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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복음,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 (로마1,2-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11 조회수646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10. 11.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도란도란글방

 

6.) 복음,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 (로마1,2-4)

 

(로마서 1,2-4)

2 이 복음은 성경에 있는 바와 같이 일찌기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입니다. 3 그것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4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 그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로가 자신의 택()하심의 이유를 복음을 위하여, 하느님의 복음(福音)을 위하여!라고 이야기를 한 뒤에, 2절에서, 그 복음이 무엇인지를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는데, 그게 성경에 있는 바와 같이 일찌기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이라 그래요.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聖經)에 미리 약속한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한 마디로,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일컫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모든 성경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된 것이라고, 반복하여 기술(記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죠? ‘성경은 나에 대해서 기록한 거야!’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예수님이?

 

쉬운 말로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아들에 의해 시작(始作)되고 종결(終結), 그 어떤 사건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복음이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걸 오해하시면 안 돼요. 그리고 그렇게 그 아들에 의해 완료된 복음의 현실이, 그것을 듣게 되는 어떤 대상(對象)에게, 무상으로 전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선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복음은, 필연적으로, 그것을 받는 자들의 능력(能力)과 자격(資格), 박탈(剝奪)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대상 침투(浸透)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 복음 자체가, 그걸 받는 자들의 힘과 노력과 자격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니까. 복음은, 그가 떨어지는 대상의 자격과 조건을 박탈하면서 들어가는 거란 말입니다.

그 복음은, 역사(歷史)의 어떤 시점에 급조(急造)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창조(創造)되기 전에, 영원(永遠) 속에서 이미 계획된 거였어요. 영원 속에서! 창세전에! 그것을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約束)이라 그래요.

 

(베드로전서 1:20) 20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미리 정하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그분을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창세전에 예수님이 구세주(救世主)로 이미 정해졌다는 건, 인간의 타락(墮落)과 천사들의 타락도 이미 하느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이죠? 구세주라는 단어 자체가, 타락한 죄인을 근거로 하여 발생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구세주가 이미 창세전에 정해졌다는 건, 인간과 천사의 타락 또한 이미 창세전에 하느님의 작정 속에 있었다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우발적으로 생겨난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이렇게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서, 어떤 역사가 일어날 것임이, 창세전에 이미 결정이 되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은 자들의 구세주가 되는 거예요. 그게 복음입니다. 아들에 의해서, 죽은 자들이 살아나서, 하느님과 연합이 되는 구원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복음이에요.

거기에서 죽은 자의 역할은? 그냥 죽어 있으면 되는 거예요. 죽은 자가 뭘 해요? 죽은 자들에게, ‘너희들 일어나서 저기 있는 나뭇가지, 선착순으로, 오는 순서대로 구원해 줄게!’ 이 말이 죽은 자에게 들려요? 그래서 복음입니다. 살려놓은 다음에 이야기를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 이미 구원이 된 자들에게, 하느님의 명령이 떨어지는 거지, 그걸 지키면 하느님이 구원해주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사무엘상 2:7-8) 7 야훼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가멸지게도 하시며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일으키기도 하신다. 8 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딩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 자리에 앉혀 주시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이게 이스라엘의 구원의 현실을 묘사해놓은 거예요. 그런데 티끌에서 일으키고, 거름더미에서 꺼낸다, 그러죠? 시편 1137절 보세요.

 

(시편 113:7-8) 7 약한 자를 티끌에서 끌어 올리시고 가난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끌어 내시어 8 귀인들과 한자리에, 백성의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혀 주신다.

 

이 사무엘서의 내용을, 시편 기자가 인용한 거예요, 그대로. 여기에서 죄인의 상태를 진토(塵土), ‘아파르라고 하고요, 거름더미, ‘아쉬포트라고 하죠. 여기서 아파르란 단어는, 아담의 재료로 쓰였던, 먼지, 티끌, 이란 단어예요. 아파르. 그리고 이 아쉬포트! 거름더미라고 번역이 된 아쉬포트이에요. 쓰레기란 단어예요, 이게! 말라기에 나오는 그 단어와 똑같은 단어예요. !

그러니까 구원 전의, 모든 존재는 아파르, 아쉬포트.’ ! ! 먼지! 쓰레기! 똥이라는 거요. 이게 다 죽어 있는 거예요. 유익한 모든 것이 빠져 있는 상태!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라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냥 구원의 은혜 아래에서, 쓰레기요 똥으로 발각되면 되는 거예요.

쓰레기가 조금 나은 쓰레기가 있고, 조금 못난 쓰레기가 있습니까? 똥이 아무리 변화되어 봐야 똥인 거예요. 그게 지금 여러분이 입고 있는 이 옛 육신이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걸 변화시키려고 하는 거죠? 내 안의 예수가 드러나게 해야 되는데, 나를 변화시켜 나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거! 요게 인간들의 죄성(罪性)인 거예요. 그렇게 우리가 죽은 자로 드러나야, 우리를 덮는 은혜가 돋보이게 되는데, 우리는 그걸 못 참아요. 자존심이 상해서.

 

그리스도교는 여러분과 저의 작은 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내가 무엇을 행하느냐와 행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나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내가 이전보다 얼마나 더 변화(變化)되고 나아졌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흠() 없고 완전(完全)한 의()가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믿으면, 그분의 의()가 여러분에게 주어지고, 여러분은 그분의 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나 저것을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안식(安息)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무익(無益)할 뿐입니다. 그러니 중단(中斷)하십시오. 이것들은 절대로 여러분을 그 어디로도 인도(引導)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 멀리 가기 전에 멈추십시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나가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 노력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순간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가엾고 비참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가장 깊은 절망(絶望)에 빠질 것입니다.

성도(聖徒)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膽力)을 얻을 뿐입니다. 그 은혜의 십자가, 영광(榮光)의 십자가를 만인이 본받아야 하는 아름다운 것으로 변질(變質)시키지 마십시오.’

설교는, 설교자가 울먹이면서, ‘여러분, 우리가 거룩한 삶을 하느님께 올려 드립시다.’로 끝나서는 안 돼요. 그건 선동(煽動)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아들에 대한 소개(紹介), 그 아들이 하신 일에 대한 선포(宣布)여야 돼요. 그리고 어플리케이션(application), 적용(適用), 살아있어 운동력이 있는 그 말씀에 의해, 일어나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先輩)들이 그런 거예요. ‘목자들아, 말씀이 일을 하게 하라! 너희들이 고치려고 하지 말고, 말씀이 일을 하게 하라!’ 말씀만 똑바로 전하라는 거예요. 다른 얘기하지 말고.

말씀이 일을 하게 해야 인간의 자랑이 없어요. 말씀을 전하는 자가, 그 적용 부분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게, 올바른 설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아들이 하신 일을 담고 있는, 살아 있는 능력(能力)이기 때문에, 복음 스스로가, 그 복음의 대상 속으로 들어가 일을 해요.

그렇다면, 이제 성경이 어떻게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복음으로 풀어내고 있는지를, 확인(確認)해야 되겠습니다. 오늘은 그 아들에 관한 복음을,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묵시록까지 달리면서 설명을 해 드릴 거예요. 제가 창세기의 그 흙! ‘아다마, !’ 아담을 만든 재료인, 흙에서, 요한묵시록의 거룩한 성()까지, 어떻게 이 흙이 거룩한 성으로 변화(變化)되는지 설명해 드릴 거니까, 한번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 혹시 창세기 1장과 2장을 읽으시다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신 적이 있나요? ‘이건 좀 이상하다. 그런데 내가 하느님 편을 들기 위해서, 덮어두련다.’ 그런 대목 없었어요?

