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24 조회수3,495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짧은 분량의 복음에서 드라마틱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복음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필립보 사도가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시켜줍니다. 근데 그 예수님이 이미 율법에 기록되어 있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인데 바로 그분이 지금 나자렛 마을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실제 만약 그렇다면 당연히 좋은 일일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상황을 지금 현실에 대입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면 이런 상황이 될 것입니다. 옆집에 아는 지인이 와서 옆 동네에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계시니 한번 가보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필립보 사도의 권고에 처음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고 하고 회의적인 생각도 했을 겁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타나엘은 요즘으로 말하면 율법과 성경을 연구하면서 열심한 신앙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신약성서 주해서에서 이와 관련된 참조 사항을 참조하면 그렇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메시야에 대한 근거와 기록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근데 그런 분이 나자렛 같은 조그마한 시골에서 나오셔서 계실 거란 말에는 당연히 회의적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필립보 사도가 이미 율법에 기록되어 있다고 전제하며 말을 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우리가 필립보 사도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나자렛 같은 마을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며 약간 빈정대는 말을 한다면 기가 한풀 꺾였을 겁니다. 하지만 필립보 사도는 달랐습니다. “와서 보시오.”하면서 다시 한 번 더 강권합니다. 복음에서는 바로 바르톨로메오가 예수님을 향해서 가는 것으로 나옵니다. 복음이니 그럴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마음을 돌렸는지 예수님께 가게 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을 향해 오는 바르톨로메오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바르톨로메오를 향해서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십니다.

 

지금 바르톨로메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구면이 아니고 초면인 상황입니다. 초면인 상황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조금은 의아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저를 어떻게 아신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하고 여쭈었을 것입니다. 이미 필립보 사도가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셨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설령 그렇다고 하신다고 해도 어째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셨다는 사실만으로 바르톨로메오를 잘 안다고 추정할 수 있을까요?

 

율법학자들이 흔히 올리브 나무나 무화가 나무 아래에 앉아 율법서를 공부한 데서 연유된 랍비들의 은유적인 표현(200 주년 신약성서 주석서, 446 참조)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나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며 메시아가 도래할 것에 대해 이미 고대하고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연구하고 한다고 해서 거짓이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 것은 어쩌면 약간은 논리의 비약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왜 그렇게 하셨을까를 한번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오늘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에 바오로 신부님의 해설에도 나오지만 이미 무화과나무에서 공부도 하고 기도도 하는 그런 사람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작은 칭찬이라고 하면 칭찬에 그만 바르톨로메오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고백에서 유추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바르톨로메오가 율법과 예언을 공부하면서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음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단순히 고대한 정도가 아니고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물론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회의적인 생각이었지만 직접 예수님과 대면을 한 상황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연출될 것을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높습니다. 바로 바르톨로메오의 고백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르톨로메오가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공부하고 했던 것을 단순히 공부를 해서 안다고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게 바탕이 돼서 이심전심으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예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단순히 지금 네가 보는 것 이상을 앞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계시해 주십니다. 이게 오늘 전체 복음의 전체 스토리입니다.

 

큰 테두리에서 보면 평소에 기대하고 했던 예수님을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에서 출현하셨고 그에 대해 반신반의했는데 결국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여러 가지 묵상거리가 있지만 저는 오늘 여기서 가장 주목해서 묵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오늘 복음 내용만으로만 본다면 사실 바르톨로메오가 단순히 예수님의 그 한 말씀만을 듣고서 고백을 하였다는 사실만을 놓고 봤을 때 조금은 비약한 면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충분히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역으로 다른 관점으로 접근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기존에 자기가 가진 지식만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봤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개방적인 태도와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에 아마도 가능했을 겁니다. 물론 이런 사실도 중요하지만 설령 이렇다고 해도 예수님과 이심전심으로 서로 뭔가 통한 것도 한몫 했을 겁니다. 이런 사실의 근저에는 예수님께서 바르톨로메오에게 하신 말씀에 중요한 대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내가 보았다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단순히 보는 의미가 아니고 지켜보고 계셨다는 의미로써의 보고 계셨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단순히 봐서 어떻게 바로톨로메오의 성향을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것에는 애정과 관심으로 보셨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겁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예수님의 그런 마음을 읽었으리라고 추측해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을 바로 즉석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게 되었지 않았을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바르톨로메오를 향해 그렇게 지켜보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향해서 지켜보고 계신다고 해도 우리가 바르톨로메오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면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바르톨로메오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말씀공부와 함께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았기에 그게 가능했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