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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양과 염소는 창세전부터 양이고 염소이다. (마태25:31~4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19 조회수2,010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9. 20. 도란도란글방

 

 양과 염소는 창세전부터 양이고 염소이다.

 

(마태25:31~46)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32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이 그들을 갈라 33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34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36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1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 가라. 42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6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갈 것이다.'

 

여러분 혹시 상황(狀況) 극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상황(狀況) 극이란, 심리 치료나 연극 치료에 쓰이는 말로, 연극의 참가자들에게 어떤 상황(사건)을 던져 주고 그 상황에 따른 즉흥적인 반응을 통해 연극을 진행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심리 치료에 쓰이는 상황 극은 문제가 많은 아이가 부모의 역할을 한다든지, 자식에게 너무 집착을 하고 있는 부모가 자식의 역할을 하는 등의 역할 교환의 방식을 통해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신의 문제점을 치유 받는 그런 짧은 연극입니다. 그 상황 극 안으로 들어가 연극에 참여하는 등장인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한 쪽은 상황 극을 통하여 치유와 교훈을 받아야 하는 환자들이고 한 쪽은 그 환자들에게 치유와 교훈을 주기 위해 한시적으로 고용이 된 엑스트라들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상황극의 주인공은 치유와 교훈을 받아야 하는 환자여야 합니다. 모든 상황 극의 초점은 환자에게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엑스트라가 괜히 오버하여 환자의 치유와 아무 상관없는 대사나 행동을 내어 놓으면 그 엑스트라는 그 즉시 퇴출이 됩니다.

환자는 그러한 엑스트라들과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한시적인 시간동안 주어진 역할을 살아냄으로 해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분별하고 직시하게 되어 결국 그 자신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의 인생이 바로 그러한 상황극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는 창세전에 이미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모두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죽은 흙에 불과하던 어떤 존재가 인격과 이성을 갖게 되고 하느님과 방불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문제가, 자기 존재의 뿌리와 근원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과 연합되어 영원한 신적 존재로 살기로 작정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만과 불순종이라는 죄는 그 거룩한 연합을 방해하는 최악의 걸림돌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역사라는 시간과 우주라는 공간 속에서 죄인이라는 역할을 부여받고 상황 극에 투입이 되어 죄의 추악함과 더러움과 허황됨과 파괴력을 배우고, 아울러 그러한 죄 속에 빠져 있는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배운 뒤 창세전에 준비 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역사라는 상황 극의 주인공들은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들의 치유와 교훈과 양육을 위해 수많은 엑스트라 들이 그 상황 극 속으로 투입이 되는데 그들이 마귀들이며 마귀의 세간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준비 된 유황 불 못에까지 들어가 영원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교훈으로 쓰이게 됩니다. 그래서 지옥은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이는 이 세상을 상황 극에 불과한 잠깐 동안의 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고린4:18) 18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시 상황 극에 투입이 된 사람들이 그 상황 극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불만을 갖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에게 주어진 그 역할을 바꾸어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합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역할로 바꾸어 내기 위해 죄인들이 품는 마음과 시도를 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상황 극에 투입이 된, 죄인으로서의 옛 자아를, 영원한 실체로 착각을 하고 그 옛 자아가 속해 있는 과거에서 출윜 옛 자신이 되고자 하는 미래의 지점으로 이어지는 모든 활주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희망이라는 것은 밝고 활기찬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희망은 성취(成就)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에 의해 부정(否定)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대학에서 심리학을 부전공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상황 극을 여러 번 접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 기억나는 상황 극 하나가 있는데 그 상황 극 속에서의 치료 대상은 마약에 중독이 된 아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자신이 오히려 우울증과 분노로 인한 신경쇠약에 걸려 버린 아버지였습니다.

