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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가장 큰 사람 (루카9,46-5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27 조회수1,12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9월 27일 월요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가장 큰 사람 (루카9,46-50)

 

1독서<내 백성을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구해 내리라.>(즈카8,1-8)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나는 시온에 커다란 열정을격렬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내가 시온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리라예루살렘은 진실한 도성이라고만군의 주님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리라.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나이가 많아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든 남녀 노인들이 다시 예루살렘 광장마다 앉아 쉬리라.

도성의 광장마다 뛰노는 소년 소녀들로 가득 차리라.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그때에 이것이 이 백성의 남은 자들 눈에 신기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내 눈에까지 신기하게 보이겠느냐만군의 주님의 말이다.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이제 내가 내 백성을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구해 내리라.

나는 그들을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게 하리라그러면 진실과 정의 안에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화답송 시편 102(101),16-18.19-21.29와 22-23(◎ 17)

◎ 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영광 속에 나타나시리이다.

○ 민족들이 주님 이름을세상 모든 임금이 당신 영광을 경외하리이다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영광 속에 나타나시어헐벗은 이들의 기도를 굽어 들어주시고그들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리라

○ 오는 세대를 위하여 글로 남기리니새로 창조될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리라주님이 드높은 성소에서 내려다보시고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니포로의 신음을 들으시고죽음에 붙여진 이들을 풀어 주시리라

○ 당신 종들의 자손은 편안히 살아가고그 후손은 당신 앞에 굳게 서 있으리이다.” 주님이 시온에서 당신 이름을예루살렘에서 당신 찬양을 전하시리라그때에 백성들과 나라들이주님을 섬기러 모여들리라

 

복음<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9,46-50)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그들에게 이르셨다.

48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제1독서 (즈카8,1-8)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시온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리라. 예루살렘은 '진실한 도성'이라고,  만군의 주님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리라."  (3)

 

 

즈카르야서 8장 3절은 8장 2절에서 제시된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 시온에 대해 격렬한 열정을 지니신 결과가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시온에 돌아와 그곳에 살 것임을 지적한다.

 

여기서는 두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하나는 '내가 돌아가'에 해당하는 '샤브티'(shabthi)이고, 다른 하나는 '살리라'에 해당하는 '웨샤카느티'(weshakanthi)이다.

 

새 성경의 번역을 통해서는 각각의 동사의 시제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상 이 두 동사의 시제가 다르다.

먼저 '샤브티'는 완료 시제로서 이미 하느님께서 시온에 돌아와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반면에 '웨샤카느티'는 계속적 용법의 접속사 '와우'(wau)와 더불어 완료형 동사가 사용되어 지속과 계속, 미래의 상태를 나타낸다.

 

즉 본문은 하느님께서 이미 시온에 돌아오셨다는 것과 장차 앞으로 영원히 예루살렘 한가운데 살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온'과 '예루살렘'은 동일한 이름이며, 성전이 재건될 곳으로서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성읍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이미 그곳으로 돌아오셨다는 것 하느님께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켜 그곳으로 귀환케 하셨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알아들 수 있다.

그리고 접속사 '와우'(wau)가 계속적 용법으로 사용될 경우에 이어지는 완료 동사는 미완료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예루살렘에 살 것이라는 약속은 성전의 재건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사신다는 것, 즉 하느님의 거룩한 임재를 상징한다.

따라서 성전의 재건은 하느님 임재의 확실한 증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더불어 친교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구약의 제2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쯔룹바벨 성전과 구약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먼 미래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께서 새 예루살렘에 머무실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것이다.

 

특히 '웨샤카느티'(weshakanthi)의 원형 '샤칸'(shakan) 원래 유목 사회에서 양을 치기 위해 풀밭을 찾으며 장막(tent)을 치고 머무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이다(창세9,27).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께서 성소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실 때에도 사용되었다(탈출25,8).

구원사적 맥락에서는, 이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 머무시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4)는 진술이 제시된다.

또한 요한 묵시록에서도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묵시21,3)라는 진술이 나온다.


여기서 '사시고', '거처하시고', '계시고'라는 표현에 사용된 희랍어는 모두 '스케노오'(skenoo; live; dwell)이다. 이처럼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구절들에 동일하게 사용된 동사 '스케노오'는 모두 다 본문에 사용된 동사 '샤칸'(shakan)과 관련된 표현이다.


이상의 관련된 성경 구절들과 거기에 반복사용된 표현들은 본문에 제시된 약속이 장차 구원사적 발전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통해 완전히 성취될 것임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은 '진실한 도성'이라고,  만군의 주님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리라." 

 

본절 후반절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머무시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먼저 그곳은 '진실한 도성'이란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고 예언한다.

