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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와서 보시오.” (요한1,45-5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24 조회수4,05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8월 24일 화요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와서 보시오.” (요한1,45-51)

 

 

1독서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묵시21,9-14)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리 오너라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10 이어서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3 동쪽에 성문이 셋북쪽에 성문이 셋남쪽에 성문이 셋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화답송 시편 145(144),10-11.12-13ㄱㄴ.17-18(◎ 12 참조)

◎ 주님성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알리나이다.

○ 주님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복음<보라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요한1,45-51)

그때에 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제1독서 (묵시21,9ㄴ-14)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11)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2)

 

묵시록 21장 11절부터 14절까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도성의 아름다운 모습과 열두 성문과 열두 초석에 대하여 묘사한다.  특히 묵시록 21장 11절은 새 예루살렘의 시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아름답게 표현한다.

 

'있었습니다'로 번역된 '에쿠산'(echusan; having)은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의 현재분사로 묵시록 21장 10절에 언급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관련된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영광'으로 번역된 '텐 독산'(ten doksan; the glory) '에쿠산'(echusan)의 목적어인데, 이것의 원형 '호 독사'(ho doksa)는 '하느님의 거룩한 임재' 곧 '셰키나'(shekinah)를 뜻한다.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에제43,5).

새 성경에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에는 '하느님의 영광'에 해당하는 '텐 독산 투 테우'(ten doksan tu theu) 다음에 바로 '광채'로 번역된 '호 포스테르'(ho poster)가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광채는 하느님의 영광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양자가 동격 관계임을 암시한다(이사60,1.2.19).

 

한편 '광채'에 해당하는 '포스테르'(poster)는 신약 성경에서 73회 사용되어 빛 자체를 나타내는 '포스'(pos)와는 달리외부의 빛을 투영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 성경에서 2회(필리2,15; 묵시21,11) 밖에 쓰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스스로 광채를 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 광채를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이 투사하는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과 '수정처럼 맑은 벽옥'이 발하는 광채(빛) 두 가지로 비유되고 있다.

 

'크고 높은 성벽이 있었습니다'

'있었습니다'로 번역된 '에쿠사'(echusa)는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의 현재분사로 묵시록 21장 10절에 언급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관련됨을 보여준다. 즉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을(묵시21,11)뿐만 아니라 크고 높은 성벽도 가지고 있다.


'성벽'으로 번역된 '테이코스'(teichos)는 '성곽'을 지칭하는데, 이와 같이 '크고 높은 성벽' 묵시록 21장 13-20절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된다.

그런데 성벽을 수식하는 '크고 높은'(mega kai hypsellon; 메가 카이 휩셀론; great and high)이라는 형용사는 묵시록 21장 10절에서 사도 요한이 성령의 압도적인 감동 속에서 올라갔었던 '산'을 묘사하는 데 적용되었던 바로 그 표현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문자적으로 '크고 높다'는 것을 의미하겠지만, 하느님의 천주성(神性)과 관련된 묵시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규모 묵시록 21장 16절과 17절에 묘사되고 있지만, 본문에 언급된 '크고 높은 성벽'은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얼마나 견고한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크고 높은 성벽'은 새 도성 예루살렘이 완전하고, 완결(완성)되어졌으며, 안전하고 웅장하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위험이나 불안, 위협이나 침략, 부정하고 불순한 세력들에 의해 노출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미 악은 두 번째 죽음 곧 불못에 던져졌다(묵시19,20; 20,10; 20,14-15).

이것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연상시킨다. "다시는 너의 땅 안에서 폭력이라는 말이, 너의 영토 안에서  파멸과 파괴라는 말이 들리지 않으리라.  너는 너의 성벽을 '구원'이라, 너의 성문을 '찬미'라 부르리라." (이사60,18)

 

'열두 성문이 ~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열두 지파 이름이'  (12)

'있는데'로 번역된 '에쿠사'(echusa)는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의 현재분사로 전체적으로는 묵시록 21장 10절에 언급된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연결되지만, 문맥상으로는 앞서 언급된 '성벽'(teichos; 테이코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성벽은 '열두 성문' (퓔로나스 도데카; pyllonas dodeka)을 가지고 있다. 


묵시록 21장 13절은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의 이 열두 성문이 균형적으로 분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땅의 임금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이 문을 통해 들어오며(묵시21,24), 그것은 항상 닫히지 않고 열려져 있다(묵시21,25). 따라서 이 성문 역시 성벽과 같이 단순히 외적의 방어와 적대 세력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고안되고 제작된 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성문에는 열두 천사('앙겔루스 도데카'; anggellus dodeka)가 있다. 이 천사들은 열두 성문 각각을 지키고 있는 하느님의 천사이다. 

"예루살렘아, 너의 성벽 위에 내가 파수꾼을 세웠다.  그들은 낮이고 밤이고 잠시도 잠잠하지 않으리라.  주님의 기억을 일깨우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마라. "  (이사62,6)

 

이들은 악한 세력들과 싸우기 위해 성문을 지키는 천사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든 이들이 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다. 거기에는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묵시21,27참조).  이와 같은 점은 그 성문 들위에 적힌 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도데카 필론'; dodeka pyllon)의 이름이라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언급된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의 의미는 이미 묵시록 7장 5-8절에서 언급된 것과 깊이 관련된다. 즉 각 지파에 속하는 일만 이천 명씩 도합 십사만 사천 명 곧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묵시7,9)만이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문'과 '천사'와 '지파'가 각각 '열둘'인 것은 명백히 이 도성 예루살렘이 승리한 하느님의 백성들만을 위한 도시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주목할 것은 이러한 사도 요한의 묘사가 에제키엘 예언자의 환시와 밀접하게 병행된다는 점이다(에제48,30-34). 에제키엘 예언자는 종말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각자의 땅을 분배할 때 자신들에게 할당된 충분한 상속 재산(기업)을 취하며회복된 도성 예루살렘으로 출입할 수 있는 각 지파 소유의 대문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은 종말에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하느님의 임재와 현존 가운데 들어갈 동등한 권리와 축복을 누릴 것이라는 원대한 비전인 것이다.

