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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그러나 이제는 (로마3,21-3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14 조회수798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10. 14.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도란도란글방

 

그러나 이제는

 

(로마서 3:21-31)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24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25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 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26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27 그러니 우리가 내세울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되찾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28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29 하느님은 유다인만의 하느님이신 줄 압니까? 이방인의 하느님이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과연 이방인의 하느님도 되십니다. 30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어서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나 다 같이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해 주십니다. 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내세운다고 해서 율법을 무시하는 줄 아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존중합니다.

 

믿음! 믿음! 믿음! 계속 나오죠? 믿음!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혹시 여러분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를 아십니까? 까치 오해성과, 그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엄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둘의 사랑을 깨는 자로 등장하는, 마동탁의 이야기입니다. 외팔이 최관, 또 키가 작은 최경도, 혼혈아 하국상, 아주 둔해 빠진 백두산, 오해성! 이런 멤버들은 모두 불구였고, 약자였어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런 선수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약함이, 강함을 누르고 승자(勝子)가 됩니다.

저는 그 책의 스토리 속에서, 역사 속 성도들의 모습을, 오버랩(overlap) 시켜서 그려보곤 했어요. 약자들이 힘을 합치면, 강자도 이길 수 있다는, 그런 건설적이고 희망적인, 그런 종류의 그림이 아니라, 이 역사란 과정을 살아가면서, 이 무력하고 불가능(不可能)한 자신들의 실체(實體)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러한 불가능함과 무력(無力)함을, 사랑과 자비로 채워주시는, 하늘 신랑의 사랑을 자각(自覺)하고 체감하게 되는, 우리는 그런 자가 맞는데, 이걸 채워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체감(體感)하게 되는, 제 나름대로 입니다, 물론! 성도의 삶을 그려본 거예요.

그들이 연합(聯合)을 해서, 그들이 자기들을 계발하고 성숙시켜, 승자가 된 게 아니라, 감독을 만났더니 승자가 되는 거거든요 약자들이여, 자신들이 무력하고 연약한 자임을 알고, 고백하는 것이, 승리니라!’라는 그런 메시지를, 나름대로 본 거죠.

요즘 자꾸 외곽에서 그리스도교를 가리켜서 개독교라 부르고, 목사를 먹사라 부른다니까, 대형교회 목사들이 모여서, 기독정당(基督政黨)을 창당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정당(政黨)의 목적이 뭐죠? 정권획득이죠. 그게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거 맞습니까? 그거 아니란 말이에요.

결국 그 외인구단의 상징이랄 수 있는, 오해성이 눈까지 멀어가면서, 그 엄지의 사랑을 얻어내게 되는, 그 이야기의 결론을 보면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도의 결국을 생각해 봤어요. 이 역사 속에서는, 불구자로, 약자로, 세상의 업신여김과 조롱을 받으면서, 그렇게 사는 게 성도의 삶이지만, 결국 신랑 예수의 심장을 선물로 받고요, 완전히 회복이 되어서, 신랑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하늘 신방을 차지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거죠.

그 공포의 외인구단이 영화로 제작이 된 적이 있는데, 그 영화의 주제가 가사가 참 좋습니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여기에다 또 적어놨어요. (하하하)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별보다 예쁘고, 꽃보다 더 고운 나의 친구야! 이 세상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친구야, 네 곁에 있으면 사랑은 내 것! 네 곁에 있으면 세상도 내 것!’

여러분 이런 사랑을 해 본 적이 있으신 가요? 잠깐 있죠? 사랑은 모든 걸 가능하게 해요. 집에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아이가,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밤새 도시락을 싸서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군대 면회를 갑니다. 엄마는 배신감 느끼죠? 그냥 사랑하는 사람의 동네에 가서, 그 사람 방에 켜진 불빛만이라도 보고 싶어서, 100마일이 넘는 길을 밤새 운전을 해서 다녀오기도 해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거예요. 그게 사랑입니다. 부모들은 속이 터져요. ‘나에게 그렇게 좀 해 보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우리 신랑 예수께서, 신부인 우리 교회에게 하시는 사랑 고백이 그러해요. 그 신랑을 뭐든지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까지 내어 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했어요. 그 신랑의 피가 아니면,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기 때문에 그래요.

