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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입다의 서원(誓願) (판관11:29~4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18 조회수4,086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8. 19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도란도란글방

 

입다의 서원(誓願) 

 

(판관11:29~40)

29 야훼의 영이 입다에게 내렸다. 그는 길르앗과 므나쎄 지역을 일주하고 길르앗 미스바에 있다가 다시 거기에서 암몬군의 배후로 돌았다. 30 거기에서 입다는 야훼께 서원하였다. '만일 하느님께서 저 암몬군을 제 손에 붙여 주신다면, 31 암몬군을 쳐부수고 돌아 올 때 제 집 문에서 저를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을 야훼께 번제로 바쳐 올리겠습니다.' 32 그리고 나서 입다는 암몬 진지로 쳐들어 갔다. 야훼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붙여 주셨으므로 33 아로엘에서 민닛 어귀에 이르기까지 스무 성읍을 쳐부수었다. 또 아벨그라밈까지 진격하며 마구 짓부수었다. 이리하여 암몬군은 이스라엘군에게 꺾이고 말았다.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집으로 돌아 오는데, 소구를 잡고 춤을 추며 집에서 나와 그를 맞는 것은 그의 외동딸이었다. 35 입다는 자기 딸이 나오는 것을 보고 옷을 찢으며 외쳤다. '아이고, 이 자식아, 네가 내 가슴에 칼을 꽂는구나. 내가 입을 열어 야훼께 한 말이 있는데, 천하 없어도 그 말은 돌이킬 수 없는데 이를 어쩐단 말이냐!' 36 그러자 딸이 아뢰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를 두고 야훼께 하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그대로 하십시오. 야훼께서 아버지의 적수인 암몬 사람들에게 복수해 주셨는데, 저야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37 그리고서 딸은 한 가지만 허락해 달라고 하며 아버지에게 청을 드렸다. '두 달만 저에게 말미를 주십시오. 그러면 벗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 가 돌아 다니며 처녀로 죽는 몸, 실컷 울어 한이나 풀겠습니다.' 38 입다는 두 달 말미를 주어 딸을 떠나 보냈다. 두 달 동안 딸은 벗들과 함께 산에 들어 가 처녀로 죽는 것을 한하여 실컷 울었다. 39 두 달이 지나 아버지에게 돌아 오자 아버지는 딸을 서원한 대로 하였다. 그 딸은 남자를 안 일이 없었다. 이로부터 이스라엘엔 한 가지 관습이 생겼다. 40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생각하고 이스라엘 처녀들은 해마다 집을 떠나 나흘 동안을 애곡하게 된 것이다.

 

판관기 11장에는 전쟁에 출전하는 입다가 섣부른 서원을 함으로 해서 일어나게 되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입다의 딸이 번제로 바쳐집니다. 입다가 암몬과 전쟁을 하기 위해 나가면서 하느님께 서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자기 손에 암몬 자손을 붙이시면, 자기가 돌아올 때 자기 집에서 제일 먼저 나와 자신을 맞이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전쟁에 승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그를 영접(迎接)한 이는 입다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습니다. 입다는 하느님께 드린 서원대로 그 딸을 번제로 잡아 죽였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동안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하느님은 입다가 돌아올 때 누가 제일 먼저 나올 것인지 아셨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느님께서 입다의 서원을 받아들이셨을까?’

두 번째로, ‘아무리 입다가 철없이 촐싹대다가 딸을 번제로 잡을 위기를 맞이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그것을 말려주지 않으시고 그 딸을 번제 단에서 잡게 하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입다의 서원설교(誓願說敎)를 준비하면서 그러한 의문들이 말끔히 씻겨 졌습니다. 역시 답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먼저 율법은 이스라엘의 서원에 대해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레위기 7장에 보면 사람이 하느님 앞에 서원을 할 때에는 어떠한 절차와 규례를 행해야 하는지가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부분을 공부해보면 지금 입다가 어떤 잘못을 하고 있으며, 왜 하느님께서 그러한 비극적인 사건을 허락하셨는지가 풀어집니다.

