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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십자가(十字架)에 의해 여자(女子)가 아들을 낳다.(요한19:25-30, 20:1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15 조회수2,933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9. 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도란도란글방

 

십자가(十字架)에 의해 여자(女子)가 아들을 낳다.

 

(요한19:25-30, 20:17)

19: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20,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아멘>

 

십자가(十字架) 아래에서의 사건을 열어봄으로써 그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계시되고 있는지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6절에 보면~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다소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시는 장면이 나오죠. 예수님께서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세요, 그죠?

 

지금 예수님은 무슨 의도로 사도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기고 계시는 걸까요. 게다가 성경은 그때부터 마리아가 요한의 집에 가서 살았다, 라는 말까지 덧붙이고 있어요.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로 말미암게 되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 ,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로 말미암게 되는 교회(敎會)의 탄생(誕生)을 에둘러서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들은 이 세상에서 육적 관계를 매듭짓고 새로운 영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굳이 제자 요한을 마리아의 아들로 연결을 시키는 거예요. 바로 이런 현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르10,29-30)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성도(聖徒)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부터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이 가치라고 정해놓은 것들을 끊어내는 자로 살게 된다라는 뜻이에요. 하느님을 떠난 죄인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가치 셋을 꼽으라면 뭐가 있을까요. , 명예, 가족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사람들이 가치라고 힘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이에요.

인간들의 그, 내 편을 향한 집요한 사랑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죠? 말이 내 편이지, 결국 내 편은 나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에요. 내 편은 수시로 바뀌어요.

마을대항 축구 경기에서 내 편은? 우리 마을 사람이지만 도대항 경기에서는 그 사람들이, 적이었던 그 사람들이 다 내 편이 되잖아요? 내 편은 수시로 바뀌어요. 그런데도 그 내 편에 내가 목숨을 걸어요. 그 내 편이 바로 ''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 가족? 마찬가지예요, 그게 내 존재의 익스텐션이에요.

그러한 집요한 자기 사랑의 도구와 방편들이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라는 칼()에 의해서 하나하나 잘려 나가는 게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거예요. 근데 그들에게 새로운 어미가 백배, 새로운 자식이 백배, 새로운 토지가 백배. 이 생에서 주어진다는 거예요. 어머니가 백 명 생겨요? .

새로운 가족, 하느님의 교회로서의 새로운 가족이 그렇게 풍성하게 나에게 생긴다란 뜻이에요. 그래서 거기에 아버지만 빠진 거라고 그랬죠? 아버지는 누구? 하느님 아버지니까~. 고기에서 딱 아버지만 빠져 있잖아요. 아버지만, 그죠? 아버지만 백배로 안 줘요.

 

(마태10,34-39)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34절에 그 '칼을 주러왔다' 라는 말은 헬라어로 [발레인 마카이라 βάλλω]이라는 그 단어는 격렬하게 던지다, 격렬하게 찌르다, 란 뜻이에요. 격렬하게 던지다, 격렬하게 찌르다. [마카이라 μάχαιρα machaira] , 전쟁이란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주님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칼과 전쟁을 던지러 오셨다,라는 거예요. 그것도 격렬하게. 여기서의 세상은 '하느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시어'에서의 그 세상이에요. 하느님과 반대편에 있는 그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세상에게 자기들끼리 원수가 되게 그런 일을 하게 이 땅에 보낸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세상과 관계없이 하느님의 백성, 이 세상 중에 속해 있으면서 세상과 함께 멸망할 뻔했으나, 그 세상에서 건져진 세상. 그게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의 세상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로다'에서의 세상이에요.

요한복음에서는 항상 세상이 두 가지로 구분되어서 표현된다고 그랬잖아요? 하나는 하느님의 대적들의 세상, 대적들로서의 세상. 하나는 그렇게 세상에 속해 있었으나 구원받은 세상. 여기의 세상이 그 세상이에요. 하느님의 교회, 세상이었던 하느님의 교회에 예수님이 칼을 던지러 왔어요. 격렬하게 집어던지러 왔단 말입니다, 칼과 전쟁을.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요? 아버지와 딸이.. 아니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된대요. 근데 이 웬수들은 예수도 안 믿는데 왜 이렇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불화를 하는 거예요?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가 되게끔 예수님이 칼을 던지러 왔대요. 그 말은 그 관계, 인간들이 힘으로 갖고 있는 관계는 끊어내고 새로운 관계 속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러 오셨다란 뜻이에.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힘으로 주신, 정말 목숨처럼 여기는 그 관계를 왜 주신 거예요? 부모, 자식, 형제, 이웃 이 관계 왜 준 거라고요? 끊어 내라고 주신 거예요. 하느님 앞에서 '너 이것도 끊을 수 있어?' 물어보시려고. 그러니 인본주의에 꽉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얘기 들으면 막 화를 내죠.

 

여러분 가족 중에 다 예수 믿으세요? 성당(교회)만 다닌다고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 가족 중에 예수 잘 믿는 사람 몇 명 됩니까?. 그러면 분명히 여러분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그 가족 중에 여러분과 지금 딴 데 갈 사람이 분명히 있다라는 건데, 혹시 이 중에 있는 사람이 딴 데 갈지도 모르죠. 따뜻한 곳으로.

만약에 그렇게 서로 딴 데에 가 있을 때에 그 목숨처럼 사랑하는 그 가족 그들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이 천국을 사실 수 있을 것 같으세요? 그 관계가 안 끊어진 상태에서. 못 삽니다.

