한군데만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하5:1) 1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으로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왕이 매우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야훼께서 나아만을 들어 쓰시어 시리아에 승리를 안겨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둥병환자였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은 크고 존귀한 자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크고 존귀한 자가 된 것이지요? 야훼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야훼께서 그를 큰 용사로 만드셨는데 그는 문둥병자입니다. 이웃 나라의 왕도 벌벌 떠는 시리아의 총사령관인 나아만, 그는 힘과 권력과 재물과 명예,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큰 용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문둥병자였습니다. 그게 세상 용사들의 실제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세상 용사됨이 문둥병이라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였지만 그 문둥병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죄에 빠진 인류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담들이 단 한 사람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지 못하고, 단 한 사람도 지고의 행복에 영원히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모든 인류가 죽음이라는 무서운 문둥병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이라는 문둥병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인류가 그 어떤 해결책과 방법을 내어놓는다 할지라도 인류는 행복에 도달 할 수 없습니다.

인류는 이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해결책들을 내어 놓았습니다. 교육, 이념, 종교, 이데올로기, 과학, 문명 등등 온간 종류의 선행체계와 지식체계를 내어 놓았음에도 인류는 계속해서 사망의 증상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멋들어지고 삐까번쩍한 인류가 내어 놓은 오답들과는 반대로 아주 보잘것없고 초라한 해답을 하나 제시하셨습니다.

큰 용사들인 인류가 보았을 때에는 형편없는 이방인에 불과한 하늘의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어떤 모양으로 왔나요?

 

(이사53:2~3) 2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조금 전에 보신 열왕기하의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 속에서는 누가 문둥병의 해결사로 등장하지요? 유대 땅에서 포로로 끌려온 노예 소녀입니다. 어떻게 일국의 총사령관이 자기 집 노예의 말을 듣고 사마리아 행을 결심할 수 있었을까요? 그에게 있어서 문둥병은 꼭 고쳐야 할 병으로 인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허접스러워 보이는 방법도 구원의 길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위기가 감지되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법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죽음에 이르는 자신의 죄를 제대로 인식한 사람은 반드시 그렇게 낮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존심이 어디 있어요. 살고 봐야지. 그런데 그러한 자신들의 죄를 올바로 자각(自覺)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절박한 자신의 상황과 지경을 감지한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하느님께 매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부인이 실제화 되는 그 과정에는 반드시 죄에 대한 처절한 자각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용사 나아만은 그렇게 노예 소녀의 말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아져 있었습니다. 자신의 문둥병은 눈앞의 불을 보듯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었으니까요.

그 나아만과 이 역사 속 아담의 무리들을 비교해 보자고요. 이 역사 속의 아담의 무리들이 정말 자신들이 죽어야 할 죄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아나요? 모릅니다. 인간들의 용사됨의 추구와 세상 왕 됨의 추구가 죽어야 할 죄 병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의 귀에는 구유에 오신 보잘 것 없는 가난한 목수의 경고가 들리지 않습니다.

 

시리아 왕을 보세요. 분명 나아만이 노예 소녀의 말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에 가면 한 예언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나아만의 병을 고쳐 줄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리아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써서 이스라엘 왕더러 나아만을 고쳐 주라고 합니다. 그게 세상의 방법입니다. 세상은 항상 이 세상 아담들이 합의하고 정의해 놓은 멋들어지고 화려한 방법으로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방법은 항상 그 반대로 움직입니다.

어찌 되었든 문둥병자 나아만은 엘리사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문 밖으로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는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전갈을 보냅니다. 이건 또 무슨 무례입니까? 하느님께서 아예 넌 병 고치지 말고 그냥 가라고 떠미는 것 같지 않으세요?