 

(레위7:11~18) 11 야훼께 친교제물을 바치는 규정은 다음과 같다. 12 친교제물을 감사의 뜻을 겸하여 바치려면, 감사의 희생제물에다가 누룩 없이 기름으로 반죽하여 만든 과자와 누룩 없이 기름만 발라 만든 속 빈 과자와 고운 밀가루를 기름에 개어 과자 모양으로 만든 것을 덧붙여 바쳐야 한다. 13 그리고 이런 예물은 누룩 넣은 빵과자를 곁들이고 받은 축복이 고마와서 드리는 희생제물을 얹어서 바쳐야 한다. 14 이 예물 가운데서 한 개만 집어 야훼께 들어 바치고, 나머지는 친교제물의 피를 따른 사제에게 돌려야 한다. 15 받은 축복이 고마와서 드리는 희생제물의 고기는 바치는 그 날로 먹어야 한다.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두면 안 된다. 16 서약한 대로 드린 제물이나 마음에 우러나서 드린 제물은 바친 날 다 먹지 못하고 남았을 때 다음날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에는 그 남은 제물고기를 불에 태워야 한다. 18 만일 사흘째 되는 날에 자기가 바친 친교제물의 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제물을 바친 사람은 야훼께 못마땅하게 보여 바친 보람도 없이 될 것이다. 그것은 부정하게 되었으므로 그 제물을 먹은 사람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 것은 화목제(和睦祭)에 관한 규례입니다. 그 화목제 안에 서원제가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제사의 종류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번제와 소제, 속죄제와 속건제,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펴 볼 화목제입니다.

이 제사들은 각각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소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이야기를, 속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의 이야기를, 화목제는 완료, 승천의 이야기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 화목제에는 감사제와 서원제, 그리고 낙헌제라고도 하는 자원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화목제의 제물은 다른 제사와는 달리 제사를 드린 자와 제사장,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화목제의 현실을 그림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 출애굽기 24장입니다.

 

(출애24:5-11) 5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중 몇몇 젊은이들을 그리로 보내어 야훼께 번제를 올리게 하고 수송아지들을 잡아 화목제를 드리게 하였다. 6 모세는 그 피의 절반을 받아 항아리에 담아 놓고, 그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 7 그리고 나서 계약서를 집어 들고 백성에게 읽어 들려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따르겠습니다.' 하고 다짐하였다. 8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뿌려 주며 '이것은 야훼께서 너희와 계약을 맺으시는 피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은 계약의 조문이다' 하고 선언하였다. 9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칠십 명을 데리고 올라 갔다. 10 그들은 거기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뵈었다. 그가 딛고 계시는 곳은 마치 사파이아를 깔아 놓은 것 같았는데 맑기가 하늘빛 같았다. 11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선발된 이 사람들에게는 야훼께서 손을 대시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은 하느님을 뵈오며 먹고 마셨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 피를 단에 뿌린 모세와 70원로들이 하느님께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고 그들은 하느님을 보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게 바로 화목제라는 제사가 담고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화목제는 속죄의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아닙니다. 화목제는 죄인들의 속죄가 완료되어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들 간의 화목이 성취된 것을 선포하며, 그러한 하느님의 은혜와 열심에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성도들의 천국 혼인잔치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제에 감사제와 자원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자원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드리는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원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 드릴 테니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거래용으로 쓰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화목제의 하나인 서원이라는 것은 죽어야 할 나를 위해 흠 없는 제물을 보내주심으로 우리에게 완료된 구원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 다른 말로 자원하여 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서원입니다.

무엇을 요구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측에서 완료시켜 놓으신 어떠한 사건에 대해 감사와 찬송으로 화답을 하는 것이 화목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제, 특히 서원제의 제물은 첫 새끼로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레위27:26) 26 짐승의 맏배는 으례 야훼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새삼스레 거룩한 것으로 바칠 것이 없다. 소든 양이든 맏배는 야훼의 것이다.

