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 (요한19,25-2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15 조회수3,072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9월 15일 수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 (요한19,25-27)

 

1독서<예수님께서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5,7-9)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화답송 시편 31(30),2-3ㄱㄴ.3ㄷㄹ-4.5-6.15-16.20(◎ 17ㄴ 참조)

◎ 주님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 주님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당신의 의로움으로 저를 구하소서제게 당신 귀를 기울이시고어서 저를 구하소서

○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당신은 저의 바위저의 성채이시니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 숨겨진 그물에서 저를 빼내소서당신은 저의 피신처이시옵니다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주님진실하신 하느님저를 구원하소서

○ 주님저는 당신만 믿고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제 운명 당신 손에 달렸으니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얼마나 크시옵니까주님은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사람들 보는 데서 그 선을 베푸시나이다

 

복음<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19,25-27)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또는>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루카2,33-35)

33 예수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제1독서(히브5,7~9)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7)

 

'이 세상에 계실 때'로 번역된 원문에서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없고, '육체'라는 단어가 나온다. '육체로 계실 때' 혹은 '육체를 지니고 계실 때' 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육체'로 번역된 '사르코스'(sarkos)의 원형 '사륵스'(sarx)의 기본 의미는 '살'(flesh) 이지만, '몸', '혈육을 가진 인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인간성' 등 다양한 의미들을 나타내어 쓰인다.

 

본절에서는 이  '사륵스'(sarx)가 '인간 그 자체' 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강생(육화)하신 예수님의 지상 존재, 즉 인격적인 본성 전체를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가진 인간이셨던 동안, 그분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을 느끼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과 유혹과 고통을 모두 당하셨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죄가 없었으므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륵스'(sarx)의 생각에 지배되는 사람들의 특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실 때에나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항상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마음에 드는) 아들이었다. (마태3,17)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본문은 생명을 독점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보여준다.

여기서 '죽음에서 구하신다' 는 표현의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예수님을 갈바리아 언덕에서 죽기 이전에 건져내신다는 의미가 된다.

 

'구하실' 에 해당하는 '소제인'(sozein)의 원형 '소조'(sozo)는 어떤 위협을 당하지 않게 미리 건져 내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에크 타나투'(ek thanatu; from death)와 함께 쓰이면, 죽음의 위험에서 건져 낸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에크 타나투'(ek thanatu)와 함께 '소조'(sozo ; to save)가 쓰였다는 사실은 본절에 기록된 기도가 겟세마니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지도록 간절히 바치신 예수님의 기도임을 말해 주며, 예수님은 그때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죽음의 위험에서 능히 건져 내실 수 있는 하느님께 드렸던 것이다.

 

둘째로, 위와 같은 의미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구하신다' 라는 표현이 죽음 이후의 부활 사건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그 기도가 '들어 주셨습니다' 라는 본절에 후반절의 표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겟세마니의 기도를 염두에 두고서 그 기도의 장면을 묘사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경험하신 분이다.

본문을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심한 통곡(요란하도록 큰 부르짖음)과 눈물(울음)로 ~ 드렸고' (he offered up prayers and petitions with loud(strong) cries and tears)가 된다.

 

루카는 예수님의 그 당시 기도 모습을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루카 22,44) 라고 기록하였다. 이보다도 더 이상 간절하고 애절할 수 없는 마음으로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어디에 나오는가!

 

예수님의 얼굴에서 떨어진 땀이 핏방울 처럼 되었다는 복음서의 기록은 얼굴에 있는 모세 혈관이 터져서 피부 밖으로 나온 피가 땀방울에 섞여 땅에 떨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간절하게 기도하셨던 것이다.

 

한편, '큰 소리로 부르짖고'로 번역된 '크라우게스'(krauges)의 원형 '크라우게'(krauge)는 '고함', '큰 부르짖음' 이란 뜻이다.

이것은 자신이 억지로 외치려 해서 나는 소리라기보다 극도의 긴장이나 고통의 가운데서 마음을 쓰지 않음에도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소리(통곡)이다.

 

더군다나 '심한'이라고 번역된 '이스퀴라스'(ischyras; strong; loud)라는 수식어가 있다는 것은 그분이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분의 심정을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은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태26,38)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전해주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상처가 깊은 사람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 소리가 터져나오고,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찬 사람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듯이 그 순간 예수님은 그와같은 상태에 빠지셨음이 분명하다.

 

참을 수 없는 긴장과 고통 가운데서 그분은 흘러 나오는 신음 소리만 낸 것이 아니라 울기까지 하셨다. 그분은 아버지께 울면서 기도와 탄원을 드린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한 인간으로서 두려움과 혼란, 절망감에 싸여 우리와 마찬가지로 내적 혼란을 겪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진지하고 애절하고 뜨겁게 기도하셨으나 저자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기도와 탄원'을 올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탄원'에 해당하는 '히케테리아스'(hiketerias)는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과 원통함을 탄원하는 자'를 의미하는 '히케테스'(hiketes)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탄원', '간청' 이라는 뜻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 기도와 탄원의 내용을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로 전해주고 있다 (마태26,42; 마르14,36; 루카22,42).