그 상황 극 속에서 아버지는 대마초에 중독이 된 아들의 역할을 했고 거기에 카운슬러 몇 분이 대마초에 중독이 되어 건달로 살아가는 아들을 둔 부모의 역할을 했습니다. 카운슬러들의 목적은 아버지가 상황 극 속에서 아들의 입장이 되어서 아들을 이해하고 그 아들에 대한 집착과 분노에서 벗어나서 우울증과 강박증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상황 극은 출연자들에게 대본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만 던져주고 그 상황에 대한 우발적 반응들로 만들어지는 연극이기 때문에 결과를 미리 예측을 할 수도 없고 극의 진행 상황도 함부로 추측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상황 극 내내 아들의 역할에 몰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마약 같은 것은 절대 손대지 않는 건전한 사람이고 건달 같은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 깨끗한 사람이라서 이런 역할을 소화해 낼 수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그 상황 극 속에서 조금도 도움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아버지 같은 모습을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모습 속에서 읽어 낼 수 있지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처럼 되었다고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 자신들이 죄인으로 폭로되는 현장을 감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의 역할이 아닌 의인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고 했고, 모든 인간이 죄 중에 잉태되고 태어난다고 선언을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 속에서 의인의 역할을 해 낼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인간은 원래 신적 존재로 완성이 되기로 작정이 되어있는 존재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신적존재라는 목표지점은 인간이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의 힘과 노력을 동원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점은 하느님의 은혜(恩惠)와 자비(慈悲)로만 도달할 수 있는 은혜에 의한 완료지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죄인들은 바로 그 점을 헛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이미 깨끗하고 훌륭한 선민(選民)이라서 죄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착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로만 신적존재로 격상될 수 있는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진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신적 존재가 되려하는 자들의 무모한 시도를 자신의 삶속에서 폭로당하면서 그러한 시도와 노력의 무모함과 부질없음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자들은 모두다 자신이 진짜 신인 줄 착각하며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에 올려놓고 자신의 배를 우상으로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으로 폭로가 될 때면 열심 있는 종교행위나 착한 일, 선한 일 등으로 자신을 위장하며 우리 인간도 이렇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시위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도(聖徒)는 이 땅에서 자신이 얼마나 가능성이 있고 훌륭한 면이 있는지를 시위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느님의 은혜가 없이는 죽은 흙에 불과한 것인지를 배워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완료의 상태에 들어가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시간이라는 순서를 타고 이 역사 속으로 내려와서 선악과라는 시험을 호되게 통과한 후, 이미 생명나무 열매(實果)를 먹은 자가 된 자신의 현실 속에 부어진 하느님의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 위의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선악과라는 상황 극을 통과하여 생명나무 열매라는 영생의 은혜 성을 배워야 하는 하느님 나라 자녀들의 전체 구속과정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는 그림인 것입니다.

선악과는 시간과 역사이며 생명나무는 하늘의 영생이라 이해하시면 쉽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통과하지 못하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와 시간이라는 선악과는 생명나무의 은혜성에 의해 부정당하고 부인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이 역사라는 상황 극 속에서 죄와 불순종이라는 병의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잠시 동안 자신의 원래의 완료된 신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역할에 몰입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역할 속의 인물과 그 인물이 속해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원래 하느님의 백성으로 지어진 사람들이지만 이 역사와 인생이라는 상황 극 속에서는 죄인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야 하며, 그 죄인들의 결국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체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인들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눈물을 절절하게 경험해야 하는 것이 성도가 살아내야 하는 역사라는 상황 극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이 땅에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율법 아래로 오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러한 상황 극 속에서 죄인으로 오게 되지만, 아울러 하느님으로부터 믿음이라는 것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 믿음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죄인들의 역할을 하고 있는 성도들의 눈과 귀를 열어서 그들이 원래 어떤 존재로 완성이 되어 있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런데 그 성도의 완료 상황은 자신의 열심과 노력이 아닌 하느님의 열심과 그 분의 작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거기에 죽은 흙들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에 의해 완료가 된 하늘나라의 현실을 희망(希望)’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현실은 그 완료된 희망에 의해 옛 자아와 그 옛 자아가 속한 옛 자아의 과거와 그 옛 자아가 이 세상 속에서 되고자 하는 미래의 모든 인간적 희망이 점령당하는 현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 세상이라는 상황 극 속에서 죄인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며, 그 역할 속에서 죄의 추악함과 파괴력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고, 그러한 죄인의 속성이 꿈꾸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의 희망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 것인지를 배워야 하는 것이며,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꼭 붙드는 자로 지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희망에 의해 희망을 점령당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것을 바오로가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로마8:24~25) 24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이제 왜 성경이 여러분을 나그네라고 하는지, 이방인이라고 하는지 잘 아시겠지요? 여러분은 이 상황 극 속에서 여러분의 가치를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죄의 본질과 하느님의 은혜를 배워 본질적 치유를 받고 가야 하는 하늘의 왕자님들, 공주님들이기 때문에 성경이 성도를 가리켜 나그네요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주어진 역할에 너무 목숨 걸지 마시란 말입니다. 그건 상황 극 속의 자기 역할이 마음에 안 든다고 상황 극 자체를 거부하는 바보 같은 환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역사라는 상황 극 속에서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백성들이라면 그들이 이 땅에서 착한일, 선한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가 그들의 천국 입성에 대단한 영향을 미칠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착한일, 선한 일을 많이 할 수도 있고, 몇 개 못 내어놓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냥 그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고 하느님의 은혜의 필연성만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황 극 속에 투입이 된 죄인이라는 환자는 그 상황 극 속에서 무언가를 기여하는 존재가 아니라 교훈을 받고 치유를 받아야 하는 존재란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잘난 환자들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치유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잊고서 그 연극에 기특한 기여를 하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그게 바리새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성도의 인생일진대 오늘 본문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구제를 열심히 하자, 선행을 열심히 하자, 그래야 양이 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느님께서 상황 극에 투입이 된 죄인이라는 환자들에게 너희들 그 상황 극 속에서 구제와 봉사와 종교행위에 힘쓰지 않으면 너희들은 염소가 되어 지옥에 갈 거야라고 협박을 하신단 말입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역사라는 상황 극의 유일한 목적은, 하느님 나라를 살게 될 성도들의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지식과 분별입니다. 그들이 이 역사 속에서 착한 일과 선한 일을 몇 개씩 하고 돌아왔는지는 하느님 관심 밖의 일입니다.

