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27 주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02 조회수1,513 추천수6 반대(0)

어린 시절의 기억입니다. 외할머니 댁에 가면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많이 싸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주신 보따리를 가지고 서울로 왔습니다. 장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가는 어머니들의 흑백사진을 보았습니다. 그 사진에서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외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밥 먹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손님이 오면 자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이웃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이 세상 소풍 끝나고 하느님 품으로 가는 날에 많은 분들이 멀리서 왔습니다. 외할머니가 보여주신 덕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닿지 않아서 많이 배우지 못한 외할머니는 손주들을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모두들 대학을 나왔고, 직장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의 시대에는 대학을 나오는 것도,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된 손주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그 자랑스러움에 외할머니는 마리아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외할머니가 자랑스러워하는 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되도록 일을 덜 하려고 쉬운 자리, 편안 자리, 고운 자리만 찾은 것 같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시밭길도 기쁜 마음으로 가셨는데, 저는 꽃길만 찾아다닌 것 같습니다. 저의 삶이 주어진 좋은 조건 속에서 누린 삶이라면, 외할머니의 삶은 어려움 속에서 일구어낸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며 사제의 길을 가는 저의 삶은 어느덧 바리사이파의 삶이 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작은 정성을 봉헌한 것처럼 외할머니의 삶은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제의와 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저와는 달리 외할머니는 나눔과 희생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위대한 것은 그가 어떤 능력과 업적을 만들어 냈는가.’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묵묵히 견디어 냈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짐을 들어주었는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불과 40년 전만해도 당연하게 들리던 말들이 있습니다. ‘여필종부, 남존여비, 출가외인이라는 말입니다. ‘아내는 반드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 여자는 결혼하면 시집의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에도 드러났습니다. 여자 아이를 낳으면 죄송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아들을 낳을 때까지 출산해야 했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상속에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시집을 왔다는 이유로 친정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이 차별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무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운전을 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온 몸을 가려야 했습니다. 마녀라는 이유로 가진 것을 빼앗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문화적인 이유로든, 종교적인 이유로든, 신체적인 이유로든 여성이 차별받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매년 새로운 차가 출시됩니다. 새로 나오는 차는 예전의 차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가지게 됩니다. 소음은 적고, 연비는 높고, 편리한 기능이 있기에 운전이 더 쉽고, 쾌적합니다. 새로 나온 차라고 예전에 나온 차보다 나쁠 수는 없습니다. 새로 나온 차를 차별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도 그렇습니다. 매년 새로운 스마트폰이 출시됩니다. 사람들은 큰 비용을 지출하면서도 기꺼이 새로운 스마트폰을 마련합니다. 이유는 새로운 스마트폰이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은 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와는 아담의 뼈로 창조하셨습니다. 자동차와 스마트폰으로 비유한다면 아담은 구형이고, 하와는 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료라는 측면에서도 흙보다는 뼈가 더 강도가 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서적으로 보아도 여성이 남성보다 차별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느님을 닮은 존엄성이 무시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그런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천년에 한 번씩 오는 선녀의 치맛자락이 커다란 바위를 스쳐서 그 바위가 다 닮아 없어지는 시간이 지나야 옷깃을 스치는 인연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이 주는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참으로 긴 시간을 기다려 만남을 이룬 것이고, 그런 긴 시간을 기다려 만난 그 소중한 인연인 만큼 아끼고 사랑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은, 지금 우리의 만남은 치맛자락으로 1000년에 한 번씩 커다란 바위를 스쳐서 그 바위가 닮아져 없어지는 그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기다려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 세상의 시작이시고,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짝 지워주신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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