 

(창세기 2:4-7) 4 하늘과 땅을 지어 내신 순서는 위와 같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 5 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던 것이다. 6 마침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시자 7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 사람이 지금 창조(創造)되고 있는데, 사람이 창조될 때, ‘나무와 풀이 없다그러죠? 창세기 1장에선 셋째 날에 나무와 풀이 창조됐단 말입니다. 여섯째 날에 인간(人間)이 창조됐잖아요? 그러면 이거 앞뒤가 안 맞는 거 아닙니까? 왜 없다 그럴까요?,

여기 4절에 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토레다예요. 그 단어는 역사라는 말인데, 제너레이션(generation), 역사! 모세가 지금부터 하느님의 천지창조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설명할 거야!’라는 말을 만드시던 때, 토레다라는 단어에 넣어놓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 창세기 11절부터, 23절까지의 창조의 내용을 내가 다시 한 번 설명할게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잘 보면, 7절에서 사람이 만들어지는데, 5절에 보면, 나무와 풀이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경작(耕作)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무와 풀이 없었대요. 5절을 보면요, 경작할 사람의 부재(不在)!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그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리가 하나 놓이는데, 그것이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음이에요,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요렇게 다리를 놓고, 경작할 사람이 없어서, 나무와 풀이 아직 없었다고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저는 이 어구(語句), 창세기 24절 이하를 푸는 아주 중요한 키(key)라고 생각해요. 아니, 조금 더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창세기 25절은, 성경 전체의 맥()을 잡는 아주 중요한 어구예요,

 

성경에서 , 저주와 심판(審判)과 죽음을 상징하지요. 그러나 비가, 하느님의 은혜(恩惠)를 상징(象徵)할 때도 있다는 거 아십니까? 이른 비, 늦은 비! 요건 하느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거든요. 생명(生命)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상징하기도 해요. 비는! 은혜의 성령을 은유(隱喩)하기도 한단 말입니다. 복음서에서 귀신이 물 없는 곳으로 찾아다니죠? 고게 은혜의 물! 은혜의 단비가 없는 곳으로, 귀신이 찾아다니는 그런 것을 그려놓은 거라 말입니다.

여기서는 후자(後者)의 용도로 쓰인 거예요. 왜냐하면 비가 오지 않아서, 나무와 풀이 생기지 않았다는 건, 비가 와야 나무와 풀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니 여기에서의 비는, 생명을 있게 하고 유지케 하는 힘을 말해요. 비는 노아의 홍수 때 처음으로 온 거예요. 그 전까지는 땅에 이슬이 올라와서 농사가 됐다 말입니다.

그렇게 나무와 풀을 존재케 할 수 있는 비는, 하느님의 은혜의 비예요. 비가 그 후로부터도 한참 뒤인 노아의 홍수 때, 처음 왔는데, 마치 그 비가 없어서, 나무와 풀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단 말이에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안 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채소()를 먹고 살았다니깐요. 노아의 홍수 이전까지는 채소만 먹었으니까! 고기는 못 먹었다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 말이에요? 비 이야기를 하냔 말이에요? 그 비가 땅에 쏟아져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생명(生命)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 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나무와 풀이, 지금 없음으로 설명이 되고 있다 말입니다. 비가 안 왔다고! 그걸 인간 창조와 연결(連結)을 시키고 있다는 걸 놓치지 마세요.

인간 창조를 이야기하면서,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걸, 굳이 모세가 갖다 넣고, 지금 모세가 창세기 24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죽은 땅! 즉 죽은 흙에 부어져서, 생령(生靈)을 만들어내시는 하느님의 그 생기(生氣)!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 이라는 단어가 흙! 이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라 말입니다.

아담이 흙!! 땅으로 만들어졌단 말이에요. 거기에 하느님의 은혜의 단비가 부어졌더니, 살아 있음! 하이 네페쉬 하야! 살아 있음! ‘있음이라는 게 거기에서 발생(發生)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 때 비로소 살게 되잖아요? 살아 있는 게 되잖아요?

여기에서 하느님의 창세전 그 언약(言約)에 관한 그 내용을, 모세가 지금 설명하고 싶은 거예요. 하느님의 은혜로 생기가 땅에 부어져야, 비로소 모든 존재가, 존재로서의 가치(價値)를 지니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의 생기가, 땅에 부어졌을 때, 발생되었던 것이 사람이 생겼잖아요? 생령(生靈)이 되어버렸잖아요? 죽어 있던 게 살았단 말입니다. 그 말은 하느님의 뜻에 의한 온전한 하느님의 사람이 완성(完成)되어서, 그들에 의해 모든 것들이 장악(掌握)되고 다스려지기 전에는, 모든 존재가 없음의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저주(詛呪)의 상태인 거예요.

5절을 보면, 땅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 그 단어는 창세기 1장에 없던 단어라 말이에요. 땅이라는 건, 인간에 의해 정리(整理)가 되고 다스려지고 장악된, 나무와 풀들이 자라는 곳을 땅이라 그래요. 그 단어가 쓰였어요, 거기에! 사람도 없는데, 땅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단 말입니다, 모세가 이미!

 

땅은, 인간이 나무와 풀을 다스리기 위해, 울타리를 쳐서 구획(區劃)해 놓은 게 땅이잖아요? 따라서 그 땅의 바깥에 있는 건, 인간의 다스림 바깥쪽에 있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직 사람이 창조되지 않았으니까, (경작지)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땅()의 울타리 안에서, 인간에게 경작(耕作)될 수 있는 나무와 풀도 존재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과 관계를 맺고, 인간이 다스리는 그 밭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은 건, 있어도, 이미 셋째 날 창조가 되었지만, 있어도 없음이란 뜻이에요. 그게 혼돈(混沌)이에요. 폼리스(formless)인 거예요. 있어도 없는 거예요. 그게 공허(空虛)예요. 엠티니스(emptiness)인 거예요. 뭔가 있기는 있는데, 죽어 있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지금 살아서 움직이지만, 성경에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게 그 이야기인 거예요.

이렇게 5절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혜(恩惠)에 의해서, 인간이 창조(創造)되기 전에, 인간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하는 초목(草木), 그 가치와 의미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마치, 초목이 있었음에도 없는 것처럼, 뉘앙스를 풍기는 묘사를 하는 거예요, 모세가! 성경이 논리적 모순(矛盾)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모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말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만들어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야, 그 초목들이 다스림 속으로 들어와서, 비로소 존재 역할(役割)을 하는 거예요. 그건, 지금 죽어 있는 흙에, 생기가 부어져야, ‘루와흐!’ 하느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살아 있는 게 되는 것처럼, 땅에 비가 와야, 생명이 잉태(孕胎)되고 출산(出産)이 되는 거예요. 그 이야기는 엄밀히 말해서, 같은 이야기라는 걸 보여주는 거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땅이 은혜의 비를 맞고, 살아있는 땅이 되어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을 해 낼 수 있듯이, 죽은 땅! 죽은 흙에 불과한 인간이, 하느님의 은혜의 생기(生氣)를 받아서, 산 존재가 되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살아있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 전에는 다 무가치(無價値)하다는 거예요. ‘없음인 거예요.

죽은 흙에, 예수의 피가 부어져서, 이겨져야, 살아있는 땅이 되는 거죠. 우리가 죽은 흙이었는데, 예수의 피가 부어져서 이겨지니까, 은혜의 피가 부어져서 이겨지니까, 산 존재가 되었잖아요?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 그게 죽음이거든요? 그에게 흙에, 예수의 침이 부어져서 이겨져서 발라졌더니, 창조가 일어났어요. 개안(開眼)이 일어났다 말입니다! 그 이야기인 거예요. 땅에, 흙에, 하느님의 은혜, 예수가 부어져야, 살아 있음! ‘있음이 발생되는 거예요.

 

그렇게 모세는, 창세기 11절부터, 23절까지의 그 첫 창조에 관한 기사를, 24절부터, 창세전 언약의 관점에서 다시 풀어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어떻게 이걸 풀게 되었냐 하면, 창세기 24절부터, 확연(確然)히 달라지는 게 하나가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하느님의 이름이 바뀐다는 거요. 창세기 24절부터! 23절까지 하느님은 그냥 엘로힘이에요. 그런데 24절부터, 다시, ‘라는 단어로 모세가 다시 설명하는 그 지점부터,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 하느님으로 바뀌어요. 왜 그럴까요,

야훼 하느님이라는 하느님의 이름은, ‘언약(言約)의 하느님이라는 뜻이거든요. 언약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첫 창조가 어떻게 언약을 품고 있는지를 모세가 지금 다시 설명한단 말입니다. 야훼 하느님이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어디서 설명되고 있느냐 하면, 출애굽기에서 설명됩니다. 출애굽기도 모세가 쓴 거예요. 고 단어를 여기서 쓰고 있는 이유가 있다 말이에요.

