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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왜 못 알아들을까 2 (루가16;27-3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19 조회수2,333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9. 19. 도란도란글방

 

비유 24. 왜 못 알아들을까 2 (루가16;27-31)

 

(루가16;27-31)

27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29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 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31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제가 짧은 영상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됐습니다. 뭐 더 볼 필요도 없어요. 자 한국에 아주 유명한 기도원에서 매일같이 있는 일입니다. 미국에서도 또 어떤 무당들이 또 원정까지 가서 저 짓들을 지금 하고 있는데 이게 바로 신유 은사 집회의 한 장면이에요. 강사가 방언을 하면서 예언도 해주고 돌아다니면서 병도 고쳐주는 그런 양상입니다. 그리고 집회 내내 기쁨 조이를 외쳐요. 그리고 영광 글로리를 외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정말 기쁨으로 보이십니까? 여기에서 어떤 영광이 보이세요? 여러분의 눈에는 이 사람들이 정말 복음을 알아들은 사람들로 보이십니까?

 

우리는 지난시간에 부자와 거지 나자로의 비유를 통해서 왜 부자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으며 거지 나자로는 어떤 이유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가능성과 기대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인정하지 못한 채 지옥에 가게 된 거고요. 거지 나자로는 그의 행위와 관계없이 하느님의 도우심 즉 하느님의 은혜(恩惠)에 의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된 거라 했습니다. 나자로라는 이름의 뜻이 하느님의 도우심이에요..

우리는 그러한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도 천국에 가기 위해 거지 나자로처럼 살자'라는 선동적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도(聖徒)는 거지 나자로처럼 살아서 천국에 가는게 아니라 끝까지 부자로만 살고 싶은 자기의 모습을 은혜로 덮으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서 그야말로 면목없는 거지처럼 천국에 들어가는 것임을 배워야 하는 거죠.

그러한 천국의 거지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저주받을 부자가 되고 싶은 부자지향성. 여기에서 부자라는 것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싶다라는 그런 부자 아니라 그랬습니다. 이 부자지향성을 계속해서 들키고 폭로당하면서 이 세상의 허황됨과 심심함을 깨달아 가게 되는 거고요. 하느님의 철장(鐵杖)에 의해서 이 세상의 힘을 하나하나 털리는 삶을 살게 되는 거라 그랬죠.

그렇게 해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 은혜가 아니면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며 그러한 신기루들이 영원히 자신들의 신기루됨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들만을 위해서 살게 되는 그 고정되는 이 땅의 세상. 지옥은 모든 존재가 자기만을 위해서 살거든요.

그걸 하느님이 언젠가 확 고정시켜 버려요. 땅을 그걸 지옥(地獄)이라고 하는 거죠. 고정된 땅, 땅의 세계. 그걸 알게 되는 이들이 거지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전히 인간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한 채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인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하느님의 은혜의 필연성에 전혀 동의하지 못하고, '왜 내가 은혜를 받아야 돼? 왜 나에게 십자가가 필요해?' 이렇게 하느님의 그 은혜의 필연성에 전혀 동의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과 그 세상의 힘에 의존하여 죽어서도 자기 것만을 챙기는 자들... 이걸 부자라고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을 보면. 지옥에 있는 부자가 천국의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하는 장면이 나오죠? 자기는 이렇게 지옥에 와 있지만 자기 형제들은 절대로 이 지옥에 오면 안 되니까 나자로를 살려 보내서 그들에게 전도(傳道)를 하게 해달라 그래요. 굉장히 기특한 부탁이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가 그들에게 있으므로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기회가 있다라고 말을 해요.

그러나 그들이 모세와 예언서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나자로가 살아 내려가도 그들은 절대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거예요. 지금 기적(奇蹟)과 말씀이 동시에 딱 떠오르는 건데요. 기적에 의해서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자 모세와 예언서가 도대체 뭔지 한번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 보자고요.

 

(루가24,27) 27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가 누구에 대해 기록돼있는 거예요? 예수에 대해 기록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말하는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란 구약성경을 비롯한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계시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에요.

하느님에 대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계시, 즉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서 하느님의 계시를 알아들을 귀를 얻지 못하면 그 어떤 눈에 보이는 기적들과 행위들이 주어진다고 해도 절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죽는 날까지 그 기적을 경험한다고 해도...

그래서 오늘 본문에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라는 보이지 않는 그 계시(啓示)의 말씀과 죽은 나자로의 귀환(歸還)이라는 눈에 보이는 기적이 대조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세상의 부자들은 기적을 원하지만 하느님은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거예요. 우리는 죽는 날까지 기적을 구해요. 그게 부자지향성이에요. 내 삶 속에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기적이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기적이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성경공부를 해요.

쉬운 말로 하느님의 계시는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만 주어지고 이해되어진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 하느님에 계시가 눈에 보이는 세상적 방법론에 의해서 전해질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러한 인본주의적 사고가 바로 지옥에 갈 부자들의 사고라는 거예요. 그것이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그 사유의 폭 안에서 진리는 이해되어질 수도 있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는 저주받을 인간 중심의 사고인 것입니다.

기적이 보여지면 사람들은 그의 경험과 이성과 사유의 폭 안에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기적을 보내주세요. 이게 바로 저주받을 마귀의 사고인 거예요. 지금 부자가 그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바로 그러한 타락한 죄인들의 유대주의적이며 인본주의적인 그 발상을 부자지향적 발상을 아주 유효적절하게 사용해서 교회를 혼란시킵니다.

 

(2데살2,9-12) 9 그 악한 자는 나타나서 사탄의 힘을 빌어 온갖 종류의 거짓된 기적과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행할 것입니다. 10 그리고 온갖 악랄한 속임수를 다 써서 사람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진리를 받아 들이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11 하느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혼미한 마음을 주시어 거짓된 것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12 결국 진리를 믿지 않고 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단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멸망하는 자들에게 무엇이 임한다고요? 기적과 표적과 능력이 임한다 말입니다. 멸망하는 자들에게. 구원 못 받은 자들은 반드시 기적에 던져지게 되어 있어요. 부자지향적 삶으로 던져지게 되었다 말입니다.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한다 말이에요. 기적과 능력을 줘 버린다 말입니다.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누가? 하느님이 기적에 던져서 '거짓 거 믿어라 그래 믿어. 죽는 날까지 기적 기적하다가 와 믿어' 하느님이 하신다는 거예요. 왜요? 어차피 구원 못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심판(審判)을 받게 하려고 기적(奇蹟)과 능력(能力)과 표적(標的)을 쫓게 한다는 뜻이에요.

마태복음 722절에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고 사람들이에요.

12절을 보면. 그렇게 심판을 받을 자들은 기적을 쫓으며 진리(眞理)를 믿지 않는다 그랬는데, 그렇다면 진리를 믿는 건 뭐예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죠. 그러면 진리를 믿는게 뭐예요?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을 받아 기적과 이적과 표적과 능력을 쫓다가 지옥에 가게 되는데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건 뭐냐 말이에요?

진리를 믿는다는 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의 은혜(恩惠)에 의해서 주어지고 진행되며 완료(完了)된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福音)을 믿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 이게 진리를 믿는 거예요.

 

그러면 속으로 '어 나도 그거 믿는데' 끝까지 잘 들어 보세요. 여러분이 진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지 한번 끝까지 잘 들어보세요.

십자가 복음은 인간 측에서의 가능성과 업적과 공로 그리고 눈에 보이는 체험과 경험과 증거를 중시하는 그러한 힘의 원리 속의 세상적 기준을 완전히 다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 복음입니다. 은혜의 복음이에요. 그게 바로 지옥에 갈 부자들의 세상이며 부자들의 방법론이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은 그걸 부정해 버려요.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눈에 보이는 기적(奇蹟)과 이적(異蹟)이 보이는 곳에는 절대 가지 말아라라고 부탁하신 거예요.

 

(마르13,21-23) 21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해도 믿지 말아라. 22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어떻게 해서라도 뽑힌 사람들을 속이려고 여러 가지 기적과 이상한 일들을 할 것이다. 23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내가 이렇게 미리 말해 둔다. 그러니 조심하여라.'

 

피스튀오 라는 단어가 나와요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걸 믿는 자들이 있다라는 거예요. 믿고서 이게 진짜 믿음이다라고 착각하는 자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는 믿음에 쓰이는 피스티오라는 단어가 여기 나오는 거예요.