그러니까 그 관계는 언제 끊어진단 얘기예요? 여러분이 부활할 때 완전히 끊어져요. 돈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 명예 대한 관심, 그게 부활할 때 다 끊어지는 것처럼 그 관계 또한 여러분이 부활할 때 하느님의 마지막 심판대에 다 끊어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천국에 가서 여러분이 이 땅에서 목숨처럼 여기던 돈, 명예, 관계가 지옥에서 불타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런 것들을 지금 끊어내는 삶을 살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 그러한 자아 숭배의 찌꺼기들을 덕지덕지 움켜쥔 채로는 절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전부를 하느님께 드린 상태에서만 하느님께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린 이 세상에서 조금씩 그걸 다 끊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聖徒)가 예수를 믿게 되면 그때부터 하느님 이외의 세상 힘들에게 가 있던 그 마음에 칼을 맞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새로운 가치, 진짜 가치를 얻게 되고 진짜 천국 가족들과의 연합(聯合)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걸 부활(復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의 죽음과 단절로 경험이 되는 거고요. 그렇게 성도가 이 세상 힘으로부터의 죽음과 단절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 속에 싹터있는 새 생명의 삶이 조금씩 피어나게 되는 것! 그걸 부활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 부활의 현실이 종결이 되는 날이 마지막 심판의 날이 되는 거예요.

그 부활의 삶이 종결이 되는 것. 그때 진짜 부활로 완결되는 거죠. 그때 성도는 육으로는 완전히 죽고. 계속 죽어가다가 완전히 죽는 날이 부활이니까 계속 죽어가면 죽어갈수록 여러분은 새롭게 부활하는게 맞는 거잖아요. 그렇게 새로운 몸으로 완전히 거듭나서 새로운 가족 관계 속으로 완성되어 들어가는 거예요. 그때는 여러분끼리가 진짜 가족인 거예요.

 

거기에는 신랑, 신부 없다 그랬죠? 신랑이신 하느님과 신부인 교회. 거기에는 부모, 자식 관계없습니다. 하느님이신 아버지, 그리고 교회인 자식들.. 그 관계밖에 없어요. 우리끼리는 '형제'... 그래서 예수님이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거죠, 그리고 사도행전 같은데 보면 사도들이 계속 '형제들아- 형제들아-' 이렇게 부르잖아요. 거기서 그 brother가 형제예요, 진짜 형제.

그렇게 성도가 역사와 현실 속에서 겪게 되는, 죽음과 부활의 삶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고 가신 거예요, 그게 성육신의 삶이며 공생애의 삶이며 십자가의 삶인 거예요. 그리고 부활의 삶이고요. 그러한 새로운 가족의 탄생 장면이 오늘 본문 바로 다음 장에 아주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제가 오늘 본문으로 한 절 더 보탠 구절이죠?

 

(요한20,17)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여기 나오죠? 내 형제들 드디어 나와요. 그리고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 이때부터 이제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제자들이 내 형제들이 되는 거예요. 이때가 어떤 때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을 그때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앞에 나타나셨어요.

그리고는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나를 만지지 말라'예요. 그리고는 이어서는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되었고 내 하느님이 너희 하느님이 되었다'라는 파격적인 말씀을 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된 거죠? 새로운 가족관계가 드디어 완성이 된 거예요, 이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렇게 새로운 가족관계가 완결이 된 거죠. 그리고 그 현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셨을 때 모든 성도들에게 일괄적으로 적용이 되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이잖아요. 부활은 하셨지만.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지면 안 되는 거예요. "아이, 그렇다고 왜 만지면 안 돼요?" 이런 질문이 들어야 되는데~. 성령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이 내려오셔야 비로소 당신의 백성들이 한 몸으로 묶여요.

 

(에페2,14-19)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기에서 가족이라고 번역이 된, [오이케이오스οίκειοςg3609) ]가 바로 가정, 식구라는 뜻이에요. 성령에 의해 교회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하느님 아버지를 한 아버지로 한, 한 식구로 새롭게 묶이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근데~ 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당신을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가. 재미있는 건요, 똑같은 이야기가 마태복음에 기록돼 있는데 거기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집니다. 그런 거 궁금해 하지 않으셨어요? 여기선 만지는데 왜 여기선 만지지 말라고 그러나.

 

(마태28,9-10)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똑같은 상황인데 여기서는 마리아가 발을 붙잡는단 말입니다. 근데 왜 요한복음에서는 만지지 마라! 가 그렇게 강조되어 적혀 있냔 말이에요. 4복음서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다른 걸 강조하면서 기록이 되어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 그렇다고 이게 있지도 않은 것을,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을 허위로 적어놓은 건 아니에요. 그 복음서의 기자들이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끌어다가 쓴 것뿐이란 말입니다. 중요한 건 여자가 예수님을 만지고 안 만지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라는 것을 우리가 배우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영생(永生)의 근원(根源)이신, 예수님을 만지지 못하는 그림. 그 생명의 근원인 생명나무 열매를 만지지 못하는 그림을 최초로 성경의 어디서 보셨죠? 생각해 보세요.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은 얼른 구약의 어떤 장면들을 여러분이 기억해 내실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성경은 항상 구약과 신약이 뚫려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신약에서 이해가 안 가면 구약의 어느 지점과 연결이 되는지를 꼭 생각하셔서 이게 과연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는가를 그 전체 속에서 파악을 해야 된단 말이에요.

어딥니까. 창세기잖아요. 생명나무를 하느님이 가려버리고 못 만지게 했단 말입니다. 누구에게? 죄인들에게.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뭔지 모르는 이들에게 절대 못 만지게 했단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여기서 다른 그림으로 펼쳐지고 있는 거예요.

 

(창세3,22-24) 22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23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24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왜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나무 열매를 못 만지게 하셨습니까? 선악과(善惡果)의 시험(試驗)이 해결되지 않고는.... 생명나무 열매 즉, 영생을 절대 취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생명나무는 선악과를 통과해야 도달할 수 있는 나무예요. 피조물은 반드시 하느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을 해야 한다는, 그 율법에 절대적으로 순종을 해야한다 라는,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하느님 절대 의존자로 살아가는 그 삶을 뭐라 그래요? 그 자체가 영생이란 말이에요.

