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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 (루카11,27-2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09 조회수85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0월 9일 토요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 (루카11,27-28)

   

 

1독서<낫을 대어라수확 철이 무르익었다.>(요엘4,12-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2 “민족들은 일어나 여호사팟 골짜기로 올라가라내가 사방의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려고 거기에 자리를 잡으리라.

13 낫을 대어라수확 철이 무르익었다와서 밟아라포도 확이 가득 찼다확마다 넘쳐흐른다그들의 악이 크다.

14 거대한 무리가 결판의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결판의 골짜기에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15 해와 달은 어두워지고 별들은 제 빛을 거두어들인다.

16 주님께서 시온에서 호령하시고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를 치시니 하늘과 땅이 뒤흔들린다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피난처가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새가 되어 주신다.

17 그때에 너희는 내가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사는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 되고 다시는 이방인들이 이곳을 지나가지 못하리라.

18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19 이집트는 황무지가 되고 에돔은 황량한 광야가 되리라그들이 유다의 자손들을 폭행하고 그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20 그러나 유다에는 영원히예루살렘에는 대대로 사람들이 살리라.

21 나는 그들의 피를 되갚아 주고 어떤 죄도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주님은 시온에 머무른다.”

 

화답송 시편 97(96),1-2.5-6.11-12(◎ 12)

◎ 의인들아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 주님은 임금이시다땅은 즐거워하고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흰 구름 먹구름 그분을 둘러싸고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의인들아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복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11,27-28)

27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제1독서 (요엘4,12-21)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 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18)

 

요엘서 4장 16절과 17절에서 장차 도래할 주님의 날에 큰 파괴가 있을 것이지만 선민 이스라엘은 보호받는다는 사실이 예언되었다. 이제 요엘서 4장 18절과 19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의 날에 선민 이스라엘의 복락은 회복될 것이지만 이방인들은 멸망할 것이 예언된다.

 

요엘 예언자는 주님의 날에 하느님의 백성과 이방 민족들에게 이루어지는 극히 대조적인 상황을 예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남쪽에 위치한 이방 민족을 대표하는 이집트와 동쪽에 위치한 이방 민족을 대표하는 에돔은 각각 황무지와 황량한 광야로 변하고 말 것이지만, 하느님의 백성이 사는 곳에서는 새 포도주와 젖과 물이 풍성하게 흐르는 등 하느님의 무한한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요엘서는 주 하느님의 혹독한 심판의 예언으로 시작했지만, 그 마지막 부분에서는 회복과 축복의 예언이 주어진다.

이런 차원에서 요엘서는 메뚜기 떼의 재앙으로 혹독한 고난을 겪고 있던 남부 유다 백성에게 죄를 멈추고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을 명하는 준엄한 말씀과 죄를 회개했을 때 주어질 벅찬 희망의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예언의 말씀이 잘 어우러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요엘서 4장 18절의 서두에 나오는 '그날에는'에 해당하는 '웨하야 바이욤 하후'(wehaya baiyom hahu)는 문자적으로 '그날에는 ~이 있을 것이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와 대명사의 표현은, 없어도 의미 전달에 전혀 이상이 없지만, 이처럼 사용된 것은 주님의 날이 반드시 도래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문구는 요엘 예언자가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구이다.

 

그는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선민 이스라엘의 복락 회복과 멸망 예언이 주어지는 요엘서 4장 18-19절 및 주님의 날에 선민 이스라엘의 평화 정착과 복수의 종결을 예언하는 요엘서 4장 20-21절로 이루어지는 요엘서의 마지막 예언을 시작하면서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놀라운 상황에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이같은 문구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날에 하느님의 백성이 경험할 것으로 제시된 이러한 축복들은 요엘서에서 메뚜기 떼의 재앙과 가뭄의 재앙으로 폐허로 변했던 남부 유다 땅이 완전히 온전한 상태로 회복될 것임을 조망하게 된다.

 

특히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는 예언은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들어갈 때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소개되었음을 (탈출3,8; 신명6,3) 연상하게 한다.

'젖이 흐르리라'에 해당하는 '텔라크나 할라브'(thellakna hallab;  will flow with milk)는 가축들이 내는 젖의 양이 엄청나게 많을 것임을 나타낸 것으로서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심지어 본문은 언덕마다(작은 산들이) 젖이 흐르리라고 묘사하는데, 이것은  과장법적인 표현이지만, 심판 후 회복의 축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클 것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다.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앞의 전반절에서는 포도주와 젖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장차 주님의 날에 선민 이스라엘이 누릴 복락을 예언한 반면에, 후반절인 본문은 샘물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주님의 날에 선민 이스라엘이 누릴 복락을 예언한다.

