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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등불의 비유 (루카8,16-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20 조회수2,40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9월 20일 월요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등불의 비유 (루카8,16-18)

 

<b><font color="#0900FF"><font size="3">마르코 복음서 4 장</font></font></b>

 

1독서<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주님의 집을 짓게 하여라.>(에즈1,1-6)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이 백성의 남은 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모든 지방의 사람들은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의 집을 위한 자원 예물과 함께은과 금과 물품과 짐승으로 그들 모두를 후원하여라.”

그리하여 유다와 벤야민의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과 사제들과 레위인들곧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곳에 계신 주님의 집을 짓도록 하느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신 이들이 모두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저마다 온갖 자원 예물 외에도은 기물과 금과 물품과 짐승그리고 값진 선물로 그들을 도와주었다.

 

화답송 시편 126(125),1-2ㄱㄴ.2ㄷㄹ-3.4-5.6(◎ 3)

◎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네.

○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우리는 기뻐하였네

○ 주님저희의 귀양살이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환호하며 거두리라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복음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8,16-18)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제1독서 (에즈1,1-6)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3)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Cyrus)가 정복한 영토 중에는 바빌론에 의해 포로로 잡혀온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 사람들도 있었지만그 이전에 앗시리아에 의해 끌려온 나머지 지파 즉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도 있었다.

그리고 키루스의 칙령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남부 유다 백성들뿐만 아니라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도 있었다.

 

에즈라기 1장 3절에서 새 성경의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이라는 표현은 애매하지만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암모'(ammo)는 분명히 '그의 백성'(his people) 즉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뜻을 갖는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 해당하는 '빠켐'(bakem; among you)은 키루스의 칙령을 받는 자들즉 키루스의 지배를 받는 페르시아의 모든 백성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키루스의 통치 지역에 거주하는 자들 중에 하느님의 백성이면 누구든지 그 지파와 신분을 막론하고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할 사람에 해당된다는 의미이다.

즉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성전을 건축할 대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빌론 유배 생활 50년만에 실제 포로 귀환으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 및 선민 공동체 회복에 기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에즈라기에는 키루스의 칙령에 따라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에즈라는 에즈라기 2장에서 무려 70절이나 할애하여 제1차 귀환자들의 가계별 인원수를 정확하게 밝혔으며에즈라기 8장에서는 20절을 할애하여 제2차 귀환자들의 가계별 인원수를 정확하게 밝혔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집을 짓게 하여라'

 

여기에 해당하는 원문은 '웨이벤 에트 베트 예흐와 엘로헤 이스라엘' (weiben eth beth yehwa ellohe israel; and build the temple of the Lord , the God of Israel)이다.

그들이 지어야 할 ''은 하느님께서 간택하시고 계약을 맺으셨던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하느님'이신 주님의 ''인 것이다.

 

여기서 ''에 해당하는 '뻬트'(beth)의 원형 '빠이트'(baith)는 '짓다'(욥기27,18), '세우다'(룻기4,11), '건축하다', '세우다'(민수32,28) 등의 뜻을 지닌 동사 '빠나'(bana)에서 유래하여 건물로서는 ''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수식을 받으므로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하느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2열왕16,18; 1역대29,3)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단어가 상징적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가족'(창세5,22), '씨족'(민수1,2)등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실 본문에서도 이면적으로는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에즈라기 전체는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과 재건 과정을 언급하는데그 과정이 표면적으로는 포로 귀환 및 예루살렘 성전과 성곽의 재건으로 나타내지만내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즈라기 전반부 1-6장은 즈루빠벨의 주도로 이루어진 제1차 포로 귀환과 성전 재건을 다루지만후반부 7-10장은 에즈라 주도로 이루어진 제2차 포로 귀환과 신앙 쇄신과 개혁을 다룬다.

따라서 이 모든 내용의 서론적 성격을 지니는 에즈라기 서두에 나오는 키루스의 칙서에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집재건은 일차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가리키지만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의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의 하느님꼐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여기에 해당하는 원문은 '예히 엘로하이우 임모'(yehi ellohiau immo; may his God be with him)이다.

원문은 '그들의 하느님'이 아니고 '그의 하느님'('엘로하이우'; ellohaiu)이다.

여기서 3인칭 단수형으로 쓰인 ''는 하느님의 백성된 사람 하나하나를 가리키는 표현이다즉 키루스는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 하나하나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이 백성의 남은 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모든 지방의 사람들은' (4)

 

'남은 자들'에 해당하는 '한니쉬아르'(hannishiar; remainders; survivors)는 '남다'(창세32,8)라는 뜻의 동사 '샤아르'(shaar)의 수동 분사형에 정관사 ''(ha)가 결합된 형태로서 '그 남아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남아 있는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에 있음을 보여준다따라서 이 표현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소멸되지 않고 남겨진 자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배제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은 범죄한 남부 유다를 멸망시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함으로써 그곳에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회복시키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예레27,1-15; 31,1-14), 이를 거부하고 이집트로 피신한 자들이 있었다(예레42-44).

뿐만 아니라 바빌론에 포로된 자들 가운데서는 그곳 이방 문화에 동화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자신들이 포로된 시건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 있었다그들이 바로 본절에 나오는 '그 남아 있는 자들','이 백성의 남은 자들'인 것이다.