선악과 시험에서 딱 실패를 하자마자 생명나무가 가려져 버리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에게는 하느님의 말씀, 즉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힘이 없어요. 선악과 시험을 통과할 능력이 없단 말이에요.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피조물에게는. 그래서 선악과의 시험은...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통과해내시고 그것을 피조물에게 전가시켜주는 방법으로만 통과가 가능해요. 예수님은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내려오신 후에 바로 그 선악과의 시험을 통과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험으로 시작하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인생이며..... 죽기까지 순종하신 십자가의 사건인 거예요. 선악과가 뭐라 그랬어요? 하느님의 말을 죽기까지 순종해야 된다, 가 선악과 시험이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삶, 그게 선악과의 시험이잖아요. 그걸 통과하신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리고는 그걸 우리에게 전가시켜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믿는 자가 예수라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되는 거예요. 믿음으로.

선악과는 우리가 어떤 열심과 노력을 부려 통과하게 되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생명나무로 들어가는 그 길을 얻는 게 아니라 생명나무 자체가 선악과를 먹고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이신 예수가 선악과, 율법 자체를 먹어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우리를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해내시는 거예요. 어떻게? 자기의 살과 피를 먹임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해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 영생은 거저 주어지는 거예요.

 

생명나무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분투하여 먹을 수 있는게 아니라 거저 주어지는 거예요. 생명나무가 우리를 뚫고 들어와 버린다니깐요? 그런데 이놈들이 선악의 판단을 자기들이 하면서 선악과 시험을 스스로 통과하여 생명나무를 먹겠다고 나선단 말이에요. 그게 바리새인들이에요,

그게 오늘날 편만하게 퍼져있는 율법주의, 유대주의인 거예요. 인본주의인 거예요.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거 할 수 없다' 가 성경이라니깐요. 그렇게 생명나무를 따 먹은 자가 되어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가족으로 거저 편입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에요, 복음입니다,

 

지금 마리아 앞에 생명나무 열매이신 예수님이 서 계세요. 이제 부활까지 하셨으므로 영생을 쥐고 계신 거예요, 예수님이. 생명나무 열매가 서 계세요. 마리아는 반가움에 그 생명나무 열매, 영생의 근원되신 예수를 만지려고 한단 말입니다.

아직 십자가와 부활에 도해(圖解), 돼서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죄인이 생명나무 열매를 자기 손으로 만지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마리아를 죄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성령이 안 내려오셨잖아요. 예수님이 승천 안 하셨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급히 만지지 마. 그러는 거예요. 그 말은 못 만진다는 뜻이에요.

"내가 승천하여 성령이 내려오셔야 그때 너희들에게 내가 한 일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고 그때 믿음이 함께 내려와서 아, 우리는 이렇게 믿음으로 거저! 우리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되는구나를 알게 되었을 때 너는 나를 만질 수 있는 거야." 물론 다 상징적인 이야기예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마리아가 만지면은 뭐가 대단히 큰일 나는 게 아니라. 그래서 곧 만졌는데 가만히 계신 거예요.

, 하느님은 모든 인간이 이 땅에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서 이 땅에 태어난, 역사 속에 태어난 모든 인간이 절대로 자기의 능력과 열심으로 생명나무에 도달할 수 없다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세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 율법 지킴으로 상징이 되는, 마리아의 손, 그 손을 막으시는 거예요. 차단시키시는 거예요. 궁금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거? 왜 만지지 말라 그러셨지? 이런 거?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계속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어요. 그때 어디 숨어 계셨을까요? 예수님은 늘 하느님과 함께 하시는 분이에요. 근데 하늘로 올라가고 내려가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예수님은 그 자체가 하느님과 일체이신 분이라니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이런 표현들로 뭔가를 설명해주시는 거예요.

 

하늘이 어딨다고 올라가요? 하늘이 저 위에 있습니까? 차원을 달리하는 곳에 있는 거예요, 하늘은. 하느님 나라는.. 자꾸 동화책을 너무 많이 봐 갖고.. 저 은하수 뒷편에.. 그러니까 그러한 국어사전들의 개념들을 갖고 자꾸 성경들을 보시려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과 피조물의 한 가족 됨은 피조물 측에서의 어떤 시도나 노력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와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게 될 성령의 강림으로만! 성취가 될 것이다, 라는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못 만져"라는 거예요.

 

(요한17,3)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이런 거예요~. 근데 이건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우리가. 성령이 내려와야 알 수 있다 그러잖아요,

 

(요한15,26)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가 안 오면, 못 알아먹어요. 근데 예수님이 승천을 안 하셨기 때문에 성령님이 아직 안 내려오셨단 말이에요. 그 성령님이 언제 내려오세요. 오순절날 내려오시죠? 모든 교회에게 내려오시는 거예요. 그때에. 그때 믿음이 일괄적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쑥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들이 생명나무를 만지는 거예요. 아니, 먹어버리는 거예요. 그때. 먹는 거예요. 그 구원의 현실을 설명해 주기 위해 이런 그림들이 마치 유치원 수준으로 이렇게 그려져 있는 거예요, 성경에.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게 되는 새 가족 탄생의 비밀에 대해서 쪼금 더 구체적인 그림으로 반복하여 기술을 하는데요.

 

(요한19,28-29)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랬더니 병사들이 신 포도주를 해면에 묻혀서 우슬초로 예수님께 건네요. 딴데서는 갈대라고도 얘기했는데 요한은 굳이 그걸 우슬초라는 단어를 써요. 요한은 그런 일련의 말씀과 행동이 '성경으로 이루게 하려 하신 것이다.'라고 친절하게 부연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일까요? '성경으로 이뤄지게 하려 하심이다.' 갑자기 죽기 전에 시편이 생각나서 '아 그때 참, "초로" 먹어야 된다고 그랬는데 내가 안 먹었네~? 내가 깜빡 잊을 뻔했다! 내가 목마르다...' 이러신 거예요? 그건 아닐 거 아니에요.^^ 그럼 성경으로 이뤄지게 하려 한다는 게 무슨 말이냔 말이에요, 도대체.