 

(출애굽기 6:1-8) 1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내가 파라오에게 어떻게 하는지 이제 네가 보게 되리라. 내가 손을 쓰기만 하면 그 강한 힘에 눌려 파라오가 이 백성을 내보내리라. 그들을 이 나라에서 내보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리라.' 2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야훼다. 3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전능의 신으로 나를 드러낸 일은 있지만 야훼라는 이름으로 나를 알린 일은 없었다. 4 또 나는 그들이 유랑민으로 몸붙여 살던 가나안 땅을 주기로 그들과 계약을 세웠다. 5 나는 에집트인들에게 혹사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내가 세운 계약을 생각하였다. 6 그러니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나는 야훼다. 내가 너희를 에집트인들의 종살이에서 빼내고 그 고역에서 건져 내리라. 나의 팔을 펴서 무서운 심판을 내려 너희를 구해 내리라. 7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어 주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너희를 종으로 부리는 에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낸 하느님임을 알리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한 가나안 땅으로 너희를 이끌어 그 곳을 차지하게 하리라. 나는 야훼다.''

 

여기에 야훼라는 이름이 수없이 나와요. 야훼! 나는 야훼다! 나는 야훼다! 너희들을 건져낸 야훼다! 야훼다! 무엇에 의해? 언약에 의해서 건져낸 야훼다! 계속 하느님이 반복(反復)하세요. 언약을 성취(成就)하시는 하느님! 이게 야훼예요.

그런데 그 언약(言約)이 어떤 언약인가 하면,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죽은 자들을 살려 내어서, 하느님만 찬송(讚頌)하게 하는 거, 하느님의 찬송이 되게 하는 게, 창세전 언약이란 말이에요. 그 언약을 성취하는 하느님이, ‘야훼예요. 야훼!

모세가 출애굽의 구원에 등장(登場)하는 언약의 하느님 야훼라는 이름을, 창세기 24절에서 갑자기 등장을 시키는 건, 첫 창조의 이야기가, 바로 그 창세전 이야기임을, 독자(讀者)들에게 주지(周知)시키고 있는 거예요. 모세라는 한 저자(著者)가 어떤 목적을 갖고 단어들을 선별(選別)해서 쓰고 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4절부터 갑자기 하느님의 이름이 바뀌는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죽은 흙에 불과했던 아담에게, 인간에게, 생기(生氣)가 들어가니까, 비로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존재(存在)가 탄생이 됐죠? 그 전까지는 죽은 거예요. 움직였어요. 짐승들도 흙으로 만들었어요. 그냥 네페쉬였는데 움직였다니까요. 그런데 그들에게도 생기(生氣)가 안 들어갔어요, 그들에게도. 짐승은 움직이지만 죽은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 먹으세요. 먹으세요. 개도 먹어도 돼요. 뱀도 먹어도 되고, 다 먹어도 돼요. 먹으라고 준 거예요. 죽은 거예요. 가치 없는 거예요. 개 죽었다고 십자가 세워주고 그러지 마세요. 묘지(墓地)에 갔더니, 개 묘지에 십자가 세워놨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개를 위해서 선 게 아닙니다. 그렇게, 죽은 흙에 생기가 부어지면, 존재가 탄생되고, 그 존재에 의해 다스려지고 장악(掌握)되는, 새 땅이 생기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예레미야 애가 4장에서, 그 생기가 누구라고 했어요? 20절에서? 야훼의 기름 부은 자! 메시아라 했잖아요? 예수! 그 생기, 콧김이 예수라니까요. 다시 한 번 보세요.

 

(예레미야애가 4:20) 20 야훼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 우리의 숨결, 만국 가운데서 그 그늘 아래 깃들어 살리라 했는데 그마저 원수들의 함정에 빠져 잡히고 말았구나.

 

그러니까 아담에게 부어졌던 생기(生氣)가 예수란 말이에요. 그걸 과학적으로 이해(理解)하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무슨 뜻인가?’ 죽은 흙인 죄인(罪人)에게, 예수의 피가 부어져야, 비로소 존재(存在)!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이야기를, 창세기 때부터 그냥 설명해주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기름 부은 자! 이게 마샤흐라는 단어입니다. 메시아예요. 메시아!

아담에게 부어졌던 콧김은 메시아란 말이에요. 정확하게 그 단어가 나온다 말이에요. ‘마샤흐,’ 메시아! 그게 우리의 콧김이란 말이에요. 예레미야애가 420절을 히브리어로 나열(羅列)하면, 야훼, 마샤흐, 루와흐예요.

그러니까 야훼, 성부 하느님! 메시아, 성자 하느님! 루와흐, 성령 하느님! 삼위가 다 등장(登場)하는 거예요. 창세기 1장에 인간이 창조(創造)되는 거기에, 야훼, 메시아, 루와흐가 다 등장한단 말입니다. 구원의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게. 삼위(三位)의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구원의 이야기!

그렇게 땅에, 흙에, 메시아가 부어져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탄생(誕生)을 하고, 그 존재들로 인한 하느님의 왕국(王國)이 서는 것! 하느님나라가 서는 것! 이게 하느님나라의 실체(實體)란 말이에요. 그게 교회 탄생 이야기란 말입니다. 출애굽 이야기나, 창세기의 첫 창조 이야기나, 모두, 그 구원(救援)의 새 창조를 모형(模型)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에 의해 새롭게 완성(完成)될 하느님나라!

 

, 증거를 대 드릴게요. 히브리어 야훼가 신약으로 와서, 헬라어로 뭐라고 바뀌는지 아세요? 야훼! ‘큐리오스로 바뀌어요. 그 단어가 뭐냐면? 주 예수 그리스도에서, ‘라는 단어가 야훼라 말입니다. ‘큐리오스라 말이에요. 야훼!’ 언약의 주체로 등장하시는 야훼가 누구예요? 땅에 은혜의 능력으로 부어지는 그 야훼가 예수!! 라는 거예요.

예수에 의해 언약 백성이 탄생(誕生)하는 것! 교회가 탄생하는 것! 그 이야기를 창세기 11절부터 지금, 조금씩, 조금씩 다른 그림으로, 그러나 조금씩 선명한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게, 성경이에요. 그래서 복음은, 아들에 관하여, 선지자(先知者)들로 이미 말씀해놓으신 것이라고 바울로가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아들에 관하여!

 

제가 조금 더 선명(鮮明)하게, 그림으로 그려 드릴게요.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의 모습을, 한번 떠 올려 보세요. 그 속에, 구원의 메커니즘과 하느님 나라의 존재 양식(樣式)이 잘 나타나 있어요.

죽은 흙, 그 티끌! ‘아파르,’ 먼지, 땅에, 흙에, 생기(生氣), 즉 야훼 하느님이 들어가세요. 그런데 야훼가 콧김,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샤흐, 큐리오스, 예수잖아요? 예수! 그렇다면 이미, 그는 하느님과 연합(聯合)이 된 하늘의 존재가 된 거죠? 콧김이 들어갔으니까. 요걸 개혁주의(改革主義)에서는, 콧김이 들어갔는데, 조금 들어가서, 완전한 콧김이 들어가야 되는 걸, 구원(救援)이라고 하는데, 헛소리하지 말라! 그러세요. 어떻게 하느님이 조금만 들어가고 많이 들어가고 그럽니까? 이미 하늘의 존재가 된 거예요.

그런데 그들에게 ()’이 주어져요. ‘선악과가 주어지잖아요? 율법(律法)이 주어져요. 하늘의 존재에게, 율법이 주어지고, 그 법을 지키면 주어지게 되는 보상(報償)으로서의 생명나무 열매(實果)’가 주어지죠?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법을 잘 지켜,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永生)을 얻어, 하느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 에덴으로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요게 하느님나라의 메카니즘임과 동시에, 하느님나라 존재들의 존재양식(存在樣式)인 거예요.

죽은 흙, 생기! , ! 성령, 생기! 율법, 선악과! 그리고 영생! 그리고 에덴, 약속의 땅! 요게 창세전 언약을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재료들인 거예요. 요걸 가지고 성경 전체를 써 가고 있다니까요. 요 다섯 개를 갖고!

