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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1.09.2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27 조회수1,469 추천수5 반대(0) 신고

 

(어린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021년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복음 루카 9,46-50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몇 년 전백령도에서

선물 하나를 제게 보내줬습니다.

백령도 홍어가 유명하다면서

보내 주신 것입니다문제는 손질되어서

곧바로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또 삭힌 홍어도 아니었습니다.

생물 홍어 한 마리가 통짜로 온 것입니다.

손질된 홍어만 먹어봤지직접 손질을

해야한다고 하니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겨우 손질해서

직원들과 함께 먹을 수 있었지만,

그 뒤 다시는 이런 선물이

오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야 인터넷 안에 들어가면 모든 요리

레시피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어떠했을까요?

줘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겠다 싶습니다.

알아야 잘 먹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도 알아야 제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모르기 때문에 받았어도

받은 줄 몰라하는 것입니다오히려

더 큰 시련을 주셨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하십니까?

줘도 못 받아 먹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느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도록,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여야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고 하십니다.

지금이야 어린이를 마치 집안의 최고

어른처럼 모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한 약자였습니다.

아직 미성숙의 단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무시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습니다그런데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여야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어린이와 같이 사회 안에서 소외당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비록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주님의 이름을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도 막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들 역시 함께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뜻이 마치 주님의 뜻인 것처럼

이웃을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은 모두를 포용하는 사랑이라는 것,

특히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이 모습이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는 것이고이로써 주님께

더 큰 사랑과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우리는 항상 더 많이의 경제에서

이제 충분하다의 경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아르투어 리히)

빠른 속도느린 속도... 모두 상대적입니다.

처음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동창 신부의 차를 처음으로

운전하게 되었습니다운전학원이 아닌

장소에서는 단 한 번도 운전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척 긴장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동창 신부에게

운전하면서 계속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 너무 빨리 가는 것 아냐?”

차의 속도계도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당시의 저였습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과속하고 있는 것처럼

차의 속도가 빠르다고 느꼈던 것이지요.

동창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40km조금 더 속도 내도 돼.”

이렇게 빠르다느리다라는

기준 자체는 상대적입니다.

언젠가 어떤 신부의 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속도를 내지 않고 가는

앞차를 향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렇게 느리게 갈 것이면 차선을

바꿔줘야지뒤의 차들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잖아?

왜 배려를 하지 않는 거지?”

앞차의 운전자가 초보자라 나름

최고 속도를 내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긴장하고 떨려서

어쩔 줄 몰라 할지도 모릅니다.

배려는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남의 배려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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