내가 너희에게 미리 다 말했는데 그래도 너희는 갈 거야. 그래도 너희는 갈 거야. 죽는 날까지 부자로 살 거니까. 너희들은 그래도 너희는 갈 거야 이런 뜻이에요. 내가 미리 말했는데 그래도 갈 거야.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 자체가요.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를 모른다라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를 몰라요. 그리스도교는 종교(宗敎)가 아닙니다. 종교는 선악과를 따먹은 욕망하는 죄인들이 만들어낸 아주 교활하고 이기적인 세상살이의 방법론에 불과한 거예요. 그게 종교에요.

그리스도교는 그런 세상살이의 방법론 아닙니다. 종교 아니에요.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는 삶을 살도록 지어졌어요. 그게 피조물이라는 단어의 뜻이에요. 그렇게 한 분 하느님에 의해서 통치가 되고 하느님이 통치하시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것들과의 그 관계 속에서 바로 그 통치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는 거예요. 그 통치(統治) 자체가 하느님 나라란 말입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선악과(善惡果)라는 금단(禁斷)의 열매를 따먹어 버렸어요. 그리고는 자기 자신들의 가치기준과 세계관에 의해서 모든 선악의 판단을 스스로가 내려 버리는 통치자가 된 거예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인간이 통치자(統治者)가 되어 버린 거예요.

 

인간의 역사를 한번 보세요. 인간의 역사는 마치 욕망하는 인간들의 그 탐욕스러운 욕망의 배설물처럼 보여지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다른 피조물들과 인간의 차이를 역사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세요. 자연은 하느님의 뜻에 언제나 순응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비를 주시면 비를 맞고 열매를 맺어요. 짐승들 먹을 거 안 주면 그냥 굶어 죽습니다. 자연은요 하느님께서 가뭄을 주시면 그냥 그 뜻에 순응하여 말라죽고 목말라 죽어요. 그게 피조물이에요. 그게 그걸 순종(順從)이라고 그래요. 죽어 하면 죽어야 돼요.

유독 인간만이 홍수를 피하겠다고 제방을 쌓고 배를 만들고, 가뭄을 이겨보겠다고 저수지를 만들고 기우제를 지내고, 벼락을 피하겠다고 피뢰침을 만듭니다. 이걸 문명이라고 그래요. 카인의 후예들이 만든 그 문명이 바로 그겁니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다는 욕망하는 인간들이 문명을 만들고요. 그 문명을 돈을 받고 팔아가면서 그게 세상이에요. 문명을 파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진화하고 진보하는 인생과 역사다라고 우기는 현장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모든 인간은 욕망하는 인간 집단이 만들어낸 문명을 사느라고 이 고생을 하는 거예요. 그냥 하느님께 순종을 하면 되는데 하느님께 순종할 수 없다고 문명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그 문명을 서로 사고파는 것. 거기에 올인하는게 인간의 인생이에요. 신기루에요. 신기루 없어도 되는걸 만들어서 그걸 굳이 팔고 그걸 얻어내겠다고 자기의 평생을 올인하는게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게 역사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삶이 역사가 다 허상(虛想)인 거예요. 신기루인 거예요. 세탁기, 티브이, 핸드폰, 자동차, 아파트 언제부터 이게 필요하게 됐죠? 그게 없으면 정말 여러분 못 삽니까? 그런데 누군가가 이런 걸 만들어 놓고 '이게 없으면 문명인 아니야'라고 이야기했더니 전부 그걸 사려고 보다 좋은 문명을 사려고 자기의 평생을 허비하는 거예요. 이게 죽어있는 좀비들의 세상인 것입니다..

 

그렇게 현실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면서 미래의 되고 싶은 나! 그 되고 싶은 나에 대한 집념과 추구를 성경이 뭐라 그런다 그랬어요? 탐심(貪心)이라고 한다 그랬죠. 아직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았는데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미래의 되고 싶은 나를 향한 추구! 이게 탐심(貪心)이에요. 마음이에요. 마음만 먹었는데 하느님이 그걸 우상숭배(偶像崇拜)라고 하잖아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그게 죄()래요.

그러니 우리는 전부 죄인(罪人)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느님의 은혜가 의()의 은혜가 우리를 덮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그렇게 죽는 거예요. 허상을 쫓다가...

그렇게 나에 대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자들을 이 세상 부자라고 하는 거고, 그들은 자신들의 되고 싶은 미래에 대한 그 불안과 공포와 무기력함에 대한 대안으로 자기보다 월등하게 힘이 센 존재인 신이라는 것을 찾아 조작하기 시작해요. 자기가 원하는 신으로 조작합니다.

세상의 부자들은 신에 대한 종교의식을 행하고요. 사실은 그게 자기에 대한 종교의식이에요. 뿌리를 찾아 들어가 보면... 그렇게 종교의식을 행하고 그 신에게 헌물과 헌금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그 신을 달래죠. 무당들 푸닥거리하는 거 보셨어요? 굿하고 푸닥거리는 다릅니다. 푸닥거리는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굿은 무당만 하지만...

 

베트남 식당이나 중국인 식당 앞에 가보면 사과 같은 거 이렇게 몇 개 닦아서 놓죠? 그걸 푸닥거리라고 하는 거예요. 이거 먹고 우리 괴롭히지 말라는 거예요. 아 정말 인간들이 아니 제대로 된 상도 못 받고 그 대문 앞에 이렇게 놓여진 그 사과나 주워 먹고 가는 그 신한테 쩔쩔 매는게 인간이라니깐요.

그런 것들이 뭘 도와준다고 걔네들을 매일 달래고 있어요. 그걸 푸닥거리라고 그래요. 여러분 지속적으로 신을 달래요. 그걸 치성이라고도 하죠. 렇게 해서 신의 보호와 되고 싶은 나에 대한 그 성취의 도움을 구하는 거예요.

그렇게 했는데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성취가 주어지지 않을 때 인간들은 종교행위에 강도를 더 높이죠. 기도를 더 많이 한다던지, 헌금을 더 많이 한다던지 강도를 더 높여요. 그래서 달래요. ? 내가 원하는걸 얻어내기 위해서... 요걸 종교라고 하는 거예요.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뭐가 달라요? 종교와 그리스도교를 분별을 못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종교의 중심에는 항상 누가 있어요? ‘나예요. 신이에요?.’ ‘무당이에요. 나예요?’. ‘!’ 신을 달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려고 하는게 신을 숭배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여 얻어내려고 하는 고것을 숭배하는 거예요. 이걸 얻어내기 위해 신을 달래는 거니까...

이 신()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돼요. 나는 사실 내가 얻어내려고 하는 것을 숭배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나란 말입니다. 자아 성취(成就), 자아 실현(實現). 그런 면에서 세상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신은 장난감에 불과한 거예요.

 

여러분 장난감을 섬기기 위해 사는 사람 있어요? 갖고 놀기 위해 사죠? 나의 만족을 위해 삽니다. 그리고 이게 싫증이 나면 어때요? 버려요. 필요 없으니까... 인간들은 신을 그렇게 여겨요. 장난감은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돼있는 거예요.

그래서 포이에르 바흐가 '신은 인간 욕망의 투사이다'라고 이야기한건 일견 옳아 보여요. 포이에르 바흐의 신학이 옳다는거 아니에요. 그 사람은 이단입니다. 인간들은 신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지속적으로 조작해낸다는 거예요. 인간 욕망의 투사.

그러니까 오늘날도 신은 계속 진화하고 변한다라는 거죠. 이게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한 자신들의 종교성을 들킨 적이 있었죠. 하느님을 섬긴다고 했는데 실지로는 아니었던 거. 금송아지 사건이잖아요. 이스라엘이 나는 하느님을 섬겨요.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하느님을 사랑해요.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는데 하느님께서 '그래? 그러면 니들 마음속에 있는 그 하느님을 한번 만들어 봐' 기회를 줬습니다. 그랬더니 귀걸이들을 다 뽑았습니다.

여러분 창세기에서 야곱이 상수리나무 아래의 우상들을 묻을 때 뭘 묻죠? 귀걸이를 뽑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귀걸이를 수호신 내지는 우상으로 갖고 있었어요. 귀걸이를 뽑아서 하느님을 만들었는데 금송아지를 만들어 냈어요. 그게 함의 후예인 애굽과, 가나안의 후예인 가나안의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송아지가...

