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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불행하여라! (루카11,42-4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13 조회수81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0월 13일 수요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불행하여라! (루카11,42-46)

 

1독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1-11)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10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11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화답송 시편 62(61),2-3.6-7.9(◎ 13ㄴㄷ 참조)

◎ 주님당신은 사람마다 행실대로 갚으시나이다.

○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구원이 오리니내 영혼 그분을 고요히 기다리네그분만이 내 바위내 구원내 성채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

○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희망이 오리니내 영혼아그분을 고요히 기다려라그분만이 내 바위내 구원내 성채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 백성아언제나 그분을 신뢰하여라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이시다

 

복음 <불행하여라너희 바리사이들아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11,42-46)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2 “불행하여라너희 바리사이들아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너희 바리사이들아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제1독서 (로마2,1-11)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5)

 

로마서 2장 1-5절은 자신도 동일한 죄를 범하면서도 이방인을 판단하는 유다인들의 악한 모습에 대한 책망과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6-16절은 하느님의 심판이 이방인이나 유다인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온다는 사실을 심판의 기준과 근거를 가지고 논증한다.

 

로마서 2장 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분명히 제시한다.

그것은 '화해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나오는데, 원문대로 번역하면 '다만 네 완고함과 회개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가 된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잠언16,2; 예레17,10)의 눈에 비친 유다인들의 내적상태를 나타낸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회개로 나아가는 기회로 삼지 않고, 도리어 그 자비심을 외면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유다인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첫번째 이유는 그들의 '완고함'이다.

여기서 '고집'으로 번역된 '스클레로테타'(sklleroteta)의 원형 '스클레로테스'(skllretes; hardness; stubbornness) '굳음'이라는 뜻인데, 유다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거대한 장애물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뻔뻔스러웠고, 완고하고 도리에 어두운 마음에 지배되고 있었다.

죄에 대해 뻔뻔스럽게 되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첩경이다.

 

'경화증'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sclerosis'의 어원이 '스클레로테타'라는 단어의 어근이라는 것은, 마치 동맥 경화증이 인간 육체의 건강에 있어 치명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완고함이 인간의 영적 건강에 있어 치명적임을 잘 보여준다.

 

유다인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두번째 이유는 '회개할 줄 모르는 마음'이다.

'회개할 줄 모르는'으로 번역한 '아메타노에톤'(ametanoeton)의 원형 '아메타노에토스'(ametanoetos; impenitent; unrepentant)는 부정 불변사 '아'(a)와, '회개하다'(마태3,2)라는 뜻의 동사 '메타노에오'(metanoeo)의 합성어이다.

 

그런데 '메타노에오'(metanoeo)는 접두사로 쓰여 '다르게' 혹은 '후에'라는 뜻을 지닌 '메타'(meta)와 '깨닫다'(마태16,9), '생각하다'(에페3,20)라는 뜻을 지닌 동사 '노이에오'(noieo)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다르게 생각하다', '후에 깨닫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아메타노에토스'(ametanometos)는 잘못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깨닫지도 못하고 돌이키지도 않는, 즉 뉘우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영혼의 세 가지 기능(역할)이라고 하는 '영혼 삼사'인 지성, 정서(감정), 의지의 모든 상태의 마비 현상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마음으로 슬퍼하며 의지와 행동으로  돌이키는 이들에게만 유효하다.

그렇지 않고 어떤 동기에서든지 죄악을 범하고도 완고한 마음으로 그대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유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인자하심을 계속 유린하고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이에 대해 가차없이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이들 가운데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계속 죄를 떠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는데, 이것은 심판날에 자신에게 내릴 진노를 쌓는 것임을 알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속히 그 죄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최후 심판의 날에 내릴 진노는 하느님의 공의에 따라 집행되지만, 그 진노를  불러 일으키는 당사자는 다름 아닌 하느님께서 제공하시는 자비를 오히려 죄짓는 기회로 삼으면서 완고함과 회개할 줄 모르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로마서 2장 5절에서 '진노의 날' 

즉 '헤메라 오르게스'(hemera orges; the day of wrath)는 2장 16절에 진술된 '사람들의 숨은 행실들을 심판하시는 그 날', 즉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있을 공의로운 최후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한편 '이루어지는'으로 번역된 '아포칼륍세오스'(apokallypseos)는 '계시'(revelation)라는 의미를 갖는 명사 '아포갈륍시스'(apokallypsis)의 소유격이다.

 

이것은 진노의 날에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 즉 공의로운 심판이 어떤 것인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뉘앙스를 전한다.

 

그것은 곧 '진리에 따른 심판'(로마2,2.3)이며, 외적 조건이 아닌 내적 실체를 보고 행하는 심판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심판'(로마2,11)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그날에 지금 사도 바오로에 의해 적나라하게 공개되고 있는 유다인들의 그 악한 실체를 보고 심판할 것이다.

 

여기서 '그대에게'로 번역된 '세아우토'(seauto)는 재귀대명사로서 '바로 너 자신에게'(for yourself)라는 뜻이며, 스스로가 자신의 심판거리를 바로 자기 자신 속에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쌓고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테사우리제이스'(thesaurizeis; are storing up)는 돈과 재물을 저축하는 것처럼 쌓아가는 것을 뜻한다(마태6,19; 루카12,21; 야고5,3). 

이 동사는 현재 시제로 쓰여 당시 유다인들이 계속하여 자신들에게 내릴 심판거리를 쌓아가고 있음을 회화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단어는 문법적으로는 직설법으로 사용되어 평서문을 이루고 있지만, 단순히 사실 자체에 대한 묘사로 그치지 않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강한 부정의 명령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1,42-46)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46)

 

루카 복음 11장 46절은 율법 교사들이 저주를 받는 세 가지 이유중에 첫번째 이유이다.

그들은 자기 어려운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옥,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지 않는 파렴치함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힘겨운 짐', '지기 어려운 짐'은 무엇인가?

 

이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원로들의 전통과 율법 교사들의 해석을 가리킨다.

 

그들은 심지어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에 대한 십일조 규정을 세부적으로 제정했고(루카11,42), 그 결과로 당대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기 위해 땔감까지도 계산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석을 '율법' 자체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여겼고(루카11,37), 하지만 이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있었고 복잡하여 일반 사람들이 일일이 암기해서 지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부담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마태23,3).

 

여기서 '대다'에 해당하는 '프로습사우에테'(prospsauete; touch)는 가볍게 만지거나 살짝 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현재 직설법의 형태로 부정어 '우'(u; not)과 함께 쓰여마치 무거운 짐에 손가락 하나 살짝 건드리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율법 교사들의 파렴치한 악행이 관행처럼 계속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의 이러한 모순되고 불의한 모습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율법 교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의무를 무겁게 부과하면서도,  자신들은 전혀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째, 다른 사람들이 율법 준수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일 때, 그들은 그 짐을 덜어 주기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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