세상적 세계관에 의한 착한 일과 선한 일을 아주 많이 하고도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지식, 그리고 자신들을 향한 하느님 은혜의 필연성을 전혀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이 너무 많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절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창세전에 갈려 있습니다. 양과 염소들은 갈려진 상태에서 이 땅에 내려오는 것입니다. 양들은 상황 극의 주인공들로 염소들은 상황 극의 엑스트라들로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현실을 다른 곳에서도 비유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첨예하게 갈라져 있는데 알곡이 불성실하여 가라지로 바뀌는 일이 없고 가라지가 열심히 노력하여 알곡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둘은 끝까지 자신의 신분대로 삽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라지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다 끝내고 모두 거두어져 유황불로 던져집니다.

그렇게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는 창세전부터 갈라져 있습니다. 그걸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역사 속에서 겪는 현실이라는 것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완료가 된 진짜 현실의 실제화 현장일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밤하늘에서 보는 북극성의 반짝이는 빛이 680년 전에 떠난 빛인 것처럼 우리가 지금 겪는 현실 또한 수천 년 전에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출발한 진짜 현실의 실제화 현장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현실은 지금 그들이 사는 일상이 아니라 이미 완료가 된 하느님 나라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혹자들이 복음을 알고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비현실적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만 일견 그들이 잘 본 것입니다. 성도의 현실은 이 세상의 일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현실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이미 결정되어 역사 속으로 내려온 이들이 이 땅에서 선한 일을 조금 못 했다고, 열심 있는 종교 행위를 조금 못 내어 놓았다고 그들의 신분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본문 34절과 41절을 보겠습니다.

 

(마태25:34,41) 34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41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잘 보면 하느님 나라와 지옥의 영원한 불이 이미 창세전에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34절과 41절의 준비 된이라고 번역이 된 헤토이마조라는 단어가 완료형 동사입니다. 그러니 천국과 지옥은 이미 창세전에 완료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곳에 들어갈 자들도 이미 결정이 되어 있습니다.

 

(로마9:10~13, 19-24) 10 뿐만 아니라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사악과의 사이에서 한번에 두 아들을 잉태했을 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1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13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 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19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을 책망하십니까? 누가 능히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1 옹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22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당장 부수어 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 주셨습니다. 23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그릇에 베푸실 당신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비의 그릇은 후에 영광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만드신 것인데 24 그 자비의 그릇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우리들 가운데는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있습니다.

 

이렇게 지옥에 들어갈 진노(震怒)의 그릇과 천국에 들어갈 자비의 그릇은 이미 옹기(甕器)장이의 마음속에서 다 결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은 그걸 수긍(首肯)하지 못합니다.