 

(시편69,22) 22 그들은 저에게 음식으로 독을 주고 목말라할 때 초를 마시게 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요. 군사들이 예수님에게 쓸개를 탄 포도주를 주는 장면이 나오죠? 마르코복음 15장에는 몰약을 탄 포도주라고 그래요~. 쓸개를 탄 포도주나 몰약을 탄 포도주는 예수님이 거절하십니다. 이게 단어가 같은 단어라서 쓸개, 몰약, 이렇게 번역이 됐는데 실제로 쓸개와 몰약을 포도주에 타면 그게 마취제 역할을 한다 그래요

그러니까 십자가 지기 전에 최대한의 배려를 한 거죠, 사형 집행관들이. '마셔, 덜 아플 거야.' 예수님이 그거 거절한단 말입니다. ? 인간들이 당할 십자가의 고통을 요만큼도 가감 없이 다 당하시려고 그건 거절하시는 거예요. *그 포도주와 지금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신 포도주는 *다른 포도주예요. 그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받았던 거고 지금 신 포도주는 바로 돌아가시기 전에 십자가에서 받으신 거란 말입니다. 그걸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돼요.

그리고 그 쓸개와 몰약이 들어간 포도주는 거절하셨지만 오늘 본문에 이 신 포도주는 받아 마셨다니깐요? 받았다 그러죠? 마신 거예요. 받아 마시신 거란 말입니다, 그거는요?

그 해면에 묻힌 신 포도주는 어떤 포도주였냐면은 사형 집행관들, 그 하급 병졸들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마시던 아주 값싼 포도주였어요. 쓸개와 몰약을 탄 포도주는 마취제였지만 이 신 포도주는 갈증해소용 음료였단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예수님의 행위가 너무 일관성이 없지 않아요? 뭐는 받고 뭐는 왜 거절해요. ~. 마취제는 거절하고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한 포도주는 받아 마시시는 거예요.

그럼 도대체 그 목마름이 뭐길래 그거는 해갈을 하셨냔 말이에요. 끝까지 그냥 멋지게 죽으시지~. 돌아가시기 전에 할 말이 "목마르다". 아프다.. 이거면 내가 이해하겠어요. 아프다, 죽겠다.. 아니, 그런 말이.. 그런 말이 나와야지, 고작 "목마르다." 거기에도 뭔 메시지가 있을 거 아닙니까..

4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계속해서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오라' 말씀하시잖아요.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목마르지 않게 하리라. 내가 주는 물은 절대 너희들을 목마르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시잖아요. 그거와 연결이 되는 거죠~. 그래서 마지막에 '목마르다'라고 얘기를 하신 거예요.

그 해면이라는 건요~. 스펀지처럼 액체를 잘 빨아들이는 그 바다동물의 다공성 뼈, 연한 뼈 종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근데 그런 것들은 스펀지처럼, 그때 당시에 스펀지가 없었으니까.. 액체를 쭉 빨아들인다 그래요? 근데 그걸 우슬초에다가 가득 적셔요. 아니.. 그 해면에다가 가득 적시고 우슬초에다가 묶어요. 그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바로 얼마 전에 '이게 바로 내 피다'라고 말씀하신 적 있었죠?.

 

(루가22,20)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그렇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피가 우슬초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발라지는 거죠. 입술에다가 발랐단 말입니다. 해면을 뭐 꿀떡꿀떡 마실 순 없으니까~. 발라준 거예요, 그걸 핥아먹은 거예요. 그리고는 해갈이 됐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우슬초에 의해서 피가 발려진 사건은 구약에 어디에 등장합니까.

 

(출애12,13.22-23) 13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22 그리고 우슬초 한 묶음을 가져다가 대야에 받아 놓은 피에 담가라. 그것으로 그 대야에 받아 놓은 피를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너희는 아침까지 아무도 자기 집 문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23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을 치러 지나시다가,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피를 보시면, 그 문은 거르고 지나가시고 파괴자가 너희 집을 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똑같이 죽음에 던져지게 될 어떤 자들에게 우슬초에 의해 피가 발라지면 그들은 살아나요. 애굽 사람이든 이스라엘 사람이든 상관없어요. 그냥 어린 양의 피를 우슬초에 묻혀 바르기만 하면 그들은 다 살아요. 그게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슬초에 적셔진 포도주를 받으시는 사건은 출애굽기의 과월절 장면을 그대로 성취하고 계시는 거예요.

십자가 위에서 예수 안에 연합이 된, 어떤 자들에게..... 예수의 피를 발라서 죽어야 할 그들을 살려 내시겠다 라는 복음의 메시지가 그 안에 담겨있는 거예요. 그 목마름을 예수님께서 다 가져가시고 ....그 목마름을 가진 이들에게 자기의 피를 먹여 그들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는 목말라 죽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시장하다' 하고 이파리만 풍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무화과나무를 죽여버렸잖아요. 근데 결국 자기가 그 무화과나무가 되어서 저주받은 말라비틀어진 십자가,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죽어버리는 것처럼, 그들의 배고픔이 되어 죽어버리는 것처럼, 똑같이 그들의 목마름이 되어 죽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식으로 그들의 목마름을 해갈시키고 그들을 건지냐면 자기의 피를 찢어 자기의 피를 쏟아 그들에게 부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그들을 넘어가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는 목말라 죽는 거예요.. 빨가벗겨져서 부끄러운 상태에서 죽어야 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빨가벗음이 되셔서 죽는 예수의 모습. 똑같은 거예요, . 그게 십자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구원받은 거예요, 우리는요.. 근데 그렇게 구원을 받은 이들이 도대체 그 예수 앞에서 뭘 구하고 있는 거냐고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목이 마르다'라고 말씀하시고 신 포도주를 받아 마신 그것이 '성경을 이뤄지게 하려 함이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이루려 함이다. '성경을 이뤄지게 하려 함이다'에서 그 ' 이루다' '다 이루었다'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인 걸 아세요, 여러분 [텔레오] 라는 단어예요. 십자가 위에서의 그 예수님의 그 신 포도주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여 내려오셔서 이루려고 했던 일의 모형이란 뜻이에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고 돌아가시잖아요. '다 이루었다'라는 이루는 '이룸' 이 바로 이 성경에 적혀진 내용인데 그 성경에 적혀진 내용을 이루려고.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아 마셨다, 라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똑같은 단어가 거기에 쓰이는 거예요. '다 이루심' , [텔레오] 라는 단어가 요한복음 4장에도 나오는데 보세요.

