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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 (마태25,1-1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27 조회수3,68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8월 27일 금요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 (마태25,1-13)

 

 

1독서<하느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테살4,1-8)

형제 여러분우리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주 예수님의 권위로 여러분에게 지시해 준 것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곧 여러분이 불륜을 멀리하고, 4 저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로 형제에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그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우리가 전에 말하고 또 엄숙히 경고한 바와 같이주님은 이 모든 일에 보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 97(96),1과 2.5-6.10.11-12(◎ 12)

◎ 의인들아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 주님은 임금이시다땅은 즐거워하고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아악을 미워하여라그분은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목숨을 지키시고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해 주신다

○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의인들아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복음<신랑이 온다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25,1-1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주인님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는기념일 독서(집회 26,1-4.13-16)와 복음(루카 7,11-17)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제1독서 (1테살4,1~8)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7~8)


테살로니카 전서 4장 7절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로 문장이 시작된다.

이 '가르'(gar; for)는 테살로니카 1서 4장 3~6절 전체에 대한 이유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음란(불륜)과 같은 성적 범죄에 자신을 방임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그 뜻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불러내신 자들이다.

 

여기서 '부르셨기'에 해당하는 '에칼레센'(ekallesen)은 '부르다'(call)라는 의미를 지닌 '칼레오'(kalleo)의 부정(不定) 과거 능동태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과거에 능동적으로 부르셨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성적 음란과 여러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부터 특별히 몇몇을 구별하여 불러내셨다는 의미를 뜻한다.

 

이러한 부르심은 죄와 죽음에서 의로움과 생명에로의 부르심이요, 희망없는 삶에서 영원한 산 희망의 삶에로의 부르심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원하신 뜻에 따라 세상에서 불러낸 자들의 모임이 바로 '엑클레시아'(ekkllesia)이다.

 

'엑클레시아'는 교회로 번역되지만, '밖으로'란 의미의 전치사 '에크'(ek)와 '부르다', '호출하다'란 의미의 동사 '칼레오'(kalle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밖으로 불러낸 자들의 모임' 이란 의미가 있다.

즉 교회는 세상의 '더러움'(부정;不淨)을 떠나 새로운 거룩함의 세계로 들어온 성도들의 모임인 것이다.

 

테살로니카 1서 4장 7절에는 전치사가 두 개 쓰였는데, '더러움' 앞에 쓰인 '에피'(epi)와 '거룩' 앞에 쓰인 '엔'(en)이 그것이다.

전자는 '~의 기초 위에서' 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의 상태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이런 의미와 더불어 전치사 '에피'(epi)는 목적의 의미를 나타내며 (갈라5,13; 에페2,10), 전치사 '엔'(en)은 궁극적 지향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더러움'으로 번역된 '아카타르시아'(akatharsia; uncleanness; impure)는 성적 더러움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느님 대전에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부정을 가리킨다.

 

또한 '거룩'으로 번역된 '하기아스모'(hagiasmo; holiness)도 성적인 거룩한 순결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종류의 도덕적 거룩한 순결로서의 거룩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간택한 자들을 불러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구별시킴으로써 모든 악에서 떠나게 하시며, 모든 면에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나아가 그러한 거룩의 상태 안에 항상 머물러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는~~~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로 번역된 '토이가룬'(toigarun; therefore)은 특별한 강조로서의  결론을 도입하는 불변사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느님의 구체적인 뜻으로서 '성적 순결'에 대해 권면하는 테살로니카 1서 4장 3~8절 전체를 결론짓는 문장이다.

 

여기서 '무시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아테톤'(atheton)의 원형 '아테테오'(atheteo)는 원래 어떤 법규정이나 계약 등의 효력을 폐지하고 무효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갈라3,15; 히브10,28).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거부(거절)하다', '무시하다'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마르7,9; 루카7,30; 10,16; 1티모5,12).  여기서도 후자의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무시하는 데 무엇을 무시한다는 것인지, 원문에는 '호 아테톤'(ho atheton)의 목적어가 없다.

한글 새 성경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영어 성경은 '이 교훈을 저버리는 자' (he who rejects this instruction)로 '호 아테톤'을 번역했다.

 

말하자면, 성적인 더러움을 버리고 거룩한 순결을 포함한 모든 거룩함을 따라 살라는 이 교훈을 무시하는 자는 단순히 이것을 가르치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무시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는 지금 이 교훈을 개인적 소견이나 권위에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부터 받은 것을 그분의 권유를 힘입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도 바오로가 당시에 이렇게 말하는 배경에는 영지주의자들이 테살로니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서, 성 윤리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금욕적 교훈들을 잊어버리도록 유혹하고 희석시켰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성 윤리에 대해 보다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하느님의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유혹했기에,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엄격한 교훈이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의도에서 테살로니카 1서 4장 8절을 기록하였다.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

 

사도 바오로는 무시의  궁극적 대상인 '하느님'을 수식하는 문구, 즉 '여러분에게 (그의) 성령을 주시는'이라는 문구를 덧붙인다.