즉 본문에서는 하느님을 근원으로 하는 생명의 물이 흘러 넘칠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진다.

 

본문에서 예언되는 주님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구원사적 측면에서 네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지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그곳에서 하느님께 합당한 예배를 회복할 때, 그들은 그 성전으로부터 풍성한 생명의 은혜를 경험할 것이라는 의미이다(하깨1,5-11).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성전의 진정한 원형이신데(요엘2,21; 히브8,5), 그분은 모든 성도들을 위해 축복의 진정한 근원이 되신다는 것이다(요한7,37-38).

셋째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궁전으로서 그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물을 전달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1코린3,16; 에페2,21).

 

넷째는 종말론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에서 구원을 받은 모든 이들이 생명의 물을 마실 것이라는 의미로 압축될 수 있다(묵시21,6).

이 네 가지 경우는 다 하느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이란 의미로 압축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집에서는'에 해당하는 '밉베트 예흐와'(mibbeth yehwah)라는 표현을 통해 잘 드러나는데, 이것은 회복될 성전과 관련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 에제키엘의 환시 가운데에도 회복된 성전의 문지방 아래로부터 물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제시된다(에제47,1.2). 요엘 예언자의 묘사와 에제키엘 예언자의 묘사는 이와 같이 일치하는데, 그들이 말하는이 주님의 집(성전)은 사실상 주 하느님 자신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주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 물은 모든 생명을 살리는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한다.

 

'샘'에 해당하는 '마얀' (mayan)은 어원상 물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솟구쳐 나오는 을 의미하는데, 본문에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물을 중단없이 지속적으로 흘려보내실 것을 암시한다.

 

한편 그 물은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고 예언된다. '시팀'(shittim)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아카시아 나무'로 볼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요르단 강 동편에 있는 고대의 성읍 명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카시아 나무는 흔히 알려져 있듯이 자생력과 번식력이 매우 강하여 가문땅에서도 잘 자란다.

만약 '시팀골짜기'가 다른 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아카시아 나무만이 자라는 가뭄의 땅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면, 본문은 하느님의 생명의 물은 그와 같이 바싹 말라 있는 땅에까지도 흘러 들어가 비옥한 땅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예언한 것이 된다.

 

또한 여기서 '시팀골짜기'는 요르단강 동편의 한 땅으로 보면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사해 바다까지 이를 것이라는 에제키엘서 47장 8절의 진술과 유사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은유적 표현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이 완전히 죽어 있는 것들에게까지 흘러 넘쳐 그들을 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시리라'에 해당하는 '웨히쉬카'(wehishiqah; and will water)의 원형 '샤카'(shaqah)는 물을 들이키거나 토지에 물을 충분히 공급하는 것을 의미하며(창세2,10; 19,32), 본문에서는 사역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강한 의지로 그런 불모지에까지도 물을 적시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


(루카11,27-2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7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젖과 말씀이 대조를 이룬다. 젖을 낸 가슴보다 말씀을 가슴(마음)안에 지킨, 간직한 그가 복(福)이라는 것이다.

 

(1코린3,1-2)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성경의 모든 말씀을 영적인 말씀으로, 곧 하느님의 뜻으로 받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인간의 뜻으로 받는 그 肉적인 사람, 그는 진리와 비 진리를 분별하지 못한다.

어제 묵상 했듯 육적, 그 인간의 뜻을 위한 가르침이 더 멋져 보이고 진짜 같아 보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말씀을 공부하는 신자(마리아)보다 바쁘게 활동하여 예수님을 시중드는 그(마르타)가 사람의 눈에는 더 진짜 같아 보인다.

 

(히브5,12-13) 12 사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벌써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하느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를 다시 남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3 젖을 먹고 사는 사람은 모두 아기이므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서툽니다.

= 그래서 어미(육)의 젖을 떼야 하는, 곧 그 젖을 떼는 것이 잔치를 할 만큼 기쁜일 인 것이다.

