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도란도란글방/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세상 왕들의 종말 (판관8:33-9: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18 조회수3,683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8. 18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도란도란글방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세상 왕들의 종말

 

(판관8:33-9:6)

8,33 기드온이 죽은 다음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바알들을 따라 음란을 피우며 바알브릿을 자기네 신으로 삼았다. 34 이스라엘 백성은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저희를 건져 내신 저희 하느님 야훼를 기억하지 않았다. 35 여룹바알이라고도 하는 기드온의 집안이 그렇게도 많은 은덕을 입혀 주었는데도 이스라엘은 그 은혜를 저버렸던 것이다. 9,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으로 외삼촌들을 찾아 가서 외삼촌들과 외가댁 온 일가에게 청하였다. 2 '세겜의 모든 어른들에게,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의 지배를 받는 것과 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과 어느 것이 나으냐고 물어 봐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그들과 한 골육이라는 것도 잊지 말라고 해 주십시오.' 3 그의 외삼촌들은 이 말을 세겜의 모든 어른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아비멜렉이 자기들과 한 혈육이라는 생각에서 마음이 그에게 기울어 4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세겔을 내다가 그에게 주었다.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할 일 없는 건달패를 사서 졸개로 삼아 거느리고 5 오브라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자기 형제들 곧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다. 그러나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만은 어디엔가 숨어 있었으므로 살아 남았다. 6 세겜의 모든 어른들과 밀로의 온 집안은 세겜에 있는 석상 옆 상수리나무 아래 모여 아비멜렉을 왕으로 받들었다.

 

이제 우리는 기드온의 이야기의 대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 판관기 기드온과 300인의 군사 이야기를 용사가 되자는 선동의 이야기가 아닌, 당신의 백성을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자리에서 반드시 건져 내시고야 마시는 하느님의 열심의 측면에서 해석을 해왔습니다.

선악과(善惡果)를 따먹고 모두가 하느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며 저마다 신()이 되어 자신의 육적자아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이 세상 아담 무리들의 욕망의 각축장으로 침투해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삶에 간섭하시며, 결국에는 그들의 처음 자리로 끌고 내려가 버리심으로 하느님의 능력과 영광과 은혜를 오롯하게 드러내시는 구원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기드온의 이야기였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기드온 이야기의 결론 부분입니다. 판관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의 정체가 폭로되고, 왕이 되고 싶어 안달을 냈던 기드온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아비멜렉의 정체와 결국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육적 인간의 집요한 악마 성이 여지없이 들켜지고 있습니다.

먼저 판관 밑에서 순한 양처럼 평화의 세월을 누렸던 이스라엘이 판관의 死後에 어떻게 그들의 정체를 발각당하고 있나요? 기드온이 죽자마자 이스라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알과 바알브릿을 섬깁니다. 바알브릿은 가나안의 세겜 지역 사람들이 섬기던 신으로 언약의 바알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우상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느님을 버리고 바알과 언약을 맺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살아있을 때에도 하느님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힘센 용사 기드온을 믿고 따랐던 것이지 기드온을 기드온 되게 하신 하느님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기드온이 사라지자마자 우상에게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들은 기드온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본문 34절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을 사면 대적의 손에서 건지신 야훼 하느님을 기억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기록을 하고 있지요? 그렇게 인간의 불가능함이 계속해서 폭로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하여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가짜일 확률이 높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신앙생활의 성숙을 위해 눈에 보이는 어떤 증거들을 찾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표징을 보여주시거나 기적을 체험케 해주시면 자신들의 신앙이 훨씬 성숙되고 깊어질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 나타나면 그 기적을 붙들지 절대 하느님을 포착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기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보세요. 그들 앞에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 그 기적 체험을 통하여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하느나님을 잘 섬기는 자가 되었나요? 아니요. 그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건 죽은 흙들의 하느님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소치였습니다. 인간들의 무지는 눈에 보이는 특정한 사건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리스도교인이라 하는 사람들까지도 눈에 보이는 것,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것, 특별한 것, 이런 것들 속에서만 하느님의 간섭하심을 찾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생의 목적과 이유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나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은, 그렇게 사건과 사건이 아닌 것으로 구분되거나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새 창조의 완성이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하느님께서 간섭하시며 일으키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 속에서 세밀하게 일을 하시는 하느님의 열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구속사라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잠자고, 일하고 하는 모든 것에 하느님의 간섭하심이 동행을 한다는 것이 되지요? 그런데 왜 인간들은 특별한 사건들에만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일까요? 그게 바로 하느님의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을 알게 된 이들은 자신들의 모든 일상이 하느님의 작정 속에서 하느님의 경륜으로 운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하느님의 간섭하심을 감지하게 되며 그럴 때마다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기 위한 애를 쓰게 되고 그것이 용이치 않을 때 안타까운 탄식을 하기도 하며 매 순간을 그렇게 삽니다. 그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감지하며, 그 뜻을 알기 위해 애쓰는 모든 몸짓과 사유와 언어를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祈禱, 언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기도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들의 일상 전체가 하느님이 일으키시는 사건이 되는 것이고, 그 사건 하나하나가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특별해 보이는 사건들 뿐 아니라 소소한 일상의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을 감지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그러한 밀접한 관계 속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속에서만 신의 존재와 간섭을 추측할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일상 속의 신이 감지가 안 되니까요. 그래서 그들의 눈앞에서 그 특별한 현상들이 사라지게 되면 그들은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생각할 것 없어요. 우리가 바로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하느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부수어 가시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사를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해석을 하려고 하는 지향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드온의 이야기가 눈에 보이는 세상 권력 앞에서 초라하게 밀을 까고 있던 기드온의 모습으로 시작이 되지요? 그는 야훼 천사 앞에서도 자신의 연약한 현실을 근거로 하여 순종치 못하는, 선악과 따먹은 아담 무리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눈에 보이는 힘이 없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말만 믿고 일을 진행하느냐는 불신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기드온에게 모든 일이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시작이 되고, 추진이 되며, 결론이 맺어진다는 것을 표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실제 전투의 현장 속에서도 기드온과 이스라엘의 두 손과 두 발을 다 묶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전쟁은 하느님께 속한 것임을 확실하게 경험케 해 주십니다.