여기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성령이 들어간 자가, 법을 어길 수 있는가?’가 궁금하시면 안 돼요. 이미 하느님나라의 존재가 됐다면서, 어떻게 그가 법을 어겼지? 그건 여러분이 궁금해 하실 게 아니란 말입니다. 고게 성경을 문자(文子)로만 보는 거예요. ()으로만 보는 거예요, 그것이!

성경은 여러분에게, 과학적 분석(分析)이나, 논리적 해석(解釋)을 요구하지 않아요! 성경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만 풀어야 된다 말입니다. 그 과정(過程)은 하느님의 전적인 은혜(恩惠), 즉 성령을 받고, 하늘의 존재가 되는 하느님 나라 백성들의 그 탄생(誕生) 과정과, 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논리적 분석을 요구하는 게 아녜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여러분 연역법(演繹法)이라는 거 아시죠? 두괄식. ‘생기를 받아서 산 존재가 된 그 죽은 흙, 하느님 작정(作定)의 결론(結論)이잖아요? 하느님의 작정의 결국, 끝에 가보면,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산 존재가 된 하느님의 백성들이 결론으로 존재한단 말이에요. 그걸 끌어다가 연역법! 앞에다 놓고,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되는 지를 보여주는 게, 선악과, 생명나무, 에덴인 거란 말이에요.

어떻게 성령을 받은 자가 죄를 짓느냐?’는 초점이 없는 거예요. 어떻게 생기를 받아 산 땅이 되는 자! 이 하느님의 생기를 받아, 산 땅이 되는 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산 땅이 되는 지를 설명해주는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그 과정과 순서에 의하면, 하느님의 은혜로 하늘의 백성이 되는 성도는, 하느님의 법을 지켜, 영생을 얻어, 영원한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으면 돼요. 그게 과정이에요. 이게 구약이죠? 옛 언약이잖아요? ‘지켜! 영생 줄게! 그리고 내가 약속한 땅에서 영원히 거하게 해줄게!’ 이게 구약이잖아요? 옛 언약이잖아요? 그게 정석(定石)이에요.

그러면 죽은 흙, 죽은 땅이, 생명의 땅,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 백성의 처음자리가, 뭐였어요? 죽은 흙이었죠? 죽은 땅! 비가 내리지 않은 땅이었단 말이에요. 거기에서는 있음이 발생될 수 없는 거예요. 비가 내리지 않은 땅이니까. 죽은 땅이란 말이에요. 죽은 흙!

그러니까 이 죽은 땅, 죽은 흙은, 하느님의 법을 때려죽여도, 지켜낼 재간이 없는 거예요. 죽은 흙은, 법을 포착할 수도 없고, 지켜낼 수도 없어요. 그건 산자에게만 적용되는 법이거든요. 그들이 하느님의 법을 지켜, 다른 말로, 선악과 시험을 통과해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해요. 방법이 없어요.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약속의 땅의 은유인 그 에덴은, 그냥 그림 속의 떡일 뿐인 거예요. 그들은 반드시 에덴에서 쫓겨나야 돼요.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진짜 산자가 되기 전에는, 거기에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쫓겨나야 되는 거예요.

그 일을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셨다는 거예요. 쫓겨나서, 다시는 약속(約束)의 땅에, 하느님과 함께 거하는 약속의 땅에 못 들어올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부어져서, 그들이 못할 어떤 것이 해결(解決)이 되는 것! 그게 복음(福音)인 거예요.

그러니까 창세기 11절부터, 그러한 구원의 메카니즘이 제시(提示)가 되고, 그 문자(文子) 사이사이에, 행간(行間),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비밀(秘密)로 감추어져 있는 거란 말입니다.

성령(聖靈) 받은 성도는, 창세기를 읽으면서도, 그 행간 속에서, 예수를 읽어내는 거예요. ‘성령 받은 자도 어떻게 죄를 짓습니까?’ 이런게 아니라, 그 사이에서, 예수를 읽어내는 게, 성령 받은 사람의 성경해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기를 부여받은 죽은 흙!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법을 통과하여,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하느님과 영원히 한 곳에 거하게 된다는 그런 구원의 공식(公式), 첫 창조 때, 이렇게 제시가 되는 거고, 그 속에 선악과문제를 해결하는, 예수가, ‘무스테리온, 비밀, 미스테리로 감추어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로가 그 단어를 그렇게 많이 쓰는 거예요. 비밀! 무스테리온! 미스테리라는 단어를 그렇게 많이 쓰는 거예요. 감추어져 있다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2:6-7) 6 그러나 우리는 신앙생활이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지혜를 말합니다. 다만 그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나 이 세상에서 곧 멸망해 버릴 통치자들의 지혜와는 다릅니다. 7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천지 창조 이전부터 미리 마련하여 감추어 두셨던 지혜입니다.

 

베드로전서 120절에서는 창세전에 미리 정하신 게, 예수였죠? 여기서는 그 비밀이 이미 창세전에 감취어진 거라 그러죠? 그럼 누가 감추어져 있다는 거예요, 창세전에 예수가 감추어져 있는 거예요. 그리고는 구약이 쫙 펼쳐지는 거예요. 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감춰두고, 생명나무 열매를, 그룹과 불칼(火焰劒) 등으로 감춰두고, 해보라는 거예요, 너희들에게! 해결책(解決策)은 하느님이 쥐고 있는 것입니다.

런데 인간들이, 자기들이 해결(解決)해 보겠다고 한 게, 바리새인들의 유대주의, 율법주의(律法主義)인 거예요. 인본주의(人本主義)인 거예요, 그게! 나는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錯覺)하고 있는 거죠. 나는 38광땡을 들고 있다는 거예요. 사기(詐欺) 치는 거예요. 자기도 알아요. 안 된다는 거!

그런데 광()을 하느님이 쥐고 있어요. 하느님이 쥐고 계신데, 내가 38광 땡이라고 속이고 있는 게, 이 인간들의 세상인 거거든요? 하느님이 그걸 바라보시면서, 어떻게, 어떤 마음이 드시겠어요? ‘이거 내가 쥐고 있는데 . 저놈이? 한 끗짜리 들고서? 38광 땡처럼 하고 있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신다니깐요.

이렇게 구약에는, 아들이라는 해결책이 비밀(秘密)로 감추어져 있고, 그 아들이 없이 인간들이 내어놓는 해결책들의 그 무용(無用)함이 계속 지적(指摘)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인생 속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 일이 그대로 드러난다니까요.

그래서 바울로가 나는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결론내고 죽은 거예요. ‘나는 똥 덩어리구나! 거름더미구나! ‘아파르구나!’ 그러고 죽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덮지 않으면, 나는 아무리 변해도, 똥이다.’ 그러고 가는 게, 성도라 말입니다.

 

이 창세기의 그림은, 출애굽기에서 똑같이 반복되어 나타나요.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시나이산으로 불러들이시죠. 시내 산이 등장해요. 에덴동산처럼 산이 등장하고, 거기에서 하느님께서 빽빽한 구름으로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덮죠? 고린도전서 102절에서 이스라엘이 빽빽한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죠? 그 앞부분, 구름에서 세례를 받은 건, 시나이산이고, 바다에서 세례 받은 건, 홍해예요. 그런데 세례라는 게 뭐요? 성령세례? 성령의 인치심을 상징하는 게, 세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산이 나오고, 죽은 흙에 불과한 이스라엘이 나와요. 그리고 그 위를 덮는 성령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키면, 생명 준다! 그리고 너희들이 들어갈 땅에서, 영영히 거하게 될 것이다.’라는 하느님의 약속의 땅이 약속되는 거예요. 똑같은 그림인 거예요. 에덴동산과 똑같은 그림!

그 그림은 에제키엘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요. 37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골짜기로 데리고 가시죠? 골짜기는? 산 속에 있는 평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 산이 등장하고, 거기에 먼지라는 단어가 또 나와요. 먼지가 풀풀 나는 죽은 뼈! 마른 뼈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똑같이 생기! ‘루와흐가 등장해요. 죽은 흙에, 생기, ‘루와흐가 부어지고, 그들이 이름이 이스라엘로 결정이 되며, 그들에게 똑같이 약속의 땅이 주어져요. 약속됩니다.

