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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1주일] 영원한 생명의 말씀 (요한6,60ㄴ-6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21 조회수3,47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8월 22일 주일

[연중 제21주일] 영원한 생명의 말씀 (요한6,60-69)

 

 

1독서<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여호24,1-2.15-17.18ㄴㄷ)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16 그러자 백성이 대답하였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17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우리 눈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18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화답송 시편 34(33),2-3.16-17.18-19.20-21.22-23(◎ 9)

◎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굽어보시고그분의 귀는 그 부르짖음 들으신다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그의 뼈를 고스란히 지켜 주시니뼈마디 하나도 꺾이지 않으리라

○ 악인은 악행으로 죽음을 맞고의인을 미워하는 자 죗값을 받으리라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2독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이는 큰 신비입니다.> (에페5,21-32)

형제 여러분, 21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22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3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5 남편 여러분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7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8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9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30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31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둘이 한 몸이 됩니다.”

32 이는 큰 신비입니다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복음<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0-69)

60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 (여호수아24,1-2ㄱ.15-17.18ㄴㄷ)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섰다." (1)

 

'스켐으로'에 해당하는 '셰케마'(shekema ;shechem)는 지명인 '스켐'(shekem)과 '~을 향하여'라는 의미를 가진 목적격 접미어 '아'(a)가 결합된 형태로, 직역하면 '스켐을 향하여' 라는 뜻이다.

 

'스켐'은 예루살렘 북쪽 50km, 사마리아로부터는 남동쪽 9km지점의 에발산과 그리짐산 사이에 있는 성읍으로서, 므나쎄 지파와 에프라임 지파의 경계에 위치하였다.(17,7 ; 20,7)

 

여호수아가 이곳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부른 이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주님만 섬기겠다는(24,14.23.24) 계약의 갱신을 하게 하기 위해서였다.(25절)

 

요르단강을 건넌 후, 온 이스라엘을 모아 놓고, 모세가 명한 대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봉독한 적이 있었던 유서깊은 이곳에서(8장 33절, 34절) 여호수아는 다시 한번 계약 준수를 다짐하는 의식을 갖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편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스켐은 아브라함이 팔레스티나로 이주해 온 뒤에 천막을 친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이며(창세12,6), 야곱이 천막을 친 곳이기도 하다.(창세33,18 ;35,1-4)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섰다'로 번역된 '와이테얏체부 리프네 하엘로힘'(waitheyatsebu liphne haellohim)에서, '그들이 ~나와섰다' 라고 수동적으로 번역된 '와이테얏체부'(waitheyatsebu)는, 계속적 '와우'(wau)와 '서다', '출두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야차브'(yatsab)의 재귀형 '이테얏체부'(ytheyatsebu)가 결합된 형태이므로, 본문을 번역하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 하느님 앞에 나왔다' (They presented themselves before God)이다

 

특히 본문에서 '야차브'(yatsab)가 복수형태로, '~앞에' 라는 의미를 가진 전치사 '리프네'(liphne)와 연결되어 사용될 경우에는, 특별한 권위자 앞에 부름받아 나아온 상태를 가리킨다.(여호8,20 ;9,13)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여러 지도자들이 하느님 앞에 부름을 받은 대로 출두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맡겨질 사명에 대하여 언제든지 성실하게 감당할 자세, 즉 신앙적인 각오나 결의가 갖추어졌다는 사실 암시해 준다.

 

한편, '하느님 앞'(리프네 하엘로힘 ; before God)이란 표현은,  하느님의 임재의 상징인 계약궤나 성막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여호4,13 ; 6,8 ; 탈출16,33 ; 29,26) 따라서 본문에서도 당시 하느님의 계약궤가 스켐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대표를 이곳으로 불러모았다고 보기도 한다.

 

가나안 정복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성막은 실로에 있었다.(여호18,1 ;1사무4,1-11) 필요에 따라 베텔같은 곳으로 옮겨진 적도 있었으므로(판관20,27) 당시에는 스켐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하느님 앞'이란 표현이 항상 계약궤와 성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신명4,10 ; 9,18)  이렇게 볼 때, 본문은 당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자신들이 서 있다는신앙을 가지고 나왔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15)

 

본문을 피상적으로 보면, '주님을 믿든, 다른 우상을 섬기든 상관않겠으니 너희 마음대로 하라' 한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선 절에서, 우상을 제하고 주님만을 섬기라고 강력하게 명령한 사실과 함께 생각할 때, 본문은 반어법적인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

 

그냥 주님만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우상을 섬기려면 섬겨라. 그러나 그 길은 죽음이다. 그래서 나와 내 집안은 하느님만 섬기겠다' 는 본문의 말은,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곧바로 주님만을 섬기겠다는 긍정적 응답을 이끌어 내었다.(18절, 19절)


 

  [연중 제21주일]

우리가 아닌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

(요한6,60-69)