즉 눈에 보이는 힘이 진짜 힘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경륜하신다는 것을 말로, 사건으로, 표적으로, 열심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 후의 기드온은 또 다시 보이는 힘을 추구하는 추태를 보입니다. 아내를 많이 얻고,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 합니다. 인간의 육적 욕망의 집요함이며 추악함입니다.

그러한 기드온의 욕망의 산물이 아비멜렉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아버지의 세상 왕에 대한 욕망을 구체화시켜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게 판관기 9장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영웅, 기드온이 죽자 금방 바알과 바알브릿에게로 돌아섭니다. 그들이 기드온과 기드온의 전쟁 뒤에서 일을 하셨던 하느님의 능력과 영광과 은혜를 조금이라도 감지를 했다면 눈에 보이는 기드온이 죽었다고 해서 금방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배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왕으로 취급하지 않는 죄인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며, 성경은 그들을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판관기(判官記)는 하느님을 왕 삼아 살지 않고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왕 삼아 사는 죄인들의 이야기이며 그들을 다루시는 하느님의 전쟁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패역한 이스라엘 안에 자중지란을 일으키십니다. 세상 왕의 자리를 추구하고 열망하던 기드온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아비멜렉이 자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역시 왕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추악한 계략을 꾸밉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분신인 것이고,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대표입니다.

기드온이 죽자 바로 눈에 보이는 우상에게 달려갔던 그 이스라엘이 바로 기드온 안에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처럼의 욕망을 펼쳐 보여준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를 부수고 들어오시는 하느님을 ...인간 속의 악마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과 세상 왕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여 사는 죄인들의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이외의 모든 존재가 다 경쟁자요 적()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외가인 세겜에 찾아가서 우상을 섬기며 살던 세겜 사람들에게 자신의 왕위 찬탈을 도우라고 설득을 합니다. 지금 아비멜렉은 단 지파나 유다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92절을 보면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골육지친임을 내세워서 설득을 합니다. 난 너희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겜 사람들이 맞다, 우린 너의 형제다하며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 바알브릿의 神堂에서 은()70냥을 꺼내어 아비멜렉에게 줍니다. 그 단어는 , 신전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바알브릿을 섬기던 신당이 맞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의 신, 풍요의 신인 바알브릿에게 바쳐진 인간 욕망의 배설물 같은 우상 신당의 헌금이 아비멜렉의 권력 찬탈자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하느님처럼의 추구를 돕는 더러운 세력인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깡패들을 삽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는 일없이 경박하게 남의 돈이나 뜯어 먹고 사는 조폭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비멜렉은 그 깡패들을 데리고 자기 형제 70명을 한 반석 위에서 다 죽여 버립니다. () 한 냥에 형 한명씩의 목숨 값을 계산해 준 것입니다. 인간의 세상 왕의 추구는 이렇게 잔인하고 포악하며 무섭습니다. 그렇게 하여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게 바로 기드온 안에 숨어 있던 악마성 이었음을 그의 아들 아비멜렉이 삶으로 폭로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자들을 300으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러한 와중에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이라는 사람이 아비멜렉과 깡패들의 칼을 피해 숨습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의 아들은 총 72명인 것이지요. 아무튼 그렇게 숨어서 겨우 살아난 요담이 자기 형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는 그리짐 산으로 올라가서 세겜 사람들을 향해 우화 하나를 이야기 합니다.