신랑이 신부와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신부가 죽은 시체(屍體)예요. 여러분, 이걸 창조(創造)’라고 해요. 그런데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이 있는데, ‘생명은 피에 있다!’라는 법칙이에요. 그래서 죽은 자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자격 있는 존재의 피가 필요해요. 신부를 향한 신랑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그 신랑이 자진해서 자신의 목숨! 그 피를 바치겠다고 나선 거예요. 그걸 구원(救援)이라 그래요.

 

잘 들어 보세요. 쉽게 설명해 드리는 거예요. 신랑이, 신부가 들어 있는 죽음(死亡)이라는 영역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구출해내야 되니까! 마치 엄지가, 까치에게, 자기 남편 마동탁을 위해서, 경기에 일부러 져 달라고 하는, 그런 마귀 같은 부탁을 하는데, 까치가 그 마귀 같은 엄지를 살려내기 위해, 그녀를 위해, 자신이 마동탁이 친 타구를 눈으로 받아내서, 실명(失明)을 해 버리는 형국(形局)이에요.

진짜 장님은 엄지였는데, 그 엄지를 구해내기 위해, 까치가 장님이 되어 버리는 거죠. 둘은 그 까치의 사랑으로 결국 이어지게 되는 거요. 그렇게 사망 속으로 들어간 신랑은, 그 사망 속에서, 신부를 만나죠. 신랑은, 그 사망과 관계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안으로 일부러 들어가지 않으면, 그 사망 안에 들어가 있는 신부를 만날 수가 없어요.

이게 거룩과 피조물의 관계예요. 그래서 그 거룩이, 하느님이, 죽음(死亡)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뚫고 들어와 버린 거죠. 그리고는 죽음(死亡)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신부를 자기와 묶어버렸어요. 묶을 약(), 묶을 속(), 이걸 약속(約束)’이라 그래요. ‘언약(言約)’이라고 한다 말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마치, 쌍둥이처럼 자기에게 묶어버린 거예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면서, 그 이유를 선조와의 언약(言約) 때문이다, 그러죠. 너희들이 뭐가 잘 나서 가 아니라, 언약 때문이다. 이게 약속(約束)이에요. 그냥 묶는 거예요. 거저! 그게 이스라엘의 자격과 됨됨이에 상관없이, 언약을 따라, 하느님이 당신과 당신의 백성을, 묶어버리는 모습이에요. 왜 그러셨을까요? 이제, 죄와 상관없는 당신은, 사망의 입에서 나가야 돼요.

사망은 죄만 먹을 수 있어요. 사망은 죄만 삼켜요. 그런데 죄 없는 어떤 이가, 사망 안으로 들어와 버린 거예요. 사망이 처음에는, 자기 먹이인 줄 알고 덥석 삼켰어요. 마귀가 예수를 죽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덥석 삼켰는데,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거룩한 게 들어와 버린 거예요. 뱉어내야 돼요. 이거는요!

사망은 거룩을 삼키면 죽어요. 그래서 사망이, 그 맛없는 존재를 확 뱉어 버렸어요. 무덤 문이 다시 열린 거예요. 나가 달라고! 그런데 그 신랑이, 사망에서 튀어나오는데, 그 신랑의 몸에 뭐가 묶여 있었죠? 약속으로! 언약으로! 신부가 묶여 있었어요. 그걸 구원이라 그래요.

거기서 신부가 하는 게 뭐가 있어요? 신랑이 묶은 거예요. 약속이에요. 언약이에요. 그게 구약과 신약이란 말예요. 그래서 신랑이 죽음 속으로 들어와서, 약속으로 신부를 묶은 다음에 튀어 나간 걸, 구원이라 한다 말이에요. 그걸 알아먹는 이들을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언약은 무조건적으로 부어지는 은혜예요. 그렇게 사망 안에 갇혀 있던 신부를 구출하기 위해서, 신랑이 사망 안으로 들어갔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로 스스로 내려간 거예요. 사망에게 먹히는 거 그 자체가, 그 존재의 완전 부정이거든요. 세상 속에서는! 그 자리로 내려간 거란 말이에요.

