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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주님의 기도 (루카11,1-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06 조회수1,24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0월 6일 수요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주님의 기도 (루카11,1-4)

   

 

1독서<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4,1-11)

요나는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말씀하셨다.

요나는 그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거기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였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오르게 하셨다그러자 아주까리가 요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워 그를 고통스러운 더위에서 구해 주었다요나는 그 아주까리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 이튿날 동이 틀 무렵하느님께서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아주까리를 쏠게 하시니아주까리가 시들어 버렸다.

해가 떠오르자 하느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보내셨다거기에다 해가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어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11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화답송 시편 86(85),3-4.5-6.9-10(◎ 15ㄴ 참조)

◎ 주님당신은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나이다.

○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주님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리오니주님이 종의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 주님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주님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애원하는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 주님당신이 만드신 민족들이 모두 모여 와당신 앞에 엎드려당신 이름에 영광을 바치리이다당신은 위대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당신 홀로 하느님이시옵니다

 

복음<주님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4)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요나4,1-11)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9-11)

 

 앞의 4장 5-8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그늘을 드리우도록 예비하신 아주까리가 하룻밤 사이에 시들었음과 이로 인해 요나가 하느님을 향해 격한 불평을 토로했음을 밝혔다.

 

이제 4장 9-11절에서는 시든 아주까리로 인해 격한 불평을 쏟아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불평의 정당성을 고집하는 요나를 향해, 하느님께서 그의 주장을 역이용해서 니네베 구원의 정당성을 밝히는 내용을 다룬다.

 

하느님께서 먼저, 분노하여 죽기를 자청하는 요나에게 수사적 질문을 던지신다.

이방 성읍이며 선민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적대국의 수도라 하여도,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 하느님께서 온 천하보다 소중하게 여기시는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성읍이 멸망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극도의 불쾌감을 느끼고 분노했던 요나가, 후에는 자신이 배양하지 않은 아주까리가 시들어 죽는 것을 보고 극도로 분노하는 것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인 것이다.

 

'아주까리 때문에'로 번역된 '알 학키카욘'(al haqqiqayon; for the gourd)은 '이 아주까리로 말미암아' 혹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로 번역할 수 있다.

그가 하찮은 아주까리가 시들어 죽어버린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합당하다면, 마땅히 하느님 대전에 소중하게 여김받는 니네베 성읍이 멸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하지 말았어야 했다.

 

동시에 요나는 아주까리가 시들어 죽어버린 것에 대해 분노할 자격도 없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위해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며, 햇빛을 주는 등  수고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고가 아니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혜로 자라나 그에게 그늘을 제공한 아주까리로 인해 그는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 하며,  또한 설사 갑자기 그것이 시들어 죽어 버렸어도, 그 사실로 인해  그는 분노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9)

 

한마디로, 요나의 답변의 요지는 자신이 하루 아침에 시들어버린 아주까리로 인해 분노하는 것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죽을지라도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옳습니다' 라는 의미이다.

 

도대체 어느 누가 사람의 목숨보다 아주까리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그러한 주장을 옳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는 아주까리가 벌레 먹어 시든 것이 분노의 이유가 된다면, 아주까리와는 비교 자체도 되지 않는 사람의 목숨 더군다나 수십만의 사람들이 사는 니네베, 단순히 죄인들만 사는 곳이 아닌 선악에 대해 분간조차 못하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십이만 명이나 되는 그곳이 파멸을 당하는 것에 대해 더더욱 분개하고, 마치 심판을 앞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아브라함이 힘을 다해 중개한 것처럼,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일을 막고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1절의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으로 번역된 '아셰르 로 야다으 뻰 예미노 리세몰로'(asher lo yadah ben yemino lisemollo; who cannot discern between their right hand and their left hand) 문자적으로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로서, 이것은 아직 인간으로서의 판단력이 부족한 어린 아이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학자들은 이 숫자를 바탕으로 니네베 성읍 당시 인구를 추정하기도 한다. 여기서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은 6~7세 미만의 유아로부터 아동들을 지칭하며 고대 세계에서 이들의 수는 전체 인구의 5분의 1정도 였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니네베 성읍에는 약 60 여만 명의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또 어떤 학자는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을 어린 아이가 아니라 니네베 도성 주민의 영육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이 도시에 하느님께서 아끼고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당시 니네베는 동쪽으로부터 서쪽까지 직경이 약 30km,  도시 둘레 전체 길이가 약 97km에 이르는 거대한 도시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읍의 사람들에 대해 하느님과는 달리 요나는 자기 편견만을 고집할 뿐만 아니라 자가당착에 빠져 무엇이 자신에게 잘못된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한다.

그러기에 이토록 당당하게 '내가 화가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나의 면모는 요나서 1장에 요나로 말미암아 풍랑을 만난 뱃사람들의 면모와 극한적 대조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1장에서 뱃사람들은 어떻게든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고자 배에 실린 모든 물건들, 그들의 전 재산과 다름없는 그 물건들을 아낌없이 바다에 내던졌다.

