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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영원한 생명 (루카10,25-3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04 조회수99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0월 4일 월요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영원한 생명 (루카10,25-37)

 

1독서<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려고 길을 나섰다.>(요나1,12,1.11)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나서 야포로 내려갔다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그러자 뱃사람들이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배를 가볍게 하려고 안에 있는 짐들을 바다로 내던졌다그런데 배 밑창으로 내려간 요나는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선장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

그러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재앙이 닥쳤는지 말해 보시오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고 어디서 오는 길이오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느 민족이오?”

요나는 그들에게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 사람들은 더욱더 두려워하며, “당신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하였소?” 하고 말하였다요나가 그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아그가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11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12 요나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13 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

14 그러자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주님당신께서는 뜻하신 대로 이 일을 하셨으니저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15 그러고 나서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

16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

2,1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11 주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분부하시어 요나를 육지에 뱉어 내게 하셨다.

 

화답송 요나 2,3.4.5.8(◎ 7ㄹ 참조)

◎ 주님당신은 구렁에서 제 생명을 건지셨나이다.

○ 곤경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당신은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저승의 배 속에서 부르짖었더니당신은 제 소리를 들어 주셨나이다

○ 당신이 저를 바닷속 깊은 곳에 던지시니큰물이 저를 에워싸고그 모든 파도와 물결이제 위로 덮쳤나이다

○ 제가 아뢰었나이다. “당신 눈앞에서 쫓겨난 이 몸어찌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다시 바라볼 수 있으리이까?”

○ 저의 넋이 아득해질 때저는 주님을 기억하였나이다저의 기도 당신께당신의 거룩한 성전에 다다랐나이다

 

복음<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그렇게 하여라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또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기념일 독서(갈라 6,14-18)와 복음(마태 11,25-30)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제1독서 (요나1,1-2. 1.11)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서 요나가 뽑혔다."    (7)

 

 

선장은 배 밑창에 있던 요나 예언자를 갑판으로 데리고 올라왔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동안 요나가 주 하느님께 기도했을 것이라는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요나는 어쩌면 당시 상황에서 기도하는 것까지 포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 타르시스로 도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 갑판 위에 요나를 비롯하여 모든 승객들과 뱃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들은 위기 타개를 위한 방편으로 제비뽑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자, 제비를 뽑아서'라고 번역된 '레쿠 웨납필라 고랄로트' (leku wenapilla goralloth; Come, let us cast lots)는 문자적으로 "오라, 그래서 우리가 제비들을 던지자" 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말할 것도 없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제비를 뽑아그 재앙이 누구때문인지를 살피자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로 번역된 '레쿠'(leku) '걷다', '가다'(또는 '오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 '알라크'(allak)의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너희들은 오라'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제비뽑기를 위해 사람들을 각각 갑판 한 가운데로 모이게 하는 말이다.

 

고대 세계에서  제비 뽑는 일은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미래를 점치거나 숨겨져 있는 원인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하던 일반적 관행이었다.

당시 제비뽑기는 막대기나 돌 같은 것 위에 글자를 새겨 던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파선 위기에 놓인 당시 사람들은 막대기에 각각 자신의 이름을 써놓고 그것들을 갑판에 던짐으로써 어떤 이름의 제비가 다른 모양으로 넘어지는지를 관찰함으로써 풍랑의 원인 제공자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아무런 사심도 없이 던진 그 제비가 깊은 강에 빠져 있다가 선장의 꾸짖음에 깨어 아직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 있는 요나 예언자에게 당첨된 것이다.

이것은 제비뽑기의 전 과정을 하느님께서 주관하고 계셨음을 알게 한다.

비록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그 일을 결정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요나를 일깨워 당신의 명령에 궁극적으로 순종하도록 하신 것이다.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  (잠언16,33)

 

 

'누구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이 본문은 그들이 제비를 뽑기 원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던 그 위기를 '재앙'으로 표현한다.

이에 해당하는 '하라아'(harah; evil)의 원형 '라으'(lah)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나쁜 것을 포괄하는 '악'(evil)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뱃사람들은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악의 원인이 인간의 악에 있음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종교적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관념은 욥의 세 친구들에게서도 있었다(욥기4,7). 그러한 이해와 적용이 욥에게는 해당되지 아니했지만, 요나에게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일이었다.