나아만이 자존심이 상해서 정말 시리아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때 나아만의 종들이 나아만의 길을 가로 막고 어차피 다른 거 시켰어도 할 거였으면서 그까짓 거 강에 들어가 씻으라고 한다고 그냥 가십니까? 속는 셈치고 들어가서 씻어 보세요.라고 충언을 합니다. 나아만은 구원될 자였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종들의 말씀은 무시해 버렸을 나아만이지만 그때에는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종들의 말대로 합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병이 실체 그대로 감지가 되었고, 그건 반드시 고쳐야 할 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어린 아이와 같은 깨끗한 피부로 요르단강에서 올라오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아만이 자신의 문둥병을 고친 것에 있지 않습니다. 나아만은 그 사건을 통하여 아무도 고칠 수 없는 자신의 병을 고치신 하느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뒤로 나아만은 야훼 하느님만을 섬기는 자가 됩니다.

그때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사례를 하려 하지요? 그런데 엘리사가 받지 않습니다. 내가 받지 않겠다고 하지요? 그건 그 사례를 받으실 분이 따로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당신 백성들의 문둥병을 다 짊어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보세요. 큰 용사인 나아만이 하느님에 의해 치유를 받는 과정에서 종의 말을 듣는 자로 내려가지요? 그리고는 하느님만을 예배하고 하느님만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시리아로 이스라엘의 흙을 가지고 갑니다.

거기에서도 마음만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의지의 발로였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구원은 용사를 쳐서 하느님의 종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용사의 추구가 문둥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백성들의 문둥병들을 모두 떠 안으셨습니다.

 

(마르1:40-42) 40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41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42 그는 곧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자 문둥병이 낫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손을 대셨는지 아세요?

 

(마태8:16~17) 16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 마귀 들린 사람을 많이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악령을 쫓아 내시고 다른 병자들도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의 그 병을 빨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루가복음 17장으로 가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루가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 가시게 되었다. 12 어떤 마을에 들어 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크게 소리쳤다. 14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 와 16 그 발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18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하시면서 19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들을 찾아가셔서 멀리서서 그들을 고쳐 주시지요? 그리고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일상으로 복귀를 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문둥병자에 대한 규례가 나오는데 문둥병자들은 절대 이스라엘 진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문둥병이 나았을 경우에는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고 제사를 드린 후, 진 안으로의 복귀, 즉 이스라엘로의 복귀가 가능했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문둥병을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건 거룩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곁에 이방인이요 부정한 자였던 문둥병 환자들이 절대 가까이 올 수 없었음을, 다른 말로 거룩과 죄는 절대 함께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열 명 중 아홉 명은 그렇게 병 고침을 받은 후 제사장에게 가서 일상으로의 복귀를 허락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길로 일상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게 바로 가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항상 자신들의 명예 회복과 자신들의 일상 챙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느님께는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감사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워들은 것은 많아서 자신이 죄 사(, 용서)함을 받았다고 너스레는 떠는데 거기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그건 진짜 문둥병은 여전히 앓고 있으면서 형식적이며 지식적인 죄 사()함만을 외치고 있는 가짜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진짜 문둥병이 나은 사람은 사마리아 문둥병자 하나였습니다. 그는 당시 개취급도 못 받던 사마리아 사람, 즉 이방인이었고 자신의 문둥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를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만 예수님께 돌아와 예수님께 사례를 했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의 진짜 문둥병, 사망(死亡)이라는 죄의 병이 나은 것입니다. 그게 진짜 구원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제사장이고 뭐고, 일상이고 뭐고, 이스라엘 진 안이고 뭐고, 그런 거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의 눈에는 예수만 보입니다. 그게 성도의 지향점이며 그리로 향하는 지향성이 성도의 삶의 궤적이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구원에 이르는 자는 하느님께 일상을 차압당합니다. 그건 곧 그의 용사됨의 추구를 차압당한다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나아만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마리아 문둥병자도 온 관심이 하느님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인간의 용사됨이 깨지고 하느님 절대 의존자로의 지향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일에 인간의 힘은 조금도 가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절대 사례를 받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물며 나아만은 어떻습니까? 그는 더더욱 사례를 받을 처지가 못 되지요. 자기의 문둥병 치유에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요르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은 것뿐입니다. 혹시 지금 그것도 나아만 측에서 일조를 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는데, 나아만이 요르단 강물에 일곱 번을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나 이스라엘이 예리고 성을 열 세 바퀴 돈 것 등의 이야기는,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 성이 무너지거나 문둥병이 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렇게 했더니 어떤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아만의 이야기에 사례를 받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엘리사의 시종 게하지입니다. 게하지는 문둥병을 고치고 떠나는 나아만을 쫓아가서 기어코 사례를 받아가지고 옵니다.

