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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4주일] 제 십자가를 지고 (마르8,27-3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12 조회수3,28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9월 12일 주일

[연중 제24주일제 십자가를 지고 (마르8,27-35)

 

 

1독서<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맡겼다.>(이사50,5-9)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우리 함께 나서 보자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내게 다가와 보아라.

보라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화답송 시편 116(114115),1-2.3-4.5-6.8-9(◎ 9)

◎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 나는 주님을 사랑하네애원하는 내 소리 들어 주셨네당신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니나는 한평생 그분을 부르리라

○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저승의 공포가 나를 덮쳐고난과 근심에 사로잡혔네나는 주님의 이름 불렀네. “주님부디 이 목숨 살려 주소서.” 

○ 주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신 분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네주님은 작은 이들을 지키시는 분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

○ 당신은 죽음에서 제 목숨을 구하셨나이다제 눈에서 눈물을 거두시고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하셨나이다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2독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4-18)

14 나의 형제 여러분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복음<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마르8,27-35)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내게서 물러가라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이사50,5~9ㄴ)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4~5)  

 

이사야 예언서의 '위로의 책'(이사 40~55장)에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이 네 개의 노래 되어있는 '야훼의 종' 또는 '주님의 종'에 관한 신탁이다(42,1~9; 49,1~7; 50,4~11; 52,13~53,12).

여기서 주님의 종이 누구를 가리키는가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주님의 종'으로 이해하였다.

 

첫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는 주님의 종의 선하신 성품과 주님의 종을 향한 하느님의 전적인 보증을 강조했다(42,1~9). 두번째 노래는 하느님의 전적인 부르심과 영광과 승리의 약속을 강조하였다(49,1~7). 이에 비해서 세번째 노래와 네번째 노래는 모두 종의 고난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 독서 들어있는 세번째 노래(50,4~11)는 주님의 종이 고난 가운데서도 전적으로 인내하며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주님의 종의 고난에 집중적으로 촛점을 맞추는 네번째 노래(52,13~53,12)와 구별된다.

 

세번째 노래의 말하는 자(話者; 화자)도 두번째 노래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종 자신이다. 이 종은 하느님께 순종적이고 신실한 자이며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큰 고난을 당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로서 모든 믿는 이들에게 참 신앙의 표본이 되는 인물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4)

 

본문에서 주님의 종은 자신을 1인칭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주 하느님)을 자신의 '주'로 칭한다. 이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는 단순히 종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권한을 가진 주인이란 의미가 아니라 온 우주의 주재권을 가지고 있는 만왕의 왕 지칭하는 표현이다.

주님의 종은 바로 이러한 만왕의 왕이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제자의 혀'를 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제자들'에 해당하는 '림무딤'(limmudim) '배우다'(신명5,1),'본받다'(신명18,7)의 뜻이 있는 동사 '라마드'(lamad)에서 유래하며, '배우는 자'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

 

이사야서 8장 16절에서에서 '제자'란 의미로 이사야서 54장 13절에서는 '교훈을 받는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단지 공부를 많이 해서 박식해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의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통해 그에게서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배워 스승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완벽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제자의 혀를 주시어' 말은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 아래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만 하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후반절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내용 역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주님의 종의 열정을 보여준다.

즉 주님의 종은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그의 말씀을 바로 듣고, 깊이 이해하여 순종하며 주님께서 전적으로 신임할 수 있는 자인 것이다.

주님의 종은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주님의 백성에게 바른 지식을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같은 측면에서 본문의 '주시어' 해당하는 '나탄'(natan)은 '위임하셨다', 또는 '임명하셨다'는 의미로 의역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 메시아적 사명을 완수하실 때에 사람들로부터 배우지 않은 자인데,

어디에서 그런 깊은 지식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으셨다(요한7,15~16).

주님의 종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느님을 통해 참된 지식을 공급받으셨고, 그 지식에 근거하여 말씀을 전파하셨던 것이다(요한8,28).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4)

 

이 본문은 왜 주님께서 종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는지 그 목적이나 결과를 말해준다. 즉 본문은 제자의 혀를 가지신 주님의 종의 주요한 사명이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특히 그는 지친 이<困苦(곤고)한 자>에게 말씀을 가르쳐 그를 돕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지친 이' 해당하는 '야에프'(yaeph)는 피곤하여 지친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 '야아프'(yaaph)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피곤해 기진맥진한 사람 의미한다(40,28.30.31).

그리고 '말로'에 해당하는 '따바르'(dabar)는 주님의 말씀 의미한다. 주님의 말씀 창조의 권능 생명을 부여하는 권능 지니고 있다. 따라서 메시야가 원하는 주님의 말씀은 지친이로 하여금 생명과 능력을 회복하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의로움과 구원에 이르지 못하며 어떤 소망도 없다고 고백하는 자들, 그리하여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들은 그 말씀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어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4)

 

주님께서는 그의 종이 가르치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도록 매일 아침마다(morning by morning) 그의 이성과 영성을 일깨우신다는 사실이 예언된다. '일깨워 주신다' 해당하는 '야이르'(yair)의 원형 '우르'(ur)는 문자적으로 잠을

깨우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서 모두 65회 사용된 용례에서 이 단어는 주로 마음을 부추기거나 감동시켜 어떤 일을 하게 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이성을 날카롭게 하시고 영성을 일깨우며 사명감을 북돋운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 이어지는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란 예언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듣게 하신다' 해당하는 '리쉬모아으'(lishimoah)는 '듣다'라는 의미를 지닌 '샤마으'(shamah)의 부정사에 '~하기 위하여' 뜻의 전치사 '레'(le)가 결합된 형태로 직역하면 '듣도록'이라는 의미가 된다.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실패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문제(이사48,8.18)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먼저 들으시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모범을 보이시는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4)

 

본절은 주님의 종이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고 순종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은 주님께서 종의 귀를 여셨다는 본문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귀가 모두 열리지 않았다는 이사야서 48장 8절의 진술과 정확히 대조를 이룬다.