 

아울러 비록 요나로 말미암아 배가 풍랑을 만났고, 요나가 명백한 죄인임이 밝혀졌으며, 요나 자신이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청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다에 던지는 것조차 주저하고, 도리어 어떻게든 자기들의 힘으로 위기를 타개하여 요나의 생명을  지키려 하였다.

 

또한 아울러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당할 수 없는 풍랑이 몰려오자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만, 그 이후 겸손하게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뱃사람들의 태도와, 죄인들이라고 해서 무자비하게 파멸을 기대하고 자기 머리를 시원하게 하는 아주까리는 아끼면서 니네베 사람들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태도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또한 온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느님 대전에 겸손할 줄 모르고, 자기 주장이 관철되지 않았다고 해서 원망과 불평의 말을 내뱉으며, 목을 곧게 하고 끝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요나의 면모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실로 이것은 충격적인 대조이다.

 

우리는 이러한 요나의 면모가 단지 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세대의 하느님의 자녀들, 믿음의 자녀들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빠질 수 있는 오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나 요나처럼,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만도 못한 그릇된 일을 저지르며, 왜곡되고 편협한 시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일깨우시는 하느님 앞에서까지 그릇된 길을 고집할 수 있음을 잊지말자.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주님의 기도

(루카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거나 기도하셨을 때, 다른 복음에서는 집, 산, 으로 장소를 알려준다. 오늘은 어떤 곳이다.

주님의 기도는 부정 과거완료 명령형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묵시1,8)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2a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 카이즘 구조로 나누어 있다.

 

A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 이름- 그분의 존재, 뜻. 하느님께서 만이 거룩하심을, 그 거룩함을 드러내시어 깨닫게 해달라고~

 

B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 아버지의 통치를 받게 해달라고~(하느님나라의 통치는 섬김)

 

C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에피시우스(헬라어)- 위에 양식, 꼭 필요한 양식. 마헬(아람어)-내일, 다가올 날의 차원이 다른 양식.

곧 위에 것, 하늘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양식이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다. 하느님으로 존재할 수 있는 날이다. 곧 영원한 생명(시간)을 위한 양식인 것이다.

 

B-1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 당시에 용서의 법이 모든 죄인을 나무에 달아 죽이는 것이다.(신명21,22) 그렇게 ‘용서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라 하시는 것이다. 오늘 기도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기도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무에 달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했을 때,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으로 대신 그 십자나무에 달려 죽으신 그 용서가 이루어지고 받는다. 그래서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기도를 하라 하시는 것이다.

 

A-1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 그러니 십자가의 용서를 무시하는 우리의 힘, 의지로 용서하려는 그 유혹에 빠지지 말라 하시는 것이지요.

 

* 우리의 의지로 용서 하려는 노력은 우리를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이를 용서할 수도,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용서를 얻지 못한다. 물론 사람이 ‘자기 의지로 용서 하려는 노력’ 해야 한다. 그래야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 수 있고, 모든 이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예수님의 용서, 그 용서의 필연성,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랬을 때, 다른 이도 용서 받았음을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그것이 나와 너, 우리의 용서(사랑)이다.

 

*성경은 샌드위치 빵 구조, 곧 카이즘 구조로 쓰여져 있다. 한 가운데 속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히브리의 문학법 이란다. 오늘 주님의 기도 역시 그렇다.

A 와 A-1가 연결되고 B 와 B-1 가 그리고 가장 중심인 C 일용할 양식이 남는다. 곧 하느님의 뜻, 말씀(율법)을 위에 양식(에페시우스), 내일의 양식(쎄메룸)으로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위에 것, 하늘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읽고 먹었을 때, 곧 말씀 양식으로 A 하느님(이름)의 거룩하심을 알게 되고 A-1 인간 스스로의 거룩, 그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고, 또한 그 위에 양식으로 B 아버지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살 수 있는 곧 땅(흙)인 우리(나)에게 이루어지기를 B-1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 그 용서의 삶으로 하늘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 하늘의 생명을 구하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인 것이다.

*인간의 뜻을 위한 기도를 빈말 기도라 하셨다(마태6,7) 일용할 양식, 내일의 차원이 다른 양식, 말씀이다.

 

(신명8,2-3) 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성체 또한 말씀으로 먹는 것, 요즈음 성체를 못 먹는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 십자가의 복음, 곧 구원의 새 계약, 그 말씀이 진리임을 모르고 먹는 파스카 제물, 그 성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니까~~

 

* 말씀이 구원의 양식이다. 말씀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다. 아멘.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복음(루카11,1~4)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2ㄷ-4)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처음 등장하는 단어가 '아버지'인데, 이것은 기도의 대상이 하느님 아버지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에 해당하는 '파테르'(Pater; Father)는 당시 유대인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던 아람어 '압바'(Abba; 마르14,36)를 번역한 것이다. 주로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되는 말이다.

 

구약에서 창조주로서의 두려움과 엄위를 전제한 전능하신 하느님의 호칭 '엘로힘' 스스로 자존(自存)하시며 계약에 충실하심을 보여 주는 고유 명사 '야훼' 사용한 것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느님을 '압바'(Abba)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가 얼마나 긴밀하고 친근한 것인가를 확실하게 보여 준다.