과거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곳에 '진리'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멸망 이전의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진리가 아닌 거짓 예언자들이 마음으로 지어낸 헛된 말을 좇았으며, 백성들이 서로에 대해 거짓을 일삼고, 심지어 진실과 진리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법정에서조차 뇌물과 정치적 알력, 개인의 이기적 동기로 인해 진리를 외면하였다.

 

실로 예루살렘은 거짓과 불의, 속임이 난무하는 도시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심판을 내리신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 성읍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회복은  다만 성전이 세워지고 성벽을 굳건히 쌓고,  성읍의 거주민들이 늘어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하느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회복은 다름아닌 진리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진실한 도성'으로 번역된 '이르 하에메트'(ir haemeth; the City of Truth) 바로 그곳이 '진리'를 행하는 성읍. '진리'를 세상에 널리 드러내는 성읍으로 불릴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만군의 주님의 산은 거룩한 산으로 불리리라'에서, 시온이 '거룩한 산'('하르 학코데쉬'; har haqodesh; the Holy Mountain)으로 불리움을 받는다는 말은 그곳에 성전이 세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곳은 거룩하신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상징적 처소인 성전이 세워진 산이기 때문에 거룩한 산으로 불리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의 진술은 '거룩한 산'에 거주하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 오셔서 당신의 계명과 율법을 모세를 통해 주실 때에 모세에게 이틀 동안 백성들을 정결케 하고, 그 옷을 빨아 준비하게 한 후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셨다.

그리고 그처럼 정결케 한 이후에도 함부로 하느님의 산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셨다(탈출19,5-12).

 

과거 모세 시절에도 그러했다면, 하느님꼐서 직접 임재하시는 '거룩한 산'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시온에서는 어떠할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 하느님께서는 시온이 예표하는, 정차 도래할 새 예루살렘과 관련해 "그러나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21,27)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거룩함'으로 자신을 지키는 자만이 '거룩한 산'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당시 정황과 관련해, 성전 재건으로 예루살렘이 하느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산'이 된다는 의미에 더하여, 신약의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규정지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거룩한 면모를 예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20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9,46-50)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 가장 작은 사람이 하늘을 받아 들여 가장 큰 사람이 되는 것, 어린이는 자신 밖에 모른다. 자신의 오관이 만족하지 못하면 울로 불고 난리가 난다.

그 어린이를~ 자신을 비워내는 그 작은 사람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받아 들이면 큰 사람이다. 이 세상 부모들이 그렇게 큰 사랑으로 자녀를 키운다.

예전, 본당 원로하신 수녀님께서 “여러분은 좋겠어요, 자녀를 목숨 걸고 사랑하쟌아요. 그 큰 사랑을 알고 체험하고 있쟌아요?” 하셨듯, 부모만큼 큰 사랑을 하는, 큰 사랑을 아는, 큰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땅의 큰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 큰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47절에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리고 48절에 *이 어린이를~로 말씀하신다.

어린이 하나란~ 가장 낮은, 작은 사람으로 짐승들의 먹이(구유)로 오신 아기 하나,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루가2,11-12)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 지금까지 먹었던 육의 양식(율법, 윤리), 그 나의 모든 것을 비워내고, 버리고~ 구유의 그 어린이 하나를 구원(생명)으로 받아들이면 하늘의 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욥은 당대에 가장 큰 사람 이였다. 땅의 가장 큰 의인이라는 말이다. 자식들이 잔치(행사)를 치루고 나면 혹시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원망하는 잘못을 저지를까봐 그때마다 정결하게 하는 예식을 치루곤 했다.

그렇게 온갖 정성으로 키운 자식들이 주고, 모든 재산까지 빼앗기는 시련을 당해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왜? 자신은 큰 사람이니까~

(욥기1,20-21 2,10) 20 그러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21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2,10 그러자 욥이 아내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미련한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 이 한 부분만 읽고 그를 닮으려 한다면 하늘의 가장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왜~ 당대의 가장 큰 의인에게 그 큰 시련을 허락하셨을까? 그것은 법(율법, 윤리)을 잘 지킨 그 큰 사람, 그 의인은 구원의 권위가 없는 헛되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다.

 

참조~(코헬렛3,18-19) 18 나는 인간의 아들들에 관하여 속으로 생각하였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어 그들 자신이 다만 짐승일 뿐임을 깨닫게 하신다고. 19 사실 인간의 아들들의 운명이나 짐승의 운명이나 매한가지다. 짐승이 죽는 것처럼 인간도 죽으며 모두 같은 목숨을 지녔다.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 모든 것이 허무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같은 하느님의 뜻을 모르니 시련이 *계속되자 욥은 자신의 무고함을 들어 하느님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욥기3,2-4 11) 2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3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4 그날은 차라리 암흑이 되어 버려 위에서 하느님께서 찾지 않으시고 빛이 밝혀 주지도 말았으면. 11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 피조물인 자신을 창조하신 그 창조주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욥기19,23-27)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 내리는구나.