 

예수님은 그 기도를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하셨다(마태26,44). 히브리 사상에서 '세 번'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횟수이다.

히브리인들의 공식 기도가 하루 세 차례였다는 사실도 그들이 하느님께 온전한 기도를  드린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예수님께서 같은 내용으로 세 번이나 동일하게 기도하셨다는 것은 더 이상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간절하고도 완벽하게 기도했음을 나타낸다.

 

'그 경외심 때문에'

 

본서 저자의 관점에서 본 예수님의 기도와 탄원의 응답을 받은 결정적인 동기와 배경에 대한 언급이다. 하느님께서 중시하시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경건에서 우러나오는 복종 때문에 그의 기도가 아버지께로부터 응답을 받았다는 진술을 하고 있다.

 

'경외심'으로 번역된 '율라베이아스'(eulabeias)는 '두려움', '경건'을 뜻한다. 기원전 3~4세기 이후부터 사용된 이 단어가 처음에는 '신중함', '세심한 주의', '사리분별'등을 의미했으나 후기 희랍어에서는 '공경'을 뜻하게 되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명사가 나타나는 곳은 본절과 히브리서 12장 28절 뿐이다. 라틴어 성경은 이것을 '존경', '경외'(reverentia), 그외 다른 성경은 '경건'(piety), '공손한 복종'(reverent submission)등으로 번역했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아버지 앞에 엎드릴 때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태도이다.

그분의 이러한 복종은 비굴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공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들어 주셨습니다'

 

'들어 주셨습니다'로 번역된 '에이사쿠스테이스'(eisakustheis)의 원형 '에이사쿠오'(eisakuo)는 방향 또는 진입의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eis)와 '듣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쿠오'(akuo)의 합성어로서 '요구에 따르다', '요구를 들어주다' 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과거 분사 수동태로 쓰였으며, 영어로는 'he was heard'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슨 기도가 어떻게 응답받았는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라는 기도는 '대속의 십자가 죽음'으로서 응답받았고 '죽음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는 십자가 죽음 후 '부활'을 통해서 응답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으셨고, 또한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부활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와 탄원이 들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7년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사람에게서 성령을 빼면 똥자루일 뿐이다. (예수회 박홍사제)

 

(요한19,25-27)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 어머니- 마리아, 이모-마리아, 그리고 막달레나 마리아.

성경은 십자(나무)가 곁에 ‘마리아’ 그 이름, 그리고 ‘여자’만을 소개한다.

 

(마태27,55-56) 55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이들이다. 56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그리고 그 마리아들이 ~

 

(마태28,1) 1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 우리가 공부했듯이 마리아 ‘쓰다’ ‘쓴물’ 이라는 뜻, 그 쓴물(마리아)들이 십자나무를 담아 단물(의인)이 되는 하느님의 계명,

 

(탈출15,25) 25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 물이 되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시험하셨다.

= 십자나무의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원의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가 이루어지는 모습이다.

 

(요한19,30)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 마리아, 여자들이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구원이 다 이루어졌다;ㅡ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어머니를 여인으로 부르신다. 남편의 짝, 아내. 그 호칭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 여자(테무트-그릇) 마리아(쓴물)들의 교회의 구성이 완성된 것이다.

에수님의 열두 살(완성), 그 완성의 때에도 관습에 따른 축제로 예수님을 잃었고, 그 잃음은 예수님을 사람들 사이에서 찾으려 했던 마리아(루가2,42~참조),

그렇듯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도 늘 예수님 밖에서 서 있었던 마리아~~

 

(마르3,31-34)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늘 밖에 있었던 마리아가 오늘 복음에서 드디어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마리아가 우리(교회)가 닮아야 할 어머니이며, 죄인(쓴물)들의 모형인 것이다.

그 마리아 처럼이 성모신심의 모형인 것이다. 내 소원, 내 기도를 빌어 달라며 공경하고 섬기는 것, 성모신심이 아니다.

내 마음속 교만을 흩으시고 끌어내리시는 그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만들어 살리시는 그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는 것, 그것이 성모 신심인 것이다.

 

(루가1,50-53) 50 그분(하느님)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 * 마음속 교만, 위선을 드러내고 내 자아를 끌어내는 사건들, 시련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살리시려는 하느님의 자비인 것이다. 그래서 시련의 사건들은 꼭 필요한 것이다.

 

오늘 히브리서도 전하지 않는가?~~~ 

(히브 5,7-9)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그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찬송을 드리는 것이 성모 신심인 것이다.