 

(에제키엘 37:11-14) 11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이다. 12 이제 너는 이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 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13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14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 넣어 살려 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여기에 또 언약의 하느님 이름이 나와요. 야훼, 나오고, 죽어 있는 먼지 위에, 생기가 부어지는 게 나오고, 그리고 땅이 약속 돼요. 하나가 빠졌어요. 다섯 가지 재료 중에 법! 율법이 빠졌잖아요? 왜 빠졌을까요, 여기서는? 바로 고 앞 장에서 새 언약이 주어진다 말입니다. 새 언약이 뭐예요? ‘법을 너희 마음에 심어버리겠다!’ 그러잖아요? 이제부터 예수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는 거예요. 숨어 있던, 무스테리온으로 감추어져 있던 예수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는 거예요.

 

(에제키엘 36:24-28) 24 내가 너희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 내 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25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26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 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27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 28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면서 나의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보세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깨끗이 씻어서, 더러움을 제거하시고, 그들 마음을 새 것으로 바꾸어 주심으로, 규례를 지켜 행하는 자로 만들겠다, 그래요. 그건, 규례를 지킬 수 있는 자로 만들겠다는 게 아니라, 이미 지킨 자로 쳐 주겠다는 얘기예요.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서,’ 성령을 부어서, 산자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레미야 31장에서, 새 언약을 거기서도 확인했는데, 거기서는 마음에 법을 두는 걸, 성령을 붓는 것으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에 법을 두는 게, 법과 몸이 하나가 되는 거라 그랬죠? 그런데 이건 인간들로서는 때려죽여도 못하는 거예요. 법 자체가 거룩하고 신성한 거기 때문에, 죄인이, 인간이, 이 법을 장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으니까,

이 현실을 어떻게 우리에게 줘요? 말씀이, 법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몸과 법이 하나가 되어, 그분이 하는 모든 일은, 그냥, 지키는 게 되어버리는 예수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거예요. 이게 그리스도와 연합(聯合)인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내가 선악과 문제 해결해줄게. 그리고 내가 너희들에게 약속된 땅! 줄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에제키엘서 37장에서, 그 법이 빠져버리고, 똑같이 창세기 1장의 그 이야기가 반복 되는데, 그 재료들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그 선악과의 이야기, 그 시험(試驗)만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보세요.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착한 사람으로 변할까에 관심이 있으면, 이렇게 성경에서 예수를 꺼내 설명해주면, 졸게 되어 있어요. 관심(關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예수에 관심이 없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얘기를 하든지, 그 뒤에, ‘그러니 이렇게 사세요!’ 그러면, ‘오늘 설교 감동적이었다.’ 그러는데, 예수를 꺼내서 설명해주면, 졸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예수를 믿는 겁니까, 이게? 나를 믿는 거지! ‘를 보러 오는 거지, 교회에! 변화된 나! 성숙된 나! 나보러 오는 거지! 예수 안 믿어요. 교회는 예수 안 믿어요. 절간이에요, 여기는요!

 

, 이 그림이, 오순절 날 다락방에서 재현(再現)이 되는 거예요. 죽은 흙인 자들에게, 예수 죽인 자들에게, 생기(生氣)가 들이닥쳐요. 성령(聖靈)이 들이닥쳐요. ‘루와흐가 똑같이 들이닥치는데, 불의 혀처럼, 바람처럼 들이닥쳐요. 그리고 선악과 시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안에서 이미 해결(解決)이 된 상태죠? 그들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들이 교회로 부름을 받아요.

그러면 뭐가 하나 없어요, 지금, 거기서는? 땅이 없잖아요? 약속(約束)의 땅이! 뭐가 땅이라는 거예요? 교회가 바로, 하느님의 땅인 거예요. 약속의 땅! 하느님나라! 그래서 성경이 교회를 하느님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이라고 하는 거예요.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창세기 1장부터 그렇게 반복(反復)되어 나왔던,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약속됐었던, ‘이 뭐예요? 생기를 받기 전에, 생명(生命)과 상관(相關)이 없는 죽은 이었던 내가, 생명을 품을 수 있는 으로 회복(回復)이 되는 그 이야기니까, 그 땅이 누구냐고? ‘라 말입니다. ! … …

 

하느님이 준비하신 약속의 땅은, 여러분 자신(自身)이에요. 약속의 땅이 하느님의 약속이 담긴 땅이죠? 그 약속이 예수의 은혜로, 내 백성(百姓)이 나와 화친(和親)하게 되어서, 나를 찬송(讚頌)하는 땅이란 말이에요.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임하는 땅이라 말이에요. 그런데 그 하느님이 내 안에 들어와 있잖아요? 거기에 들어오시면 안 되시는 분이에요. 죽어 있는 땅이기 때문에!

그런데 내 안에 하느님이 들어와 버리시므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처소(處所)가 되는 거예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약속의 땅은, 내가 바로 너를 회복(回復)시켜, 네 안으로 들어가겠다, 연합(聯合)되겠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입니다. 약속의 땅은, 에덴은, 우주 어딘가에 예수의 열심에 의해 만들어져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그 약속의 땅, 천국을 살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내 안에서 예수와 함께 사는 그것보다 이 세상 다른 모든 게 재미없어져야 돼요. 그런데 모든 게 너무 재미있잖아요? 그걸 부수는 걸, 신앙생활(信仰生活)이라 그래요. 그런데 전부, 이 세상 재미있게 살게 해달라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으니, 이 세상에 무슨 그리스도교가 있습니까?

한번 물어봅시다. 진짜 이 시대에 교회가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로가 우리를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聖殿)!’이라고 하는 거예요. 땅이란 말입니다, 그게. 그래서 그 언약적 관점(觀點)에서, 첫 창조를 풀 때, 땅에 비가 내리지 않은 것으로, ‘없음을 설명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제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릴게요.

창조 때의 땅은, 모든 생명체의 모체(母體)라고 할 수 있어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땅으로 하여금, 풀과 채소와 씨를 가진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라! 그랬어요. 창세기 111절부터 나오죠? 그리고 짐승과 가축과 기는 벌레 등, 생물을 땅으로 하여금 내도록 했어요. 흙으로 지어집니다, 그들이요. 마찬가지로 인간도 땅의 흙먼지로 지으시고, ‘아파르로 지으시고, 그들의 코에 생기가 들어가는 거예요. 땅으로부터 비롯돼요.

이렇게 볼 때 땅은,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체(生命體)를 만들어 내는 모체라 할 수 있어요. 마치 땅이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고 정복(征服)하고 있는, 생명의 근간(根幹)처럼 보여요. 물론 땅은 그 자체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땅과 함께 할 때, 하느님의 능력(能力)이 거기에 부어질 때, 거기서 생명이 발생(發生)이 돼요.

그런데 그러한 땅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되죠? 거기에서 발생이 되었던 모든 것들에게 문제가 생기게 되죠. 그 땅에서 비롯된 모든 생명 세계가, 문제 속으로 함께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에게, 타락(墮落)이라는 문제가 생겼을 때, 이 세상 모든 피조물(被造物)이 함께 그 타락이라는 문제 속으로 빠져 버리는 거예요. 땅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로마서 8장으로 가면, 그 땅에 뿌리박고 있는 피조물(被造物)들이, 다른 말로, 땅의 다스림과 정복(征服) 속에서 질서(秩序)로 존재해야 하는 피조물들이, 땅의 회복(回復)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표현이 나와요.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그 땅을 하느님의 아들들(자녀)’로 바꾸어버린단 말이에요.

 

(로마서 8:19-22) 19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21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드셨어요? 인간이 타락(墮落)했는데, 왜 땅이 같이 저주(詛呪)를 받는가? 우리에게 하느님이 뭔가 설명해주시기 위함이에요. 땅이 뭐 잘못했어요? 그 땅이 바로 우리라니까요. 그게 회복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생명의 비가 부어져서!

인간이 타락(墮落)하기 전에는, 인간과 땅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땅은 하느님의 창조하신 뜻을 따라서, 풍성(豊盛)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땅은 인간과 잘 조화(調和)를 이루었어요. 이러한 조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에덴이었잖아요?