왜 하나느님이 우리 인간과 상의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하냐는 것이지요. 그건 자기들이 원래 산 존재라는 전제를 갖고 내어놓는 불평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원래 처음자리는 죽은 흙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먼지 같은 존재들을 당신이 쓰시고자 하시는 대로 만드시는 것이 잘 못입니까? 보세요. 인간들은 하느님 앞에서 그 정도로 교만합니다. 그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양과 염소들의 행함은 도대체 무엇을 교훈하기 위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먼저 예수님 오른편의 양들의 행사를 한 번 볼까요? 영원한 천국의 주인으로 세움을 받은 양들은 예수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을 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외면하지 않고 돌봐 주었다고 합니다. 잘 보세요. 목마름, 배고픔, 나그네, 벌거벗음, 질병, 감옥, 이게 다 뭡니까? 현재 죄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사망(死亡)의 증상들의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그걸 누가 다 회복시키시고 채우셨습니까? 시장하셨던 예수님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배고픔을 대신 가져가시고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굶어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공로로 우리의 배가 은혜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6:33~35) 33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34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35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벌거벗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벌거벗게 된 아담의 부끄러움이 노아에게서 한 번 더 확인이 된 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벌거벗음을 가져가시고 그 분의 의()로 우리에게 옷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는 그림이 나오는 것이라 했지요? 예수님의 의의 흰옷이 우리에게 입혀지고 우리의 벌거벗음이 예수님에게로 전가(傳家)가 되어 십자가(十字架)에서 도말(塗抹)되는 것입니다.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병은 죄의 삯인 사망의 대표적인 증상입니다. 우리의 그 질병을 예수께서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사망을 몽땅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게 구원 아닙니까?

 

(마태8:16~17) 16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 마귀 들린 사람을 많이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악령을 쫓아 내시고 다른 병자들도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렇지요? 그리고 나그네들을 찾아오셔서 그 나그네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신 분이 누구시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원래 하늘 밖의 이방인이요, 하늘의 나그네로 존재할 뻔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당신이 나그네가 되시고 우리의 나그네 됨을 가져가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하느님의 가족, 하늘의 왕 노릇하는 자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에페2:19) 19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하늘의 외인(外人), 하늘의 나그네에서 하느님의 가족(家族), 하나느의 권속(眷屬)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 나그네들을 아들의 나라로 옮겨 그 나라의 왕 노릇하는 자들로 삼아 버리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옥에 있는 자들을 찾아오셔서 그 감옥에 있는 자들을 건져내시고 위로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성경(聖經)은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살아야 할 피조물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늘의 초월과 단절된 채 역사와 공간 속에 갇혀있는 상태를 휠라케감옥(監獄)이라 합니다. 그 단어가 오늘 본문에 감옥이라고 번역이 되어 쓰인 것입니다. 그 감옥이라는 단어가 똑같이 나오는 곳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입니다.

 

(1베드3:18~19) 18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 19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에서의 갇혀있는이 바로 휠라케, 감옥입니다. 바로 그 감옥, 지옥에 찾아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시고 위로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 하느님 오른 편의 양들이 행한 모든 일을 완벽하게 먼저 해내신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형제들의 목마름과 형제들의 배고픔과 형제들의 벌거벗음과 형제들의 나그네 됨과 형제들의 질병과 형제들의 감옥을 사랑과 은혜로 해결하고 위로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진정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것입니다. 보좌 우편(右便)의 어린양.

창세전에 이미 그 하느님의 어린양 안에서 구원을 받도록 결정이 되어버린 하느님의 편애 속의 존재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라는 양 안에서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이해하게 된 사람들의 세계관이 어떻게 바뀌겠습니까?

자기들은 죽은 흙에 불과하여 전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혜로 하늘의 의를 거저 받은 존재들에게서 가장 처음 격발되어 나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自己)부인(否認)입니다. 그러한 자기부인의 사고 속에서 배고프고, 목마르고, 벌거벗고, 병들고, 나그네 되고, 옥에 갇혀 있는 이들을 볼 때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저주받은 자, 연약한 자, 죄인으로 보일까요? 그렇게 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지요? 그들은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과 함께 밥도 안 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하면서도 그런 자들과 같이 되지 않은 것을 감사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이 뭐라 했지요? 독사의 자식들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복음을 아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세계관은 바로 그러한 연약한 모습이 자신의 것이었음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다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완료된 하느님 나라를 이미 선물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나 형제의 삶 속에서 그러한 연약한 모습이 발견 될 때마다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추악함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더러움을 짊어지고 가실 수밖에 없었다는 은혜의 복음을 다시 한 번 명료하게 반추(反芻)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인간의 연약함과 하느님 은혜의 위대함을 교훈하시기 위해 성도의 삶 속에서도 연약함과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때때로 폭로시키시는 것입니다. 그 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나 혹은 이웃 속에서 발견이 되는 인간의 연약함과 불가능함을 대할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떠올리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을 대접하는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마태25:40,45,46) 40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5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6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갈 것이다.'