여기서 '주시는'으로 번역된 '디돈타'(didonta)는 '주다'라는 뜻을 지닌 '디도미'(didomi)의 현재 분사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지속적으로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사도 바오로는 이런 표현을 통해, 성적 순결을 가르치는 사도 바오로의 이 교훈 (1테살4,3~8)을 경시하며 성적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는 자들은 곧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을 무시하고 훼방하는 자들이며, 그분의 성령을 통해 거룩한 정결의 삶에로 부르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자라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2017년 9월 1일 가해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연중 제21주간 목금요일

 

신랑이 온다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마태25,1-13)

1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교회를 통해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려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름은 하느님성령을 뜻하며 등은 교화를 뜻한다.(묵시1,20참조)

곧 교회를 다니지만 성령을 간직하지 못한 신자들이다그리고 그 성령에 의한 깨달음이 아닌 행위의 신앙을 산 그 어리석은 신자들인 것이다.

기름을 선행으로 말씀들 하시는데인간의 선행이 아니다인간의 선행은 구원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이사64,5 로마10,3참조그리고 선행이란 선하신 하느님의 계명인 죄인들(쓴물)의 구원을 위한 십자나무의 희생그 하느님의 법(탈출15,20), 곧 예수그리스도의 대속그 죽음그 선행(의로움)을 구원의 법진리로 깨닫고 믿고 의탁하는 삶인 것이다그리고 그 예수님의 대속을 이웃에게 구원의 진리로 전해주어 구원을 받도록 하는 그것이 슬기로운 선행이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름이 깨달음인 것은~,

(요한12,7)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그리하여 내 장례(죽음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예수님의 죽음그 대속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아 구원 받을 수 있음을 깨닫는 그 믿음의 고백이 기름을 간직함인 것이다그 깨달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요한14,26)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졸다잠들다그 표현은 육(죽음)의 상태를 의미 하는 것이다모든 인간은 육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예복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쫓겨난다는 것이다.(마태22,1-13)

그 예복은 하느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어린양이 죽어 남긴 가죽 옷(창세3,21참조곧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그 죽음 그 하늘의 의로움이신 예수님을 입는 것믿는 것이다.(로마13,14 콜로3,14 참조)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기름곧 성령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성령은 모자라지도 또한 상인에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성령은 갈망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선물로 받는 것,(사도2,38 로마8,23참조그 받아드린 성령께서 구원의 길로 이끌어 가신다그런데 그 처녀들을 왜 슬기롭다 하셨는가?

그것은 그들이 간직한 하느님의 지혜슬기이신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문은 닫혔다.

그들이 간직한 성령 때문에 들어 간 것이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주인님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매정하신 것이 아니라신랑 예수님은 혼인 예물로 보내신 당신의 영을 청하라간직하라 하신(루가11,13) 그 성령을 간직한 그 당신의 지체인 신부만 알아보신다.(요한15,26 10,27참조)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처녀나 어리석은 처녀나 모두 신랑(예수)이 오시는 시간을 몰랐다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 시간그 때를 아시고 우리 신랑께 이끌어 가신다그래서 그날과 그 시간을 아시는 늘 깨어 계시는 그 성령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그것이 깨어있는 것오늘 그 깨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멘.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25,1-1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하고 대답하였다." (3~4.9)

 

마태오 복음 25장은 24장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사흘 전에 주신 올리브산에서의 말씀이 계속되는 부분으로서, 특히 도둑의 비유, 두 종의 비유인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비유(마태24,42~51)와 더불어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는

세 가지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세 가지 비유란 '열 처녀의 비유', '탈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를 나누는 임금의 비유'를 말한다.

 

'천국은 마치 ~~에 비길 수 있다'는 것은 천국이 열 처녀에 비유되는 것이 아니라 열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는 상황에 비유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다의 혼인 풍습은 신랑이 신부의 집에 들러 간단한 종교적 의식을 치른 후, 신부와 신부의 들러리들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 혼인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신랑의 집이 먼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 혼인 예식을 치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본 장에 있어서의 혼인 잔치는 어느 곳에서 벌어졌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문맥의 흐름으로 보면, 혼인 잔치는 신부의 집에서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름을 예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나중에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요청했을 때 그 요청을 거부한 사람이 신랑이었던 사실(11~12절)에 비추어 보면, 혼인 잔치는 신랑 집에서 베풀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만일 혼인 잔치가 신부 집에서 신부 집에서 베풀어졌다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요청을 거부하는 주체가 신랑이 아닌 신부의 아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인 잔치가 어디서 열렸는지 단정할 수 없다.

 

당시 유다 관습에 의하면, 혼례식은 보통 해가 진 이후에 시작되었다.

이때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부의 집 문 밖에 나가서 등을 들고 있다가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에 당도하면 영접하였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집에 가는 시간은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랑이 늦어질 것을 대비해서 등이 꺼지지 않도록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야 했다.

 

특히 본문에서 신랑이 예측치 못한 시간에 온 것이 강조되는 것은 종말, 또는 모든 성도들의 신랑이 되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예비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여기서 신부의 들러리인 열 처녀가 들고 나간 '등'으로 번역된 '람파다스'(lampadas)는 수지질의 소나무로 만든 횃불이나 등불, 또는 심지를 꽂아서 쓰는 속이 등근 접시나 기름병을 의미하는 명사 '람파스'(lampas)의 목적격 복수로서 '여러 개의 등'이다.