사망으로 들어간 신랑은, 그 사망 안에 갇혀 있던 신부를, 자기 몸에 언약으로 묶고서 구출해 내오신 거예요. 엔테베 구출 작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신랑의 신부 구출 작전을 들으시면서,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라는 신랑의 그 사랑 고백이, 이 세상 모든 걸 다 줘도 너와는 바꾸지 않겠다는 예수의 고백이, 여러분에게 들려야 되는 거예요.

 

중요한 건, 내가 나를 바라볼 때, 다른 이보다 내가 더 나은 게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신랑이 나를, 내가 속했던 사망으로 들어와서 나를 건져 냈는데, 내가 나를 보니까, 내가 다른 이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나는 게달의 장막이고, 포도원의 노예처럼 못난 존재예요. 슬람미예요. 그냥! 악당인 마동탁을 위해서, 게임에서 져 달라고 부탁을 하는 철없는 엄지인 거예요. 그런데 신랑이 무조건적인 사랑과, 무차별적인 자비로, 내가 갇혀 있는 사망으로 출격해 들어와서, 눈알을 뽑아 준 거예요. 까치처럼. 심장을 내줘버린 거예요. 이걸 구원(救援)’이라 그래요.

신부인 교회는, 바로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신랑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 그 신랑이 준비해 놓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 자리로 그냥 나가는 거예요. 절대 그 검은 피부를,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희게 만들어서, 잔치 자리에 나가는 게 아니고, 게달의 장막 같은 너덜너덜한 모습을 발전시키고 계발하여, 잔치 자리로 나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예쁜 여자가 되어서, 현모양처로 성숙되어서, 잔치 자리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내 모습 이대로! ‘나 지은 것 죄뿐이니, 성부여 의지 없어서!’ 이렇게 두 손 번쩍 들고, 면목 없이 그러나 감사함으로, 혼인 잔치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 때 그 신랑을 진짜 사랑할 수 있어요. 내가 뭔데 날 그렇게 사랑하셨는가가 절절히 느껴져야! 이걸 로마서 5장에서 화목(和睦)’이라 하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 자신이, 외인구단의 멤버들보다, 더 부족하고 불가능한 자임을 아는 게, 변화(變化), 성숙(成熟)이라 그러는 거예요. 그걸 아는 걸! 그 불구의 상태를 열심히 노력해서 극복해내고, 멀쩡한 사람이 되어 잔치 자리로 가는 게 아니라 말이에요. 그래서 신부의 유일한 지참금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이요, 믿음 밖에 없어요! 신부가 가져갈 건 믿음밖에 없어요. 신랑이 신부에게, 왜 믿음만 요구하시는지 아세요? 그 믿음이, 바로 사랑이에요.

 

오늘날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한 정의조차 제대로 못 내리고 있어요. 믿음이 뭐예요, ‘난 당신을 믿어!’ 믿는 게 뭐냐고요? 여러분이 아는 그 믿음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같다고 생각하세요? 신랑만 사랑하고, 신랑만 자랑하게 하시려고 신부의 그 어떤 도움도 받지 않으시고, 도와 줄 수도 없어요.

죽음 안에 갇혀 있는 자가 뭘 도와 줘요? 그 어떤 도움도 받지 않으시고, 오직 당신의 피로만, 신부를 구출해 내셔서, 혼인을 올리신단 말이에요. 그래야 신랑의 영광만 드러나요. 그래야 신랑만 찬송 받는 거란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16-17) 16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는 길이 율법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7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가 죄를 조장하시는 분이란 말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게 어려운 구절이에요. 이해가 가세요? 바울로는 16절 말미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절대 신부의 자격을 획득할 수 없다고 단언을 한 후에, 17절에서, 자신의 행위나 노력으로, 스스로 의롭게 되려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렇게 묻는 거예요. 너희가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하다가, 혹 죄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라고 하지 마! 분명히 너희들은 죄를 지을 거야. 만일 그렇다면, 너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너희에게 죄를 짓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지셨다는 것이냐?’ 이런 말이에요. 쉽게 설명해 드릴게요.