 

(판관9:7-16) 7 이 소식이 요담에게 전해지나 그는 그리짐산 꼭대기에 가 서서 소리 높이 외쳤다. '세겜의 어른들은 내 말을 들으시오. 그래야 하느님도 여러분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오. 8 하루는 나무들이 모여 와서 자기들을 다스릴 왕을 세우기로 하고 올리브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9 그러나 올리브나무는 사양을 했소. '내 기름은 모든 신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런데 나 어찌 기름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 보며 으스대겠는가?' 10 그래서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자네가 와서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11 그러나 무화과나무도 사양을 했소. '나 어찌 이 훌륭한 과일을 내지 않고, 나 어찌 이 달콤한 맛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 보며 으스대겠는가?' 12 그래서 나무들을 포도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자네가 와서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13 그러나 포도나무도 사양을 했소. '내 술은 모든 신과 사람을 흥겹게 해 주는 것, 그런데 나 어찌 이 술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 보며 으스대겠는가?' 14 그래서 모든 나무는 가시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자네가 와서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15 그러자 가시나무는 그 나무들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소! '너희가 정말로 나를 왕으로 모시려는가? 정녕 그렇거든 와서 내 그늘 아래 숨어라. 그러지 않았다가는 이 가시덤불이 불을 뿜어 레바논의 송백까지 삼켜 버릴 것이다.' 16 그러니 이제 여러분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는 것을 어찌 떳떳한 일이라 하겠소? 그러고도 어찌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하겠소? 그러고도 여룹바알과 그의 집안에 잘해 드렸다고 하겠소? 그것이 어찌 그의 업적에 보답하는 것이 되겠소?

 

이 우화에는 나무들이라는 불특정 다수 집단이 등장하고 그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가 되는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가시나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다른 세 나무는 나무들의 왕의 추대를 정중하게 거절하는데 가시나무만이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말미에 아비멜렉의 이야기를 붙여 넣어, 그 나무들의 우화가 아비멜렉의 왕위 찬탈 사건을 비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네 종류의 나무들은 하느님 나라 백성들의 자기 존재 인식과 마귀 나라 백성들의 자기 존재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울러서 그러한 아비멜렉 안에 들어 있는 기드온과 이스라엘, 즉 성경의 독자인 우리 자신의 악마성을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삶 속에서 반드시 이루실 언약 성취의 필연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먼저 올리브나무의 반응을 한 번 보세요. 본문 9절입니다.

 

(판관9:9) 9 그러나 올리브나무는 사양을 했소. '내 기름은 모든 신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런데 나 어찌 기름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 보며 으스대겠는가?'

 

올리브나무는 자신을 기름 부어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는 다른 나무들에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뭡니까? ‘사람과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화를 위해 사는 자라면 당연히 왕위 추대를 수락해야지요. 그런데 그의 관심은 이 세상 왕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현실이 하느님이 허락하신 현실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그 현실이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이 맞다면 그 현실 속에서 분명 하느님 스스로가 당신의 영광을 챙겨 가실 것임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힘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에 더 집중하고 있지요? 두 번째 나무를 볼까요? 본문 10절 이하로 갑니다.

 

(판관9:10-11) 10 그래서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자네가 와서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11 그러나 무화과나무도 사양을 했소. '나 어찌 이 훌륭한 과일을 내지 않고, 나 어찌 이 달콤한 맛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 보며 으스대겠는가?'

 

무화과나무 역시 자신의 현재 현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현재의 현실이 이 세상 왕의 추구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나무는 포도나무입니다.