한편 이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위기의 상황에서 그 위기의 원인을 찾아보고자 제비를 뽑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나 문서화된 율법의 말씀이 없는 이방인들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예레44,1-10참조).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

 

본문은 '와이얍필루 꼬랄로트 와이입폴 학고랄 알 요나'(weiyappiliu goralloth weiyippol hagoral al yonah; They cast lost and the lot fell on Jonah)인데, 문자적으로 '그래서 그들은 제비들을 던졌고,그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앞의 '제비'는 복수형으로 되어있는 반면 뒤의 '제비'는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뽑으니'와 '뽑혔다'에 해당하는 단어를 '와이얍필루'와 '와이압폴'의 원형 '나팔'(napal)은 어원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모습(fall down)을 나타내는 동사인데(탈출21,33; 여호6,20), 앞의 것은 3인칭 복수 사역 능동형으로 사용되고, 뒤의 것은 3인칭 단수 기본형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막대기로 된 제비들을 던졌다는 사실 그 제비들 가운데 당첨되었음을 알리는 특정한 제비가 사람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느님의 주권에 의하여 요나에게 떨어졌음을 암시한다.

 

이로 인해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요나가 풍랑의 원인 제공자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특별한 섭리를 통해 당시 배에 탄 사람들이 던진 제비가 정확하게 요나에게 당첨되도록 역사하셨던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조금도 관여되지 않은 제비뽑기로 인해 요나는 당시 재앙이 일어나게 한 원인자임이 밝혀졌고, 이것을 통해 요나는 자신의 범죄 사실을 시인하게 되었다.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누가 저의 이웃인가?

(루카10,25-37)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 법(도덕과 윤리)으로 읽었느냐? 진리(하늘의 대속)로 읽었느냐? 하느님의 계명으로 읽었느냐? 인간의 윤리 계명으로 읽었느냐? 숨겨진 하느님의 진리로 읽었느냐? 인간의 뜻으로 읽었느냐? 어떻게 읽었느냐 물으시는 것이다.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 율법교사, 그의 말대로 라면 그는 살지 못한다. 하느님을 목숨바쳐 사랑할 수도,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시편14,2-3) 2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들을 굽어 살피신다, 그 누가 깨달음 있어 하느님을 찾는지 보시려고. 3 모두 빗나가 온통 썩어 버려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하나도 없구나.

 

(로마3,10-12) 10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1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12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 말씀을 하늘의 진리로 올바로 읽었다면, 깨달았다면 하느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마음과 정신,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목숨바쳐 사랑해 주심을 알았을 것이다.

그 사랑의 하느님을~ 온 마음과 정신, 온 힘을 다해 나의 생명, 진리로 믿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 또한 병행복음 마태복음으로 가보면~

 

(마태22,39)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와 같다는 것이다.

죄인들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주어 그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깨닫게 해 주는 것, 그래서 이웃도 하느님을 온 힘으로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이웃을 살리는, 그것이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큰 계명이다.

그러나 이 율법교사는 율법을 제사와 윤리,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읽었기에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긴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행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에페2,8-9참조)

 

(요한17,3)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아는 것-알고, 아는(야다-눕다. 하나 되다) 모든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당신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신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그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그 아버지의 사랑과 한마음으로 죄인들의 형제, 친구, 이웃으로 죽으신 그 사랑.

그 사랑으로 받는 구원, 생명이니 그 사랑의 관계를 아는 것, 믿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없는 교사는 ~~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 자신이 사랑할 이웃을 묻는다, 찾는다.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위선, 교만이다.

율법을~ 말씀을 사람의 수준, 관점으로 읽었기에 영원한 생명을 빼앗긴 죽음의 상태인 그에게 그를 위한 한 가지 비유 이야기를 주신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 물론 어떤 사람은 율법교사다. 강도들 또한 율법교사들이다.

 

(요한10,7-8)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 하늘의 의로움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진리로 주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인간의 뜻으로 읽고 가르쳐, 인간의 자기 의로움으로 구원이 이르게 잘못 가르쳐, 영원한 생명을 빼앗는 율법교사들인 것이다.

그 상태가,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린~ 그것이 하늘의 혼인예복, 그 생명의 옷을 빼앗긴 죽음의 상태인 것이다.

사람의 관점, 수준, 지혜로 배우고, 가르치고 또 배우고, 가르치고~그렇게 헛된 신앙의 역사는 반복되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묵시3,3 9참조)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 율법자들은 모든 진리의 길, 그 반대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 가엾은 마음, 측은지심, 예수님의 음이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 기름과 포도주, 곧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 돌봐 주신 것이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우리 주님은 죽기까지, 끝까지 갚아 주시는 사랑이시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율법교사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의 질문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냐”로 답하신다.