 

주님께서 배고픈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병든 자, 벌거벗은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뭐라고 부르십니까? 내 형제요, 지극히 작은 자라 부르십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형제,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천국 백성들은 예수의 발자취를 쫓아 그렇게 자기를 비운, 연약한 자기부인의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때 성도들은 그 형제들의 연약함을 저주나 실패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죄가 쏟아 놓은 결과불의 추악성과 하느님 백성들의 십자가의 삶을 그 속에서 찾아내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역사라는 상황 극 속에서 죄의 실체와 죄인들의 실존을 올바로 자각하여 배우는 것입니다.

반면에 율법과 제사를 열심히 지키며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치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어땠나요? 세리와 창녀, 죄인들을 볼 때 그들을 저주받은 자들로 여겼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 중의 작은 자로 오신 예수를 나무에 달아서 저주받은 자로 만들어 죽여 버린 것입니다.(신명21:23) 율법주의, 세상의 힘의 원리 속에서는 약함이 곧 저주받은 모습이니까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은혜의 복음 앞에서의 자기부인 없이 자신들의 구제나 선행이나 종교행위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열심히 행하는 자들은 절대로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로 대접할 수가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생겨버린 인간의 선악구조에 의해, 이 세상이 가치와 힘이라고, 선과 악이라고 규정해 놓은 것들에 의해 인간과 사물과 사건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죄란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곳에서 여전히 부와 명예와 건강과 잘됨과 성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얻지 못한 자들은 저주받은 자라는 인식이 가슴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요?

이렇게 양들이 행한 선행과 구제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는 자기부인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지극히 작은 자이신 예수님을 대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양과 염소의 비유를 민중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으로, 거지로, 병든 자로, 나그네로 변장하여 사람들에게 찾아오시니까 무조건 연약한 자들을 도와주다보면 불현듯 예수님을 도와주는 것이 될 것이라는 그런 류의 해석은 너무 동화적 발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민중을 메시아라 합니다.

민중 속에 예수가 들어 있고 그 민중에게 행한 일이 예수에게 행한 일이 되어 양의 자리에 올라 하느님 나라로 입성을 하게 된다는 그런 논리에서는 당연히 민중이 메시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착한 일을 열심히 하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대접하여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우편(右便)의 양들이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하고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고 이 땅에서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동안 오늘 본문에 나열된 그런 기특한 일을 했을 수도 있고, 안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예수 안에서 그러한 일을 한 자로 결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일을 행한 자로 평가를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세상에서 그러한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건 그들 안에 있는 예수의 행함이었기에 제가 언제 그런 일을 했나요?’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들이 그러한 일들을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하느님은 그들을 예수 안에서 행한 자로 취급해 주실 것이기에 그들 또한 자신들이 행했다고 평가해 주시는 그 일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그런 선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칭 양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모두 자신의 의()의 마일리지에 차곡차곡 쌓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착한 일, 기특한 종교행위를 하나도 잊지 않습니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들이 . ()이 이를 어찌 하나라도 잊어버리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열심을 부리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의 아비는 마귀다라고 독설을 내 뿜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비유에서 그들을 이렇게 비꼬십니다.

 

(루가15:7) 7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율법도 철저하게 지키고 제사도 열심히 지내며 금식(禁食)이나 구제(救濟)에도 열심을 부리고 있으므로 우리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자들을, 회개할 것 없는 자칭 의인 아흔 아홉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이 땅에서 그런 기특한 일을 하며 자신들의 가치를 챙기는 자들보다 죄인 하나가 천주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고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을 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게 올바른 상황 극 속에서의 성도의 치유모습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분명 하느님은 양과 염소를 당신의 오른 편과 왼 편으로 갈라놓으신 후 창세전부터 예비 된 천국과 지옥으로 그들을 밀어 넣으셨습니다. 그 동사들이 모두 완료형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염소들이 내어놓은 착한 일이 그들의 염소 신분을 양으로 바꿀 수 있었다는 말입니까?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염소들이 우리도 착한 일을 많이 했는데 왜 우리더러 지옥에 가라 하십니까?’하고 따진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결정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비유는 성도(聖徒)들의 세계관(世界觀)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지 행()함을 강조하는 비유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보태져야 한다는 알미니언 주의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란 말입니까? 구원받은 자들도 성도답게 살지 못하면 탈락을 한다고요? 오늘 본문이 그렇게 말하고 있나요? 아니잖아요?

