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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회개(悔改) (루카10,13-1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30 조회수69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0월 1일 금요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회개(悔改(루카10,13-16)

 

1독서<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거역하였습니다.>(바룩1,15-22)

15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 16 우리 임금들과 우리 고관들과 우리 사제들우리 예언자들과 우리 조상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17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18 그분을 거역하였으며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19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날부터 이날까지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20 주님께서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려고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던 날당신 종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가 오늘 이처럼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21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22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화답송 시편 79(78),1-2.3-5.8.9(◎ 9ㄴㄹ 참조)

◎ 주님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소서.

○ 하느님민족들이 당신 유산의 땅에 쳐들어와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었나이다당신 종들의 주검을 하늘의 새들에게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살을 땅 위의 짐승들에게먹이로 내주었나이다

○ 그들의 피를 물처럼예루살렘 둘레에 쏟아 부었 건만묻어 줄 이 아무도 없나이다저희는 이웃에 우셋거리가 되고주위에 비웃음과 놀림감이 되었나이다주님언제까지 마냥 진노하시렵니까언제까지 당신의 격정을 불태우시렵니까

○ 선조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소서어서 빨리 당신 자비를 저희에게 내리소서저희는 너무나 불쌍하게 되었나이다

○ 저희 구원의 하느님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저희를 구하소서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복음<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10,13-16)

13 “불행하여라너 코라진아불행하여라너 벳사이다야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또는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독서(이사 66,10-14)와 복음(마태 18,1-5)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제1독서 (바룩1,15ㄴ-22)


히브리어 성경에 없는 바룩서는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경을 통해서 전해졌다히에로니무스는 유다인들이 읽지도 않고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이유에서 바룩서를 라틴어로 옮기지 않았다.

히브리어로 '바룩'은 '축복받은 자'라는 뜻이다.

 

6장의 예레미야의 편지를 빼고는 이 책의 저자로 알려진 바룩은 유다 왕궁의 서기관이며동시에 예례미야의 비서 겸 제자요 친구로서예언자의 삶과 신탁을 후대에 전해 준 중요한 인물이다.

저자와 저작 연대와 집필 장소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문의 정보가 신빙성이 없어서 바룩서의 저자는 바룩의 이름을 빌려 쓴 차명 작품으로 본다.

 

작중연대는 바빌론 유배 기간이지만주요 부분의 저작연대는 이르면 유배 이후 시대부터 늦으면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200-60)까지 폭넓게 생각한다.

집필장소도바룩서의 원문이 히브리어로 쓰였고그 내용이 바빌론 포로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공동체에 대한 권고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팔레스티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바룩서는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1장 1-14절은 도입부로서 저자나 저술 장소와 시기저술 상황을 밝힌다.

둘째, 1장 15-3장 8절로 유배자들의 기도이다.

세째. 3장 9-4장 4절은 지혜와 율법에 관한 성찰이다.

네째, 4장 5-5장 9절은 유배의 신학적 반성과 회복에 대한 희망이다.

다섯째, 6장의 예례미야 편지는 예례미야가 바빌론으로 유배살이를 하러 떠나는 포로들에게 써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오늘 독서 1장 15-22절은 바로 둘째 부분에 해당되는 산문으로된 유배자들의 기도이다저자는 여기서 신명기 신학을 전개한다.

곧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돌아보며 반성하고(1,15-2,12), 주님의 자비를 간절히 청한다(2,13-3,8). 과거에 대한 반성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 중점을 두고간절한 청원은 현재 바빌론 유배 상황에 촛점을 둔다.

 

이스라엘은 과거 이집트 탈출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역을 일삼았다그 결과 모세를 통하여 주님께서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신명기27-30)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재앙의 근원은 하느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잘못이다. 하느님은 자애롭고 공정한 분이시다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하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하느님 대신 그 땅의 잡신들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들을 시켜 경고하셨지만이스라엘 백성은 그 경고를 듣지 않아 결국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다애가에서처럼 제 자식의 살을 먹는 끔찍한 상황을 언급한다(2,3; 신명28,53-54참조).

이스라엘은 이제 공정하신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분의 자애에 매달릴 뿐이다(3,1-2).

 

이같은 신명기적 신학사상과 관련하여 바룩서의 저자는 세 가지 점을 부각시킨다.

첫째유배의 진정한 의미이다유배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이름과 계약을 다시 기억하고자신들의 죄악에서 유일한 하느님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둘째토라(모세오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죽음의 길에 들어선 것은하느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지혜의 샘이요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인 토라를 저버린 탓이다바룩서는 토라를 소유한 이는 다른 지혜가 필요없다고 말한다.

세째바룩서의 저자도 애가의 저자처럼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인격화한다다만 애가는 시온(예루살렘)을 딸로 표현한 데 반해바룩은 홀어미를 표현한다이 홀어미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심지어 자식들마저 낯선 땅으로 떠나 보내고지금 큰 슬픔에 잠겨 있는데바룩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낯선 땅에서 돌려보내시리라고절망에 빠진 홀어미를 위로할 뿐만 아니라 그를 들어 올리시고정의와 평화와 거룩함의 새로운 소명을 주실 것이라 선언한다(5,3-5).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그 분을 거역했으며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그 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당신 종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가 오늘 이처럼 우리에게 내렸습니다~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바룩 1,15-22참조)

 

오늘 복음 루카 10장 13-16절에 예수님께서 코라진벳사이다카파르나움의 도시들에 대해 불행을 선언하신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을 비롯한 도시들의 모습은바로 내 자신과 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와 교회와 사회와 나라와 이 시대에 적용하면 영신적으로 무난하다.