 

(요한4,34) 34 그러자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이거예요, ‘완성하다,이루다’ [τελειώσω] 똑같은 단어예요. 근데 이 예수님이 하느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을 이루는 것. 그게 나의 양식(糧食)이라 그러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라고 이렇게 얘기해놓고 그 양식을 받아 마시는 거예요. 근데 그 양식이 뭐였냐고요. "내려가서 죽어!"였잖아요. 이해가 가세요? 이거 삼단논법만 알아도 다 이해가 가는 건데? 그죠?

'나는 이제 내 피를 다 쏟아 부어서 하느님이 살리라고 하는 이들을 다 살렸어~.''다 이루심'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내용인데 그 내용이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 그리고 신 포도주를 받아 마신, 그 그림에 들어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게 성경을 이루게 하는 일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 [텔레오τελειώσωg]라는 단어가 그대로 쓰인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다 이루심' 이 예수님의, 예수님의 양식이기 때문에 그러한 목마름에 대한 호소가 나오는 거고, 그 목마름을 채우는 것으로 신 포도주를 우슬초에 적셔서 십자가 위에 바르시는 그림이 나오는 거고 바로 그 그림을 다 이루었다, [테 텔레스타이], [텔레오τελέω teleō]로 선언하고 떠나시는 거예요.

 

하느님을 떠난 인간들은 공허(空虛)라는 목마름에 시달려요. 그 목마름은 죄()로 말미암게 되는 사망(死亡)의 증상이에요. 밀란쿤데라는 그걸 '권태(倦怠)'라고도 이야기를 하고 파스칼은 그걸 '심심함'이라고도 이야기하죠?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그 공허를 메꾸기 위해 열심히 사는 거예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사랑도 열심히 해보고 취미생활도 열심히 해보고. 그 공허 메꾸기 위해. 그게 죽음의 증상이거든요. 근데 그 자리는 하느님이 쑥 빠져나간 자리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메꿔지지가 않아요.

하느님이 쑥 빠져나간 자리는 무한하신 그 하느님이 빠져나간 자리기 때문에 끝이 없는.. ~~ 아무리 내려가도 끝이 없는 무저갱(無低坑) 이기 때문에 그걸 지옥(地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공허예요, 심심함이에요, 그게 권태예요. 그게 지옥이라니깐요? 그게 목마름입니다.

그 목마름을 그대로 가진 상태에서 여러분이 어떤! 고대광실에 가 있다 할지라도 거기가 지옥이에요. 아무리 여러분이 먹고 싶은 걸 다 먹는다 할지라도 그게 지옥이라니깐요, 거기가? 그 공허가 해결되지 않은 그 자리가. 근데 인간들은 끊임없이 이 세상 어떤 것들로 공허를 채우려고 해요. 그 목마름을 해갈시키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죠? "너는 아무리 이 물먹어도 곧, 다시 목마르다" 그건 뭘 빗대어하신 말씀이에요? 그 여자가 세상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남편을 다섯 번 바꿨습니다. 요 남자랑 살면 만족할까? 요 남자랑 살면 만족할까? 다섯이나 바꾸고 여섯 번째 사람하고 살고 있는데 인제는 그 공허가 채워지지 않으니까 혼인신고도 안 했어.^^ ㅎㅎ 세상 힘으로 계속해서 자기를 채우려고 해요.

그때~ 예수님이 그 우물물을 빗대어서 "너 이 물 아무리 먹어봐야 세상의 물은 금방 목말라. 내가 주는 물먹어야 목 안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요. 끊임없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요한6,35)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죠?. 그러면 이 물은 뭐예요? ‘예수님의 피인데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져요? 성령으로 주어지잖아요.

 

(요한7,37-39) 37 축제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시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39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야기예요, 여러분은 그렇게 성령 받아서 해갈이 되셨습니까? 근데 세상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목마르죠?. 아니라고 말씀 못하실 거예요. 목말라요~. 돈에 대해서도 목마르고 명예에 대해서도 목말라요. 인기에 대해서 목마르고 자랑에 대해서 목마릅니다. 내 자식새끼에 대해 목마르고 부모에 대해서 목말라요. 그건 죽는 날까지 여러분이 가지고 가시는 거예요. 그게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그 목마름을 끊임없이 겪으면서 그 목마름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예수님이 해갈하신 영적 목마름에 소중함을 깨닫고 가는 거지, 그 목마름에 대해서 자유롭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절대 자유롭게 안돼요.

"아닌데요? 나는 그 정도에 대해서는 자유로워졌는데요?" 거짓말하는 거예요. 제가 백 퍼센트 개런티 해 드릴게요. 다 거짓말이에요. 그럴 수 있는 사람 없어요. 그 속에서 "예수님이 나를 영적으로 예수님의 그 은혜의 폭력성을 갖고 오셔서 불가항력적 은혜로 그 영적 해갈을 해 주지 않았다면 난 어떡할 뻔했는가. 이 목마름 끝까지 갖고 영원 속에서도 지옥을 살 뻔했구나~. " 그거 깨달으는 거예요.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주시고 그 목마름의 해갈의 방법으로 이 땅에 오신 성령에 의해 우리가 한 몸으로 한 지체가 되어 새 가족이 되는 거예요. 쉽죠.

