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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5주일]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마르9,30-3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19 조회수2,71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9월 19일 주일

[연중 제25주일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마르9,30-37)

 

1독서<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지혜2,12.17-20)

악인들이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화답송 시편 54(53),3-4.5.6과 8(◎ 6)

◎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 하느님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당신 권능으로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하느님제 기도를 들으시고제 입이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 이방인들이 제게 맞서 일어나고포악한 자들이 제 목숨을 노리나이다그들은 하느님이 안중에도 없나이다

○ 보라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주님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2독서 <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야고3,16-4,3)

16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4,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마르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중 제25주일 제1독서 (지혜2,12.17-20)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그에게 수치스런 죽음을 내리자." (18~20)

 

지혜서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고칠십인역(LXX; Septuaginta; 희랍어로 쓰여진 구약 성경)에만 나오므로 제2경전(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분류한다.

2경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어(희랍어헬라어)로 저작된 책은 지혜서와 마카베오 2권뿐이다.

 

지혜서의 저작 연대는 B.C. 50~3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이 쓴 것으로 보인다.

유대교 사상가인 필로에 의하면, A.D.1세기 초에 이집트에는 100만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좀 과장된 숫자이겠지만이집트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유다 백성들각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교포들이 사는 곳을 말함)유대인들이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지혜서는 철학윤리신학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된 갖가지 주제들을 다룬 소품 모음집이다.

 

저자의 집필 목적은 이집트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헬레니즘 문화가 압도하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와 그 부근에 살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유대교의 정통교리를 다른 문화에 어떻게 적용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토착화(Inculturation)작업의 일환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혜서 저자는 유대교 전통을 거의 모르는 그리스인들과 저자 자신처럼 히브리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헬레니즘에 익숙한 유다인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사상과 비교하여 유대교 관습과 사상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헬레니즘에서 기원한 우상 숭배와 물질주의적 인생관에 맞서서 유대교의 전통적 믿음과 교리를 수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깨워 준다.

 

지혜서는 크게 세 부분종말의 숙고(1~5), 지혜의 찬가(6~9), 역사의 숙고(10~19)로 나눈다.

첫째 종말의 숙고(1~5)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전지(全知)하심을 강조한다.

둘째 지혜의 찬가(6~9)에서 임금과 권력자들에게 하는 권고지혜서 7장 22~23절에 나오는 지혜의 정신에 담긴 정신의 특성 21가지(완전을 뜻하는 7의 3배수;매우 완전한 숫자), 지혜를 청하는 기도(9)등이 나온다.

 

마지막 세째 부분(10~19)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지혜서10장에서는 원조들과 성조들의 이야기, 10장 15~11장 20절에는 이집트 탈출 사건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높이 기리는 찬미가(11,26; 구원의 보편주의), 가나안 정복자연우상동물 숭배의 어리석음(13~15),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광야에서의 시련(16~19)을 두서없이 열거한다.

 

지혜서에는 특히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돋보이는데 '의인들의 불사 불멸'과 '지혜의 의인화'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전통적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의롭게 살고도 현세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의인들은 비록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더라도하느님 마음에 들어 죽은 다음에 하느님 곁에서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서 저자가 희망하는 것은 죽은 의인의 부활(復活)이 아니라 의로운 영혼의 불사불멸(不死不滅)이다.

 

한편 지혜서에 묘사된 '인격적 지혜'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의 '은총'개념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육화된 말씀'과도 상통한다.

인격적 지혜'를 성령이나 성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시도이지만 어쨌든 지혜서에서 신약성경의 삼위일체 신학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던지는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하느님께서 전지(全知)하시고 전선(全善)하시고 전능(全能)하신데왜 이 세상에 악()이 범람하는가전선(全善)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왜 악()을 허락(허용)하시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참으로 법()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분이 너무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당하고불의의 사고나 불치병으로 일찍 죽는지하는 것이다.

동시에 끊임없이 나쁘고 못된 짓을 하며천상천하(天上天下유아독존(唯我獨存)처럼 살아 천벌(天罰)을 받아 마땅한 놈이 너무나 현세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잘되는 것을 보면()은 과연 계시는가도대체 신()의 공의(公義), 정의(正義)는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던지면서 불신앙과 회의를 품게 된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소위 신정론(神正論)이라 일컬었다.

 

일찌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다 더 큰 을 위해서보다 더 큰 을 예방하기 위해서전지(全知)하시고 전선(全善)하신 하느님께서 악()을 허락하신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攝理)안에서 고찰할 것을 설파했다.