에덴은 하느님이 인간과 함께 사시는 곳이었고, 땅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다스리는 인간에게 아무런 어려움을 제공하지 않았어요. 땅과 인간이 함께 하느님 편에 섰기 때문에. 땅과 인간의 연합(聯合)의 모습이에요. 타락한 후에, 땅이 인간을 거부(拒否)하고 인간의 반대편에 서죠? 가시와 엉겅퀴! 질려(蒺藜)와 형극(荊棘)을 내버립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대로 된 소산(所産)을 주지 않아요, 땅이! 인간과 땅의 분리,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분리!

그렇게 해서 인간이 땅과 연합이 되어서, 땅이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그 질서(秩序)가 깨지고, 땅이 하느님의 저주(詛呪)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거예요. 이제 인간은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除去)하고, 거기서 채소를 생산해야 하는 수고(受苦)를 할 수밖에 없어요. 거기서 땀이 나오고, 거기서 수고가 나와요. 땅과 인간의 분열(分裂) 속에서, 수고와 아픔과 고통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게 이 죄의 증상이라 말입니다. 땅이 회복되기 전에는 안 되는 거예요.

그건 정말 철저한 분열이요, 전쟁이에요.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땅이 피를 담아 두었다가, 고 인간을 고발(告發)한다 말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고발하는 철저한 분리가 일어나는 거예요. 땅과 인간의 분리(分離)! 그래서 죄인은, 카인은, 살인한 자는, 그 땅에서 살 수가 없어서, 쫓겨났어요. 이 살인자는 땅 위를 돌아다니면서, 무서움과 공포에 휩싸여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하느님이 그 땅에서 쫓겨난 자를 보호(保護)하십니다. 웃기지 않아요? 정작, 하느님의 백성인 아벨, 하벨은 카인에게 맞아 죽을 때, 보호 안 해주었는데, 그를 때려죽인 카인을 보호한단 말이에요, 하느님이요! ‘카인을 죽이는 놈은 내가 죽일 거야!’ 그런다고요, 하느님이! 왜 그러죠? 거기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있는 거예요.

하느님이 아벨을 보호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아니, 죽었잖아요?’ 죽으면, 보호하지 않은 겁니까? 죽음이 끝인가요? 여러분, 우리 인간들이 포착(捕捉)하고 정의(定義)하고 있는 죽음은,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자가 없어요. 유일하게 이 땅에서 죽을 수 있는 분은, 예수 한 분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죽음을 우리의 이 이성 안에서 추측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죽음이 있어요. 그 죽음을 죽으신 분이 예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 자체도 소유할 수 없어요. 포착할 수도 없어요. 하느님은 아벨을 보호하신 거예요. 그런데 카인을 왜 보호(保護)하시느냐? 이건, 하느님이 카인을 보호하셨다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죄인은 하느님이 보호를 선포(宣布)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을 하는가 보라는 거예요. 하느님이 분명 카인을 보호한다고 했는데, 카인이 하느님의 보호를, 쓰레기 취급해버려요.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일이 뭐예요? () 쌓은 거예요, 자기가! 하느님이 보호하겠다고 하는데, ‘나는 그거 못 믿겠으니까, 내 힘으로 성 쌓아서, 내 힘으로 보호할 거예요.’ 여기에 초점이 있는 거예요. 하느님이 카인을 사랑했다는 게 아닙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에 빠져버린 인간은, 하느님을 절대 의지(依持)하지 못해요. 자기를 신 삼아 삽니다. 고게 카인인 거예요. 그가 제일 처음 한 게, 성 쌓은 거잖아요?

그래서 세상의 건축자(建築者)들은, 예수라는 모퉁이 돌을, 자기들의 성 밖으로 계속 던져버리는 거예요. 그게 포도원 농부의 비유예요. 진짜 보호해줄 예수가 왔더니, 계속 던져버려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는 거예요. 예수는! 그 후에도 인간은요, 바벨탑()을 쌓아서, 하느님을 자기들의 행위 밖으로 밀어버리죠? 우리들의 행위로 하늘에 오르겠다! 하느님이 그거 부수는 거예요. 고게 역사(歷史)라니까요.

인간의 행위를 부수는 게, 역사라 말입니다. 그런데 착해지겠다는 거예요, 여러분이요? 그걸 부수러 오는 게 하느님인데. 하느님은 인간이 쌓는 성, 그들의 죽은 땅을 파괴(破壞)해버리세요. 저주해버리십니다. 그렇게 타락한 땅! 하느님이 떠나 죽은 땅! 그게 죽은 흙인 죄인의 모습인 거예요.

 

(창세기 6:1, 5-7, 11-13) 1 땅 위에 사람이 불어나면서부터 그들의 딸들이 태어났다. 5 야훼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6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 7 야훼께서는 '내가 지어 낸 사람이지만, 땅 위에서 쓸어 버리리라.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없애 버리리라. 공연히 만들었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11 하느님 보시기에 세상은 너무나 썩어 있었다.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12 하느님 보시기에 세상은 속속들이 썩어, 사람들이 하는일이 땅 위에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13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은 이제 막판에 이르렀다. 땅 위는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저것들을 땅에서 다 쓸어 버리기로 하였다.

 

땅과 죄인을 마구 혼용(混用)해서 쓰고 있어요. 인간이, 땅이 죄악으로 가득 차고, 인간이 죽어야 되는데, 땅을 죽여 버리겠다. 땅을 저주하신단 말입니다. 그 땅의 원시(原始)가 어디였어요? 에덴이었잖아요? 에덴!!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거하는 땅! 그게 안 될 때 땅은 그냥 죽은 흙이 되는 거고, 거기에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거란 말입니다.

거기에 새로운 땅이 약속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땅은 다 소멸(消滅)되어야 되는데, 유일(唯一)한 하느님의 땅!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에게 이제 약속(約束)이 되는 거예요. 고 땅 말고 다른 땅은, 약속의 땅 아닙니다. 거기 들어가면 다 죽는 거예요.

그곳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다른 말로, 선악과 유혹을 잘 치러내면, 하느님과 함께 거하며, 하느님이 주시는 젖과 꿀의 풍요(豐饒)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그런 땅이에요. , 인간이 하느님을 잘 섬김으로써, 땅도 인간을 반대하지 않고, 창조 때의 그 효력을 그대로 발휘(發揮)해서, 포도송이 하나를, 두 장정(壯丁)이 메고 와야 할 정도의, 그런 소산을 내는 땅이에요.

 

(신명기 8:6-10) 6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가 보여 주신 길만을 따라 가도록 하여라. 7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이제 너희를 기름지고 넓은 땅, 골짜기와 산에서 지하수가 솟아 샘이 되고 냇물이 흐르는 땅으로 이끌어 들이려고 하신다. 8 그 곳은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여는 땅이요, 올리브나무 기름과 꿀이 나는 땅이다. 9 굶주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땅, 아쉬운 것 하나 없는 땅, 돌에서는 쇠를, 산에서는 구리를 캐낼 수 있는 땅이다. 10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너희는 배불리 먹으며 하느님을 기리게 될 것이다.

 

, 에페소서 1장의 단어들이, 여기에 그대로 등장하고 있는데, 선악과 시험만 잘 치러내면, 율법을 잘 지키면, 그 땅은 아무런 부족(不足)함과 불편(不便)함이 없는 풍요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들에게 부어질 거라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지켜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약속의 땅은 왜 꼭 그 가나안이어야만 되는가? 왜 경계(境界)를 다 정해주시죠, 하느님이? 고 밖은 약속의 땅 아니거든요. 왜 그 조끔만, 경계만, 하느님께서 울타리를 쳐서, ‘약속의 땅이야!’라고 이스라엘에게 주시냐고요? 성경에 나와요. 그 이유가!

 

(신명기 11:10-15) 10 너희가 들어 가 차지하려는 땅은 너희가 나온 에집트 땅과는 다르다. 거기에서는 씨를 심은 다음 채소밭에 물을 줄 때처럼 밭을 놀려 물을 대어야 했지만, 11 너희가 건너 가 차지하려는 땅은 산과 골짜기가 많은 곳이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로 땅을 적신다. 12 그 땅은 이렇게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몸소 돌보아 주시는 땅, 해마다 정초부터 섣달 그믐날까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보살펴 주시는 땅이다. 13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나의 명령을 귀담아 들어 너희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그를 섬겨라. 14 그리하면 그가 너희 땅에 가을비와 봄비를 철맞게 내려 주시어, 밀과 술과 기름을 거두게 해 주시고 15 들에는 너희 가축이 뜯어 먹을 풀이 자라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배불리 먹으며 잘 살게 될 것이다.