 

(판관9:12-13) 12 그래서 나무들을 포도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자네가 와서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13 그러나 포도나무도 사양을 했소. '내 술은 모든 신과 사람을 흥겹게 해 주는 것, 그런데 나 어찌 이 술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 보며 으스대겠는가?'

 

포도나무 역시 하느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신의 일상이 이 세상 왕의 추구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 백성들의 자기 존재 인식인 것입니다. 천국의 백성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천국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전부 하느님과 타자를 위해 삽니다.

그래서 누구 위에 군림한다든가, 자신의 업적과 공로를 근거로 상을 받아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평가나 대우를 받으려 한다든가, 타자와의 차이성을 입증하여 자신의 높음이나 위대함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이나 자원에 만족하며 그것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사용하며 삽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모든 존재가 각기 다른 역할과 직업과 다른 생김새를 갖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최선의 만족과 행복 속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그만큼의 영화를 내어 놓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가 어떤 존재가 되어 어떤 모양의 일을 얼마만큼 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적이 하느님과 이웃의 영화로움이니까요. 그냥 자기가 가진 것으로 하느님과 이웃의 영화를 위해 살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그게 행복이고, 그게 평화며, 그게 안식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서 천국을 산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정확하게 그것과 반대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요? 그것이 아비멜렉, 즉 가시나무의 삶입니다. 본문 14절 이하를 보세요.

 

(판관9:14-15) 14 그래서 모든 나무는 가시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자네가 와서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15 그러자 가시나무는 그 나무들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소! '너희가 정말로 나를 왕으로 모시려는가? 정녕 그렇거든 와서 내 그늘 아래 숨어라. 그러지 않았다가는 이 가시덤불이 불을 뿜어 레바논의 송백까지 삼켜 버릴 것이다.'

 

다른 세 나무가 전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능력과 자원에 만족하며 그것들을 세상 왕의 자리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할 만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원이나 힘이나 능력이 자기들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영화롭게 하라고 하느님으로부터 수여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러한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명예롭고 가치 있는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자기의 존재와 자원과 됨됨이와 능력이 자신의 것인 양 너스레를 떱니다. 가시나무가 다른 나무들에게 내 그늘에 피하라고 하지요? 자신은 그럴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통치 영역 안으로 들어와서 자신의 뜻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말에 복종하지 않을 때에는 불을 내어 다 살라 버리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게 세상 왕들의 자기 존재 인식입니다. 항상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자기가 왕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러한 세상 왕 노릇에 걸림돌이 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모든 분열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잖아요? 우리의 모습은 가시나무의 모습입니다. 절대로 하느님과 이웃의 영광을 위해 나를 희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자들의 삶에 어떻게 개입을 하시는지 볼까요?

 

(판관9:17-24) 17 내 아버지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여러분을 미디안의 손에서 건져 냈는데 18 여러분은 오늘 내 아버지의 집안을 뒤엎으려고 들고 일어나 칠십 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들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소. 그리고 여러분 세겜의 어른들은 계집종의 자식인 아비멜렉을 여러분의 혈육이라고 해서 왕으로 떠받들었소. 19 만일 여러분이 이 날 여룹바알과 그 집안에 한 것이 떳떳하고 아무 잘못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비멜렉과 행복스럽게 잘들 지내보시오. 20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삼키고 세겜의 어른들과 밀로의 집안에서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삼키라고 나는 빌겠소.' 21 이렇게 말을 마치고 나서 요담은 도망하여 브엘에 이르렀다. 그는 형 아비멜렉을 피하여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22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이 지났다. 23 하느님께서 악령을 보내시니, 아비멜렉과 세겜의 어른들 사이가 나빠져, 세겜의 어른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게 되었다. 24 이렇게 하여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당한 억울한 죽음을 원수갚는데 자기 형제를 죽여 피흘린 죄를 아비멜렉에게 갚으시고 제 형제를 죽이는 자를 도와 준 세겜의 어른들에게도 그 죄를 갚으시려고 하신 것이다.