그러니까 '다 이루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모순이 되는 말이 아니라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 예수님의 다 이루심은 그분이 철저하게 버려져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거니까. 그거 궁금하지 않으셨어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다 이루었다' 가 어떻게 화해가 되냔 말이에요. 하느님에 의해 철저하게 버려짐과 다 '이룸' 과 이게 화해가 되는 말이냐고요. 그건 다- 이룸이 아니라 다 잃음!이죠. 잃어버림. 아버지에게 버림을 당했는데 그게 뭐가 다 이룬 거예요, 다 잃어버림이지~.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으면 다 끝나는 거거든요. 근데 그걸 다 이루었다, [테 텔레스타이] 라고 한단 말입니다.

.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다 이루실 일은, 그 하느님의 일은 자기가 철저하게 버려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오로지 순종하여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에만 집중하고 착념하는 것! 그게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생명력이 부어져야 할 존재가 싹 비워져야 돼요. 그게 하느님 나라예요. 그 하느님의 나라의 현실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한 번 보여주신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신 그 방법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거예요.

 

하느님의 일이 다 이루어지기 위해선 그 일에 쓰임을 받는 존재의 다~~ 비워짐, 완전히 버려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함. 이게 전제되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완전히 버려지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순종해버리신 거예요. "죽어! " 그러니까 죽었어요.. 그랬더니 그 죽은 시체의 삶을 통해 하느님이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시퍼렇게 살아 있는 자들이 그 하느님을 도와주겠다고 하는 그 자리에선 하느님이 일 안 하세요. 그 자의 일을 하죠, 그가. 자기의 일을 해요.

그러나 우리가 죽어있는 상태에서 하느님이 하시는 그 일은 완전히 다른 일이에요. 똑같은 착한 일인데요~. 어떤 사람이 자기부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그 사람의 자기부인의 과정 속에서 예수가 드러나서 하는, 나오는 착한 일과 내가 끝까지 나의 자랑과 인기를 챙기기 위해서 하는 착한 일과 모양은 똑같은데 둘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착한 일이에요.

어떤 사람은 '정말 이 세상의 힘은 내 힘이 아니구나... 그리고 이 세상의 힘은 들풀의 꽃 같아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구나..'라는 그런 고백으로. 그리고 하느님에게 하느님의 아들이 먼저 헌금으로 드려졌기 때문에 나도 내 소유를 나 자신을 하느님 앞에 제물로 헌금으로 드릴 수밖에 없구나 하고 나오는 헌금이 있어요.

그것도 버림이에요, 버리는 거예요. 그것도요, 내 소유를. 그런 여러분의 헌금이, 여러분이 버린 헌금이 어디에 어떻게 보람 있게 쓰이게 될 거라는 그런 기대도 하지 마세요. 그건 버린 거예요. 그러나 '내가 어떻게 일해서 이걸 냈는데~ 이게 그렇게 쓰여야 돼?' 그건 버린 거 아니에요. 내가 거기서 끝까지 가치를 챙기려고 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막 쓰여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 하나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 일체()감이 어느 정도냐 하면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어요. 이 말씀은 '하느님이 바로 나이고 내가 곧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조차 자기 마음대로 안하셨잖아요. 하느님이 시키는 말만 했다 그랬어요. . 두 분은 일체거든요, 일체.

그러니까 말조차도 자기 맘대로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일체예요, 그게 연합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나중에 그 상태로 가거든요? 하느님과 그 상태로? 그러기 위해선 지금의 여러분, 자아가 어떻게 돼야 돼요? 내 것을 내놓지 못하게 계속 죽어야 돼요. 그래야 하느님이 시키는 말만 할 수 있다니깐요? 하느님이 시키는 일만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고게 자기부인이에요. 그렇게 내가 무력한 자로 폭로되는 거. '이거는 절대 선한 것이 될 수 없구나'라고 폭로되는 거~.

그런데 이렇듯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체감을 강조하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버려짐을 느끼고 계신단 말이에요. 버려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상식적으로 일체감이라는 것과 버려짐이라는 것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아요. 어떻게 일체감과 버려짐이 어떻게 서로를 인정할 수 있어요, 어떻게 그게 두 개가 화해될 수 있냐고요~. 안되잖아요! 우리의 사고로는 일체라는 것은 버려짐과 절대 화해할 수가 없어요. 끌어들임이지 어떻게 버려짐이 일체가 됩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하느님과 일체라고 하는데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졌다니깐요? '버려졌다'라는 건 '아버지와 분리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아버지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다 이루지 못함'이라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와 분리된 거니까.

 

그러나 여러분, 쪼끔만 깊이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왜냐면 예수님 말고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 있는 분은 없어요. . 예수님만! 하느님과 일체거든요. ‘버려졌다'라는 건 분명히 '일체였다'라는 걸 전제하는 거예요.

따로 떨어져 있었던 거는 버려진게 아니라 원래 떨어져 있었던 거예요. 근데 '버려졌다'라는 건 '일체였다'라는 게 전제되는 겁니다. 그 일체였던 것이 끊어져 나가 버려지는 거니까~. 근데 하느님과 일체일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어요~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버려질 수 있어요. 인간은 하느님과 일체였던 적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질 수가 없어요. 하느님으로 부터 예수님만! 버려질 수 있어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순종하는 분만 하느님과 일체된 분이에요. 말이 좀 어렵습니까?

왜냐면 자신의 버려짐조차 하느님께 의존되어 있을 정도로, ''라는 자신에 대한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거잖아요. 자기 생명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고 자신과 일치된 어떤 분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거라는, 그러한 철저한 자기부인이 벌어진 장소가 예수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그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 거예요.

"죽어!! " 그러니깐 죽은 거예요. 죽음조차 내 의지대로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죽음과 삶이 그 주도권이 나에게 없단 말입니다. 그게 '일체'예요, 일체. 그런데 하느님이 여러분을 그 일체 속으로 끌어들이고 계신단 말입니다,

 

힘의 원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요~.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지는 하느님이 있을 수 없다,라고 생각해요.* 그건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는 상식이 아니거든요. 어떻게 하느님이 하느님에 의해서 버려집니까.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자신을 버려서 원수를 살리는 십자가의 삶의 원리, 십자가의 원리예요.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는 당신을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원수를 살려내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만! 하느님과 함께 거할 수 있어요. 바로 그러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가신 거란 말입니다. 그게 십자가예요.