잘 생각해보세요. 하느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물은 단순히 대속의 대가가 아닙니다.

제물이라는 것은 대속의 대가이기 이전에 하느님께서 받으실만한 거룩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부정하고 더러워서 차마 받을 수 없는 것들 대신에 그 제물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물을 드린 자를 흠 없는 제물과 동일시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 하고 은혜라 합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을 해 보자고요. 제물이 하느님에게 바쳐져서 하느님의 쇠지팡이(鐵杖)에 맞아 죽는다는 것은 형벌의 의미보다는 피조물의 육적 자아가 파기되고 하느님의 것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와 생명력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존재일 수 있고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느님께 바쳐져서 육적 자아가 죽고 하느님의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은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조물의 대표로 육신을 입으시고 그 피조물의 구원의 과정을 먼저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지금도 그 부활의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이신 그 분이 영원히 육신을 입으시기로 결정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요.

그러한 구원의 역사적 과정을 성경의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의 처음 것들은 전부 하느님께 구별하여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처음 것이 바쳐짐으로 해서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난 창세전 언약의 성취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출애13:12-16) 12 너희는 태를 처음 열고 나온 것을 모두 야훼께 바쳐라. 너희 가축이 처음 낳은 수컷도 야훼의 것이다. 13 처음 난 나귀는 양을 대신으로 바치고 물러내어라. 물러내지 않으려거든 목을 꺽어라. 너희 자식들 가운데서 맏이는 다 물러내어라 14 훗날, 너희 아들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거든 너희는 이렇게 말해 주어라. '야훼께서 강하신 손을 펴시어 종살이하던 나라, 에집트에서 우리를 건져 내셨다. 15 그 때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야훼께서는 에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실 수밖에 없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까지도 처음 난 것은 모조리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처음 태를 연 수컷을 모두 야훼께 제물로 바쳐야 하고 아들들 가운데서도 맏아들은 물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16 이것을 너희 손에 새긴 표나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표지처럼 여겨라. 야훼께서 그 강하신 손으로 우리를 에집트에서 이끌어 내시지 않았느냐?'

 

(신명15:19) 19 소와 양의 수컷 맏배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 따로 바쳐야 한다. 맏배 황소는 부려 먹을 생각을 말라. 맏배 양의 털은 깎아 가질 생각을 말라.

 

이렇게 이스라엘의 처음 것은 식물이건 가축이건 전부 하느님께 갖다 바쳐야 합니다. 그건 출애굽기 13장의 말씀처럼 첫 새끼가, 죽어야 할 이스라엘을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쳐져야 할 하느님의 백성들이 그 자체로는 너무나 더러워서 하느님의 것으로 바쳐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더러운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하느님께 바쳐진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거룩한 장자들로 편입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처음 것들이 하느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하느님의 명령은 오직 하느님의 장자만이 하느님이 받으실만한 제물이 되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성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그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형제들, 즉 성도들이 하느님에게 거룩한 제물로 드려질 수 있는 신분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은혜의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첫 새끼가 하느님 앞에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다른 제물들이 그 첫 새끼 안에서 제물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첫 새끼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다른 제사에서는 꼭 첫 새끼가 아니더라도 제물로 쓰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하게도 화목제의 제물은 절대로 첫 새끼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나 셋째는 괜찮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화목제는 속죄 제물로 오신 하느님의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완료된 속죄와 그로 말미암아 완성되게 되는 하느님 나라를 누리며 즐기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왜 또 제물이 필요한가요? 그리고 그 제물을 이웃과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왜 그런 번거로운 제사가 또 있어야 하지요? 여러분, 예수라는 맏아들 다음에 줄줄이 살아나는 자들이 있지요? 그들이 교회입니다.