60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 거북하다(스크레로스)- 용납하기(관용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예수님은(쉬운 말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며 당신의 ‘살과 피에 의해서만 참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 참 생명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자격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주님의 살과 피가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어져야 한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자들과 유대인들, 그리고 그곳에 모인 무리들은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보고 그분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도 기적을 일으켜서 자기들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속에서 온 힘을 다해 주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이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그러한 죽음을 통해 생명이 주어진다고 하니까,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용납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 주님은 당신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가고자하는 방향에 주님의 말씀이 제동장치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가고자하는 방향을 정해놓고 그 방향으로의 행진을 위해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님이 도와주시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이 진리라 했던 그 길에 태클을 걸고 들어오신 것이다.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 주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새 생명을 주시기에 속죄 제물로 오셨던(요한3,16) 주님께서 창조 이전에 이미 ‘있었던 곳’ 하늘에 존재하셨던 ‘참 그리스도’ 이심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63 영은 생명을 준다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 예수님의 살, 몸, 피에 관한 모든 말씀이 하늘의 생명을 주는 영이었다는 것이다. 육에 속한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생명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부어짐‘으로만 생명은 살아나게 되는 것으로 참 생명은 영에 속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1코린15,45) 45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 생명을 주는 영-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이 씀을 믿기만 하면, 그 말씀에 의해 그들에게 생명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이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 안에서 제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밖에서부터 주어지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 믿지 않는 자들(복수), 팔아 넘길자(단수)로 유다를 뜻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유다는 믿지 않아 끝내 돌아오지 않은 모든 이들의 대표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 새 생명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새 창조의 존재 양식인데(로마8,1-3참조) 죄인이 그 새 창조의 존재 양식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살리시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은혜를 입어야 하는 그 진리의 복음은(요한14,6참조) 하느님께서 創世前 택한 당신의 백성들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에페14참조) 그들을 부르신 것이다.

 

(로마8,29-30)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 ‘십자가의 대속을 구원의 진리로 믿어 거저 의롭게 되었다’ 이 말씀을 믿고 간직하여 받는 구원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 옛 시대의 존재양식, 곧 구약(제사와 윤리)에 의거하여 자신의 생명(힘)을 취하려는 이들은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이었기에 떠나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 이렇게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왜 주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을 했을까?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실망하여 고기 잡으러 낙향(落鄕)을 했을까? 사실 베드로의 모든 고백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던 것이다.

 

(마태16,16-17)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베드로의 그러한 기특한 고백들은 무엇에 대한 증거이겠는가. 불가능한 베드로를 이끌고 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의 현존(現存)인 것이다. 따라서 많은 제자들이 떠나고 베드로가 주님곁에 남아 있었던 것은 베드로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이끄심 이었던 것이다.

 

(시편139,7-10) 7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8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9 제가 새벽놀의 날개를 달아 바다 맨 끝에 자리 잡는다 해도 10 거기에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잡으십니다.

= 다윗이 하느님을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쫓아가신 것이다. 그렇듯이 지금 베드로를 붙들고 있는 것은 오히려 주님인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기특한 고백을 한 후에도 여전히 육의 욕망에 세상에 힘을 쫓고 세상의 권세(權勢)앞에 벌벌 떨었던, 그러나 그런 그를 주님께서 붙들고 놓지 않으심으로 그가 위대한 使徒로 生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듯이 성도(聖徒, 하느님 백성)는 일단 하느님의 손에 붙들리면 그가 가는 것마다 하느님께서 쫓아다니시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갈 수가 없다. 당신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집요함은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은총이신 성령님! 생명의 말씀으로 주님께서 저희를 붙들고 계심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아멘.

묵상에 도움 주신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살롬.




 

 연중 제21주일 복음(요한6,60~69)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63)

 

여기서 '육'에 해당하는 '사륵스'(sarks; flesh)는 기본적으로 '살'이라는 뜻이며, 육체 및 혈육을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데 종종 쓰인다.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하여 하느님을 찾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인간, 그리스도를 보고서도 지각하지 못하는 어둠에 속한 자들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육'은 언제든지 죄에 굴복하므로, 육체가 있는 곳에 언제나 죄가 있다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기본 입장이었다.

 

'영'이 생명을 주는 것과 대조적으로 '육'(사륵스)은 영적인 측면에서 아무 유익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쓸모가 있다', '유익하다', '돕다', '소용이 되다'에 해당하는 '오펠레이'(ophelei; profits; counts for)는 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인데, 여기처럼 사물에 대해 쓰일 때에는 '그것은 가치가 있다'(it is of value; it is of avail)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께서는 '오펠레이'(ophelei)를 부정하기 위해 '우크~우덴'(ouk~ouden)이라는 이중 부정을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여 '육'이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됨을 강조하시고 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육체가 원하는 것을 좇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성경은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며(로마8,6),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른 결과가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경고한다(에페2,3).

 

즉 '육'(사륵스)이 이끄는 데로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육'의 무익함을 죄로 기울여지는 성향을 가진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게서는 인생을 무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가치를 소홀하게 여기는 육적 가치에 치우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이 매우 특별한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말은'으로 번역된 '레마타'(remata; words)는 '레마'(rema)의 주격 복수로 '말하여진 것들', '예언들', '명령들'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말씀들'이다.

 

'레마'(rema)는 기본적으로 '분명하게 말하여진 어떤 것', 즉 진술이나 성명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한'에 해당하는 '에고 렐랄레카'(ego lelaleka; I have spoken)는 말하는 주체를 나타내는 1인칭 대명사 '에고'(ego)를 사용하여 말하는 주체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렐랄레카'(lelaleka)는 '랄레오'(laleo)의 완료 시제로서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 혹은 주장하신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내가 이미 설교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신 그 말씀들이 '영이며 생명'이라고 단언하신다.

 

당신 자신의 말씀 속에 생명의 영과 생명의 능력이 존재함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은 본성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말씀과 성품이 죄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생명이며 오직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만 할 수 있는 말씀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라는 성경의 증거는 그 말씀이 지닌 능력이 어떠한지를 잘 드러낸다.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레미타'(remata)가 있는 곳에서는 새 생명의 역사와 영적 갱신이 일어나는 것이다.

 

요한 복음 6장 68절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에서도 '말씀'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레마타'(remata)가 사용된 것을 볼 때, 이것은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며,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심을 이해하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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