 

안 하면? 말 안 지키면? 하느님이 이른 비, 늦은 비 안 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나안 땅은, 무슨 땅? 천수답(天水沓) 농사를 짓는 땅이란 뜻입니다. 애굽은, 사람들이 나일 강을 퍼다가, 농사를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약속의 땅은 어떤 땅이냐 하면? 인간의 행위(行爲)가 전혀 가치화(價値化) 될 수 없는 땅이에요. 골짜기가 물을 받았다가, 하느님의 명령(命令)에 의해 주면, 소산이 나고, 안 주면, 굶는 거예요.

약속의 땅은, 인간의 행위(行爲), 인간 자체가, 인간 자신이 자기들의 유익(有益)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곳을 약속의 땅이라 그래요. 그래서 고 척박한 땅, 지금도 이스라엘은 먹을 물이 없어서, 바닷물을 정수(淨水)해서 먹거든요. 하필 고런 땅! 하나님이 안 주면, 죽어야 되는 그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주고, 그리로 몰아버린 것입니다.

누구만 보라고? 하느님만 보라고! 하느님만 봐야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요? 밤에 발 뻗고 자는 거예요. 애굽에서는? 옆집 철이가 열 바가지 부으면, 나는 새벽 3시에 나가서, 열다섯 바가지 부어야 돼요. 고게 인간이거든요. 붓는 대로 소산(所産)이 늘어나니까! 천수답(天水沓) 지역에서는? 내가 뭐 할 게 없으니까, 하느님 주려면 주고, 말면, 마세요. 그걸 자유(自由)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복음(福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땅, 약속의 땅은, 하느님의 영광(榮光), 하느님의 능력(能力), 하느님의 은혜(恩惠)를 드러내는 땅이에요. 하느님이 드러나는 땅이, 약속(約束)의 땅이에요. 인간이 뭘 하는 땅이 약속의 땅이 아녜요. 하느님이 드러나야 약속의 땅이에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땅은 내 거라고 말씀을 하신 거예요. 땅은 내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그 힘이 되어서, 인간들 자신의 유익(有益)을 위해 사고파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이 서로 사고팔고 못했어요. 경작권(耕作權)만 팔았어요, 부득이할 때! 그러나 희년(禧年)이 되면 다시 찾는 거예요. 그래서 땅은 매매(買賣)가 안 돼요. 매매가 안 된다는 건, 그 땅 자체가 힘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가치가 안 된다는 거예요. ? 하느님 거기 때문에.

그런데 이 땅이 힘의 저장고(貯藏庫)가 되어서, 가치가 되어서, 그 땅 스스로가 가치를 챙기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고게 인간이라니까요. 요 인간들이, 땅이, 하느님 것이어야 할 땅들이, 자기들 스스로의 가치를 챙기고, 사고팔게 되는 거요. 그게 마귀(魔鬼)들의 세상인 것입니다.

 

(레위기 25:23) 23 땅은 아주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하는 식객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생기(生氣)로 인해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건. 쉬운 말로 성도는,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그릇으로 살아야 하는 거지, 하느님과 연합(聯合)하여 생기를 받아서, 하느님을 드러내는 그릇으로 살아야 되는 거지, 그 자체로 힘을 과시(誇示)하거나, 그 자체의 유익(有益)을 위해 존재할 수 없는 거라는 거요. 그래야 하느님이 거하시는 땅! 약속의 땅! 하느님의 것인, 그 하느님의 것으로서의 땅 자격(資格)이 되는 거예요, 그래야! 가치와 힘을 상실(喪失)한 땅에 되어야!

그런데 우리는 엉뚱한 땅이 되어서, 내 가치(價値)를 자꾸 챙기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땅이, 하느님의 영광(榮光)을 드러내는 산 땅, 약속의 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先行)이 되어야 되는 게, 비를 맞아야 된다 말이에요. 생기(生氣)가 부어져야 된다 말이에요. 성신(聖神)이 부어져야 된다 말이에요.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고, 은혜로 종결(終結)이 된다는 거예요. ? ! 그 흙은 그 자체로, 거름더미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하느님 거라니까요, 여러분은! 제발 그걸 알아먹고, 하느님 앞에서, 죽은 흙으로, 티끌로 서라는 거예요. 그게 성경이 하고 싶은 말입니다.

 

(이사야 32:11-18) 11 태평무사한 여인들아, 몸서리쳐라. 팔자가 늘어진 여인들아, 몸부림쳐라. 옷을 벗고 알몸으로, 너희 허리에 베옷을 둘러라. 12 가슴을 치며 통곡하여라. 기름진 농토와 무성하게 열리는 포도송이를 생각하고 통곡하여라. 13 내 백성의 농토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고 집집마다 기쁨으로 흥청거리던 마을은 망하리라. 14 궁전은 버림받고 혼잡하던 도시에서는 인기척이 사라지리라. 그리하여 도시가 섰던 언덕과 망대가 섰던 자리에 동굴만이 남아 들노새들이 뛰놀고, 양떼가 풀이나 뜯게 되리라. 15 드디어 하늘의 영기가 우리 위에 쏟아져 내려 사막은 과수원이 되고 과수원은 수풀이 되리라. 16 사막은 법이 통하는 곳이 되고 과수원은 정의의 터전이 되리라. 17 정의는 평화를 가져오고 법은 영원한 태평성대를 이루리라. 18 나의 백성은 평화스런 보금자리에서, 고요한 분위기에서 마음놓고 살게 되리라.

 

하느님과 평화스런 집! 그게 성신(聖神)을 받은 회복된 땅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기경(起耕)을 하거나, 인간들의 땀과 노력이 깃들어서, 좋은 땅이 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譬喩)예요. 그러니까 성경은 면도칼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논리적입니다. 바로 그 현실(現實), 예수님께서 이렇게 설명을 해 주세요.

 

(요한복음 14:18-23) 18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기어이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지나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20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 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22 가리옷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23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 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런데 성령(聖靈)이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어떨 때 들온다고요? 어떻게 회복(回復)된 땅이 된다 그랬어요? 선악과를 통과해야. 여기도 내 말을 지키면, 오겠다.’ 그랬는데, 성령이 왔다는 건, 지킨 자가 됐다는 거라 말입니다. 그걸 아냐고요? 그게 감격(感激)스러우세요? 그 사람만 성도예요.

하느님의 은혜로, 선악과(善惡果) 시험(試驗), 성취(成就)가 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그들 안에 하느님께서 거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영생(永生)이 주어지게 되는 거예요. 죽은 흙에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아들의 영이 임()하니까, 선악과의 시험이 성취가 되고, 에덴이, 약속의 땅이 회복이 되며, 하느님의 영원한 거처(居處)가 생기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을 하느님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땅이라 말입니다. 여러분이 에덴이고, 여러분이 천국(天國)이라니까요. 그게 기쁘냐고요?

내가 천국이라면, 내가 가고 싶은 어떤 곳이, 준비(準備)가 되어 있어서 내가 천국에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지금 이 상태(狀態)가 너무 행복해야 되는 거예요. ‘하느님과 내가, 어떻게 연합(聯合)이 되어서, 이렇게 함께 거하게 되었지?’, 행복(幸福)해야 성도(聖徒)인 거예요.

아니고, 하느님이, 뭔가 열심히 하면, 어디에 준비해놓은 좋은 곳에 나를 들여보내주시겠지이걸 불신자(不信者)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기복신앙(祈福信仰)이라고 하는 거예요.

땅은 누구예요? 여러분 자신이란 말입니다. 그걸 바울로가 에페소서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에페소서 2:18-22) 18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이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21 온 건물은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22 여러분도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했다고요, 그 돌을? 건축자(建築者)들이 되어서, 계속 모퉁이 돌을 버렸단 말이에요. 그런데 하느님이, 하나느님의 은혜로, 거기에서 집을 지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느님의 거할 처소(處所)! 우리는 계속 하느님을 버려요. 죽을 때까지 버릴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만, 거룩한 성으로 지어버리는 거예요. 성전으로 지어버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쉬운 말로, 하느님과 죽은 흙의 연합(聯合), 하느님 측의 열심과, 하느님이 쏟아 부으시는 은혜(恩惠)에 의해서만 가능(可能)한 거니까, ‘죽은 흙들아! 38광 땡인 척 하지 말고, 그냥 한 끗으로 죽어라!’는 거예요. 너희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산 척 하지 말라는 거예요.