 

(로마1:24) 24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욕정대로 살면서 더러운 짓을 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거기에 쓰인 파라디도미라는 동사는 붙들고 있던 것을 넘겨주다, 놓아주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죽은 흙을 붙들고 계시던 손을 놓아버리는 형국입니다. 그때 타락한 피조물, 즉 죽은 흙들이 죽음의 잔치를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파라오를 완고, 강팍(强愎)’하게 하셨다고 할 때, 그 의미가 하느님이 파라오를 악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파라오 안에 들어 있던 악을 하느님께서 제어하지 않으시고 놔두시며 그 악을 당신의 목적에 맞게 쓰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악한 신을 보내셨다는 말은 악하지 않은 그들을 일부러 악하게 만들어 버리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이 악의 조성 자가 되시니까요. 그 말은 하느님께서 성령의 일반 은총을 거두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죽은 흙들의 본질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때 그 속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악의 본질이 그대로 폭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느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라고 하는 우리들을 하느님의 장중에서 벗어난 사람들처럼 그렇게 놔두실 때가 있지요? 하느님이 말려주실 만도 한데 안 말려 주시고 그냥 놔두셔서 우리 자신의 악마성을 그대로 폭로 당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을 받은 성도가 가장 아프고 괴로울 때가 바로 그때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동안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작은 것들까지도 전부 끄집어 내셔서 죄로 진열을 해 보이십니다.

그러한 죄는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도저히 자기들의 의로 그 심판을 모면할 수 없는 자들에게, 하느님이 준비하신 하늘의 의가 선물로 주어졌다는 복음의 현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의 맨 앞줄에 서 있는 것이 죄에 대한 자각인 것입니다. 그게 악신이 임한 하느님 백성들의 상태인 것입니다.

 

성도는 사업이 망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명예가 손상되거나 할 때보다 자신 안의 마귀적 성향이 스스로에게 들켜질 때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그때 성도는 왕이 되고 싶어 하던 육적 자아의 욕망에 타격을 입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실체를 폭로당하다가 급기야 내가 죄인 중의 죄인라는 처절한 고백을 하게 될 때 성도의 육적 자아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이 땅에서 온전하게 성취 될 수 있는 문제의 것이 아닙니다. 지향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성도의 육적 자아가 그렇게 분열과 난항을 겪으면서 지리멸렬의 길을 가게 되고, 육적 자아의 멸망의 길을 가게 될 때, 자신을 향하던 왜곡된 사랑이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지향성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내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아가서 1장에 보면 지금 설명한 내용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가1:12-14) 12 나의 임금님이 몸을 누이신 방에 나르드 향내 그득 채우리라. 13 가슴에 품은 유향 꽃송이 같은 내 사랑. 14 엔게디 포도원에 핀 헨나(고벨) 꽃송이어라.

 

이 말은 지금 술람미의 고백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신랑이 침상에 있을 때 술람미에게서 나르드 기름 향기가 토해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나의 임금님이 몸을 누이신 방이 단어는 신랑 솔로몬과 신부 술람미의 하나 됨의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 단어인 것입니다. 침상이라는 것은 부부가 함께 눕는 침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부부를 한 몸이라고 하지요? 그건 신랑이신 하느님과 신부인 교회의 관계를 모형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 했습니다.

신랑의 희생으로 신부가 탄생을 하여 신랑의 몸으로 연합이 되어 신랑의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가 되는 구원의 이야기가 부부라는 관계 속에 담긴 것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신랑과 함께 침상에 누웠다는 것은 신랑과 신부가 한 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에페5:31-32) 31 성서에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32 참으로 심오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봅니다.

 

그렇지요? 신랑의 침상에 신부가 들어가 둘이 하나가 되니 신부의 몸에서 나도 향이 뿜어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식탁에서도 신랑과 신부는 하나가 됩니다. 성경은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인 교회를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로 묘사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신랑이신 예수께서 신부인 교회에게 나는 하늘의 양식이니 나를 먹어라고 외치십니다. 그렇게 신부는 신랑의 살과 피를 먹고 비로소 신부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는 그렇게 하여 신랑 안으로 들어가 신랑과 연합이 됩니다. 그건 또 신랑이 신부를 먹는 형국입니다. 요한복음 4장으로 가면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의 양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4:31-35) 31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32 예수께서는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33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누가 선생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을까?' 하고 수군거렸다. 34 그러자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35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온다' 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내 말을 잘 들어라. 저 밭 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생명의 빵으로 이 세상에 오신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그때 그 여인에게 구원이 임하지요? 곧 제자들이 도착하여 예수님께 식사를 권유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이 잡수실 양식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양식이 뭡니까?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하십니다.