그러니까 그러한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의 버려짐은, "! 어떻게 그렇게 버려지는 예수, 그게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냐? 그가 어떻게 하느님일 수가 있냐?" 이렇게 예수의 하느님 되심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인간은 하느님을 절대! 하느님 나라를 절대 모르는 존재구나'를 폭로당하는 거예요. 오히려요. 근데 사람들은 "거봐~ 하느님 아니지."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니깐요? 하느님의 백성은, "아니야~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을 하느님 나라를 모르는구나" 그리로 가게 된다니깐요...

 

결국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거예요. 예수님을 버려짐으로 이끄시는 분은 아버지의 성령이죠.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여 성령이 밖에서부터 끌고 가시잖아요, 예수님을. 그래서 일부러 세례자요한에게 성령을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눈에 보이게 내려오시는 거예요. "교회들아, 봐라" 성령이 아들을 어떻게 끌고 가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끌고 갑니까? 버려짐의 장소로 끌고가요. 그런데 그 성령이라는 처소에는 누가 함께 계시는 거예요? 아버지 하느님이 같이 계신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버려지는데 그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세요. 그게 삼위일체입니다.

성령이라는 처소 안에서 예수, 성자 예수와 성부 하느님이 같이 존재하시는데 이 일체이신 아버지와 아들이, 아버지는 "죽어라!"라고 명령을 하시고 아들은 "그래요,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내가 죽겠습니다"라고 다른 길로 가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그게 바로 "일체 "인 거예요.

한 존재가 다른 존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완전히! 죽어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라는 존재 자체가 하느님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자신을 죽여 원수를 살려내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삼위일체의 하느님 안에서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 그리고 성령의 사역으로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그 자리로 성도가 초청을 받고 있어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의 완전한 이루심,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에 의해 버려져도 '자아가 등장하지 않는다'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아버지가 버려도 아버지의 뜻이 나를 버리는 거라 할지라도 거기에서도 내 자아가 등장하지 않는 게 일체예요. 그게 하느님 나라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걸 보여주시는 거예요. 아버지가 나를 버리는데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도 그 아버지의 뜻에 의해 완전히 버려져요. 그게 하느님 나라에서 모든 백성이 해야 할, '다 이룸' 이라니깐요? 하느님 나라 백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그걸 다 이루는 거예요.

하느님이 "죽어!" 그러면 선악의 판단의 기준을 내가 내려놓고 " 죽을게요." 죽는 거예요. "가나안에 들어가서 아기까지 다 죽여!" 그러면? .... '도덕과 윤리로 판단하여 그게 어떻게 옳습니까.' 가 아니라 하느님은 무조건 선하니까 다 따르겠습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순종하는 자라 성경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 자리로 내려가는 거~

그러한 예수님의 버려짐 말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어요. 그러한 방식으로 성령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기 위해서 자기부인을 유발하는 거예요. 자기부인은 그냥 구호가 아니에요,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한 기적! 이에요, 자기부인은.

그 첫 번째 자기부인을 성취하신 분이 하느님과 일체하셨던 예수님이셨고 그 은혜로 예수님과 일체로 부름을 받은 성도가 그 뒤를 잇는 거예요.

 

(요한17,21)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니까 하느님...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머리로 한 몸, 가족이 되었어요. 일체가 되었어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일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은 성자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삼위일체 안으로 끌려 들어간 거거든요? 여러분의 이 역사 속에서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제부터.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고백이 수시로 터져 나오게 돼 있어요, 수시로.

영원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일체였던 예수가 역사 속에서 버려짐의 상태에서 그 아버지와 일체 됨을 보인 것처럼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는 성령, 믿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들이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과 똑같이 버려짐을 경험하면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고백을 수시로 하면서 "다 이루었다"라는 고백을 결국 하게 되는 거예요.

'결국 나는 완전히 버려지고도 하느님을 버리지 않고 그분의 뜻을 순종하는 자가 되었구나'라는 자리로 하느님이 밀고 들어가시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의 삶 속에 하느님이 그렇게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꼭 하느님이 버린 것 같죠. . 그래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 아닐지도 몰라. 그런 허탄한 고백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하느님이 날 버린 것 같아서. 하느님은 그 속에서 이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구나 라는 위대한 고백을 듣고 싶은 거지, . 하느님은 정말 나를 버리셨나 보다. 내게 등을 돌리셨나 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연약한 고백을 듣고 싶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제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 오늘부터 가서 자기부인 해야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자기 부인이 돼요? 저 좀 가르쳐주세요. 허벅지를 찌를까요? 은장도 갖고 하루 열두 번씩? 그렇게 해서 자기부인이 되던가요?

', 참으니까 되던데요?' 그건 참는 게 아니라 벼르는 거라니깐요? '언젠가 터지면 넌 죽는다.' 이게 참는 거예요? 벼르는 거지. 그게 자기부인 아니에요. 오히려 자기의 쌓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참았어~. 나는 너보다 나아. 그러면서 이를 악물면서 몸에 막 암이 생겨. 너무 스트레스 받아갖고. ㅎㅎㅎㅎ.. 그거 자기부인이에요? 억지로 참는 게? 아니에요, 그게 자아실현이라는 거예요. 자아 성취라는 거예요.

여러분, 모델화라는 건 모델이 있고 그 모델처럼 살고 싶은 내가 있어서 나를 점점 그 모델 쪽으로 몰아가려는 의도를 모델화라고 그러죠. 거기에서는 내가 부인되면 안 돼요. 내가 계속 살아야 돼요. 그래야 내가 나를 몰고 갈 수 있거든요. 그건 자기부인 아니잖아요.

