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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2 주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28 조회수3,690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은 거룩한 주일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야 하는 계명을 우리는 지키기 위해서 주일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신자가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의무 중에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계명이 이 계명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일은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당에 가 미사 참례를 하고 마지막에 성체를 영하고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퇴장 성가가 없지만 신부님의 강복을 끝으로 미사 참례를 하면 온전히 주일을 거룩히 지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주일을 거룩히 보내라는 의미에서 주일을 지키는 것까지는 백 번 양보해서 그렇게 봐준다고 해도 ‘거룩히’라는 말 앞에서는 거의 낙제 점수에 가까울 것입니다.

 

오래 전에 출판된 교황님의 책을 봤습니다. 주일에 대해서만 언급된 책이었습니다. 사실 그 책을 읽고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교황님의 말씀대로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주일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이 시대에 과연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참으로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그게 몇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그때를 생각해보니 그때 제 마음을 울렸던 경각심이 다시 해이해진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오늘 주일 복음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전통에 대해 평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예수님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전통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따져 질문을 합니다. 그들의 의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약간 어느 정도 무마시키려는 핑계거리를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숨어 있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역공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전통이라고 했지만 실제 오늘 복음에서는 조금은 미세한 의미 차이가 있습니다. 장터에서 돌아와 몸을 씻지 않고 먹었다고 해서 그들은 그걸 가지고 전통을 어겼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건 전통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지역 주변의 기후적인 환경으로 인해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생활 문화였던 것입니다.

 

문화를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구실을 삼은 것입니다. 그들의 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향해서 질타를 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서인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를 인용하시면서 군중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을 하시는데요 형식은 군중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지만 실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향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의도는 전통이라는 것도 있다면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본질이 가지고 있는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일조를 언급하신 대목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언급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한마디로 말씀을 하면 정작 씻어야 할 것은 외부에 묻어 있는 더러움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온갖 더럽고 추악한 마음을 씻어야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또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걷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주일에는 당연히 하느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미사 시작부터 미사 마칠 때까지 정해진 미사의 형식에 따라 몸과 행동으로 행한 몸짓 같은 외적 행위도 하나의 제사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그런 동작을 통해서 그 하나하나의 의미를 되새기며 할 때 그게 하느님 대전에 올라가는 진정한 제사가 될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겠지만 그냥 성당에 참석해 외형적인 전례의 형식을 따랐다는 그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그건 오늘 복음에 언급된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입술로만 하느님께 제사를 드린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입술로 말을 통해서 고백하는 기도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속에는 참회도 있고 믿음을 고백하는 것도 있고 또 그런 마음을 지켜주십사 하고 청원의 의미를 담고 드리는 기도도 있습니다. 사제의 입술로 드리는 기도 속에도 우리의 마음을 모아서 함께 생각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 기도가 그냥 듣는 것에만 그치면 그건 오늘 제2독서에도 나오지만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는 수준에서만 그친다면 그 말씀은 그냥 허공의 메아리에 불과한 말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씀은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에는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고 해도 그냥 귀 고막만 울리는 진동에만 그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울림을 주는 떨림으로 작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오늘 제2독서 마지막 말씀처럼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어려움을 겪는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하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그때 말씀의 힘이 비로소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냥 말씀 그 자체로만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일에 선포되는 독서와 복음 말씀은 단순히 미사 예절의 한 형식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건 제가 할 소리가 아니네요. 원칙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등불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보루가 되어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온전히 지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만이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흠 없는 신심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의 생각처럼 외형적인 어떤 신심행위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 담긴 그 정신을 구현할 때 비로소 그때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향해 가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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