 

이제 나아가서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의 친밀함이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가르치며,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호칭 다음에 두 종류의 간구가 나온다. 하나는 하느님과 관련된 것이며(2절), 다른 하나는 인간과 관련된 것이다(3~4절).

 

하느님께 대한 첫번째 간구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시며'에서, '이름'에 해당하는 '오노마'(onoma; name)는 존재 자체를 의미하며, 하느님의 선하시고 공의로운 속성 등 그 이외의 모든 속성이 그 이름 안에 들어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거룩히 드러내시며'로 번역된 '하기아스테토'(hagiastheto; hallowed be)는 '거룩하게 하다'는 뜻을 지닌 '하기아조'(hagiazo) 부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인데, 이것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느님께서 공경을 받으셔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나타낸다(이사8,13; 29,23; 에제36,23).

말하자면,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이 '인간들에 의해서' 거룩해지기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하고 거역해서 범죄하는 대신에, 하느님을 경외하고 예배할 수 있는 상황과 기회를 베풀어 달라는 간구인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영광과 존귀와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두번째 간구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이다. 여기서 '오게 하소서'로 번역된 '엘테토'(eltheto; come)는 '가다', '오다'를 뜻하는 '에르코마이'(erchomai)의 부정과거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부정과거 명령형은 그 내용이 결과적으로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열망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속히 도래하여', '결과적으로 완성되기를' 바라는 강한 욕구를 포함한다.

또한 '나라'로 번역된 '바실레이아'(basileia; kingdom) 정관사 '헤'(he)와 같이 사용되어 '그 나라'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실레이아'(basileia)라는 단어는 특정한 영토와 장소, 공간을 의미하지 않고, '하느님의 통치와 지배, 다스림'을 의미하는 역동적 개념(reign; govern)이다.

다시말해서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언급으로서, 하느님께서 직접 왕이 되셔서 사탄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당신이 직접 다스리시는 그 마지막 종말의 때가  속히 올 것을 갈망하는 간구인 것이다(루카4,43; 마르9,1).

 

이제 기도의 내용 중에서 예수님의 관심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필요과 관련된 '일용할 양식'과 '죄에 대한 용서' 그리고 '유혹에서의 구원'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언급하신다.

 

첫째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구에서 '일용할'로 번역된 '에피우시온' (epiusion; daily)은 '바로 오늘 필요한 것'과 '오는 날', 즉 '내일의 양식'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날마다'라는 '카트 헤메란'(kath hemeran; by day; each day)이라는 관용구를 사용해서 '일용할 양식'을 제한하고 있으므로, 대체로 그날그날의 실존적 삶에 필요한 실제적 양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다'의 뜻인 '디도미'(didomi)가 현재 능동태 명령형 '디두'(didu; give)로 사용되어 계속과 반복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보아야 한다.

 

인간의 필요를 구하는 두번째 간구는 '죄의 용서'에 관한 것이다. 새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가르'(gar; for)가 '왜냐하면 ~ 이기 때문에' 라는 이유 부사절을 이끈다.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청하려면, 전제 조건이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수 있다.

만일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이 기도는 아무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잘못한'으로 번역된 '오페일론티'(opheilonti; that is indebted; who sins)는 '빚지다'는 의미를 가진 '오페일로'(opheilo)의 현재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죄도 용서해 주시고'라는 뜻이다.

 

당시 유대 풍습대로 빚을 진 사람들이 채권자의 노예가 되거나 옥에 가두거나 하지 말고, 탕감해 주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18,23~35).

이러한 사실은 '용서하오니'에 해당하는 '아피오멘'(aphiomen; we forgive)에도 잘 드러나는데, 이 단어는 현재 능동태로서 계속해서 용서할 자세를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인간의 필요를 구하는 마지막 간구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이다. 

'유혹'으로 번역된 '페이라스몬'(peirasmon; temptation)의 원형 '페이라스모스'(peirasmos)는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유혹을 뜻한다(야고1,12; 1티모6,9) 

여기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믿음과 거룩함으로 벗어나 타락하도록 하는 외적, 내적 유혹거리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빠지지'에 해당하는 '에이세넹케스'(eisenehkes; lead) '들어가다'라는 의미를 지닌 원형 '에이스페로'(eisphero)의 가정법 과거형이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뜻이 아니라 '유혹에 굴복하지 않도록 우리를 이끌어 달라'(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는 뜻이 된다.

 

한편, 마태오 복음 6장 13절에서는 '다만 악에서 구해주소서'라는 말이 주님의 기도 끝에 더 붙어 있다.

여기서 '악'으로 번역된 '투 포네루'(tu poneru; from evil; from the evil one)라는 단어는 중성으로 볼 수도 있고, 남성으로 볼 수도 있다.

 

중성으로 보면 '악'(evil)은 추상적인 의미를 갖게 되고, 남성으로 보면 '악한 자'(evil one)라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앞의 문장과 연관지어 보면, 우리로 하여금 유혹에 빠트리는 악한 자, 즉 마귀로부터 구하여 달라는 간구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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