 

사도 요한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이러한 종말론적 비전을, 자신이 본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도래의 환시가 내포하고 있는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자유롭게 끌어 들인다. 이로써 사도 요한은 하느님과 그의 모든 백성들이 영광스럽고 놀라운 완전한 종말론적 친교와 일치 가운데 들어갈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8월 24일 월요일 [성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사도 축일]

 

(요한1,45-51)

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나타나셔서 나자렛에서 사셨다.

 

(미카5,1) 1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그의 뿌리는 옛날로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은 나타나엘이 열심한 율법학자인 것이고당시 모든 율법학자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에서 해방시켜줄 육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그것은 사람의 영을 해방시켜주실 하느님의 뜻을 거짓되게 하는 것으로나타나엘은 그 거짓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영적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스승님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어제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가 빠졌다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은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영께서 알려 주셔야 깨닫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오르는 사다리라는 말씀 이신 것이다그 사다리는 나무곧 십자 나무를 뜻한다.


(마태27,50-52) 50 예수님께서(십자가에서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51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성전하늘이 열렸다는 것그리고 죽은이들이 살아나 하늘로 들어간다.


참조~

(에페1,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2코린5,21)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1베드1,18-19) 18 여러분도 알다시피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1코린6,20) 20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그분의 사랑 곧 십자가의 대속 그 구원의 사랑이 참 진리임을 믿고 기쁨과 감사의 찬송으로 높여 드리는 것이다.


(에페1,6)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아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복음(요한1,45~51)

 

베델에서 꿈꾸는 야곱과 층계(사다리); 창세기 28장 12절;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7ㄷ)~~~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48ㄴ)

 

'거짓이 없다'로 번역된 '돌로스'(dolos; deceit; false)는 '미끼', '올무', '속임', '간교함', '교활함', '거짓됨' 등을 뜻한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며(마르7,22), 사탄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고(마태26,4), 하느님께서 죽어 마땅하다고 경고하신 죄의 목록 중에 포함된 것인데(로마1,29), 나타나엘의 마음 속에는 대개의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이것이 없다는 게 그의 훌륭한 인품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이다.

 

특히 '없다'로 번역된 '우크 에스틴'(ouk estin; is nothing)이라는 현재 시제는 사실은 그가 계속적으로 온전한 마음을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요한 복음 1장 4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 포도나무 아래에 있다, 올리브나무 아래에 있다'라고 하면, 그것은 묵상기도 중에 있다, 명상 중에 있다는 말로 알아듣는다.

우리들은 이런 성경 말씀에 대한 전지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이길래 나타나엘이 놀라운 반응을 나타내면서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 라는 신앙 고백을 할까? 하고 의아해한다.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기도를 하고 있을 때 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타나엘의 놀라움과 신앙고백의 반응은 자신의 영혼의 속,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기도 내용을 알아차리시고 다 알고 계시는 분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 밖에 더 계시는가?

바로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메시아이시다라는 말이다.

 

'무화과나무'에 해당하는 '쉬케'(syke; fig tree) 이스라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종이며, 유다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나타난다.

더욱이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그늘이 짙어서, 그 무성한 가지 아래 앉아 율법을 배우고 기도와 묵상을 하는 것은 경건한 유다인들의 오래된 관습이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지적은 그가 메시야 오심을 희망하면서 경건한 생활에 힘써 왔다는 것을 알게 한다.

특히 '있는 것을'로 번역된 '온타'(onta; when you were)는 현재 분사 시제로 그가 계속해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이 일을 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이같이 하는 모습을 '보았다'라고 했는데, '보았다'에 해당하는 '에이돈'(eidon; I saw)은 시각으로 감지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카나 출신 나타나엘이 경건하게 묵상에 잠긴 모습을 신적(神的) 전지(全知)로 이미 보셨던 것이다.

아마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약속된 메시야가 과연 오셨는가?

 

도대체 세례자 요한은 누구이며, 예수라는 분은 누구신지를 아버지 하느님께 물으면서 묵상하고 있었을거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천주 성자 이신데, 같은 하느님으로서 성부 하느님 사이에 천사가 왜 필요하겠는가?

이것은 육신을 취하신 예수님의 현재 위치이신 이 세상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은 초월적인 영적인 차원에 계시는 성부 하느님 사이의 간극을 의미하는 말이다.

 

동시에 성령의 도구인 천사들이 성자 하느님과 성부 하느님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은 여기 나타나엘의 묵상기도를 포함해서 지상에서의 모든 기도가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 하느님께 봉헌되며, 성부 하느님으로부터의 기도의 응답도 반드시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다는 명명백백한 진리를 계시하시는 내용이다.

 

또한 성령의 도구인 천사가 날개가 있다면 단번에 성부 하느님께 오를텐데,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은 우리도 완덕의 근원이시고 모범이신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길이 step by step 한 단계 한 단계씩 서서히 이루어진다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시는 완덕과 성덕에의 진보도, 은총과 은사를 받아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선익을 위해 봉사하는 일도 서서히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너무 욕심을 내거나 예수님을 앞서 가거나 서둘러서는 안되고, 한 단계 한 단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밟아 가야 한다는 사실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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