어떤 걸 모델화하여 그걸 쫒아가는 게 자기부인 아니에요. 여러분, 자꾸 여러분 주변에 롤 모델을 찾아다니시려고 하는데 "이런 롤 모델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런 롤 모델이 쫒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롤 모델이 진짜 잘 살고 있는지 어떻게 아세요?

느님의 은혜와 전혀 상관없이 자기 의() 쌓고 있는지 어떻게 아세요? 간디 정도로 살아주면 롤 모델 자격 있습니까? 테레사만큼 살아주면 롤 모델 자격 있나요? 법정처럼 살아주면 롤 모델 자격 있어요? 내가 어떤 걸 모델화하여 그렇게 살겠다는 것 자체가 내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는 거예요.

자기(自己)부인(否認)은 성령이 칼이 되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와 폭력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요? 아니오? 성령이 내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도 노력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근데 수많은 실패를 겪게 돼요, 거기에서.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나는 끊임없이 실패했는데 그래서 나에 대한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데 거꾸로 내가 바꿔지는게 3자에게 들통이 나게 돼요. 그게 진짜 자기부인입니다.

다른 거 없어요. “하느님, 나는 먼지네요.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내 이름을 기억해 주세요." 이 말 한 마디 진심으로 던지고 가는 사람이 성화의 절정을 경험하고 가는 거예요. 뭐 대단한 거 하려고 하지 마세요. 하느님이 얼마나 크신분이신지만 여러분의 삶 속에서 드러내고 가시면 되는 겁니다.

 

사도 베드로가 "저는 예수님 따라 죽겠습니다." 그러죠. "죽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 그럽니까? "니가 나를 위해, 니 의지대로 의지를 발동하여 죽겠단 말이야?" 자기부인 하겠다는 거거든요? 자기부인의 극치. 죽음 아닙니까.. 예수를 위한 죽음. "죽겠습니다." 그럴 때 뭐라 그래요. '니가 오늘 세 번 나를 부인할 거야.' ' 니가 나를 부인할 거야...' ^ ㅎㅎㅎ 그것도 세 번.

"철저하게"라는 뜻이거든요? 세 번이라는 건. 사도 바울이 세 번 기도했다, 라는 건 죽으라고 기도했다는 뜻이에요. 딱 세 번 기도했다는 게 아니라. 그 질병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하느님께 세 번 기도했다고 하겠어요. 끊임없이 마음속에 '아이고.. 이거 좀 하느님이 고쳐줬으면 좋겠다'라고 마음먹었을 거 아니에요, 그게 기도잖아요. 근데 무슨 세 번이란 숫자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죽으라고 기도했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완벽하게 부인했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힘으로는 안된단 뜻입니다, 그게요.

여러분, 왜 그전에 제자들이 세 번 깨웠는데 계속 잤는 줄 아세요? 잠은 뭐예요. 성경에서. 메타포하는 거예요? 죽음이에요. 왜 굳이 고 때 자요? 뭘 먹었다고. 포도주를 너무 많이 먹었나? 그날 저녁때? 왜 고 때 자냐고요? "제자들아! 너희들은 이렇게 죽어있는 자들이란다. 내가 세 번을 깨웠는데도 못 일어나는 자들이란 말이야."

마지막에 뭐라 그래요? 물을 갖다 확 끼얹는 게 아니라 "이제 자고 쉬어라." . "내가 일해야 된다. 너희들의 처지가 이 모양이기 때문에 내가 일해야 되는 거야. . . ." 우리의 모습을 폭로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피가 그대로 덮는 거예요.

그렇게 덮으니까 어떻게 돼요. 나중에는 베드로가 진짜 예수를 위해 죽는데 어떤 방식으로 예수에 의해 죽냐면? 아니, 예수를 위해 죽냐면? 밖에서 어떤 이가 띠를 띠우고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거예요. 그게 성령에 의한 자기부인이에요.

 

잘난 척들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 끊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중독? 천만의 말씀. , 담배, 오락, 심지어 티브이 연속극 보는 거. 맘대로 끊어지던가요? 여러분, 세상, 하느님 이외에 우리가 세상 다른 것에 내 마음을 빼앗기는 걸 죄라고 하거든요? 근데 그 죄의 권세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가 찾아왔다가 하느님에 의해 그가 밀려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죠?

그러면 중독이라는 거 자체를 생각해 보세요. 내가 아직 술을 못 끊었어요, 담배를 못 끊었어요. "의지가 이것밖에 안되냐?! 예수 믿고 아직 그 정도도 못 끊어?!" 아니오. 담배는 내가 피우고 내가 끊는 게 아니라 담배가 찾아왔다가 걔가 떠나야 끊을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걸 못 끊는 걸 경험하면서 "! 얘가 찾아왔다가 떠나지 않으면 나는 아무, 아무런 노력과 열심을 부릴 수 없는 먼지구나."를 배우는 거예요, 오히려.

, 담배를 하고 안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들 뭔가에 중독돼 있잖아요. "그래도 술은 나쁜 거잖아요." 천만의 말씀. 여러분이 먹는 건 다 독이에요. 그래서 간이 있는 거예요, 해독하라고. 뭐가 나쁜 거고 뭐가 좋은 겁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몇 가지 착한 행실, 바른 행실 내어놓고 하느님 앞에 잘난 척하는 거 아니에요. 오히려 그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폭로 당하면서 "하느님, 이제 하느님이 사세요. 저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잖아요. 하느님이 사세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네요." 깨닫고 무력해지는 거예요.

무력해지면 질수록 세상에 대한 욕심이 밀려나는 것입니다. 근데 전부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까 그냥 욕심도 점점 커져.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욕심이 점점 커져.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의해 그리고 그 십자가 은혜의 폭력성에 의해 우리는 점점 부인되다가 결국 우리의 자아가 죽고 우리의 자아가 죽으면 거기서 뭐가 태어나요? 예수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가 '아들'을 얻는 거예요. " 여자여, 당신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십자가 앞에서 새로운 가족이 형성되고 그 여자에게 아들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 여자는 누구?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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