34절의 ‘~것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거기에서의 ‘~은 지금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행하신 일을 말합니다. 주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하느님의 백성들을 하나하나 구원해 내시면서 그들을 당신의 품속으로 집어넣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에페소서에서 바울로가 교회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먹고 교회로 충만하게 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과 그렇게 언약을 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신랑은 신부를 품에 품는 하늘의 식사를 하는 것이고, 신부는 신랑의 살과 피, 즉 은혜를 먹는 은혜의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랑과 신부의 식탁입니다. 역시 한 몸 됨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침상에서의 한 몸 됨이나 식탁에서의 한 몸 됨은 전부 신랑 측에서의 희생을 근거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왕의 신분인 솔로몬이 얼굴이 검은 노예, 술람미를 사랑하여 둘이 하나가 되는 것 자체가 왕의 희생이 전제가 된 하나 됨이니까요. 그렇게 신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한 몸이 된 신부에게서 향기가 토해져 나옵니다. 그건 신랑이 좋아하는 향기입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그 향의 발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향이 술람미의 젖가슴 속에 품고 다니는 몰약 주머니에서 나는 향기입니다. 당시 고대 시대 여인네들은 몸에서 나는 냄새를 감추기 위해 몰약 향낭을 젖가슴 사이에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목에다 걸어 젖가슴까지 늘어뜨린 향수 주머니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여염집 아낙네들이 저고리 속에 사향 주머니를 품고 다녔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2 절의 나르드 향이나 13절의 몰약 향이나 똑같이 시체의 방부제로 쓰이던 것이고 여인네들의 향수로 쓰이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술람미가 자기의 몸에서 나는 향을 시체를 싸는 나르드 몰약의 향이라 표현을 했을까요? 게다가 그 향기는 자기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술람미가 솔로몬 당신은 내 품의 몰약 향낭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술람미에게서 나오는 향기는 솔로몬의 향기라는 것입니다. 그 향낭 자체가 솔로몬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신부인 우리 성도에게서 향기라는 것이 난다면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먹히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젖가슴 사이의 몰약 향낭이 되어 주셨다는 증거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시체와 함께 싸여지는 몰약의 향낭이시라면 우리는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시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밖에 안 납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체에게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게 되는 것은 시체의 공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체와 함께 연합이 된 몰약 향낭의 효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인 됨을 폭로 당하면서 죽은 흙의 자리로 내려가게 될 때에 우리는 죄인 중의 죄인, 즉 죽은 시체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나를 품어 안으시고 내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조금씩 밖으로 토해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2:19-20) 19 나는 이미 율법의 손에 죽어서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위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시체 냄새를 가리는 몰약 향낭이 되셔서 우리를 하느님께서 흠향하시는 흠 없는 제물의 향기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인간은 육의 몸을 입고 있는 한, 하느님 앞에서 전부 가시나무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기의 소유와 자원과 힘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남을 지배하려 하고, 그것이 용이치 않을 때 서슴없이 남을 밟아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살다가 결국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완전한 멸망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들은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시체가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처음 자리를 올바로 자각하게 되고, 그렇게 자기가 부정되어지는 과정을 고난 속에서 통과를 하며, 자기의 시체 냄새를 가리고 계시는 몰약 향낭이신 예수님을 신랑으로 꼭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 신랑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랑은 당신이 신부의 목에 걸어 놓은 향기만 흠향하십니다.

그 외에 신부가 내어 놓는 다른 것은 전부 시체 썩은 냄새로 취급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신랑이 우리를 찾으러 오실 때 우리가 받은 믿음과 은혜만을 내어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의 결혼 관습을 보면 왜 성경이 하느님과 교회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을 했는지가 아주 분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신랑과 신부가 결혼을 하게 될 때 제일 처음 과정이 신랑 부모의 신부 간택입니다. 신랑이 결혼 전에 신부를 보는 일은 매우 희귀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전 예정입니다. 하느님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창세 전에 예정하십니다.

 

(에페1:4-5)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신부가 간택이 되고 혼인날이 가까워 오게 되면 신랑 집에서는 신랑의 친구나 믿을만한 종을 신부에게로 보냅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신랑에 대해서 소개를 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의 아내 리브가에게 엘리에셀을 먼저 보냈던 것이 바로 그러한 연유에서입니다.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누가 먼저 와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습니까?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 자신이 자기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세요.

 

(요한3:28-29)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라고 말하였는데 너희는 그것을 직접들은 증인들이다. 29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히브리 사람들의 결혼 관습 속의 신랑 소개용 친구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신랑이 다시 오실 그 때까지 우리에게 보내져서 신랑을 소개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성령이십니다.