오늘 본문은 오히려 인간의 행함은 그 어떤 기특한 것이라 할지라도 창세전에 갈려진 신분을 바꾸지 못 한다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마태복음 13장의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도 가라지가 열심히 노력하면 알곡이 된다는 가능성은 조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알곡과 가라지는 갈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알곡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가라지가 된다는 말도 없습니다.

알곡은 처음부터 알곡이고 가라지는 처음부터 가라지입니다. 그 수많은 가라지들 속에서 어떻게 자신이 알곡이 되었는지를 은혜의 말씀과 신앙의 여정 속에서 배우는 이들이 진짜 알곡인 것입니다.

 

그렇게 창세전에 택하여진 양들은 이 세상 속에서 절대 힘과 가치와 윤리와 도덕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과 현상과 사건과 인간들 속에서 항상 예수를 읽어냅니다. 그리고 그 예수에 의해 거저 주어진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그 신랑에게 집중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그저 잠시 후면 사라질 상황 극의 현장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연약한 자들 속에서도 예수를 발견하고, 실패 속에서도 은혜를 발견합니다. 그들의 삶의 관심은 전부 예수요, 은혜뿐입니다. 그들이 종말을 준비하는 양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비유가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 그리고 달란트의 비유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24장에서 종말의 때를 묻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을 하셨던 예수님께서 그 성도의 깨어있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종말론 강화가 바로 24장의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의 비유인 것이며 25장의 세 가지 비유인 것입니다. 그 네 비유가 전부 주인이 없을 때에도 주인에게만 집중하여 이 땅에서 손해를 보면서도 주인이 곁에 계신 것처럼 살았던 종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주인이 멀리 떠나있는데도 주인이 마치 곁에 계신 것처럼 열심히 주인에게만 집중하여 사는 종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그들을 미련하다고 욕을 했을까요? 신랑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계속 등불을 켜고 있는 여자들, 그들이 어두움 속에서 등불을 들고 있을 때 그 등불은 그 여자들의 좌표가 되었을 것이고 그 좌표를 보고 어두운 세상은 그들의 비효율성을 열심히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확히 그 미련한 좌표를 보고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들만을 끌어 올리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정지되어있고 고정되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그 특유의 활동성을 발동시켜 열심히 어두움과 등불이라는 좌표를 갈라내십니다. 역동적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매일 매일을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집중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속에서의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고 영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원을 준비하는 삶은 다른 것 없습니다.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만을 꼭 붙들며 이 세상과 자신의 옛 사람에서 눈을 떼는, 희망 제거 작업에 몰두 하면 됩니다. 그 때 소희이 여러분을 이끄는 위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희망제거 작업 안에는 천국 희망도 포함이 됩니다. 그 안에는 구원에 관한 희망도 포함이 됩니다. 우리는 천국가기 위해 예수 믿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예수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희망의 중심에는 역시 자기 자신이 주인공입니다. 성도는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구원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이어서 섬겨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랑스러워서 하느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말이지만 그렇게 하느님이 사랑스러워 질 때까지 우리는 철저하게 낮아져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구원이나 천국이라는 것을 감히 하느님께 요구할 수도 없는 자라는 것을 자각할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무장을 해제 당해야 합니다.

자신의 구원과 자신의 천국을 위해 종교행위를 하고 신()을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서 다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피조물들이 자신의 본질과 하느님의 영광을 올바로 깨닫고 하느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배워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의 어떤 행위도 양됨과 염소 됨을 바꾸어 낼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행하심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을 두려워하십시오. 그 하느님을 사랑하세요. 그리고 그 분이 내 곁에 함께 사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과 세상을 부인하시고 부정하시는 하느님을 배우세요.

혹 하느님께서 지금 여러분의 일상을 폭격하고 계신다고 해도 절대 원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희망을 폭격당하며 희망으로 전진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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