 

원문에는 이 단어 뒤에 새 성경이 번역하지 않은 단어 '헤아우톤'(heauton)이 있다.

 '헤아우톤'(heauton)은 여성 3인칭 복수 소유격 재귀 대명사로서 '그녀들 자신들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열 처녀는 모두가 각자 자기 자신의 등을 들고 나갔다.

여기서 '나간 장소'가 신부의 집인지, 처녀 자신들의 집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이것은 이 비유의 전개에서 크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본 비유에서 '신랑'으로 번역된 '뉨피우'(nymphiu)의 원형 '뉨피오스'(nymphios)라는 단어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11절).

따라서 비유에서 신랑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는 신부가 아닌, 들러리 처녀 열 명이다.

 

당시 신부의 들러리는 신부의 친구들이 맡았으며, 들러리들이 드는 등불은 모두 열 개라고 한다. 유다인들은  이상적인 숫자, 완전 숫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당에서의 공식 집회도 열 명이 참석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비유에서도 그러한 풍습에 따라 들러리 처녀들이 열 명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신랑되시는 예수님의 재림은 열 처녀로 상징되는 '모든 성도'가 대비하고 준비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재림 앞에서 단 한명도 열 처녀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슬기로운 처녀가 아니면 어리석은 처녀에 해당하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어리석은'으로 번역된 '모라이'(morai; foolish)의 원형 '모로스'(moros)는 신중하지 못하고 예측 능력이나 지혜가 결여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며, '슬기로운'으로 번역된 '프로니모이'(phronimoi; wise)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분별력이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그리고 여기서 쓰인 동사 '에산'(esan; were) 반복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이것은 신부의 들러리 처녀들의 개인적인 성향이 항상 그러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결국 다섯 처녀들은 항상 신중하지 못하고 선견지명이 없는 자들로 살아왔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하는 날에도 평소처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성향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드러낸 것이며, 반대로 다른 다섯 처녀들도 평소의 삶의 자세가 사려깊고 분별력이 있으며 신중했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신랑을 맞이하는 날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서의 교훈은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주님의 재림의 때에 어떠한 자들로 드러날 것인가가 판가름난다는 것이다.

 

이제 마태오 복음 25장 3절에는 열 처녀들이 왜 어리석고 슬기로운지를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밝힌다.

즉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등은 물론 기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늦어질 것을 대비해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던 반면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준비했을 뿐 여분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메트 헤아우톤'(meth heauton; with them)은 '그녀들 자신들과 함께' 또는 '그녀들 자신들 곁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들러리 처녀들이 등을 밝힐 여분의 기름을 반드시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충고해 주는 표현이다.

 

그리고 '엘라이온'(elaion; oil)은 '올리브 나무'(olive tree)를 의미하는 '엘라이아'(elaia)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올리브 기름'을 뜻한다.

이 기름은 팔레스티나에서 나는 대표적인 산물로서 등불을 밝히고(2열왕4,10) 병을 치료하는데(루카10,34), 그리고 귀한 손님의 머리에 부어 예의를 시하는데(루카7,46) 사용되었다.

 

이 기름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믿음'을 상징한다고 보고, 어떤 학자는 믿음에 대응하는 '선행'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는 기름이 성별 의식에 사용된 물질이라는 것과(즈카4,12) 성령이 기름으로 상징된다(루카4,18)는 사실에 근거해서 기름은 내면적 신앙의 모습인 '성령의 능력과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마태오 복음 25장 4절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 왜 슬기로운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 '그릇'으로 번역된 '앙게이오이스'(anggeiois; jars)의 원형 '앙게이온'(anggeion)는 플라스크와 같은 휴대용 병 말하는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올 것을 대비하여  말고도 여분으로 플라스크 같은 병을 하나 더 준비하여 거기에 기름을 담아가는 준비성을 갖추었다.

그래서 설사 기름이 다하여 등불이 타다 꺼지더라도 여분의 기름으로 계속해서 등불을 타오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5절에 '신랑이 늦어지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 당신의 재림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늦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지체되는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베드로 2서 3장 9절이 이것에 대해 분명히 밝혀준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도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연되는 주님의 재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어 방종에 흐르는 기회로 이용될 수 있음을 베드로 2서 3장 3절과 4절이 밝혀주고 있다.

"마지막 때에, 자기 욕망에 따라 사는 조롱꾼들이 나와서 여러분을 조롱하며,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7절에서 '우리 등이 꺼져 가니'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오시는 역사의 깊은 밤중에 성령의 불길이 소멸해가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9절의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라는 표현은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주면 둘 다 등불을 켤 수 없을 것이기에 결코 나누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에서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주님 오시는 순간에 자기의 것을 나누어 줄 수는 없다는 말로서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구원에 있어서 그 누구도 각자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며, 모자란 기름을 러가는 역할도 그 누구가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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