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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30 조회수838 추천수0 반대(0) 신고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6,10-14

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를 두고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11 너희가 그 위로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리라.

너희가 그 영광스러운 가슴에서

젖을 먹어 흡족해지리라.

1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13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14 이를 보고 너희 마음은 기뻐하고

너희 뼈마디들은 새 풀처럼 싱싱해지

리라.

그리고 주님의 종들에게는 그분의 손

길이,

그분의 원수들에게는 그분의 진노가

드러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해제. 역주 정 양 모)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

마태오는 산상설교,파견설교,비유설교에 이어 이제 공동체설교를 엮었다. 공동체설교에서는 교회의 참 모습을 밝힌다. 18장을 일컬어 흔히 교회규범이라고도 하는데,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마음가짐, 몸가짐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1-9절은 대체로 마르 9,33-50을 옮겨쓰면서 가감,수정한 것이다. 나머지 가운데 10-14.15.21-22절은 어록에서 따왔고, 16-20. 23-35절은 특수자료인데 유다계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채록했을 것이다.

 

1-5절은 마르 9,33-37을 옮겨쓰면서 대폭 가감,수정한 것이다.

 

1

마르코에 의하면 제자들은 서로 시기하여 누가 제일 잘났느냐고 길에서 다투었다. 마태오는 이를 고쳐,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이냐는 식의 객관적 질문으로 바꾸었다. 여기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냐 아니면 이제 어린이들처럼 처신하면 장차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의 세계냐, 논란이 계속되고있으나 굳이 양자택일을 할 필요는 없겠다.

 

2

2절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그를 껴안으시며”(마르9.36)를 약간 고쳐쓴 것이다.

 

3

3절은 마르 10.15 “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를 많이 개작한 것이다. 앞뒤 문맥을 고려해서 3절를 풀이해 마땅하다. 제자들처럼 자기를 높이지 말고 어린이들처럼 자신을 낮추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오직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들을 참작할 것이다.(5.20;7.21;19.23=24;23.13-14)

4절은 어록의 말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추어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입니다를 문맥에 맞게끔 조금 개작했다. 4절 역시 겸손을 촉구하는 훈계다.

 

5

5절은 마르 9.37을 옮겨쓰면서 37ㄱ을 고치고 37ㄴ절은 삭제한 것이다. 마르 9.37의 본래 뜻인즉,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셈이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느님을 영접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5절의 뜻인즉, 소외자들을 아끼신 예수님의 처신과 명령에 따라, 불쌍한 어린이, 특히 도움이 필요한 고아 같은 어린이를 돌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돌보는 셈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소외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선행을 당신 자신에게 베푼 선행으로 간주하신 최후심판설교를 연상케 된다. 그러니까 5절의 내용은 겸손을 촉구하신 3-4절의 말씀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태오는 마르9.37 출전을 존중하여 5절을 수록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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