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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눈 속에 있는 들보 (루카6,39-4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10 조회수3,07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9월 10일 금요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눈 속에 있는 들보 (루카6,39-42)

 

1독서<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1,1-2.12-14)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과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나 바오로가,

믿음으로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12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13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화답송 시편 16(15),1-2과 5.7-8.11(◎ 5ㄱ 참조)

◎ 주님당신은 제 몫의 유산이시옵니다.

○ 하느님저를 지켜 주소서당신께 피신하나이다주님께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주님.” 주님은 제 몫의 유산저의 잔당신이 제 운명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

○ 저를 타이르시는 주님 찬미하오니한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깨우나이다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

 

복음<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6,39-42)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가만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위선자야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제1독서 (1티모1,1-2.12-14)

 

티모테오 1.2서, 티토서는 사목(司牧)서간이라고 불린다. 세 서간의 주요 관심이 초기 교회의 열정적 선교 활동이 아니고, 선교사들이 세운 공동체의 관리(사목)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뜻의 티모테오는 유다인 어머니 에우니케(2 티모1,5; 할머니의 이름은 로이스)와 이방인 아버지(사도16,1)사이에서 태어나 소아시아 동남쪽 리스트라에서 살다가 A.D.46년경 그곳에 복음을 전하러 온 사도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A.D. 50년경부터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에 동참한 티모테오는 그 뒤 사도 바오로의 충실한 협력자요 동업자로 남았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높이 평가하고 따뜻하게 소개했다.

 

그는 '우리의 형제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하느님의 협력자'이다(1테살3,2). '나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의 일을 성심껏 돌보아 줄 사람이 나에게는 티모테오밖에 없습니다.'(필리2,20) '그는 내가 주님안에서 사랑하는 나의 성실한 아들입니다.'(1코린4,17)

 

그외에도 티모테오서는 그를 아직 젊은이로 묘사하고(1티모4,12; 2 티모2,22), 위장병을 비롯하여 다른 질병에 자주 시달렸던(1티모 5,23) 약골로 소개한다.

 

대다수 성서학자들은 사목 서간들을 사도 바오로의 친저 서간이 아니라 사도 바오로 이후의 세대에 그의 신학 사상을 현실에 적용하여 저술한, 사도 바오로 계열의 서간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근거는 첫째, A.D. 2세기 와서야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영지주의 사상과 특징이 나타나 있고, 예컨대 부활의 생명을 이미 누리고 있다는 주장(2 티모2,17~18)과 혼인에 대한 경멸과 지나친 금욕주의(1티모4,3.8)가 그것이다. 

 

둘째, 교회 조직에 대해 특별한 관심(하느님의 가정인 교회안에 감독, 원로, 남녀 보조자, 과부 등의 위계적 직무와 질서)을 드러내고,

 셋째, 사도 바오로 친서 서간과는 다른 신학, 윤리적 관점을 보인다.

 

'율법'은 올바른 처신함으로(1티모1,8~11) 이해하고,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응답하는 것이라기 보다 헌신과 절제로 이어지는 하나의 덕행으로 (1티모5,8; 2티모2,22), '의화'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기 보다 그리스의 철학 개념인 '정의'의 덕으로(1티모6,11) 이해한다.

 

대다수 성서학자들은 티모테오 2서가 사도 바오로의 생애 마지막 몇 달 또는 며칠을 목격하거나 전해 들은 저자에 의해 사도 바오로가 죽은 지 얼마 안되어 쓰였을 것이라 추정한다(A.D.70년경). 

그리고 이 서간을 일부 참조하여 1세기 말엽 어느 무명 저자들이 티토서와 티모테오 1서를 집필한 것으로(A.D. 90년경) 판단한다.

 

티모테오 1서의 서간의 머리말(1,1~2)은 다른 바오로 서간의 경우와 다르다. 

감사의 말이 없고, 사도 바오로가 사도직을 받은 게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이라고 되어 있다.

 

티모테오 1서는 에폐소 교회의 상황과 관련하여 세 가지 주요 주제를 다룬다.

 

첫째는, 참 가르침과 거짓 가르침의 구분이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수많은 신(神)들에 얽힌 이야기와 만신전(萬神殿)에서의 위계질서(신화나 끝없는 족보이야기)와 모세의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율법 교사들(히메네오스와 알렉산드로)의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경계이다.

둘째는, 믿는 이들의 올바른 처신,

셋째는, 교회의 직무에 대한 규정과 지침을 다룬다.


대한 인사말과
(1티모1,1~2)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독하고 박해 하던 오늘 독서는 친서 형식을 빌려 사도 바오로의 복음 선포인 것처럼 전하는 티모테오에 죄인이었지만, 나중에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 입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직무를 맡아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1티모1,12~14.15~17참조).