 

(창세21,8) 8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게 되었다. 이사악이 젖을 떼던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시편131,1-2) 1 <다윗의 노래>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고 제 눈은 높지 않습니다. 저는 거창한 것을 따라나서지도 *주제넘게 놀라운 것을 찾아 나서지도 않습니다. 2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혔습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

= 육의 그 욕망의 자리를 버리고(떼고), 오롯이 하느님 아버지만을 의지하게 되어 아버지로 얻는 마음의 평온, 쉼, 안식을 고백하는 것이다. 제사, 기도, 활동 등 나에게서 나가는 나의 종교 행위를 의지한다면 육의 젖을 먹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구원의 진리, 그 약속의 말씀으로 내 안에 있다면~하늘의 용서로 하늘의 자유, 평화, 그 복을 누리는 영적인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젖은 기름을 뜻하기도 하고, 그 기름은 성령을 뜻한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젖의 단어가 가나안이다.

 

(레위20,24) 24 너희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그들의 땅을 차지할 것이다. 내가 그 땅을,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겠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려낸 주 너희 하느님이다.

=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말씀)을 젖과 꿀로 주신다. 곧 하느님의 약속(뜻)을 믿고 따르는 삶은, 젖의 축복의 삶이 되는 것이고, 꿀 같이 내 입맛에 맞는 곧 내 열심, 내 의로움이 진짜 같고, 맞는 것 같아 그 자기의 뜻(말)을 의지하는 사람은 저주의 삶이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렇듯 말씀을 축복과 저주로 주셨다.(신명11,26~참조) 그러니까 말씀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축복(젖)과 저주(꿀)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뜻(지혜)으로 읽으면 제사와 윤리, 그 법이 되어 죄(저주)의 심판을 줄 것이고, 하느님의 뜻으로 읽으면 죄의 덮으심, 대속, 그 하늘의 진리를 깨달아 용서와 구원(축복)의 판결을 받는 것이다.

 

(야고2,12) 12 여러분은 장차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받을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 제사와 윤리, 그 육의 젖을 먹는 사람들 앞에서 자유(십자가)의 법을 말하고, 그 자유의 법을 의지하고 누리는 삶을 사는 그 실천을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실행인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약속), 그분의 마음, 그 사랑이 흘러나와 이웃에게 전해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아멘!!!

 

~♡ ♡~

원죄없이 잉태된, 그 神의 자리, 그리고 천주의 모친이신 그 神의 자리에 성모님이 아닌, 쓴물(마리아)이 십자나무의 대속을 진리로 받아 마음에 지킨, 그래서 단물(은총)이 되신 성모님!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당신을 사랑합니다. 천주의 성령님 그 마리아처럼 되게 하소서~~아멘!!!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복음(루카11,27~28)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27.28)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의 베엘제불 논쟁을 마치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축복하였다.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축복한 이유는 그 어머니를 축복함으로써 그 자식을 축복하고 찬양하는 유대 관습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예는 예수님을 수태한 마리아를 축복한 엘리사벳의 찬양에도 나타난다(루카1,42.43).

또한 이 여자의 외침은 당시 예수님을 적대하던 일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권위있는 능력의 말씀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하지 못했던그때 모인 군중들 대부분의 감정을 대표해서 나타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배었던'으로 번역된 '바스타사사'(bastasasa; bare)는 '옮기다'를 의미하는 '바스타조'(bastazo)의 부정 과거 분사이다.

여기서는 '태어나게 했던'(that bare; gave you birth)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등장하고 있는 한 여자는 예수님께 '당신을 낳은 어머니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으며, 이것은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라고 노래한 마리아의 찬양(루카1,48)이 직접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루카 복음 11장 27절의 한 여자의 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11장 28절에서 참된 행복의 조건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있음을 밝혀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비결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듣고'에 해당하는 '아쿠온테스'(akuontes; hear)는 '듣다'를 뜻하는 원형 '아쿠오'(akuo)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서 단순하게 듣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몰두하여 듣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지키는'에 해당하는 '퓔랏손테스'(phylassontes; keep it; obey it)는 '지키다', '보호하다'를 뜻하는 '퓔랏소'(phylasso)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서 철저히 지키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참된 행복이라는 것은 육적 혈통이나 인간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데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루카 복음 11장 28절에 나오는 '오히려'에 해당하는 '메눈'(menun; rather)이라는 단어는 그 여자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뒤의 이야기 즉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참된 행복의 조건이 오히려 영적인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 자신이 결국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단지 예수님을 낳고 양육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켰기에 가능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정확하고 타당한 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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