그러니까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결국은 나를 섬긴 거예요. 이게 부자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자기들이 부자지향적 인간들이라는 걸 들켜버린 거예요. '내가 부자구나' 이걸 들켜 버린 거예요. 금송아지 만들어 놓고, 이게 송아지다 그러지 않고 '이게 애굽에서 우리를 구원한 하느님, 야훼 하느님이다' 그랬잖아요.

오늘날 교회가 똑같이 그렇게 믿고 있다니깐요. 금송아지 믿고 있으면서 결국 자기를 위해 하느님을 달래고 있으면서 자기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착각(錯覺)하는 거예요. 그래서 병() 안 고쳐주면 화()내고, 부자(富者) 안 만들어주면 삐지고 이러는 거예요. 자기(自己) 믿는 겁니다. 그건요.

 

여러분 아까 서두에 보신 동영상에서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해서 그런 발광을 떨었을까요? 거기서 하루에 거치는 헌금이 하루에 수천만원입니다. 왜 그렇게 돈을 싸 짊어지고 그런 것들을 경험하고 싶어 할까요? 거품 물고 쓰러지고 벌벌 떨고 이상한 소리로 쏼라대고 왜 그럴까요? 내가 원하는거 얻어내기 위해서에요.

병 고쳐주세요, 자식새끼 잘 되게 해주세요, 부자되게 해주세요. 아니 하나님 사랑합니다 그러는데 거품 물고 사랑합니다. 그러는데 하느님이 얼마나 당황하시겠어요? 예 맨정신에 하세요. 그런 거는... 아니 그런 뚱뚱한 아줌마들이 거기 누워서 벌벌 떨면서 사랑합니다. 그래요. 맨정신에 단정하게 앉아서 고백을 하지... 그거 다 무당 굿하는 겁니다.

여러분 하느님은 그러한 인간의 종교성 다른 말로 부자지향성을 칼로 부수어 버리세요. 하느님은 그 자리에서 그들이 부자로 딱 판별이 되자, 그 자리에서 삼천 명을 칼로 도륙해 버립니다. 죽여 버려요.

 

(출애32,1-4) 1 백성은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 오지 않자, 아론에게 몰려와 청하였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에짚 트에서 데려 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2 아론이 그들에게 '너희 아내와 아들 딸의 귀에 걸린 금고리를 나에게 가져오라.' 하고 대답하자 3 백성이 모두 저희 귀에 걸린 금고리를 떼어 아론에게 가져왔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수송아지 신상을 부어 만들자 모두들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에짚트에서 데려 내 온 우리의 신이다.'

 

제사장이라는 놈부터 이렇잖아요. 다 부자예요.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은 전부 부자예요. 죽는 날까지 부자예요. 하느님의 은혜가 그들을 덮어서 그들 중 일부를 건져내는 것 뿐입니다. 전부 나죠? . 우리. 우리. 우리. 나예요. 여기에서 어디 하느님이 나와요? 그들에게 어떤 벌을 내리는지 보십시오.

 

(출애32,26-28) 26 모세는 진지 어귀에 서서, 야훼의 편에 설 사람은 다 나서라고 외치자 레위 후손들이 다 모여 왔다. 27 모세가 그들에게 일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명하신다. '모두들 허리에 칼을 차고 진지 이 문에서 저문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형제든 친구든 이웃이든 닥치는 대로 찔러 죽여라.'' 28 레위 후손들은 모세의 명령대로 하였다. 그 날 백성 중에 맞아 죽은 자가 삼천 명 가량이나 되었다.

 

하느님의 진노(震怒)3천 명이 도륙 당해요. 이때가 이스라엘이 과월절의 기적을 통해서 애굽을 나온지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로 과월절로 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무슨 날? 오순절이잖아요. 그렇죠. 오순절.

그러니까 구약 최초의 오순절에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그들의 죄를 향한 하느님의 진노에 의해 삼천 명이 도륙당하는 거예요. 이걸 율법(律法)이라 그래요. 이게 구약(舊約)이에요. ()를 지으면 죽어야 돼요. 구약이에요. 이게 그런데 왜 죽었어요? 하느님을 못 알아본 거예요. 자기의 부자지향성 때문에... 자기들이 그 자기의 존재성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못 알아보고 엉뚱한 풍요(豊饒)의 신()을 하느님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죽은 거예요.

 

그런데 이 사건 안에 모세라는 중보자의 모형이 등장하죠. 하느님이 모세에게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랬더니 모세가 '아니요 하느님 그러면 하느님이 어떻게 됩니까? 하느님이 끌고 나와서 하느님이 죽이면 하느님이 어떻게 됩니까?'하고 막아서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게 모세예요.

그게 누구의 모형이겠어요? 예수의 모형이라 말입니다. 고것이... 바로 신약으로 넘어와서 이제 성취가 되는 거예요. 그 중보자에 의해 요렇게 죽어야 할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신약으로 가면 똑같은 오순절날 신약의 오순절날 죽었던 3천 명이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나죠?

 

(사도2,38-41) 38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셨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39 이것은 우리 주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곧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그들을 설득시키고 이 사악한 세대가 받을 벌을 면하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41 그들은 베드로의 말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 날에 새로 신도가된 사람은 무려 삼천 명이나 되었다.

 

오순절 날이에요. 하늘의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전히 자기 자신들을 우상(偶像) 삼아 살고 있는 이 세상 부자들에게 너희는 너희 자신을 우상 삼아 살고 있는 금송아지 만든 죄인이니까 회개(悔改)하라 그랬어요. 너무너무 착하게 살고 있었고 너무너무 종교행위 열심히 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바로 금송아지 만든 죄인이니까 회개하라 그랬단 말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자 이 세상이 전부 합의를 해서 그 예수를 살해(殺害)했어요. 죽여버렸단 말입니다. ? 나보고 부자라 그래? 나 거지 나자로로 살고 있는데... 착각하는 거죠? 그러니 광야(廣野)에서의 이스라엘의 그 금송아지의 사건은 실제 하느님 살해 사건이었던 거예요. 그게 하느님 살해 사건입니다.

 

하느님을 풍요의 신. 내 소원이나 이루어주고 병이나 고쳐주는 그런 존재로 오해하는게 그게 하느님 살해 사건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맞아 죽은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섬기는게 아니라...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렇게 진노를 하신 거예요. 다 죽여라 그런 거예요. 다 죽여라 너희들이 나를 향해 칼을 뽑아? '다 죽여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실상은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는 교활(狡猾)한 인간들이 하느님 살해 사건의 주범(主犯)이에요.

그래서 요한은 묵시록에서 이 세상 전체를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이 세상 전체가 하느님을 죽인 자들의 집이란 뜻이에요.

 

(묵시11,7-8) 7 그러나 그들이 증언(교회)을 끝내면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그 짐승이 올라 와서 그들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그들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이며 상징적으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에집트라고도 합니다.

 

두 증인(證人) 교회에요. 큰 성은 어디? 바벨론 이 세상이죠. 이 세상 전체가 소돔이고 이 세상 전체가 애굽이에요. 그리고 이 세상 전체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에요. 그러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누구란 뜻이에요? 저주받아 죽을 소돔인이며, 애굽인이며, 예수님 살해범들이란 뜻이에요. 모든 인간이... 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모든 인간이 다 하느님을 살해하는 거예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그 자체가 하느님 죽인 겁니다. '왜 내가 당신 말만 들어야 돼?' 그래서 따먹은 거니까 아담이 하느님보다 힘 쎘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죽이죠. '왜 내가 니 말만 들어야 돼?' 이거니까 그게 모든 인간들의 실존이란 말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다 하느님 살해범들이에요.

그런데 그 하느님 살해 현장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어요. 세상에게 살해당하는 그 하느님께서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있는 그들 중에 아버지가 주신 어떤 이들의 죄를 그 자리에서 똑같이 자기를 향해 돌을 들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그들의 죄를 쭉 빨아들이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들의 죄가 되셔서 죽어 버리셨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죄가 없어져 버렸어요. 자기가 자기의 죄로 예수를 막 죽이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쭉 빨아들여서 그 죄와 함께 죽어 버렸다니깐요. 그게 믿겨집니까? 그래서 복음은 듣고, 듣고 또 듣고 하는 거예요.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또 들려주시오! 한번 들어서 두 번 들어서 열 번 들어서 그 은혜의 깊이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가 그러는 거예요. ‘그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아라. 제발.‘ 그러는 거예요. 깨달아 알아라.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좀 알아라 하는 거예요.