 

특별히 사도 바오로에 대한 평가가 눈에 띈다. 전에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한 것이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다는 구절이다.

 

아무도 진리를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환경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영적 무지에서 나오는 행동은 용서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충분히 주님의 구원의 진리와 가르침을 들을 수 있고 깨우칠 수 있으며 살아야  하는데도, 영적 나태와 무관심과 악습에서 헤어나기 싫어서 의식적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거부할 때는, 똑같은 조건과 처지와 신분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주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도 하느님의 정의임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은 하느님의 뜻과 진리를 알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는 끝가지 고집을 부려 회개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눈 먼 이가 눈 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루카 6,37-42)

37 '남을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 용서는 예수님께서 나와 너, 그 우리의 죗값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받는 것, 그 우리, 서로가 받은 용서이기에 그 누구도 심판과 단죄를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 십자가로 받은 용서, 그 진리의 복음을 나누며 서로 용서 받았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용서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38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 하느님의 약속인 십자가의 용서, 그 구원의 말씀을 후하게 주시라는 것, 예수님은 하느님의 구원 그 한 가지 일만, 한 가지 말씀만 하셨다.(요한7,21참조)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한 가지 일, 구원의 약속의 책인 것이다.

 

(에페2,1-9) 1 여러분도 전에는 잘못과 죄를 저질러 죽었던 사람입니다.

=죄의 상태가 영의 죽음인 것이다.

 

2 그 안에서 여러분은 한때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곧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 안에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다 한때 그들 가운데에서 우리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본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4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6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 그런데 사람의 의로움, 사랑을 흘려 넘치게 주는 그 도덕과 윤리의 가르침을 받게 되면 영원한 죽음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비유의 말씀을 주셨다.

 

39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 육이 원하는, 곧 세상의 재물과 명예(의로움) 그 뜻을 위한 인간 중심의 가르침을 받으면 함께 지옥이라는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뜻, 생각, 그 길이 아닌, 하느님의 뜻, 길인 영원한 생명의 가르침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하느님의 말씀(뜻)을 듣기 싫어한다.

 

(2티모4,2-4) 2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 가르치는 지도자(사제)나 듣는 신자들이나 하느님의 말씀보다 나타나는, 발현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신앙으로 따른다는 것이다.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 제자는 자신의 말(계명)이 아닌 가르침을 받은대로 스승(예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 그것이 스승 예수처럼 되는 것이다.

 

(이사55,8)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티토1,13-14) 13 이 증언은 참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하게 *꾸짖어 그들의 믿음이 건전해져서, 14 유다인(사람)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율법(윤리)의 눈, 그 법(죄-들보)의 눈을 깨달아라 하시는 것이다.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 율법의 눈, 그 들보를 버리라는 것, 의인이 되고자 하는 그 법이 오히려 심판과 단죄로 죄를 만들어 내는 위선인 것이다.

 

(로마3,20-22)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의 복음, 그 진리의 눈으로 봐야 형제, 이웃에게 용서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아멘.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복음(루카6,39~42)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1)

 

이 구절은 '형제의 눈 속'과 '네 눈 속' 그리고 '티'와 '들보' 그리고 '보면서'와 '깨닫지 못하느냐'가 서로 대구를 이루는 매우 기교적 문장이다.

 

여기서 '티'에 해당하는 '카르포스'(karphos; mote; the speck of sawdust)는 '시들다'는 뜻이 있는 '카르포'(karpho)에서 유래하여 지푸라기나 왕겨 등을 의미한다.

 

반면에 '들보'에 해당하는 '도코스'(dokos; the bean; the plank)는 '받치다', '지탱하다'는 의미가 있는 '데코마이'(dechomai)에서 유래하여 건물을 바치는 기둥 혹은 서까래를 의미한다.

 

타인의 조그마한 결점을 상징하는 '티'와 자신의 큰 허물을 상징하는 '들보'라는 서로 대조 되는 단어를 대구시킴으로써 이 구절의 내용이 강조된다.

 

인간의 눈 속에 지붕을 받치는 재목을 가리키는 들보가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것은 매우 심한 과장법이다.

 

이러한 과장법을 통해 예수님께서 전달하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타인의 작은 도덕적 잘못이나 교리적 오류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예리하게 지적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갖고 있는 더 큰 잘못, 즉 마치 들보와 같은 결함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음을 과장법을 사용하여 신랄하게 지적하신 것이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들보와 같은 결함은 바로 자신이 가진 죄악을 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와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는 가혹한 마음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구절에 나오는 동사들이 모두 2인칭 단수로 쓰였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당신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개개인이 바로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일일이 지적하는 심정으로 사용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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