그것은 율법교사인 그에게 초죽음이 된 이를 싸매줄, 그리스도(기름)의 피(포도주), 그 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자비를 베풀어라 하셨겠는가? 본문에 강도를 만나 죽을 뻔 그가 사마리아인의 받은 것처럼, 율법을 진리로 읽지 못해 영원한 생명을 빼앗긴 너, ‘강도만난 율법교사야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그 사마리아인의 자비를 받아라’ 하시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또한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당연한 도리이다. 그러나 그 인간의 도리로 얻을 수 있는 하늘의 생명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인간의 착한 행실, 그것이 신앙의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2티모1,9-10)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 깨끗하고 거룩해 지는 것이다.) 10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아멘!!!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10,25-37)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0~33)

 

루카 복음 10장 30~35절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며 이웃이 자기 동족에 한정된다고 믿고 있는 어떤 율법 교사에게, 그의 생각이 틀렸고, 또한 그가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기 아님을 드러내며, 또한 그에게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치고자 착한 사마리아인과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수님 당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사제나 레위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예리코는 해면보다 250m 낮은 저지대이다.

 두 지역간의 거리는 약 36km정도였으며, 길이 가파르고 길 옆에는 암석들도 많았으며 도둑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루카 복음 10장 30절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에 해당하는 '헤미타네' (hemithane; half dead) '절반'을 뜻하는 '헤미'(hemi) '죽다' 뜻하는 '트네스코'(thnesko)가 합쳐서 만들어진 형용사로서, 강도 행각의 무시무시함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그래서 강도맞은 사람이 혼자 힘으로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상태였음 보여 주면서, 이웃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상황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마침 그때 백성들을 위해 성전에서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봉헌하는 임무를 지닌 사제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의 의무 기간을 마치고 예리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도맞은 사람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에 해당하는 '안티파렐텐'(antiparelthen; he passed by on the other side) '반대'의 뜻을 지닌 '안티'(anti) '지나가다'라는 뜻을 지닌 '파레르코마이'(parerchomai)가 결합된 동사인 '안티파레르코마이'(antiparerchomai)의 부정과거형이다.

이것은 사제가 의도적으로 사고 현장을 우회하여 지나갔음을 명백하게 확인시켜 준다.

 

아마도 그는 자신도 강도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것이라고 판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신을 부정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율법 때문에 그렇게 헀을 것이다(레위21,1~3).

 

하지만 어떤 이유와도 상관없이, 강도만난 사람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는 최소한도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사제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사제는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을 보고도 의도적으로 외면했으며, 백성의 종교 지도자로서 누구보다도 사랑의 실천에 모범이 되어야 할 사제 (민수18,1~32)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도무지 용납이 될 수 없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또한 레위인도 사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백성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성별된 지파의 사람이었는데(민수18,1~32), 사제보다는 지위가 낮았지만 유대의 종교 특권층이 속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이들이야말로 레위기 19장 18절에 명시된 이웃 사랑의 계명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더 잘 지켜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 레위인도 앞서 지나간 사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채 외면하고 떠나가 버린다.

 

한편, 세번째로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당대 유대인들에 의해 거의 사람 취급을 못받았던 부류인데도 진정한 이웃이 되어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인과 앞서 나온 사제와 레위인을 비교시킴으로써, 교만하고 완고하며 사악한 유대주의자들을 책망하고 계신 것이다.

 

루카 복음 10장 33절에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 (esplangchnisthe; he took pity on him; he had compassion on him) 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의 부정과거형이다. 

신약 성경에서 12회 등장하는 이 단어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에게 쏟아부어져야 할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을 표현한다.

 

이 단어는 사제와 레위인도 강도만나 폭행당해 죽어가는 사람을 당연히 불쌍히 여겨 도와주어야 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하지만 '가엾은 마음' 어려움에 처한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깊이 공감하고, 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어야만 생길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극도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 반면에, 사마리아인만이 비극에 처한 자를 가엾에 여기는 참된 사랑의 자비를 지녔던 것이다.

 

 이야기의 역설과 아이러니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이웃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멸시받던 '이방인'이 불행을 당한 '유대인'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당시 이웃을 한계짓고 구별짓는 배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이웃의 자세를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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