 

다시 사도행전으로 돌아가 보자고요. 베드로가 신약의 천 번째 오순절에 바로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설교를 했어요.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설교했단 말입니다. 베드로가. 그랬더니 그 복음을 알아듣는 이들이 생겼는데 그 숫자가 3천이었어요.

이런 그림이죠. 구약의 오순절에는 율법의 시절에는 하느님의 율법에 의해 도륙을 당하는 죄인들 3천이 등장하는 거고요. 신약의 오순절에는 그렇게 죄인으로 죽었던 그리고 영원히 죽어야했던 자들에 의해 목숨 바친 그 예수에 의해 살아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살아나는... 은혜에 의해 살아나는 의인(義人) 3천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 사이에 십자가(十字架)가 있다 말입니다. 너희가 이걸 아느냐라고 묻는 거예요. ‘너희는 그렇게 거저 살아난 자들이다 이걸 믿기만 하면 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자들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내가 부자거든요. 나를 여전히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데 '왜 내가 그 은혜를 받아야 하는 약자의 자리로 내려가야 되는가'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걸.

그래서 자기 스스로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준다 그러는데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내 이성과 사고와 사유의 폭은 그 정도로 나약한게 아니니까 나한테 보여줘. 기적 보여줘. 체험하게 해줘. 그럼 내가 믿을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믿음은 그런 거 아닙니다. 십자가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 그냥 거저 주어지는 거예요.

하느님의 진노(震怒)로 죽어야 했던 자들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천국의 나자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냥 천국의 거지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끝까지 부자로 사는데 하느님의 은혜(恩惠)로 천국의 거지로 여김을 받는 거예요. 그냥.

 

그런데 41절을 보면 그렇게 살아난 신약의 3천이 말을 받아 그들이 구원을 받았대요. 오순절 날 살아난 3천 명이 말을 받아 구원(救援)에 이르렀대요. 살아났대요. 여기에서 이라는 단어가 로고스입니다. 이 로고스라는 단어 어디서 보셨어요?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그 단어인 거예요. 로고스를 받아 살아나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고, 예수가 하나님 말씀의 모든 내용이죠? 거기에 대해선 뭐 수차례 설명해 드렸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예요. 그 예수를 못 알아보고 온 세상이 합의(合意)하여 죽였어요. 난 그 말 못 알아먹겠어. 로고스 못 알아먹겠어. 죽였는데 은혜의 성령이 오시자 그 죽임당한 예수를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기더라는 거예요.

그러니 말씀을 믿는다, 말씀을 이해한다, 복음을 이해한다라는 건 하느님의 은혜로 성령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한다. 그분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해한다라는 말과 같은 말인 거예요.

그렇게 구원(救援)과 유기(遺棄)는 오직 말씀(로고스)에 의해서만 분리(分離)가 되고 판단(判斷)이 되는 거예요 말씀에 의해서만. 이걸 알아먹는가? 못 알아먹는가에 의해서만. 그래서 바로 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 신약의 오순절에 말을 받고 3천 명이 살아나는 바로 이 신약의 오순절에 말이라는게 등장하는 거예요. 하나로 통합되는 어떤 말. 그걸 방언(方言)이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 무식한 인간들이 못 알아듣는 말만 조금 하면 전부 방언이라 그러니까... 방언은 모든 종교에 다 있어요. 그 따위 방언 이야기하는거 아니에요. 성경이 이야기하는건...

여러분 절()에 한번 가보세요. 눈 딱 감고 여기가 절이라는 거 생각하지 않고 들으면요 절에 있는 스님들도 다 방언하고 거기서 기도하는 그 불교인들도 다 방언해요. 그리고 기도의 내용도 똑같아. 전부 병 고쳐주세요, 부자되게 해주세요, 자식 대학 좋은데 가게 해주세요 다 이거야. 뭐가 달라요?

성경(聖經)에서에 방언(方言)은 그런 종류의 것을 이야기하는게 아니에요. 역사(歷史) 내내 받아들여지지 않던 하느님의 말(방언)이 어떤 소수의 무리에게 받아들여지는 역사가 일어났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느님의 말은 모든 인류에게 계시(啓示)로 주어지는데 모든 인류가 하나도 못 알아먹었어요. 이게 로마서 1장이잖아요.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이게 방언이 갖고 있는 의미인 거예요. 너희들은 죄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그 계시, 하느님 나라의 말씀을 전혀 못 알아듣는다.

그러니까 심판과 진노의 개념을 담고 있는게 방언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십자가에 의해 성령이 임하자 그 방언을 제자들이 각기 다른 나라 방언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가지 언어로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다 알아들었단 말입니다.

전부 못 알아듣던 자들이 그 언어를 알아듣는 일이 생겼다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 은혜에 의해. 그런데 그 성령(聖靈)은 어떻게 오신 거예요? 십자가(十字架)로 온 거라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사도행전에 처음 방언(方言)이라는게 등장하는 거예요.

 

(사도2,1-11) 1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2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4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5 그 땡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 6 그 소리가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렀다. 그리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네 지방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7 그들은 놀라고 또 한편 신기하게 여기며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셈인가? 9 이 가운데는 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10 프리기아, 밤필리아, 에집트, 또 키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방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로마에서 나그네로 온 11 유다인들과 유다교에 개종한 이방인들이 있고 그레데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지금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들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저마다 자기네 말로 듣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하였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方言)으로 하느님의 큰일 말하는걸. 저들은 다른 나라말로 막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못 알아듣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에게 이해가 되어진다는 뜻이에요. 하느님의 큰일이.

그러니까 방언(方言)이 담고 있는 내용은 전부 하느님의 큰일이어야 돼요. 그 방언이 담고 있는 내용은 하느님의 큰일. 여기에서 이게 텅인지 포린 랭귀지인지 이걸 구별하는건 아무 가치가 없어요. 아무 가치가 없어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나와서 누군가에게 알아듣게 되었다라는 이 사실이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큰일, 즉 하느님의 은혜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그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다른 나라 방언으로 들렸던 거예요. 하느님의 큰일이...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와 부활(復活) 그리고 승천(昇天)으로 말미암아 성령(聖靈)이 불의 혀같이 임하니까 은혜로 그 각기 다른 방언들이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하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가. 그렇게 하느님의 큰일이 알아들을 수 없었던 방언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되니까 구원이 일어나더라. 이게 3천 명이 살아나는 사건이란 말입니다. 부자가 나자로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교의 방언은 오직 하느님의 큰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관한 내용이어야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방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되는 그 기적이 성령 강림에 의해서 성취가 되었다라는 건 성령이 임하면 방언이 터진다가 아니라,

그러한 이해되어질 수 없는 하늘의 계시가 어떤 이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계시가 되기 위해선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안된다라는 의미에서 성령에 의해 방언이 터지는 거고 그게 알아들어질 수 있게 된거고 거기서 구원이 일어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받으라고 패면서 방언 연습시키고 이건 무식한 거죠? 걔네들 다 무당이에요. 그리스도교인 아닙니다. 백 퍼센트 무당이에요.

그런데 이 방언이라는게 이 세상에 생기게 된 원인이 뭐예요? 우리 창세기로 한번 가보자고요. 바벨탑 사건이에요.

 

(창세11,1-9) 1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여기서 언어가 하나라는 단어가 나오죠. 그죠? 사도행전에서도 어떻게 우리가 하나로 듣게 되었느냐? 똑같은 단어란 말이에요. 하나였어요. 언어가.) 2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3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 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우리의 이름을 날려 온 세상에 흩어짐을 면하자 어떻게? 우리 힘으로! 이게 유대주의란 말이에요. 부자예요. 이게.) 5 야훼께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6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7 당장 땅에 내려 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 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여기서 방언이 나오는 거예요. 처음에. 언어가 혼잡게 되는 거예요.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어떤 언어들이 생기는 거예요. 이게 방언입니다.) 8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 두었다. 9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그 언어가 혼잡게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그곳이 바벨론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벨이에요. 거기가. 그게 세상입니다.)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살아야 하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과 지혜와 노력으로 하늘에 닿으려고 했고요. 자기들의 이름을 온 세상에 내려 했어요. 그게 자아숭배, 우상숭배, 세상 부자들의 삶이란 말입니다. 하느님은 거기에 진노(震怒)하신다 말이에요. 하느님은 그런 우상숭배(偶像崇拜)에 진노하셔서 그 죄인들의 언어(言語)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만들어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方言)이라는 것에 일차적인 의미는 하느님의 진노(震怒)와 심판(審判)인 거예요. 진노와 심판. 그러한 인간들의 교만(驕慢)에 관한 하느님의 진노와 방언 이야기는 이사야서로 넘어가서 조금 더 명료하게 설명이 돼요.

