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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30 조회수3,720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믿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편견과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은 왜 좋지 못한 것일까요? 여기에 사로잡히게 되면 아무리 좋은 게 있어도 그걸 이미 자기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인 고정된 틀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온전히 어떤 현상이나 본질을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마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색안경을 벗기 전에는 절대 본질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주관적인 성격이 좀 더 강합니다. 객관적인 상황에서는 그런 게 개입될 여지가 적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여기에 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직업이 가발을 만드는 사람과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죠. 이 두 사람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직업병’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걸 굳이 떠나서 이 두  사람의 시선이 가는 방향을 한번 생각을 해보면 어떨 것 같습니까? 구두를 만드는 사람은 시선이 주로 아래로 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발을 만드는 사람은 사람의 머리 스타일을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시선은 위를 향하는 경향이 두드러질 것입니다.  두 사례가 절대적인 게 아니지만 이렇게 말을 하면 누구나 수긍이 가는 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보통 보면 자기가 보고자 하는 면만 보려고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직업병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요? 직업으로 인해서 생긴 병이라는 것입니다. 직업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랜 시간을 함께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처럼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것도 지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발현될 수 있지만 보통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편견과 선입견도 또 하나 장담을 할 수가 없는 게 있습니다. 자기가 바라보는 모든 시선과 생각이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본다고 확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 알 수도 있고 또 착각과 실수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떤 사실을 바라볼 때 자신의 주관이 많이 개입된 상태에서 판단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해 사물의 본질을 잘못 볼 수도 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고향 사람들을 한번 살펴보면 어떤가요? 예수님의 좋은 설교 말씀을 들었습니다.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긴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시원찮습니다. 은총의 말씀을 은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눈을 가리는 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오늘 복음에 보면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이는데요 이 반응도 중의적인 의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 그 자체가 놀랍다는 뜻으로 놀라워할 수도 있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인 게 분명한데  어떻게 목수 아들의 입에서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는지 그 자체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놀랍다는 의미도 있을 겁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기존에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가졌던 편견과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문맥상 의미를 보면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반응을 예수님께서는 보시고 그들의 허를 찌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의 이야기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의 예를 들어 주십니다. 두 사람을 언급하셨는데 그들은 이 말씀에 화가 잔뜩 났던 것입니다. 웃자고 하는 말씀입니다만 복음에 나오는 단편적인 사실과 정황만을 놓고 봤을 때 마을 사람들이 바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을 예수님께서 왜 언급하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게 되면 화를 낼 수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사례인데 그걸 간파할 정도라면 말입니다. 만약 하나만 언급했다면 조금은 이해가 될 수가 없을 수도 있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두 개를 한꺼번에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를 완전히 간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의도는 그들이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그들에게 말씀하시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은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믿음 하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과부는 자신도 코가 석자인데도 불구하고 엘리야의 입장을 이해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단적인 예입니다.

 

나아만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자존심을 내세웠지만 부하와 또 포로가 된 이방 처녀의 말에 귀를 기울인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함께 또 일곱 번 강물로 씻어야 한다고 하는 대목에서 그것도 완전히 순종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해서 나을 거라면 서너 번만 하면 되지 일곱 번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나아만 장군은 온전히 순종을 한 것입니다. 자기의 병이 나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든 생각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천날 만날 보고 들어도 자신의 믿음에 변화가 없는 신앙생활이 된다면 우리에게도 구원의 문이 배제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이런 논리를 좀 더 확장해서 보면 부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교리는 다르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복음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경우 그들에게도 하느님은 구원의 손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불교에도 자비를 강조합니다. 그 자비가 성경에서 말하는 자비와 동일한 개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자비도 되지만 우리가 말하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이 베푼 자비의 대상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 해당한다면 그들은 단순히 일반 대중인 보살에게 자비를 베푼 것으로 알고 했을 일이지만, 우리의 교리를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우리 입장에서는 마치 이방인과 같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대로  자비를 실행했다면 바로 예수님께 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사람과 가장 작은이의 기준이  어떤 종교를 기준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배타적으로 접근한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복음에 존재하는 이유가 의미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제2 계명에 해당하는 대상은 바로 ‘누구나’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어떤 특정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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