하느님의 절대 주권과 하느님의 전적인 은혜에 인간의 공로가 개입을 하여 흠집이 난 것입니다. 그때 나아만의 문둥병이 게하지에게로 옮겨갑니다. 그러한 인본주의의 망령이 바로 나아만의 문둥병이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게 죄의 본질이며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르코복음 1장의 문둥병 치유 사건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면, 루가복음 17장의 문둥병자 치유 사건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에 대해, 그래서 하느님의 거룩이 절대 그것과 함께 할 수 없음에 대해,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문둥병자와 하느님의 아들이 부둥켜안고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강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로가 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이렇게 기술(記述)을 합니다.

 

(에페2:12-13,19) 12 그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이스라엘 시민권도 없는 외국인으로서 약속의 계약에서 제외된 채 이 세상에서 희망도, 하느님도 없이 살아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13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를 말미암아 하느님과 가까와졌습니다. 19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멀리서 밖에 부르지 못했던 이방인, 외인들이었던 우리가 오직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주님과 가까워 진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 과정에서 문둥병자가 한 일이 뭡니까? 때 수건으로 피부를 박박 밀었나요? 아니면 좋은 약을 장복했습니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 가신 것입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모여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거처로 예수님께서 찾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19절의 말씀처럼 하늘나라 시민으로, 하느님의 가족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오이케이오스’, ‘오이코스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죽어야 할 문둥병자들이 하느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 가족, 하느님의 집에 심판이 먼저 임한다고 했지요? 보세요.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의 가족이 된 자들은 일상과 육적 자아를 하느님께 차압당하는 심판을 먼저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찬송을 할 수 있는 자입니다. 성도는 무엇이 진짜 복이며, 무엇이 진짜 가치이며, 무엇이 진짜 행복인지, 믿음 안에서 식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필립3:20)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세주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크신 은혜를 찬송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 찬송이 진심으로 깊어 질 때 우리에게서 이 세상 문둥병자들이 내어 놓은 해답인 이 역사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며, 이 세상의 힘만을 추구하던 문둥병자로서의 나의 모습이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깊이깊이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성도가 방종으로 흐르거나 게을러 질 거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도의 신앙 행위는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지 성도의 의지나 결정에 의해 첨가 되거나 사라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느님의 은혜의 설교(說敎)를 들으시고 방종을 하거나 게을러진 분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의지와 노력에서 나온 가짜 열심이었던 것이지 성령이 내어 놓은 진짜 성도의 열심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은혜를 전하면 그러면 이제 나의 의를 쌓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혹시 이 자리에도 그런 분이 계시다면 한 번 여쭤 보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자기 를 쌓지 않기 위해 안하는 겁니까 아니면 원래 하기 싫었던 것을 안 하는 것입니까? 그동안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고 있었는데 십자가라는 핑계 거리가 생기니 거기다 다 뒤집어 씌워 버리는 거죠? 좋습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게 원래 여러분의 자리입니다. 이제 그동안 여러분이 넉살 좋게 내어 놓았던 열심들은 모두 헛것이었음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시작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동안 하기 싫은 것 억지로 했었다면 그건 하느님의 원수로 행한 겁니다. ? 하기 싫은 것 억지로 시키는 그 하느님이 얼마나 미웠겠어요? 그분보다 힘만 세면 당장이라도 때려 눕혔을 텐데,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으니까 여지껏 참은 것 아닙니까? 그럼 지금이라도 내가 하느님보다 힘이 세 진다면 그 하느님은 당장 묵사발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동안 억지로 한건 하느님 앞에 하나도 카운트 안 되는 선이요, 착함이요, 섬김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를 그냥 인정하시고 거기서부터 시작하시면 됩니다.

 

어떤 것이 자기 의()에서 나온 것이고 어떤 것이 하느님의 열심에서 나온 것인지 어떻게 알지요?’ 여러분도 이런 질문이 드십니까? 제가 분명히 말씀 드릴게요.