 

(이사28,1-13) 1 ! 네가 비참하게 되리라. 에브라임의 주정꾼들이 쓰고 뽐내는 꽃관, 사마리아야! 술부대의 머리에 얹힌 화려한 꽃, 사마리아야, 네가 정녕 시들리라. 2 보아라, 주께서 보내신 힘있고 강한 이가 온다. 우박 섞인 돌풍처럼, 휩쓰는 풍랑처럼, 마구 내려 퍼부어 바다를 이루는 폭우처럼 온다. 그가 와서 너를 잡아 땅에 처박으리라. 3 에브라임의 주정꾼들이 쓰고 뽐내는 꽃관아! 네가 마구 짓밟히리라. 4 기름진 골짜기를 굽어 보는 언덕에 곱고 화려하게 피어 있는 꽃들아! 네가 정녕 시들리라. 이른 여름에 익는 돌무화과 같아 눈에 뜨이기가 무섭게 따 먹히리라. 5 그 날, 살아 남은 당신의 백성에게는 만군의 야훼께서 고운 꽃관, 화려한 왕관이 되시리라. 6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공정한 마음을 주시고 성문에서 싸우는 용사에게는 적을 물리칠 용기를 주시리라. 7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독주에 취해 헤매는 이자들은 누군가? 독주에 취해 비틀거리는 이자들은 바로 사제와 예언자들이 아닌가? 아주 술독에 빠져 버렸구나. 저렇듯이 독주에 취하여 헤매다니! 비틀거리며 계시를 본다 하고 뒤뚱거리며 재판을 하다니! 8 술상마다 구역질나게 토해 놓고 떠드는구나.

 

( 이게 지금 이스라엘의 종교의 실상이라고 하느님이 확 폭로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열심을 부렸던 북 이스라엘의 신앙이 이 상태라는 거예요.)

9 '저자가 하느님을 안다고 누구를 가르칠 셈인가? 되지 못하게 계시를 받았다고 누구를 깨우쳐 줄 셈인가? 겨우 젖뗀 아기에게나, 금방 젖꼭지 놓은 아기에게나 해 보시라지!

( 니가 뭔데 나를 가르치려고 그래? 하느님의 말씀이 예언자 위에 떨어졌더니 이런 말하더라는 거예요. '니가 뭔데 나를 가르치려 그래' 하는 거예요.)

10 저자가 하는 소리를 좀 들어 보세. '사울라사우, 사울라사우! 카울라카우, 카울라카우! 즈에르삼, 즈에르삼!''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이건 무슨 뜻이 있는 말이 아니라, '얼렐레 까꿍' 이런 뜻이에요. 그리고 술 취한 사람이 주절주절 주절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기들 '애기야 얼랄렐렐레레' 허 어디서 많이 듣던거 같지 않아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던져줬더니 '얼렐레 까꿍 너 지금 나한테 그러는 거야'라고 못 알아듣더라는 거예요. 방언으로 알아듣더라는 거예요. 그거를... )

11 과연, 이제 하느님께서는 더듬거리는 말씨와 다른 나라 말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셔야겠구나.

(그때 하느님이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다른 방언 생소한 입술. 이게 아시리아 사람들이에요. 아시리아 사람 들어서 '니네 쳐버리겠다'라는 것인데)

12 '쉴 때가 되었다. 고단한 자는 안식(安息)을 얻어라. 이제는 안심(安心)하여라.' 일찌기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13 그래서 야훼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울라사우, 사울라사우! 카울라카우, 카울라카우! 즈에르삼, 즈에르삼!'(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이런 말을 들으며 걸어 가다가 뒤로 자빠지거라. 뒤통수가 깨지고 그물에 걸려 잡히거라.

 

이제는 하느님께서 너희들에게 하느님의 말을 방언(方言)으로 얼렐레 까꿍로 던져서 못 알아듣게 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넘어져 뒤지게 하겠다는 뜻이에요. 못 알아들으면 죽는다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못 알아들으면 죽는다 뜻이에요. 이게 방언이 갖고 있는 심판의 개념인 거예요.

 

세상(世上)은 하느님의 말씀을 방언(方言)으로 여겨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얼마나 많이 느낍니까? 왜 이렇게 못 알아들어? 왜 그렇게 못 알아들어? 나는 이해하는 걸 왜 그렇게 못 알아들어? 이게 방언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에요. 교만(驕慢)을 면류관(冕旒冠)처럼 쓰고 있던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예언자(豫言者)를 통하여 하느님의 도()를 전했더니, 이스라엘이 그 소리를 마치 방언처럼 못 알아듣고 그냥 쏼라쏼라 하면서 조롱(嘲弄)하더라는 거예요. 막 흉내들을 내는데 쏼라쏼라이러면서 '너 지금 나한테 그런말 한거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예요.

 

하느님은 하느님의 도()를 방언(方言)처럼 여기는 패역한 죄인들에게 아시리아라는 방언을 보내어 패신 뒤에 그들에게 하느님의 도()를 방언으로 들리게 해버리겠다라는 거예요. 끝까지 니넨 죽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진노의 심판은 복음을 방언으로 들리게 하는 거예요. 그들은 다 죽기 때문에 복음을 방언으로 들리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부자들이 나자로가 살아내려가도 못 알아 든는다는 거예요.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거예요. '사울라사우, 사울라사우! 카울라카우, 카울라카우! 즈에르삼, 즈에르삼!'' 으로 듣는 거예요. 여러분 방언은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이 생명나무를 막아 버린 사건과 동일한 그림인 것입니다. 못 알아듣는다는 거예요. 13절을 보면요, 그렇게 복음을 방언으로 듣게 되는 자들이 어떻게 된다 그래요? 뒤로 자빠지거라. 뒤통수가 깨지고 그물에 걸려 잡히게 된다 그러죠? 왜 그들이 뒤로 넘어지는지가 16절에 나와요. 한번 보세요.

 

(이사28,16) 16 그러므로 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주춧돌울 놓는다. 값진 돌을 모퉁이에 놓아 기초를 튼튼히 잡으리니 이 돌을 의지하는 자는 마음 든든하리라.

 

그 시온에 두는 예수라는 돌 그걸 알아먹지 못하는 그게 뭐라 그랬어요? 로고스. . 그 말을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은 그 돌에 걸려 넘어진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 이사야서의 말씀은 바울이 인용해다 썼죠? 어디에서? 로마서에서 썼잖아요.

 

(로마9,29-33) 29 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전능하신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주시지 않았던들 우리는 소돔처럼 되었을 것이요 고모라와 같이 되었으리라.' 30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이 오히려 그 올바른 관계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31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법을 추구하였지만 끝내 그 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32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얻으려 하지 않고 공로를 쌓음으로써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33 성서에, '자 이제 내가 걸림돌 하나를 시온에 놓으리니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바윗돌이라.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은총(恩寵). 은혜(恩惠). 이렇게 믿음에 의한 하느님의 의()를 쫓지 않고, 행위(行爲)에 의한 율법(律法)을 쫓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 그 내용이 방언이라는 개념(槪念)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말씀이 부디치는 돌, 즉 방언이 될 것이다라는 그런 뜻이에요. 로마서에서 바오로가 하는 이야기가 방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인간의 그 행위와 보이는 행위와 보이지 않는 은혜가 충돌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들은 어디에 해당하는 자들이냐를 계속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의 행위 눈에 보이는거 여러분 정말 의지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여전히 부자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교인에게 있어서 방언(方言)이라는건 인간의 죄인(罪人)됨을 반추(反芻)하게 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느님의 계시는 하느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으면 절대 죄인인 인간의 지혜나 노력으로 알아듣거나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그 계시의 은혜성. 그리고 심판과 은혜의 그 양면성을 보여주는게 방언이에요.

 

그렇게 바벨탑에서 시작된 하느님의 저주와 심판의 그 방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의해서 신약의 오순절 날 이제 하나로 딱 열리게 되는 거고, 하느님의 은혜 속에 들어있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도()가 다 이해되어지는 거예요. 각 나라말로 막 전하는데 똑같은 복음이 이해되어지는 거죠. 그게 은혜의 복음이에요.