처녀, 동정녀(여자*테무트), 그 빈 그릇에 하느님의 것을 담으면 깨끗하고 거룩한 생명의 그릇이 되지만, 사람의 것을 담으면 개짐(이사64,4) 곧 더러운 걸레(똥걸레)를 담는 죽음의 그릇이 된다.

 

* 천주의 성령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간구해 주소서 아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복음(요한19,25~27)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6~27)

 

요한 복음 19장 25절과 19장 27절에는 '어머니'라는 뜻의 '메테르'(meter)가 사용되었다.

19장 25절에서는 요한 복음사가가 예수님과 마리아와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했고, 19장 27절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사도 요한에게 모친을 부탁하면서 당신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어머니'라는 뜻의 정감있는 '메테르'(meter)란 표현을 했다.

 

하지만 요한 복음 19장 26절에서는 '메테르'를 사용하지 않고, 셈족 계통의 언어로서 어떤 거리감을 두는 표현인 '귀나이'(gynai)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여인', '부인'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어떤 여인을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2장 4절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향해 '귀나이'(gynai)라고 불렀고, 지금 자신의 사명을 마무리하는 십자가 형틀 위에서도 어머니를 그렇게 불렀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하느님의 계획하에 치밀하게 이루어진 구원 사업 안에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둘째 하와이신 마리아의 성소와 역할을 규정지어 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마리아가 예수님과 피와 살을 나눈 혈육적 관계 안에서의 모친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고, 공적으로 첫 기적을 베풀어 당신의 신성(神性)을 드러내야 하는 카나의 혼인 잔치 자리와, 인류 구원 사업이 완성되는 십자가의 형틀의 자리와 거기에서 모든 은혜가 내려져서 구원 사업이 계승되는 교회를 대표하는 사도와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그 자리가, 혈육과 육정의 관계를 넘어 각자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성부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자신의 성소와 역할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신, 구약 성경을 통틀어 첫 복음이라고 불리워지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에 해당하는 '잇샤'(isha) 70인역(LXX)에서는 '귀네'(gyne)로 번역되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걱정하여 사랑하는 제자였던 사도 요한에게 맡기기 위해 부르는 호칭으로만 '귀네'(gyne)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의 초기에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약속된 메시야'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여자의 후손'이라는 모티프(motif)를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출산하기 전(前)이나 출산시, 그리고 출산 후에도 평생 동정이시라는 교리를 신덕 도리로 이천년 동안 믿어온 가톨릭을 반대하며, 자신들의 대처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을 부정하는 개신교는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외에도 여러 명의 아들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이 요셉 양부의 형제, 자매의 자녀들인 고종 사촌들이나 마리아의 형제, 자매의 자녀들인 이종 사촌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복음에 나오는 '형제'라는 뜻의 '아델포스'(adelphos)라는 희랍어 단어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촌 형제들도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예수님의 친형제들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어머니를 친형제들에게 맡기지, 왜 이종사촌인 제자에게 맡겼겠는가!

 

루카 복음 1장 38절에서 마리아는 구세주의 모친, 교회의 모친, 인류의 어머니로서의 모성을 수락하셨는데, 그 수락한 모성이 요한 복음 19장 26~27절에서 인류 구원 사업이 계승되는 성사적인 인간 집단인 교회를 상징하는 사도 요한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가상칠언(架上七言) 중에서 루카복음 23장 34절, 루카복음 23장 43절에 이어서 세번째 말씀인 요한복음 19장 26~27절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사도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선포하심으로써 이제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당신께 나아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시는 것이다.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 오는 것이 가장 구원과 완덕에 이르는 쉬운 길이며 빠른 길이고, 가장 완전하고 완벽하며 안전한 길이라는 말이다.

 

마리아론 학자들은 이 길은 바로 마리아의 티없으신 성심께 봉헌하는 것과,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신 마리아의 성덕(聖德)을 본받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완전한 하느님이셨지만(요한1,1), 보통 여느 사람들처럼 이성과 감정을 지니신 온전한 인간이기도 하셨다.

 

자신의 손과 발이 못박혀 몸이 찢기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가운데서도(요한19,18.28) 자신의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눈물로 지키고 있던 자신을 낳고 길러준 육신의 어머니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무죄한 당신이 고통받고 죽어야만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의 뜻이 아루어지기에, 마음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어머니를 내려다보는(요한19,25) 아들로서의 심리적, 영적 격정은 그의 온 심장과 오장육부를 파고들어 타는 듯한 안타까운 심정이 되게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이 친어머니처럼 섬겨주기를 바랬던 마리아는 바로 자모이신 성교회, 죄인들의 피난처이신 교회를 상징하는데(십자가의 길 13처), 주님의 구원 사업이 계승되는 성사적인 인간 집단인 교회는 믿음의 모델이며 은총의 전구자이시고, 예수님의 첫 제자이기도 한 마리아를 통해 구원과 성화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이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