 

(요한15:26) 26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그렇지요? 지금 우리 신부들에게 신랑을 소개하시는 신랑의 친구는 보혜사(保惠師) 성령이십니다. 그렇게 신랑의 친구로부터 신랑에 대해 소개를 들은 신부는 신부 집에서 신랑을 기다립니다. 신랑은 신부의 집에 속전을 지불하고 신부를 사게 됩니다. 만일에 돈이 모자라면 종살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속전(贖錢)이 완전하게 지불이 되면 신랑이 드디어 신부를 데리러 가는데 그 때가 밤입니다. 이 밤 같은 세상에 신부를 홀로 두었다가 나중에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왜 신랑이 이 밤 같은 세상에 당신의 신부를 두고 가실까요? 왜 솔로몬은 술람미를 신부로 택하여 입맞춤 한 번 해주고는 떠나버렸을까요? 왜 솔로몬의 왕궁으로 즉시 데려가지 않았지요?

신부는 밤 같은 세상 속에서 신랑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 자기에게 신랑이 필요한지 가슴 깊이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거의 일 년 가까운 기간이었다고 하니 정혼한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시간 치고는 꽤 긴 시간입니다. 신랑은 밤에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신부를 찾아 가서 정확하게 신부의 손을 잡아끕니다. 신부는 신랑이 보내준 신랑의 빙폐물(聘幣物)을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신랑은 자기가 준 것을 자기에게 내어 놓는 자를 신부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신부가 아닌 들러리들이 아무리 비싼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있어도 신랑은 자기가 보낸 빙폐물을 지닌 신부만을 데리고 옵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만이 하늘같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미리 보내주신 빙폐물이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혼인예물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믿음을 내어 놓아야 신랑이신 예수님의 손에 붙들려 하늘로 갈 수 있습니다. 다른 예복은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믿음이라는 예복만이 하느님 나라로 입성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선물로 주신 이사악을 내어 놓으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느님 앞에 내어 놓아야 진짜 신부인 것입니다. 히브리서로 가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히브11:5-6) 5 에녹은 믿음으로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 가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게서 데려 가시기 전부터 그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에녹은 하느님과 동행을 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동행을 하다가 하늘 신부가 되어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지요? 그런데 히브리서가 하느님과의 동행을 믿음으로 산 것이라 합니다. 믿음으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과의 동행이고, 그 믿음을 내 놓은 자만이 신랑이신 예수의 아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69절을 보면 노아도 하느님과 동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노아 또한 믿음으로 산 자라는 말이지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방주 속으로 들어가 방주의 은혜로 살아나게 되는 하느님의 신부인 것입니다. 그도 믿음으로 산 자입니다.(히브11:7)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내가 바로 왕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기드온이고, 내가 바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성패의 근거로 삼으며 라는 우상 섬기기에 여념이 없는 이스라엘이며, 내가 바로 나의 왕 됨을 위해 내 형제들의 목숨을 한 반석 위에서 몰살할 수 있는 아비멜렉인 것이며,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아비멜렉의 편을 들었다가 자기들에게 유익이 안 된다 싶으니까 금방 배신을 하여 피 묻은 칼을 어제의 동지에게 들이대는 세겜 사람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의 그러한 마귀성(魔鬼性)을 폭로해 버리시고 결국은 진멸해 버리십니다. 기드온도 죽고, 세겜 사람들도 전멸 당했으며, 아비멜렉도 맷돌 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살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이 기드온의 이야기를 통해,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135천이라는 세상 앞의 300의 자리로 몰고 내려가셔서 결국은 완전히 죽은 자로 만들어 버리시고, 그들이 결국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오롯이 바라는 믿음의 사람들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당신의 구원의지를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시체일 뿐이고 너희가 내게 바치는 향기는 내 아들의 몰약 향낭일 뿐이다, 그러니 하느님처럼 되겠다는 헛된 망상을 버리고 내가 주는 복을 받아 살아야 한다이게 바로 기드온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신부로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화려한 가짜 빙폐물들을 버리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진짜 빙폐물인 믿음을 내어놓는 자로 밀려 내려가야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나의 양식이 되어 내 안으로 들어오신 우리 신랑의 은혜를 찬송하고 찬미하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그게 진짜 승리입니다. 기드온과 300인의 이야기,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지요? 역시 십자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