그리고 그들이 살아 올라오는 거예요. 구별없이. 이게 교회의 보편성입니다. 따라서 다락방에서의 교회, 최초의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필연성을 계시하는 계시적 사건이구요. 그래야 십자가가 있어야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도()를 이해할 수 있다라는 이 계시적 사건인거고 계시적 은사에요.

그런데 서두에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마귀(魔鬼)는 은혜(恩惠)와는 전혀 상관없이 눈에 보이고 경험되어져야 내것으로 삼을 수 있다라고 하는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를 절묘하게 자극을 해서 그 방언의 의미를 왜곡해 버린 거예요. 그게 고린도교회의 문제였어요. 고린도교회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유대 땅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헬라(그리스)의 도시예요. 고린도라는 도시 자체가 헬라의 아주 유명한 도시였어요. 그것도 그 고린도에 세워진 교회란 말이에요.

따라서 고린도 교회는 아주 자연스럽게 헬라의 밀교(密敎)라고 있죠? 무스테리온, 신비종교들이 있단 말이에요. 헬라에는요. 그 밀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그 헬라의 타락한 도덕성(道德性)에 영향을 아주 심하게 받고 있어서 근친상간(近親相姦)이 막 있었어요. 교회 안에.

특히 헬라의 그 신비종교들의 영향으로 신비적인 체험이나 기적등이 교회 안에서 늘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었단 말이에요. 특히 방언이나 예언 그리고 신유. ()고침 등의 그 특이한 현상들이 교인들 사이에서 그 영성의 고저(高低), 그걸 하는 사람은 영성이 높은 사람, 못하는 사람은 낮은 사람 이러한 이 영성의 고저를 가르는 특별한 것이 되어 있었단 말이에요.

그걸 부수는게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오로는 그러한 고린도교회에게 은사라는게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줘요. 하느님께서 성도에게 은사를 주시는 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심을 알게 하는데에 도움을 주는 선물의 차원으로 주는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성도는 다 은사를 받아요. '어 난 은사가 없는거 같은데' 그 사람은 성도 아니에요. 모든 성도는 다 은사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어떤 은사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요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하는데 필요한 은사에요.

 

일단 구원이라는 거 자체가 은사에요. 케리스 은혜에서 케리스마 은사가 나온 거거든요. 은혜를 받아 구원받은 자는 전부 케리스마를 받은 거예요. 모든 성도는 다 은사를 갖고 있는데 이 은사가 착착 연결이 되어서 모든 교회에게 예수를 설명하는데 필요한게 은사에요.

그러니까 모든 은사(隱事)는 다 계시적(啓示的)인 성격을 갖고 있는 거예요. 모든 은사가... 그리고 은사에는 차별이 없어요. 그런데 조금 특별하게 보이는 아주 신비하게 보이는 그런 은사를 갖고 있는 인간들이 내가 너보다 낫다라고 분열을 초래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교린도 교회 안에... 사도 바오로가 그 중에 몇을 끄집어내서 너희들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설명해주는게 고린도전서 121314장이에요.

거기서 나오는게 예언(豫言)과 방언(方言)입니다. 그건 방언을 열심히 해라가 아니에요. 여러분 제발 성경을 좀 깊이 읽으세요. 그걸 부수는 거라니깐요.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게 하는 그것. 이걸 성령의 은사를 신령한 것이라 그래요. 그래서 신령한 것을 사모(思慕)하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방언과 신유은사, 예언, 이런 걸 사모해라가 아니에요. 그걸 신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인간들이 문제인 거예요. 어디에 그게 신령한 거라고 나와 있어요? 신령한게 뭔지 제가 가르쳐 드릴께요.

 

(1고린도12,1-7) 1 형제 여러분, 이제는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에 대하여 말씀드리겠는데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2 아시다시피 여러분이 이교도였을 때에는 헛된 우상에게 매여서 우상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3 그래서 여러분에게 일러 둡니다마는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받아라' 하고 욕할 수 없고 또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요게 신령한 것이에요. 예수를 주라 하고 예수의 그 십자가를 실패라고 저건 패배라고 저건 저주받은 거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는 그 사람이 신령한 것을 갖고 있는 거예요. 신령한 것의 역할이 그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성공주의, 물질주의, 인본주의 이 속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란 말이에요. 아니라고들 우기고 있지만 자기의 삶 속에서 예수의 십자가가 나타나면 늘 징징거린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저주받을 것이다라고 인정하는 거랑 똑같은 거란 말이에요. 그게 신령한 걸 못 받은 자인 거예요. 그러면서 뭐가 나오냐하면 은사가 나오잖아요.)

4 은총의 선물은 여러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일의 결과는 여러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뭘 한다구요? 그 같은 하나님이 뭘 한다라는 거예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라는 것을 알게하는 것으로 주는 거라는 거예요. 은사와 직임 전부가 다. 그리고 그게 신령한 것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은사는요 어떤 개인에게 사유화되어서 그 개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용도로 주어지는게 아니라,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주어진 한시적인 선물인 거예요.)

7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이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은 공동의 유익이란 뜻이에요.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다란 뜻이에요. 여기서 공동이라는건 뭐겠어요? 교회. 사람 각자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준게 아니라 교회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준게 은사라는 거예요. 그게 공동의 유익이란 뜻이에요.)

 

따라서 교회에 주어지는 모든 은사는 예수님의 주()되심과 인간의 불가능(不可能)함과 무력(無力), 그리고 은혜의 필연성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거지 누군가에게 사유화가 되어서 그 사람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여서는 안된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은사를 갖고 있는 자도 그게 하느님이 주신 거면 '내가 이런 은사 있어요'라고 자랑해서도 안 되고 그 은사를 부러워하는 인간들도 안돼요. 그 사람은 은사가 아직 뭔 질 모르는 사람들인 거예요. 그런데 그 은사를 갖고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들 얼마나 많아요?

은사집회, 신유집회, 성령집회 다 은사 받은 사람들이 은사 받게 해주겠다고 하는 거거든요. 그 사람들 무당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아니에요. 제가 개런티 해드릴께요. 내가 천국에 가서 그 사람들 있으면 내가 내려 갈께요. 지옥(地獄)으로...

진짜로 그 사람들 성경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아니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은사는 교회를 하나로 만드는게 아니라 분열시켜요. 우열(優劣)을 조장(助長)한다니깐요. 그럼 성경하고 다르잖아요. 은사의 목적과 기능이 다르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게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사도 바오로는 그러한 은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들어있는 자들에게서 나오는게 아니라면 그게 아무리 신기해 보이고 신통해 보여도 전부 가짜다라는 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1고린도13,1-3) 1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은 사랑도 같이 하지 않으면이란 뜻이 아니에요. 여러분 사랑 못하잖아요. 다 가짜에요. 천사의 말을 하고 방언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 들어있는 자들에게서 나올 때에는 목적과 계획이 있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지만 아무리 신비한 소련방언 중국방언을 한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안에 들어있지 않은 자들에게서 나오는 이 신기한 것은 꽹과리 소리다란 뜻이에요. 징과 꽹과리 소리.)

 

2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게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안에 들어있는 자들에게서 나온게 아니라면 산이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졌다하더라도 실제 그런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가짜다란 뜻이에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란 뜻입니다. 기적이 있을 수있다라는 거예요. 박태선이나 문선명 손에서 불꽃이 튀었단 말입니다. 있을 수 있는데 그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 들어있는 자들에게서 나온게 아닐 땐 그건 아무것도 아니란 뜻이에요. 마귀가 하는 거다란 뜻이에요.

 

3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들어있지 않은 자들이 자기꺼 다 팔아서 심지어 몸까지 소신공양(燒身供養)해서 남을 섬겨도 그거 하느님이 하나도 카운트 안 해준다는 뜻입니다. 낫띵이에요. 낫띵, 아무것도 아니다. 이게 낫띵이란 뜻이거든요. 정확히 번역하면 낫띵이에요. 그러니까 먼저 우리가 알아야 될게 하느님의 은혜(恩惠)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말이에요.