여러분은 선행에, 혹은 종교 행위에 열심을 부려도 되고 열심을 부리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그것도 여러분의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 성령(聖靈)을 받은 성도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상황이 그를 생명으로 이끌고 간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입니다.

 

(고후2:14-16) 14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5 우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 향기는 구원받을 사람에게나 멸망당할 사람에게나 다 같이 풍겨 나가지만 16 멸망당할 사람에게는 역겨운 죽음의 악취가 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감미로운 생명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향기의 구실을 아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보세요. 복음이 전해지면 그 은혜의 복음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향기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향기로 전해지게 됩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반드시 둘로 분열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그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감사와 찬송을 진심으로 내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계신 성령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해 육적 자아가 부인 되어 지고, 그로 말미암아 이 역사의 덧없음과 무용함과 추악함을 알게 되어 자기의 소유를 나누고, 이웃을 섬기며, 이 세상 힘 가진 자 앞에서 당당하고, 힘없는 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그러한 삶을 사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거기에 하느님의 십자가 복음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완료 하셨으므로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그 구원에 보탤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혹은 우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쏟아 부으신 은혜가 어떤 것인지 아는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살겠습니까?’라는 적용이 떨어졌다고 가정해 보세요. 둘 다 십자가를 근거로 얼마든지 선포되어질 수 있는 적용의 부분입니다.

그랬을 때 하느님의 백성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와야 맞습니까? ‘맞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문둥병자로, 부정한자로 그렇게 죽어야 할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그렇게 구원해 내셨으니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하겠지요? 그렇다고 감사에서 격발된 그 사람의 행위가 한 순간에 멈추어 버리겠습니까?

혹은 맞아, 우리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으신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데 비록 내 육신이 약하여 수시로 넘어지고 실수하고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 주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 봐야지, 그리고 경험상 죄를 벗어난 삶이 자유롭고 한결 홀가분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으니 더 이상 죄 속에서 뒹굴 수는 없지.’이리로 안 가겠습니까?

혹시 그 사람이 실수를 하고 큰 죄를 저지르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그 십자가의 은혜 속에서 더욱더 십자가를 꼭 붙드는 사람으로 지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복음이 생명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적용이 떨어져도 그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된단 말입니다.

반면에 순전히 자기의 자랑과 인기와 만족을 위해 종교 행위를 하고 선한 일을 했던 사람은 똑같은 적용이 떨어지게 되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은혜의 복음을 들으면 그걸 빌미로 자신의 게으름을 변호할 것이고, 하느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열심을 내자고 하면 열심을 부리면서 자기의 의를 챙겨 가질 것입니다.

둘 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분량과 모양은 같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죽음으로 작용을 하게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열심을 부려도 되고 안 부려도 됩니다. 저는 그렇게 말씀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으로 달려가는 우리의 발길은, 그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달리는 때와 비교하여 한결 가볍고 가뿐하며 기쁜 길이라는 것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을 품어 안은 하늘의 백성이 죄를 지으면서 행복할까요?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일에 모든 걸 바치면서 자랑스러워질까요? 아닙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러한 상황에도 그냥 놔두시는 것은, 성도는 그 상황 속에서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죄의 고통 속에 처박아 두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지금 성화론에 근거한 열심을 촉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론은 우리의 열심을 방법과 도구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가자는 것이지만, 지금 우리의 열심으로 오히려 우리의 무력함을 확인하고, 하느님 나라의 참 기쁨을 조금이라도 맛보고 가자는 취지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이는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해 점점 관심을 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당연하며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러한 자기부인의 삶이 진행되어지면서 우리는 하늘의 맛을 조금씩 보게 되는 것이고, 성도의 특권에 대해 배우게 되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백성다움을 조금씩 챙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이해해야 하고 그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는 존재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먼저 배우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다 합력하여 선으로 향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하느님의 열심이 여러분에게 가입하여 여러분으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의 힘의 원리로부터 떠나게 하시고, 나만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 살던 그 자리에서 밀어 내실 때, ‘아멘하고 일어서십시오. 거기에서 하늘 백성의 기쁨을 조금이나마 맛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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