 

(요한묵시록 21:1-2) 1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어린양의 신부(新婦)! 신부는 교회! 우리라 말입니다. 그게 천국이에요. 새 하늘과 새 땅! 옛 하늘과 옛 땅은 없어졌다잖아요? 지금 이 몸이 없어질 거란 말입니다. 그걸 믿으시냐고요? 그러면 여러분은 자유(自由)에요.

이 몸 이대로 가지고 가면, 나는 절대 천국(天國) 못 갈 것 같죠? 그거 인식(認識)이 안 된 사람, 아직 구원(救援)받은 사람이 아녜요. 성령은 죄에 대하여, ()에 대하여, 심판(審判)에 대하여 가르치기 때문에, 이 몸 이대로 내가 갖고 가면, 천국 못 들어갑니다. 이 고백(告白)을 반드시 해야 돼요. 그런데 이게 없어진다, 그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에게 입혀진다, 그러잖아요? 준비한, 예비한 신부(新婦)처럼! 그래서 거기에서 찬송(讚頌)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게 에페소서의 창세전 언약 아닙니까?

그렇게 이 역사(歷史), 어떻게 하느님이, 그 죽은 흙이었던, 이 똥 덩어리들을, 하느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만들어가는 지를 보여주는 묵시(默示)의 실제(實際)와 현장(現場)인 거예요. 그래서 다니엘서 7장에 보면, 이 역사 전체를 ,거룩한 성이 회복(回復)되는 칠십주간(이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니엘서 9장으로 가보세요.

 

(다니엘 9:24) 24 하느님께서는 정하신 기간이 칠십 주간이 지나야 네 겨레와 네 거룩한 도읍으로 하여금 다시는 거역하지 않게 하시고 죄악에서 손을 떼게 하실 것이다. 죄를 벗겨 주시고 영원한 정의를 펴실 것이다. 환상으로 내리신 예언을 틀림없이 이루시어 더없이 거룩한 이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성별하여 세우실 것이다.

 

이게 역사(歷史)의 끝이거든요. 그런데 뭘 위해서? 거룩한 성! 요한묵시록에서 거룩한 성이 누구였어요? ‘예요, !! 죽은 흙인 인간이, 어떻게 거룩한 성이 되어져 가는가? 하느님이 거하는 성이, 거룩한 성이 되어지는가? 죽은 흙이 어떻게 하느님과 연합(聯合)하여, 하느님이 누리는 걸 누리게 되는 가를 보여주는 게 역사(歷史)란 말이에요, 역사!!

그래서 하느님이 안식일(安息日), 안식년(安息年), 희년(禧年)에 땅에서 아무 것도 못하게 한 거예요. 땅을 쉬게 하라! 그런 거예요. 안식년, 안식일, 희년은 하느님의 은혜(恩惠)에 의해서, 모든 것이 죄()에서 풀려나고, 속박(束縛)에서 풀려나는 게, 안식년, 희년이죠? 안식일도 그렇고. 그래서 그날 일하면 죽는 거예요. 돌에 맞아 죽는 거예요. 하느님이 혼자 하신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안식년을 한 번도 안 지켰어요. 그래서 하느님이 어떻게 합니까? 땅을 기필코 쉬게 만들어버리죠. 어떻게?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서! 490년 동안 안식년 한 번도 안 지킨 걸, 70년 동안 다 지키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7년에 한 번씩 지켜야 되는 걸, 한 번도 안 지키니까, 아예 70년을 땅을 쉬게 만들어버려요. 땅이 중요한 거예요? 인간이 중요한 거예요? 이 땅을 쉬게 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이 땅이 토해내 버리는 거예요.

하느님과 연합(聯合)되지 못한 이 세상의 인간들은요, 하느님이 보시기에 그냥 똥입니다. 먼지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소중(所重)하다고, 지랄들을 떨고 앉아 있는 거예요. 하느님은 땅이 중요하다니까요. 이 땅에서 그 하느님의 뜻을 요만큼이라도 어기는 자는 다 쫓아내 버린단 말입니다.

 

(레위기 26:43) 43 그들이 버리고 떠난 땅이 폐허로 있으면서 안식을 누리고 있는 동안, 그들은 자기들의 죄벌을 달게 받아야 하리라. 내가 정해 준 규정을 역겨워하고 내가 세워 준 법을 가볍게 여겨 거부하다가, 마침내 닥쳐 오는 죄벌을 면할 길이 없으리라.

 

땅을 쉬게 하기 위해 사람을 쫓아버린단 말입니다. ? 안식(安息)의 땅, 하느님나라는, 인간들이 쉬면 안 되는데, 쉬면, 인간들의 자기 유익(有益), 수익(收益)이 줄어들까봐, 계속 땅을 안 놀렸단 말이에요. 하느님나라는 그렇게 인간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운행(運行)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기필코 땅을 쉬게 만들어버린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 하느님의 언약의 땅, 약속의 땅에 들어온 여러분은, 여러분의 수고(受苦)와 노력(努力)을 멈추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寶血)을 꼭 붙들면 되는 거란 말입니다. 십자가 앞에 여러분의 짐을 내려놓아야 되는 거예요. 그게 안식일(安息日), 안식년(安息年), 희년(禧年)에 해당하는 자의 삶이란 말이에요,

 

(역대하 36:20-21) 20 느부갓네살은 칼에 맞아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들을 바빌론으로 붙잡아다가 페르샤 시대가 되기까지 대대로 종으로 부렸다. 21 이리하여 이 땅은 긴 세월 동안 황폐되어, 밀렸던 안식을 다 찾아 누리며 칠십 년을 채우리라고 야훼께서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보세요. 70년을 포로(捕虜)로 보내어 땅을 안식(安息)하게 하는데, 다니엘서에서는 칠십 이레로 거룩한 성()이 어떻게 완성(完成)이 되는지를 보여줘요. 성경이, 여러분, 소름끼치게 너무 논리적(論理的)이잖아요?

여러분, 내가 지금 하느님의 거룩한, 회복(回復)된 땅이 되었어요. 그 사람은, 지금, 은혜(恩惠)의 비를 받지 못하는 이 땅을 어떻게 여기게 될까요? 그리고 땅에 속한 이 힘들을! 죽은 걸로 여기게 되는 거예요, 당연히! 그런데 왜 이 땅의 것들을 바라보면서, 위의 것을 못 바라보시는 것입니까? 성도라는 인간들이요! 내가 땅이라면서!

진짜 땅은 라면서요? 생명 받은 땅은 라면서요?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땅! 이게 지금 거룩한 성이 지금 회복이 돼 있는데, 왜 죽어 있는 이 땅을 부러워하냐고요? 여기서 성공(成功)하면 축복(祝福)? 천만의 말씀! 여태까지 봤잖아요? 이 땅은 죽은 땅! 비 못 맞은 땅! 생명(生命)과 관계없는 땅! 여러분이 진짜 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로가 그러는 거예요. 땅에 것!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땅에 것! 그러면 어떻게 된다, 그래요? 저주(詛呪)받는대요. ? 그 사람은 진짜 땅 아니니까!

여러분, 잘 견디세요. 내가 땅이 될 때, 우리가 속한 이 땅이, 우리에게서 부정(否定)당하여 죽을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세상(世上)에 대하여 죽었다면서요? 그런데 내가 하느님이 계시는 진짜 땅이 됐다는 걸 모르면, 이 세상에서 나의 땅이 부정이 안 돼요. 이걸 여러분이 꼭 알아먹으셔야 돼요.

, 죽은 흙에서,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이 거하는, 거룩한 성,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인지, 잘 아셨죠? 성경이 그냥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 이거구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으세요? 아다마, 아파르, 에서 성경이 시작이 되는지! 그러니까 다른 거 궁금해 하지 마세요. 성경은 그냥 아들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기뻐하시면 돼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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