 

(고전15:20~23) 2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사람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22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살아 나셨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로마12:1)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맏아들의 동생들에게 똑같은 제물로서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여기에서 제물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뛰시아라는 단어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의 동생들에게 제물의 삶을 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의 맏아들처럼 당신에게 바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느님 앞에 자격 있는 제물이 되라는 권면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우리를 거저 하느님의 제물로 받으셨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제물 됨이라는 방향성과 지향성을 갖고 살아가게 될 것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의 삶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라는 존재의 육적자아가 부인되고 그 안에 사시는 예수만이 드러나게 되는 자기부인의 과정이 성도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맏아들에 의해 완료된 하느님 나라를 누리며 즐기는 화목제의 현장에 맏아들이신 예수의 동생으로 입적이 된 라는 제물이 하느님께 바쳐지는 그림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맏아들이신 예수가 가신 길을 쫓아 자기를 부인당하고 온전히 하느님께 바쳐져서 다른 이들을 위해 를 양식으로 주는 하늘 백성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 나라의 존재양식입니다.

가 비워져서 상대방의 배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것이 아닌 제물, 즉 구원받은 가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지고 그들이 나를 먹고, 배가 부르게 되는 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 나라입니다.

 

(로마8:29) 29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라는 존재의 육적 자아가 부인되어져 가는, 역사 속에서의 구원의 현재 시제를 살게 되는 성도이기에 세상 속에서의 고난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밟히고 빼앗기고 비워지고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 역사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하느님 백성들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렇게 처음 것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거저 하느님의 제물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우리를 첫 열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처음 것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여 살게 되고 결국에는 처음 것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 성도라는 말입니다.

 

(야고1:18)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하느님의 맏아들이 가신 그 자기부인의 길, 십자가의 길을 실제 화하여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히브리서 기자는 교회를 장자들의 총회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장자이신 예수 안에서 거저 구원을 얻은 입양된 장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진짜 장자가 가신 그 길로 쫓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화목제의 현장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서원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서원은 하느님에 의해 내가 부인당해 가는 과정 속에서 하느님에게 내 것을 빼앗기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하느님께 드려서 그것으로 보상을 받는 종류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입다가 전쟁을 하러 나가면서 하느님에게 엉터리 서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볼까요?

 

(판관11:29-32) 29 야훼의 영이 입다에게 내렸다. 그는 길르앗과 므나쎄 지역을 일주하고 길르앗 미스바에 있다가 다시 거기에서 암몬군의 배후로 돌았다. 30 거기에서 입다는 야훼께 서원하였다. '만일 하느님께서 저 암몬군을 제 손에 붙여 주신다면,31 암몬군을 쳐부수고 돌아 올 때 제 집 문에서 저를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을 야훼께 번제로 바쳐 올리겠습니다.' 32 그리고 나서 입다는 암몬 진지로 쳐들어 갔다. 야훼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붙여 주셨으므로

 

그렇지요? 입다는 제사를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원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입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서원을 한 시점이 야훼의 이 입다에게 임한 뒤라는 것입니다. 야훼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여 입다가 성령 충만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입다가 엉터리 서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꼭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어떤 존재가 대단하게 훌륭한 삶을 보여줄 때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처음 자리를 폭로하시며 그러한 추악한 자를 덮으시는 하느님의 은혜가 밝히 드러나게 될 때 그것을 성령 충만의 상태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는 일이 뭡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창세전 언약의 성취에 대한 교훈을 다시 떠오르게 하시고, 죄와 審判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가르치시는 역할로 성령이 오신 거잖아요? 따라서 역사 속에서의 성령 충만은 하느님께서 인생과 역사에게 행하신 일을 오롯하게 드러내는 일에 동원이 되는 피조물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로 가서 다시 한 번 역사의 존재목적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신명8:1-3) 1 너희는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계명을 성심껏 지켜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행복하게 살며 번성할 것이고 야훼께서 너희의 선조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 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2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 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3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찌기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보세요. 이 광야 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하느님의 말을 안 듣는 쓰레기인가를 폭로 당하는 자폭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세상의 힘이나 인간의 노력, 즉 세상의 빵으로 살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이끌려 가며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 성도가 이 인생을 사는 이유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입다가 어떻게 주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고 자신을 부인 당하는지 보세요. 입다는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목적을 가지고 서원이라는 것을 방법으로 사용합니다.

