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13 조회수1,884 추천수9 반대(0)

국어시간에 육하원칙(六何原則)’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글을 쓸 때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라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어떻게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과학의 분야에서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벌어진 일에 대해서 의문 나는 부분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정에서도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원인을 알면 판단을 내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는 왜라는 질문은 과거에서 현재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에 늦게 출근한 것은 왜의 문제입니다.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있을 수 있고, 마라톤 대회가 있어서 길을 막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라는 말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면을 끓이는 것은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스프를 먼저 넣고 끓이기도 하고, 계란을 넣고 끓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자주하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단식하고, 우리도 단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안식일에는 쉬어야 하는데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줍니까?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인데 밀 이삭을 따서 먹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혼인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단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인잔치가 끝나면 그들도 단식할 것입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당신들도 안식일에 소나 양에게 물을 먹이지 않습니까?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저는 왜라는 질문을 받으면 답변이 궁색해진 적이 많았습니다. 숨기고 싶은 것들이 있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 라는 질문을 받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싶으면서도 반항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저도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을 드러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라는 질문은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카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왜 동생 아벨을 죽였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50명만 있어도 벌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나중에는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벌하시지 않겠는지 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 10명을 보아서도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왜라는 차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라는 행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슬퍼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율법학자는 대답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사제와 레위인은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에 데려다 준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자비를 베풀어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배반하였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왜라는 말은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라는 말은 공동체를 갈라놓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살면서 왜라는 질문은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어떻게라는 방법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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