 

'너는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다. 예로부터 네 귀가 열리지 않았으니  네가 배신만 하고 모태에서부터 반역자라 불릴 것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이사48,8) 

원문상으로도 '열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타흐'(patah)가 본문과 이사야서 48장 8절에 각각 사용되었다.

 

그들은 듣는 귀가 닫혀 있어서 들어도 듣지 못하며(이사6,9), 아예 주님의 명령 듣기를 싫어하는 자들이다(이사48,8). 반면 주님의 종은 주님께서 그의 귀를 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고 완전하게 순종한다.

 

바로 여기서 주님의 종이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완전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근거 나온다. 따라서 믿는 이들도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거역하고 범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종의 듣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5)

 

원문에서 '나는'에 해당하는 '아노키'(anoki)라는 인칭 대명사가 매우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이 단어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만큼은'이라는 강조적 의미를 나타낸다. 주님의 종만큼은 부르심과 말씀에 절대 순종의 자세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거역하다'에 해당하는 '마라티'(marathi)의 원형 '마라'(mara)는 원래 음식의 맛이 매우 쓴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구약성경에서 대부분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이사1,20; 민수20,10; 신명1,26). 그러나 주님의 종은 절대로 그렇지 않고 오히려 언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행하신다(요한8,29). 

또는 '뒤로 물러서다' 해당하는 '아호르 네쑤고티'(ahor nesugothi)는 겁을 집어 먹고 뒤로 도망친다는 의미 가지고 있다.

 

주님의 종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에 섰을 때 온갖 두렵고 떨리는 일이 계속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도망치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이러한 주님의 종의 사명은 메시아의 공생활 가운데 그대로 구현되었다

 

 

 


연중 제24주일 복음(마르8,27~35)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33)

 

마르코 복음 8장 32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고 나온다. 베드로는 마르코 복음 8장 31절의 주님의 수난 예고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로 믿고 있던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통해 얻을 것으로 고대했던 모든 영광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르코 복음 8장 21절의 '반박하기 시작하였다'에서 '반박하다'에 해당하는 '에피티만'(epitiman; to rebuke)의 원형 '에피티마오'(epitimao)는 '경고하다', '경계하다', '책망하다', '꾸짖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르코 복음 8장 33절에서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라고 하시며 엄중히 꾸짖으시는 것을 감안할 때, 이미 어두움의 세력에 붙잡힌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매우 거칠게 대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서,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진 채 예수님을 향한 그릇된 열심과 애정으로 불타고 있는 베드로의 마음을 이용했던 것이다. 

마르코 복음 8장 3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막아서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하신다.'사탄아'에 해당하는 '사타나'(satana; satan)은 '적대자'를 뜻하는 '사타나스'(satanas)의 호격이다.

 

신약 성경의 36회 용례 중에서 34회가 모두 그리스도와 하느님 자체, 또는 그분의 일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영적 세력인 '사탄'을 일컫는 말로 쓰였고, 나머지 2회는 여기와 그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23절의 '베드로'에 대해 쓰였다.

 

베드로도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혀서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로 쓰임을 받았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주님의 적대자였다고 할 수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던 자가 너무나 쉽게 주님의 적대자로 전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최종목적인 아버지의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해서 반드시 걸어가야 하는,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거칠게 대드는 사탄의 조정을 받고 있는 베드로의 기운에 조금도 눌리지 않으시고, 무서울 정도로 단호하고 담대하게 그를 뿌리쳐 버리신다. 그리고 '내게서 물러가라'에 해당하는 '휘파게 오피소 무'(hypage opiso mu; get behind me)에서 '물러가라'로 번역된 '휘파게'(hypage)는 '휘파고'(hypago)의 현재 명령형이다.


이것은 '너는 지금 당장 내 뒤로 가라'는 뜻이며, 사탄의 도구가 된 베드로에게 상징적으로 스승이신 예수님 당신을 따라야 하는 제자로서의 본분과 위치를 지키라는 뜻이다.

즉 제자란 예수님 당신을 따르는 존재이지, 이끄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며, 제자가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마음대로 결정할 권한이 없음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한편,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23절에는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는 말이 더 첨부되어 있다.  이에 해당하는 '스칸달론 에이 에무'(skandalon ei emu; you are an obstacle to me; you are stumbling block to me)에서 '걸림돌' 혹은 '넘어지게 하는 자'에 해당하는 희랍어 '스칸달론'(skandalon; an offence)은 '올무', '함정'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모케쉬'(moqesh)와 '걸리다', '거치다', '장애물'이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미크숄' (mikshol)에 대한 70인역(lxx)의 역어로 '길에 놓여 걸려 넘어지게 하는 어떤 장애물' (걸림돌) 혹은 '다른 이를 범죄하도록 유도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의 베드로의 행위가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셔야 할 구원의 길을 방해하는 걸림돌로서 하느님의 뜻을 어기도록 유도하는 범죄의 행위가 됨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을 수 없다며 극구 만류하는 베드로의 말과 행위는 예수님의 공생활초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탄의 유혹의 목적과 같이 예수님의 구속 사업을 방해하는 것이다. 

끝으로 '너는 ~생각지 ~ 하고'에 해당하는 '프로네이스'(phroneis; you do have in mind)의 원형 '프로네오'(phroneo)는 '마음에 두다', '중히 여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단지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바로 이것에 집착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고,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일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하느님의 일임을 나타낸다. 

또한 이 구절은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현재의 진행중인 동작을 나타내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순간까지도 베드로의 마음이 오로지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낸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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