여러분 그 사랑 안에 들어있지 않은 자들이 하는 모든 착한 행위 멋져 보이는 은사의 발휘. 이게 다 자기 자랑하는 부자(富者)의 행위라는 뜻이에요. 자기 자랑하는 부자의 행위.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특별히 예언과 방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건 고린도교회의 많은 문제 중에 특히 예언과 방언의 문제가 아주 심각한 것이였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방언(方言)이라는 건 이 세상이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복음, 하느님에 계시를 상징하는 거고요. 그 방언인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심판(審判)에 해당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계시적(啓示的) 은사(隱事)였어요. 진짜 방언(方言)이었을 때 그게...

고린도 교회에 가짜 방언에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예언하는자 방언하는자의 예언과 방언을 분별하라 그랬잖아요. 분별하라는게 뭐예요? 가짜가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분별하라. 진짜 방언 계시가 진짜 떨어지던 그 시대에도 가짜 방언이 있었다니깐요. 교회 안에 방언과 예언 이건 모든 종교에 다 있습니다. 헬라의 신비종교 안에 이미 방언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분별(分別)하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분별하라 예언도 마찬가지예요.

방언이 심판과 저주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어서 통역(通譯)이 없으면 절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였던 반면에,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어야 되기 때문에 '누구에게는 이건 못 알아듣는 말이야'라는 고 내용을 담고 있어야 되기 때문에 통역이 있어야 돼요. 방언(方言).

그런데 예언(豫言)이라는건 하느님으로부터 말미암고 하느님에 의해 실행(實行)되고 하느님에 의해 완성(完成)되는 하느님의 언약(言約)에 대한 말씀. 이게 예언이에요. 그래서 다니엘이 예레미야가 쓴 책을 보면서 '아 이게 그거구나'하고 70이레를 설명하잖아요. 인류의 역사는 칠십이레로 한정이 되어 있는데 '아 이게 이런 이야기구나 하느님은 그걸 분명히 이루시겠지' 그리고 이루어졌죠. 실지로. 그게 예언이란 말입니다.

다니엘의 그 말이 다니엘이 꿈을 해석하고 벨사살 왕의 잔치상에서 일어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런걸 막 해석하고 했던 것들이 앞일을 얘기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 일은 하느님에 의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를 이야기한거잖아요. 그걸 예언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느님이 앞으로 하실 일, 하느님에게서 나와서 하느님에 의해 진행되고 완료될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걸 예언(豫言)이라 그래요. 성경(聖經)에 기록된 것 하느님의 말씀 그게 예언이에요. 그래서 바오로가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유익이 있지만 그들을 위한 거지만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함이다라고 그러죠. 믿는 자들은 그거 다 알아듣거든요.

그런데 방언은 '너네들 심판받을거야 이놈들아' 이 용도로 쓰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함이라는 뜻이에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어휴 저거 신기한 말하네' 그러고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뭐 성경을 읽어 봤어야 뭐 질문을...

 

(로마11,36) 36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

 

요 일에 관한 이야기가 예언인 거예요. 따라서 성경적인 예언이란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이 하느님에 의해 성취가 되고 완료가 될 것임에 대한 것일 때 비로서 예언인 거예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라 회개하라이걸로 귀결이 되야 예언이에요. 그래서 예언은 반드시 성취가 되야 돼요. 어떤 건 성취되고 어떤 건 안 맞고 요게 무당들이 하는 거예요.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야 돼요. 하느님 것 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요즘 흔히 교회 예배당에서 예언이랍시고 지껄이는 수많은 개신교목사들이나 성령기도회간사들이나, 어떤 여자들 한무리의 여자들 LA에도 많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런 예언은 그게 하느님의 말씀 즉 십자가 복음에 관한 것이 아니면 다 가짜입니다. 다 가짜에요. 가끔 맞으면 안돼요. 예언은 반드시 성취(成就)되야 돼요.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당신은 하느님께서 돈을 많이 벌게 하셔서 큰 그릇으로 쓰실 것이라는 둥, 복채 많이 내라는 뜻이죠? 기분 좋게 해줬으니까... 돼도 돼고 안되도 돼. 자기 도망갈거니까... 올해 안에 세번의 기회가 주어질텐데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야 한다. 언제 왔는지도 몰라? 지도 나중에 생각할 때. '아 그게 기회였나'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이건 점치는 방법 가르쳐줄 때 가르쳐주는 수법들이거든요. 이게 다...

제가 동양철학의 대가 아닙니까? 예언하는 이들이 똑같이 하고 있어요. 여름에 물조심해라. 겨울에 불조심해라. 올해 안에 당신의 배우자가 나타날건데 그 배우자의 성이 아무개다. 그거 놓치면 절대 안 된다. 언제 지나갔는지를 몰라 '누구였지' 여러분 그런건 예언 아니에요. 그냥 무당 짓거리인 거예요.

하느님의 예언은 성경밖에 없어요. 계시는 이미 성경 안에서 종결됐습니다. 그 계시가 성경에서 종결되지 않았다고 하는 모든 이들이 다 이단이에요.

이거는 제가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2천년 교회의 역사가 결정한 거예요. 오늘도 계시를 받아 자기가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계시를 전달한다. 이 사람들 다 무당입니다. 계시는 이제 떨어지지 않아요. 개별적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계시가 종결되기 전 사도시대에만 한시적으로 주어졌던 거예요.

그 사도들이 계시를 받아 예언과 방언으로 떨어졌던 계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한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이제 계시적 은사는 사라지는 거예요. 하느님의 계시가 완료되서 우리에게 주어졌으니까...

어떤 목사들은 뭐 갑자기 성령이 임해서 이런 예언의 능력이 생겼다고 그걸 강신무(降神巫)라고 하는 거거든요. 무당(巫堂)에도 두 종류가 있어요. 학습무(學習巫)와 강신무(降神巫). 강신무는 신이 임해서 갑자기 무당되는 거고, 학습무는 배워서 되는 거거든요. 이건 조금 급이 낮아요. 학습무는 이 동자신 같은게 강신(降神) 갑자기 그냥 임해서 강신무가 되는...

요 인간들이 조금 나은 무당인데 고런 강신무들이 양복입고 강대상에 서서 무당짓거리 하는 거예요. 예배당 안에 강신무들이 들어와 있다니깐요.

아무튼 방언이든 예언이든 초대교회 때 주어진 그러한 은사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느님의 계시였어요. 왜냐면 초대교회 때는 아직 정경(正經)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계시(啓示)가 교회(敎會)에 떨어져야 돼요.

하느님은 예언을 통해서 교회에 당신의 계시를 정하셨고 방언을 통하여 계시의 은혜성을 주지시키시면서 그 방언을 통역하여 전달하게 하심으로서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느님의 계시를 전해주신 거예요. 방언을 통역해서 방언이 통역되어져서 교회에게 전해지면 그게 뭐예요? 그게 예언이에요. 그러나 이제 계시가 완료되고 정경이 완성이 되면 쉬운 말로 온전한 것이 오게 되면 그 예언과 방언이 필요가 없게 되잖아요.

그 이야기를 바오로가 고린도전서 13장에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1코린13,8-10) 8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9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10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완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이렇게 명확하잖아요. 온전한 성경이 오기 전에는, 성경에 기록될 계시가 요기조금 조기조금 요렇게 떨어진단 말이에요.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게 되면 이제 조금조금 하던게 필요없어진단 뜻이란 말입니다. 사라진단 뜻이에요.

바오로는 방언과 예언이 한시적으로 주어지고 있던 그 사도시대에도 예언과 방언이라는 그 경험적 도구들을 통하여 말씀을 이해해야 했던 어떤 이들을 어린아이들이라고 그래요. 바로 고 밑에 한번 보세요.

 

(1코린13,11)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예언과 방언 이야기하면서 그게 어린아이의 일이라 그래요. 그런데 오늘날은 그걸 해야 어른이고 성숙한 성도고 그거 안하면 어린애라고 여기죠. 그래서 함월산 가면은 개도 방언을 하는데 너는 여태 방언을 못한다고 이 마귀새끼야 그러면서 막 패면서 연습시키잖아요. 굴로 끌고가서... 그래서 집에서 막 연습해와요. 막 어떤 사람은 녹음해서 가져가갖고...

어린아이 때에는 눈에 보이는게 반드시 있어야 안심을 하거든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느님이 허락하실 수 있어요. 그러나 장성(長成)한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걸 보고 싶어 한다면 저능아죠. 그건요. 엄마가 애기가 옹알옹알 옹알거리고 있는데 '어휴 신기하다 참 부럽다 넌 나보다 어린이야 난 너를 존경할거야 영성 깊은 사람으로' 이거 말이 돼요?