복음의 세 도시는 라삐들의 종교교육이 성행하고상업이 번창했던 부유한 도시였다그러나 오만과 자기식의 의고집과 자기도취에 빠져예수님께서 그렇게도 많은 기적들을 보여주시며 사랑을 쏟았건만주님 말씀에 귀를 막고 돌아오지 않아지금 나무람을 받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평소 생활은 어떤가오늘 독서와 복음을 연계시켜 묵상해 볼때, "돌아오라 ~~사랑한다~~" 외치는 기도 공동체 성가 386장 "주의 성심을 바라 보아라의 가사가 절절히 들리는 듯 하다.

회개하도록 외치시며 사랑을 쏟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 자신이 거역했을 때그 사랑은 믿음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로다른 공동체로 흘러감을 알아야 한다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복음(루카10, 13~16)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3~14)

 

'코라진'(chorazin)은 '나무가 많은 곳'이란 뜻으로 오늘날 발견되는 유적에 의하면 당시에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코라진'은 예수님의 초기 활동 지역이었던 '카파르나움'(Capernaum)에서 약 3km 이내에 인접한 도시였다. 현재는 '텔 흄'(Tel Hum)으로부터 동부쪽으로 5km정도 거리에 있는 '케라제'(Kerazeh)일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벳사이다'(Bethsaida)는 '어획 장소'(고기잡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갈릴리 호수 동북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성읍이었다. 원래 명칭은 '벳사이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로서, 헤로데 필리보 임금이 건설하여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렇게 붙여졌다.

 

이곳은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필리보의 고향이기도 했다(요한1,44; 12,21). 특히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눈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던 곳이었다(마르8,22).

하지만 루카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벳사이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가장 큰 이유의 배경에는 루카 복음 9장 10~17절의 기사가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며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으며(루카9,11), 또한 황량한 빈 들에서 먹을 것이 없는 군중들에게 '오병이어'로 남자 장정만도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시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다(루카9,13~17).

 

이것을 볼 때, 갈릴리 지방의 주요 도시였던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많은 권능과 기적을 베푸신 활동의 주요 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곳 사람들은 믿음에는 보잘 것 없어 예수님의 복음을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에 해당하는 '우아이 소이'(Uai soi; Woe to you)에서 '우아이'(uai)는 엄숙한 경고나 고통, 분노 그리고 동정심 내지 연민 감정이 서려 있는 탄식을 표현하는 의성적 감탄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신 것이 단순히 심판과 보복만의 선언이 아니고, 불신앙에 대한 책망 속에는 그들을 향한 동정과 연민의 안타까운 심정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고대 페니키아의 도시였던 티로와 시돈은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갈릴리 지방과 인접해 있어서 예수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신 적이 있었는데(마태15,21; 마르7,24.31),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언급하신 것은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완고하고 사악함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구약적인 배경에서 '티로와 시돈'은 하느님의 심판 선고를 받은 사악한 이방 도시였다(이사23장; 에제26~28장; 요엘4,4~8).

'티로와 시돈'은 갈릴리 북방에 있는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로서 '티로'는 B.C.2750 년경에, 그리고 '시돈'은 B.C. 1400년 이전에 건설되었다.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이 두 도시는 번영과 쾌락과 이교도의 도시로서 유명하며,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억압한 결과(아모1,9; 요엘 4,4~6) 하느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이사23장; 에제26~28장)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보다 갈릴리의 도시들이 더 사악하고 완고한 곳이라고 선언하시고 있는 것이다.

 

'티로'(Tyro)는 '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티로'라는 지명을 거론하시면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이 바위보다도 더 마음이 굳어지고 사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비가 와도 조금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 바위처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자루옷'으로 번역된 '삭코'(sakko; sackcloth) 낙타의 짧은 털과 같은 거친 직물로 만든 옷이며, 흔히 슬픔과 탄식을 표현할 때 맨 살 위에 바로 입었다(2사무3,31; 1열왕21,27).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서적인 회한(悔恨)을 표현하기 위해 '재'(먼지; ash)를 머리 위에 끼얹거나(애가2,10), 잿더미 위에 앉거나(요나3,6), 재 위에 드러 눕기도 하고(에스테르4,3), 그 위에 뒹굴기도 하였다(미카1,10).

 

이렇게 구약에서 회개의 행위를 표현할 때 관용적으로 쓰던 표현을 사용해서 이방인들 '티로와 시돈' 사람들보다도 더 완고하고 사악한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10장 14절에서 '심판 때에'에 해당하는 '엔 테 크리세이' (en te krisei; at the judgment)라는 말로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심판관으로 재림하셔서(사도17,31; 2베드2,9) 죄악에 대하여 엄격히 심판하시지만, 허락되었던 특혜와 특권을 감안하셔서 더 많이 받은 그 책임을 저버린 자들에게 더 큰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이것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ㄴ)는 영적 원리에 의한 것이다.

 

성경 속에 나오는 도시는 나 자신과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적용하면 된다.

인간이 회개할 때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며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시는 인격적인 주님 대전에 언제까지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부릴 수 있겠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동시에 더 많은 은총과 현세적 축복과 영적 혜택을 입은 사람이 그것을 거부했을 때에는 더 큰 내세의 심판과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ㄴ)의 영적 원리에 의한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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