자신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게만 해주시면 자신을 제일 먼저 맞이하러 나오는 자를 번제로 잡아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누가 입다를 맞으러 나올지 모르셨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럼에도 하느님은 입다의 서원을 묵인하십니다. 아니 어쩌면 하느님께서 입다의 무남독녀 외동딸을 입다의 개선 행렬 맞이에 제일 먼저 내보내셨을 지도 모릅니다. 왜요? 하느님의 교회에게 구원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요.

그러니까 입다의 딸은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아버지 입다의 죄 때문에 잡혀 죽도록 역할을 부여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원이 하느님께서 시작하시고 완료하신 일이 너무나 경이롭고 감사해서 그분께 를 드리는 행위를 서원이라 한다고 했지요? 그게 화목제이니까요.

만일 입다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하느님의 행하심이 경이로워서 하느님께 서원을 한 것이라면 누가 번제물이 되던, 그것이 하느님께 드려지는 것이므로 수긍하고 인정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게 하느님 중심의 서원 자의 태도니까요. 그런데 입다는 자기 딸이 번제물이 되자 옷을 찢고 통곡을 합니다.

 

(판관11:35) 35 입다는 자기 딸이 나오는 것을 보고 옷을 찢으며 외쳤다. '아이고, 이 자식아, 네가 내 가슴에 칼을 꽂는구나. 내가 입을 열어 야훼께 한 말이 있는데, 천하 없어도 그 말은 돌이킬 수 없는데 이를 어쩐단 말이냐!'

 

이게 뭡니까? 이게 하느님의 행하신 일에 자기 자신을 드리는 서원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입니까? 입다는 자기에게 별로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을 하느님 앞에 내어 놓고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어낼 요량으로 서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하느님께 바쳐지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옷까지 찢으면서 애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해서 입다는 서원을 통하여 자기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희생하여 큰 것을 얻어내려 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으로 기뻐하고, 하느님으로 감사한 서원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세상적 유익에 탐닉했던 사람입니다. 그게 세상에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 아닙니까?

그러니까 입다는 처음부터 뭐가 잘나서 판관으로 선택이 된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죄 성을 대표적으로 담고 있는, 이스라엘의 대표가 되어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 살아나야 하는 죄인들의 실존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요 지팡이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구원 받고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지요? 아무 죄도 없는 순결한 이가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예요.

오늘 본문에서 무죄한 입다의 딸이 왕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이스라엘의 대표인 아버지 입다에게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판관11:36) 36 그러자 딸이 아뢰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를 두고 야훼께 하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그대로 하십시오. 야훼께서 아버지의 적수인 암몬 사람들에게 복수해 주셨는데, 저야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자신은 죽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훼와의 언약에 의해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언약에 의해 죽기로 결정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누구시지요? 예수님입니다. 입다의 딸은 지금 아버지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살려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베전2:22~24) 22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 말씀에도 아무런 거짓이 없었습니다. 23 그분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24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입다의 딸이 처녀였다는 것을 반복해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판관11:37-39) 37 그리고서 딸은 한 가지만 허락해 달라고 하며 아버지에게 청을 드렸다. '두 달만 저에게 말미를 주십시오. 그러면 벗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 가 돌아 다니며 처녀로 죽는 몸, 실컷 울어 한이나 풀겠습니다.' 38 입다는 두 달 말미를 주어 딸을 떠나 보냈다. 두 달 동안 딸은 벗들과 함께 산에 들어 가 처녀로 죽는 것을 한하여 실컷 울었다. 39 두 달이 지나 아버지에게 돌아 오자 아버지는 딸을 서원한 대로 하였다. 그 딸은 남자를 안 일이 없었다. 이로부터 이스라엘엔 한 가지 관습이 생겼다.