 

참고로 에즈라기는 B.C.538년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포로 귀환 칙령으로부터 B.C.444년 느헤미야 주도의 제3차 포로 귀환 직전,즉 제2차 포로 귀환 시대까지를 다루는 책으로서2성전인 즈루빠벨 성전의 건축과 에즈라의 신앙 개혁을 중심으로 한 선민 이스라엘 역사의 영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 성경 전통에서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기는 저자의 이름을 따서 에즈라서로 불리며, 단일작품으로 여겨졌으며, 1세기에 간행된 히브리 성경에서 구분이 이루어졌다.

저자는 바빌론 유배 이후 한 세기 동안의 사건들을 보고한다.

작중연대는 어림잡아 키루스 칙령(BC539년경)부터 아그타크세르크세스 1세(BC464-424) 말년 까지로 잡으면 된다.   

최종 편집은 느헤미야의 공적 활동이 끝난 뒤인 BC400년경에 이루어졌다고 본다.

 

에즈라.느헤미야기의 관심사는 세 가지이다.

성전 건립.예루살렘 도성 복구.하느님 백성의 쇄신이며, 이 세가지는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성전 건립과 예루살렘 도성 복구는 이스라엘의 외적 조건을 회복하는 것이다.

외적 조건을 아무리 완벽하게 회복하더라도, 진정한 내적 쇄신을 이루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또 다시 정체성을 잃고, 이민족들 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둘 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전 건립과 도성 복구와 더불어 그 옛날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자기네 조상들에게 내려주신 율법을 바탕으로 시나이 계약을 회복하고, 백성을 쇄신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바빌론 유배를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과 도성을 재건하고, 새로운 계약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게 된, 유배 이후의 시대를 '제 2의 이집트 탈출' 이라 부른다.

에즈라('도움'이란 뜻)서는 전반부(1-6장)과 후반부(7-10장)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유배자들의 귀환과 성전의 건립 및 봉헌을 다루고, 후반부는 귀환자들의 쇄신을 다룬다.

 

성전 건축을 명하는 공식 문서인 키루스 칙령은 세 번(1,2-4;,5,13-15;6,3-5)나오는데,

오늘 독서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솔로몬이후 우상숭배와 계명 불이행으로 왕국 분열이 일어나고, 북부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BC 722년에 멸망하고, 남부 유다는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BC 587년 멸망하고, 나라를 끌고 갈 만한 엘리트들이 유배를 간다.

 

이제 때가 차서, 혼종혼과 더불어 야훼 유일신 신앙을 버리고 혼합종교에 빠진 유다는 성전건립을 통해 무너진 주님과의 관계 정립과 회복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업이 유다 자체의 힘으로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하느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과 약속은 반드시 이루신다. 그것도 생각지도 못한 적대국의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바로 유배로 끌려간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를 통해 이루어진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느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못하실 일이 없으시다. 적대국의 왕도, 원수도 주님 손에 들어 있고, 주님이 그들을 유다를 위한 당신 섭리의 도구로 쓰신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과 일련의 역사하심을 깊이 묵상하면서 회개해야 하고, 주님 품으로 빨리 돌아와야 한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를 선포하셨다."(1,1)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복음(루카8,16~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8)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루카8,4~15)와 등불의 비유의 결론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 원리를 빗대어 말씀하시며, 복음을 듣고 실천하는 믿음의 자세를 촉구하신다.

 

또한 이 말씀은 탈란트의 비유의 결론 부분에도(마태25,29), 미나의 비유의 결론에도(루카19,26), 그리고 본절과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의 등불의 비유에도 등장한다(마르4,25).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와 '가진 것이 없는 자'를 비교하신다. 여기서 반복하여 나오는 '호스 안'(hos an)은 '~하는 자는 누구든지' (whosoever)라는 의미로서 '가진 자'와 '가진 것이 없는 자'를 총칭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진 자'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것을 환영하고 잘 활용하여 실천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마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루카8,15)  계속적으로 삶의 더 많은 기쁨과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반면에 '가진 것이 없는 자'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서도그리고 그 말씀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경시하고 하찮게 여기며 실천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함정은 자신들에게 분명히 없는데, '가진 줄'로 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마태오 복음 25장 29절과 마르코 복음 4장 25절, 그리고 루카 복음 19장 26절에는 빼앗기게 되는 대상이 모두 '가진 것', 즉 '호 에케이'(ho echei)로 되어 있다.

즉 루카 복음 8장 18절의 '~줄로 여기는'에 해당하는 '도케이'(dokei)가 없다.


 '도케이'(dokei)는 '사실은 그렇지 않는데 그러하다고 독단적으로 생각하거나 잘못 믿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루카 복음 8장 18절의 '(가진 것이) 없는 자'는 사실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는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으므로 빼앗길 것도 없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8장 18절에서 그것조차도 빼앗길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사실은 없는데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결국 그 마음이 완고해지고 사악해져서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의 길에서 더 멀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는 전에 이미 하느님께로부터 은총과 말씀을 깨닫는 통찰력그리고 풍성한 은사들을 받았지만, 그후 말씀에 부주의하고 말씀 듣기를 싫어하고,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사는 중에 그러한 것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자신 안에 그러한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줄 알고, 계속해서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 결국에는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에서조차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본주의의 부조리요 모순인 경제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지고서, 복음에 대한 자세가 결국 내적(內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원인이 될 것임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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