= 하느님을 꼭 만나서 자신의 정당함을 따지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욥은 37장까지 자신의 큰 사람됨, 그 정당함을 위해 몸부림친다.

 

(욥기38,1-4. 8.19.31 40,1-4)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2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3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하느님의 지혜로 답하라는 것) 4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네가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8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그것이 모태에서 솟구쳐 나올 때, 19 빛이 머무르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또 어둠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31 너는 묘성을 끈으로 묶을 수 있느냐? 또 오리온자리를 매단 밧줄을 풀 수 있느냐?

40,1 주님께서 욥에게 계속 말씀하셨다. 2 불평꾼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려는가?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는 응답하여라. 3 *그러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4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 자신이 짐승일 뿐임을~ 자신의 자기 의로움은 헛된 것일 뿐임을 깨닫는다.

 

욥기의 결론이다. 

(욥기42,2-6) 2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3 당신께서는 “지각없이(깨달음 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4 당신께서는 “이제 들어라.(하느님의 지혜를) 내가 말하겠다.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소문으로만 들었던 사람의 귀) 6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 하느님은 땅의 의인, 그 큰 사람이 아닌, 자신의 헛됨을 깨닫는 그 작은 사람이 하늘을 받아들여 하늘의 큰 사람으로 만들어 내신다.

욥의 고백처럼~그 큰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그 일에 동원되는 노고가 사탄을 통한 시련이라는 것이다. 피조물, 그 그릇이 땅(세상)의 것을 담으면 땅에 것이 되고, 하늘의 것을 담으면 하늘의 큰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의인, 큰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를 담아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다시 복음으로~

(루가9,48) 48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아멘.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9,46-50)

 

오늘 복음 해설이 없어서 병행구절인 (마태복음18,1-5.10) 해설을 올립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0)

 

'주의하여라'에 해당하는 '호라테'(horate; take heed)의 원형 '호라오'(horao)는 일차적으로는 '눈으로 보다'(요한8,57)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알다', '조심하다', '유의하다'라는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은 잊지 않도록 마음에 두어 유의해서 반드시 지켜야 함을 뜻한다.

 

특히 여기서는 현재 명령형으로 기록되어서, 주의해야 할 사항이 단순한 권고 사항이 아니고 반드시 실행해야 할 실천적 명령이며, 또한 현재 명령형이기에 희랍어에서 현재는 일회성이 아닌 계속적으로 유념해야 할 사항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업신여기지'에 해당하는 '카타프로네세테'(kataphromesete; look down; despise)의 원형 '카타프로네오'(kataphroneo)는 '업신여기게 되다','가볍게 여기다'(마태6,24), '업신여기다', '멸시하다'(로마2,4)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자세를 뜻한다.

 

본문에서는 부정(不定) 과거 가정법으로 사용되었으나, 여기에 금지를 나타내는 부정어 '메'(me; not)와 함께 쓰여서 강력한 금지를 나타낸다.

 

마태오 복음 18장 10절은 5~9절에 뒤따라 나오지만, 내용상 14절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10절에서 14절까지의 한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마태오 복음 18장 10절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14절) 이루기 위해서는작은 이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멸시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그들의 천사들이'에 해당하는 '앙겔로이 아우톤'(anggeloi auton; their angels)에서 '그들의'에 해당하는 '아우톤'(auton; their)은 앞서 나온 '작은 이들'을 말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수호 천사를 임명해 두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사도12,15).

 

히브리서 1장 14절에서는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으로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되는 이들이 아닙니까?" 라고 계시되어 있다.

 

이 천사들의 기능과 역할 및 활동의 방법에 대해서는 성경이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속단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는 것은 '작은 이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특별 대우를 받아야 될 존재들임을 나타낸다.

 

'작은 이들'을 지키는 천사가 항상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있다는 것은 '작은 이들'이 하느님께 특별한 관심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사실은 '작은 이들'을 보호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작은 이들' 즉 예수님께 속한 믿음의 자녀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로우심과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잃어버리는'에 해당하는 '아폴레타이'(apoletai; should be lost; should perish)의 원형 '아폴뤼미'(apollymi)는 돌보는 사물, 혹은 짐승 등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잃다'(마태15,24)라는 뜻만이 아니라, 일이 어그러지거나 실패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망하다'(마태26,52)는 뜻과 그리고 영원한 생명(구원)을 상실하게 됨을 의미하는 '멸망하다' (요한3,16)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잃어버리다'는 것은 영원히 하느님 품을 떠나 죄의 길에 머물다가 영원한 참 생명을 얻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볼 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결국 선택하신 자들 가운데 단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나타낸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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