 

오늘 지혜서 2장에서는 바로 이러한 신정론(神正論)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지혜서 3장이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전통적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永遠; eternity)에 비교하면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점()에 지나지 않고잠깐 지나가는 이승의 삶을 마치면 반드시 심판이 있고그때에는 종말론적 자리바꿈(자리 전도)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공의(公義)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지상에서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 세워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당신의 말씀과 계명에 충실한 이들에게 당신이 약속하신 상급을 반드시 주시며 의로운 영혼은 결코 불사불멸하지 않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선행에는 상급을 내려 주시고악행에는 벌을 주시는 공의(公義)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불의하고 죄짓고 자신이 신()이 되어 안하무인(眼下無人; overbearance) 으로 이승에서 맘대로 산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영원한 심판과 지옥벌로 갚아 주시어 당신의 의()를 바로 세우시며당신의 생명의 말씀이 진실되다는 것을 입증하시고당신이 천상천하(天上天下)의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잠깐 살다가 육신 생명을 마치지만불의와 불법거짓과 오류무지와 폭력에 맞서서 하느님의 진리와 의()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순교를 통해 그 목숨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 순교자들처럼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불의와 절망과 억울한 고통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천국의 영원한 복락과 내세(來世)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성으로는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고문과 박해와 죽음 속에서도믿음을 가진 의인들은 내세(來世)의 영원한 복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자에게 약속된 선물과하느님을 지복지관(至福直觀)하며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축복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연중 제25주간 2독서 (야고 3,16-4.3)

 

 16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16-18)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6)

 

모진 시기와 이기심이 생산해 내는 해악의 결과들은 혼란과 온갖 악행이다. '혼란'으로 번역된 '아카타스타시아'(akatastasia)는 '무질서한 상태', '불안정', '혼동', '요란'이란 뜻의 명사이다. 여기에는 마음의 평정이 없으며, 일관된 언어가 없어, 결국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혼란과 다툼을 초래한다.

 

'온갖 악행'에서 '악한'으로 번역된 '파울론'(phaulon)의 원형 '파울로스'(phaulos)는 '나쁜', '악한', '무가치한'이란 뜻을 가진 '카코스'(kakos)와 동일한 뜻으로, 여기서는 공동체의 조화와 평화를 깨트리는 악한 면을 지칭한다.

따라서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간에 심지어 교회일지라도, 그곳에는 필연적으로 평화를 깨뜨리는 무질서와 파멸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17-18)

 

이제 세속적이고 현세적이고 악마적인 지혜와 대립되는 '위에서 오는 지혜'가 어떤 것인지, 또 그 지혜가 어떤 열매를 가져 오는지를 진술한다.

 

우선 '위에서 오는'으로 번역된 '아노텐'(anothen)은 이 땅에 근거를 두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요한3,3.7 ; 19,11 ; 야고1,17) 따라서 '위에서 오는 지혜'는 하느님의 지혜로서, 세상으로부터의 지혜와는 정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사로서의 이 지혜는 교회를 위한 축복의 열매를 맺도록 한다.

 

야고보 바오로가 말한 성령의 9가지 열매(갈라5,22-23)와 유사하게, 하느님께서 난 지혜의 8가지 구체적인 특성을 나열하고 있다.

① 순수 ; '하그노스'(hagnos)는 '순결한', '순수한'(pure)이란 뜻으로, 부정하거나 더럽지 않음과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하느님의 선명하고 분명한 말씀을 왜곡없이 따르며, 하느님 앞에 항상 동일한 모습만을 견지한다.

 

② 평화 ; '에이레니코스'(eirenikos)는 '평온한', '평화로운'이란 뜻으로,  신약 성경에서 여기와 히브리서 12,11에서만 발견된다.   '혼란'으로부터 나온  세상의 지혜와 대비된다.

 

③ 관대 ; '에피에이케스'(epieikes)는'온화한', '온순한', 공정한'이란 뜻으로,  세상의 지혜를 가진 독선적이며, 오만한 사람의 마음과 달리,  참을성과 이해심이 많고, 관대하며 친절한 마음을 의미한다.

 

④ 유순 ; '유페이데스'(eupeides)는'복종하다'에서 유래되어, '쉽게 순종하는', '고분고분한'이란 뜻이다. 이것은 거칠고  완고한 것과는 반대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온당하고 유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⑤ 자비 ; '엘레오스'(eleos)는 고통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동정심'이란 뜻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불쌍한 마음으로 자비와 동정심을 아끼지 않는다. 냉정과 냉랭함이 그 반대이다.

 

 ⑥ 좋은 열매 ; '자비'의 결과를 나타나는 '구제'(자선)로 이해할 수 있다.