 

입다와 이스라엘은 창녀의 자손임이 확증이 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와는 정 반대로 남자조차 알지 못하는 숫처녀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창녀의 자손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는 것입니다.

38절을 보면 아버지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야 하는 입다의 딸이 산 위에서 애곡을 했다고 하지요? 그러한 대신 죽는 자의 눈물을 어디에서 보셨지요? 나자로의 무덤 앞에서 주님이 애곡하셨던 것을 기억하세요?

 

(요한11:29~35) 29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달려 갔다. 30 예수께서는 아직 동네에 들어 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마중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던 것이다. 31 집에서 마리아를 위로해 주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가 곡하러 무덤에 나가는 줄 알고 뒤따라 나갔다. 32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에 찾아 가 뵙고 그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 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34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이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마리아도 그렇고 마르다도 그렇고 공히 오빠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의 하소연을 합니다. 그들은 예수도 믿는다고 하고 부활도 믿는다고 하는데 여전히 관심의 초점이 인간의 육적 자아와 이 세상에 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죽음에 떨어지는 죄라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정작 죽어 있는 것은 무덤 속의 나자로가 아니라 바로 살았다고 자처하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그들을 쫓아온 유대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어 있는 그들을 살려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시고 나자로와 함께 무덤 속에 있던 그들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입다의 딸의 애곡이 바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애곡과 닮아 있지 않습니까? 결국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는 아버지의 손에 죽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그렇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입다의 딸이 스스로 죽겠다고 자원을 한 것은 입다의 서원대로 암몬과의 전쟁의 주체가 하느님이셨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입다가 서원을 하기를 하느님께서 전쟁에 이기게 해주시면이라고 서원의 조건을 달았잖아요? 그런데 입다의 딸이 그 서원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그 전쟁의 승리가 하느님의 것이었다는 것이 입증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입다의 딸만이 그 전쟁의 승리가 하느님의 열심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죽어 이스라엘의 승리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장이 어떻게 끝이 납니까?

 

(판관11:39-40) 39 두 달이 지나 아버지에게 돌아 오자 아버지는 딸을 서원한 대로 하였다. 그 딸은 남자를 안 일이 없었다. 이로부터 이스라엘엔 한 가지 관습이 생겼다. 40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생각하고 이스라엘 처녀들은 해마다 집을 떠나 나흘 동안을 애곡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다의 딸을 기리며 해마다 애곡을 하더라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니까 이 입다의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입다와 입다가 대표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 입다의 딸, 즉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나는 창녀의 아들 입다, 순결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살아나는 창기 이스라엘. 그것이 바로 입다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교회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입다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대적 암몬을 쳐부수고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가 어떻게 마무리가 됩니까? 결국 입다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죽는 것으로, 다시 말해 육적 입다가 망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승리입니다.

보세요. 판관기가 너무 일관성이 있지 않아요? 판관기는 이렇게 자신들이 왕이 되고 싶어서 하늘 왕을 왕 대접하지 않는 타락한 죄인들의 하느님처럼의 추구를 박살을 내 버리심으로 그들을 죽음에서 건지시는 하느님의 왕 노릇에 관한 기록인 것입니다.

그 도구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판관으로 모형 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에게 들려 쓰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판관기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 작전에 말려든 사람들은 반드시 세상 힘을 빼앗기고 차단당하고 해체 당하는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가난하게 되고, 다 건강을 잃게 되고, 다 망하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는 분들 중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의 힘을 많이 가진 것처럼 보이는 분들이 계시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렇다면 그러한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셨지요? 그런데 그 만나를 왜 주셨습니까? 사람이 빵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만나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역사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서 빨리 그 주인공의 자리에서 내려오세요. 그러면 절망과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내려오려 노력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세요. 그러니 그러한 때에 당황하거나 놀라지 마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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