사도바오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오늘날 교회는 그리 꺼꾸로 이해를 하고 있죠. 바오로는 방언(方言)이 곧 하느님의 말씀인 예언(豫言)이 되어야 한다라는 의미에서 방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통변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있어요.

 

(1코린146-9) 6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이상한 언어(방언)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어떤 계시나 지식이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나 가르침을 전해 드리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7 피리나 거문고 같은 생명없는 악기도 소리는 납니다. 그러나 악보대로 분명하게 연주하지 않으면 무슨 곡이 연주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8 또 나팔 부는 사람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전투준비를 하겠습니까? 9 이와 같이 여러분도 이상한 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虛空)에다 대고 말하는 셈입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은 교회에 전혀 유익이 안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행하는 방언은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됐어요. 반드시. 그리고 여럿이서 함께 웅얼거리는것도 안돼요. 자 우리 함께 방언으로 기도합시다. 뭐 랄랄라 이거 안됐어요. 초대교회 때는 많아야 세명, 그것도 순서대로 그리고 그 중에 하나는 반드시 통역을 해야 돼요.

 

(1고린14,27-28) 27 이상한 언어를 말할 때에는 둘이나 많아야 셋이 차례로 말해야 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 28 해석할 사람이 없을 때에는 교회 안에서는 그런 말을 쓰지말고 혼자서 말하거나 하느님하고만 말하십시오.

 

하지 말라는 거예요. 아무런 유익(有益) 안되니까... 하지 말아라. 이렇게 방언에 통역이 붙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통역이 되어 전달이 되어질 때 그때 예언의 기능을 갖게 되기 때문이에요.

통역이 되지 않는 방언은 그게 아무리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이 주셨다라는 그 면에서만 개인에게 유익이 될 뿐이지, 교회에는 절대 유익이 안된다 말이에요. 근데 그 개인에게 유익이 되는 것도 '아 하느님과 이 사람이 관계있는 사람이구나' 왜 이게 진짜 방언일 때 이야기예요. 그런 면에서만 유익이지 그의 마음에는 아무런 열매도 못맺는다 그래요.

 

(1고린14,14-16) 14 만일 내가 이상한 언어로 기도한다면, 기도하는 것은 내 심령뿐이고 내 이성은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15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나는 심령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심령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16 만일 여러분이 심령으로만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면 그 집회에 참석한 보통 교인들은 당신이 말하는 것을 알아 듣지 못할 터이니 어떻게 그 감사의 기도끝에 '아멘' 하고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잘 보셔야 돼요 많은 분들이 방언(方言)으로 기도하면 남들보다 오래 몇시간식 앉아서 기도를 해도 시간이 가는 줄을 몰라서 그렇게 기도를 한다 그러죠? 그래서 그거 꼭 그렇게 오래 해야돼요.

묻습니다. 그럼 무슨 기도를 그렇게 오래하셨는데요? 아 방언으로 기도해서 무슨 기도 했는지 모른대요. 그러면 왜 기도하셨어요? 아 나는 모르지만 내 안에 있는 영이 하느님과 직통(直通)으로 기도를 했기 때문에 이게 유익이라는 거죠. 여기서 하는 내 영은 푸뉴마 성령인 거예요. 우리에게서 진짜 방언이 나올땐, 계시로서의 방언이 나올 땐 하느님께서 계시로 주시는 방언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못 알아 들을 땐 그리고 교회에 이게 통역이 되서 전달되지 않을 땐 아무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고 나에 마음에도 열매를 못맺힌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내 마음, 이 마음이 지식 사고란 뜻이에요. 내 지식과 이성과 사고 안에서 이해되어지는 말을하고 기도를 할 때 그때 내 마음에도 열매가 맺히니까 그거 하라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내 영()이 하느님과 자기네끼리 '그럼 나는 뭐예요 나는 그걸 못 알아듣는 나는 뭐냐구' 내 영과 하느님과만 관계있는 존재에요. 나는 뭐예요 그러면 그런 이야기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방언(方言)보다는 예언(豫言)을 하려고 하라고 강력(强力)하게 권고(勸告)를 했던 거예요. 그리고 방언을 금하지 말라 방언하는 걸 금하지 말라라고 한건 계시가 완료되어지지 않았는데 하느님의 계시로 떨어지는 방언을 금하면 안 되잖아요. 그때는 그래서 금하지 말라 그런거지... 그걸 문자적으로 오늘날 교회(敎會)로 끌고 들어와서 '교회에서 방언 못하게 하는건 다 이단(異端)이다' 이건 무식(無識)한 소리에요.

 

(1고린14,1-5) 1 힘써 남을 사랑하고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2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3 그러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키워주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4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울 뿐이지만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교회에 도움을 줍니다. 5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만일 이상한 언어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이 교회의 이익이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이게 다 이해가 가시죠. 이제요. 예 여기서 도움을 준다라는 말이 유익이되다, 확고히하다, 건축하다란 뜻이거든요. 성도에게 진짜 하느님의 계시가 떨어지면 그가 확고한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방언이 계시가 성도에게 유익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다른 이들이 못 알아 들을 땐 그게 교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단 뜻이에요.

 

그래서 (1고린14,19) 9 그러나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상한 언어로 일만 마디의 말을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때에 예언과 방언은 계시적 은사였어요 그래서 바오로는 방언하는 걸 교회에서 금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이제 계시가 완료되었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구절을 오늘날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는건 정말 무지한 거예요. 여러분 기적이나 방언 같은 신비한 은사가 초대교회 때인 사도시대 이후에 완전히 사라졌어요.

근데 교회에 기적이 또 신비한 그런 은사들이 언제부터 다시 나타났는지 아세요? 4세기때 교회사를 보면 나와요. 4세기 때가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서 핍박 받는 자리에서 핍박을 하는 종교가 되자 교회 안에 기적과 신비가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교회가 로마에게 핍박을 받을때에는 카타콤에 숨어서 아무런 기적을 맛보지 못하고 무덤에서 그냥 죽어갔어요.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졌어요.

그런데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서 땅과 재산을 갖게 되었어요. 그리고 권력을 갖게 되자 이 힘의 원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기적 눈에 보이는 거 승리, 이렇게 교회를 뒤집어 엎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방언(方言)은요. 그리스도교 역사 1900년 동안 단 한번도 사도행전하고 고린도전서 말고 1900년 동안 단 한번도 교회에 보고(報告)된 적이 없어요.

 

1901년 그 이름도 유명한 아주사 거리에서 갑자기 성령운동이 일어나서 그때 방언이 터진거에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왜 1900년 동안 하느님이 막으셨을까요? 여러분 혹시 이 자리에 방언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저도 합니다. 안할 뿐이지...

저는 고2때부터 했어요. 방언을 하시는 분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확인한 것처럼 하느님의 계시, 하느님의 십자가 복음은 이렇게 세상에게 방언일 수밖에 없는거고 나에게도 심판과 저주의 방언이였었는데 어떻게 나는 그걸 예언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고 감사하시고 아직도 그 복음을 방언으로 듣고 있는 세상을 향한 자비의 마음을 가지면 돼요.

하고 안하고는 아무 아무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까짓 거 해도 돼고 안 해도 돼요. 그거요. 중들도 하는거 안 해도 돼요. 그런데 한다면 하면서 그리로 가시면 돼요.

방언 못해본 사람들 방언 받게 해달라고 여기저기 성령집회 쫓아다니지 마시고... '야 어떻게 세상사람들에게 방언으로 여겨지는 그 복음이 나에게 이렇게 이해가 되어지고 내 입에서 그 복음이 전해지는가. 데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이 방언으로 들리지? 내가 진짜 방언하는 사람이구나. 이 방언이 어떻게 나에게 이해되어졌지? 내가 진짜 통변하는 사람이구나.

어 내가 어떻게 잠시 잠깐후면 오실이가 오시리라 회개하라 어떻게 이 예언을 하고 있지? 내가 예언하는 사람이구나!' 기뻐하세요. 그거 받아서 뭐하라고 그렇게 짐싸들고 돌아다니면서 받으러 다니는 거예요? 있는 사람도 안쓰는데... 필요없습니다.

성경(聖經)이 방언(方言)이고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게 통변(通辯)이며, 성경의 내용을 올바로 이해하여 세상에 선포(宣布)하는게 예언(豫言)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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