 

 ⑦ 편견이 없는 ; '아디아크리토스'(adiakritos)는 부정 접두어 '아'(a)와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디아크리노'(diakr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구별되지 않는'이란 뜻이다. 사람의 외관만을 보고 판단하거나 공정성을 잃은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⑧ 위선이 없는 ; '아뉘포크리토스'(anipokritos)는 부정 불변사 '아'(a)와 '~체하다'라는 뜻의  '휘포크리노마이'(hypokrinoma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거짓없는', '진실한',  '있는 그대로', '숨김없는'이란 뜻을 지닌다.   바리사인들처럼 위선을 행치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8가지의 위로부터 난 지혜는 교회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한다.

 

우리 교우들이 세상의 지혜를 멀리하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지혜를 가까이 한다면, 이런 믿음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열매를 맺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지혜와 총명을 지닌 자로서, 교사의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18)

 

야고보는 17절의 지혜의 특성 가운데 '평화'(에이레네; eirene)의 덕목을 다시 강조하면서 본 장을 마무리한다. 이 평화는 다툼과 싸움과 분쟁과 요란이라는 세상적 지혜의 모습에 대조적인 속성이며, 그런 악의 열매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교회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것으로서, 하늘에서 난 지혜의 여러 특징을 아우르는 덕이다.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의로움의 열매를 거둔다. '의로움의 열매' 번역된 '카르포스'(열매) 디카이오쉬데스'(karpos dikaiosynes)의 개념은 17절의 위에서 오는 지혜에 속한 모든 특징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런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려 하는 자에 의해서 심겨진 평화의 씨로 만들어진다. 평화는 14절에서 언급된 시기와 이기심과 16절에서 언급된 혼란과 온갖 악행의 상태와 상반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소란한 일들이 가득하기 보다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의 열매, 즉 의로움의 열매인 평화가 감돌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 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마태5,9)

 

 

2012년 9월 23일 연중 제25주일

 

가진 자가 모든 이의 종이 되는 사랑의 사회

 

과거 고대인들은 야생에서 식량과 땅을 빼앗기 위해 서로를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것은 권력을 탐해서가 아니라 생존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사회가 형성되면서 계급과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권한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많은 이익을 갖습니다. 반면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불이익을 당할 때가 많지만 더 잃는 것이 두려워 불평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 더 많은 돈을 가지기 위해 전력 질주합니다. 

누구나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누구나 가장 큰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경쟁 사회 속에서 나와 같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도전해야 할 대상, 제거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지위를 가지려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사회의 지위가 역전되는 혁명과 같은 것입니다. 

우두머리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종이 되고, 제일 끝에 앉아 밥을 먹고 가장 겸손한 자리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제일 나약한 사람이 가장 존중 받는 사람, 소외되고 굶주린 사람이 가장 존중 받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무혈혁명, 사랑의 혁명입니다.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진정한 사랑의 사회로 변화되는 혁명입니다. 

윗 사람이지만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습니다. 

세계가 변화되려면 권리를 위한 투쟁보다는 ‘특권을 포기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만 새로운 문명, 진정한 평등의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서로가 경쟁 상대, 제거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형제 자매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서로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된다면 더 이상 서로를 헐뜯고 짓밟는 일 없이 사랑만이 존재하고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서로를 도와줄 수 있는 지 입니다.

 강한 사람은 나약한 사람을 이끌고 큰 사람은 작은 사람을 위해 무릎을 굽힐 것입니다.

권력은 권한을 가진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지위란 단지 업무와 책임을 분배할 때만이 합리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각자 주어진 일은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낮추시어 우리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습니다. 모든 권한을 지니신 분이지만 스스로 순종하셨습니다. 스승이시지만 스스로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한을 가진 가장 존귀한 분이시지만 어떤 특권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조차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주 작고 나약한 어린아이 모습으로, 그리고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가장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가장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겸손을 따르는 새로운 사회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나약한 사람은 돌봄을 받아야 하는 관심의 대상이고, 가난한 사람은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된다면 더 이상 충돌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형제애로 뭉친 사랑의 단결만이 있을 뿐입니다. 

힘과 재산, 권한은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짓밟는 수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리더란 더 이상 권한을 가진 자리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을 돌보아야만 하는 많은 짐을 진 자리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실로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지만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가르치심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키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고 아직도 나약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줄 여유가 없습니다. 

어쩌면 나는 주님의 자녀이면서도 아버지의 길과 다른 권력의 사회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길과 멀어져 가고 있는 자녀들이 다시금 주님의 길로 돌아올 것을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스스로 작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위를 놓아버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가지십시오. 이 세상의 소외된 사람들이 따뜻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한번만 더 눈길을 주십시오.

나의 작은 행동, 따뜻한 마음이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도 주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주님, 아버지이신 주님과 멀리 떨어져 가고 있는 저희가 아버지 주님의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버지의 사랑을 닮게 하여주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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