십자가는 그 자체로, 하늘의 계획을 완료해 내신, 완전성을 가진 거예요. 그래야 하느님이 하신 일이 돼요. 하느님이 하신 일은 항상 완료(完了)예요. 완전(完全)이에요. 그런데 그 십자가가,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들의 행위를, 보다 나은 행위로, 인간을 보다 나은 인간으로, 모범생으로 만들어 내는, 바꾸어 내는 도구로 선 거라면, 이건 완료고 완전이니까! 너희는 더 이상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의 공로! 그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너희가 지금 죄를 짓는다면, 십자가가 지금 뭔가를 완료시켜 놓았는데, 너희들이 죄를 짓는다면, 십자가가 죄를 짓게 하려고 선거냐?’라고 묻는 거예요. 사도 바울로는 십자가의 목적이, 고작 우리의 행위를 바꾸어내는데 있는 게 아니라, 보다 융숭 깊은 목적을 갖고 섰다는 걸,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아예 새 사람으로 바꾸어내는 능력이 있다는 거예요.

 

(에페소서 2:8-9) 8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9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8-31) 28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29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 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31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보는 것처럼, 어린 양의 신부가, 자격을 갖추는 게, 신부의 됨됨이에 있지 않아요. 신부는, 신랑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고 믿는 것으로, 그 자격을 완비하게 되는 거예요. 신랑은 이 세상의 가치의 기준으로, 성숙되고 괜찮아진 그런 신부를 찾는 게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자기의 사랑을 알아주는, 그 이를 찾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로가 믿음이란 걸,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믿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로마서 3:21-22)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율법과 예언서들은 구약 성경인데, 거기서 벌써, 새로운 ()’ 또 다른 ()’가 증거(證據)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성경은 전부 예수에 대한 이야기란 뜻이에요. 그러니 율법! 구약성경이 전부, ‘예수 믿어라!’를 얘기하고 있었더라는 거예요. ‘예수 믿어라!’

사도 바울로는 118절부터, 320절까지, 아주 길게, 인간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고 추악함을 폭로해내요. 아주 길게! 인간들은 율법으로도, 양심으로도, 심지어, 말씀을 가지고도, 죄만 생산해내는 추악한 시체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아지 빠른 좀비들이라는 거예요. 지금 우리의 모습이에요.

예전에 우리가 그랬던 게 아니라! 한 마디로, 너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외인구단이라는 거예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우리에게서도 그러한 좀비의 모습이 똑같이 보일 때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다, 모두 다, 같이 지옥가야 되나요? 그래서 등장하는 게, 21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니 데.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다 공포의 외인구단, 쓸모없는 외인구단인데, 감독이 나타난 거예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들 수 있는 감독이 나타난 거예요. ‘그러나, 이제는그 감독이 나타나서, 절름발이를, 다리 하나 만들어주고, 외팔이를 팔 하나를 껴서 붙여주고, 이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상태예요. 그런데 그 감독을 믿자, 승리를 하는 거라니까요.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아담 무리들은, 다 좀비 맞아요. 그게 죽은 흙이에요. ‘없음입니다. 그래서 다 지옥에 가야 맞아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대반전의 현실을 만들어내신 거예요. ‘그러나, 그러나!’ 그렇게 다 죽어야 마땅하지만, 그 중에 어떤 자들을 위해 대안을 마련해 놓았다는 거예요. 그게 21절에 기록이 되어 있는 거예요. 율법과 예언서! 구약 성경에서 이미 증거 되었던 하느님의 약속, ()’예요. 예수!

그 하느님이 한 의()율법 외에의 것이에요. ‘율법 외에!’ 율법을 부정해 버리고 나타난, 하느님의 다른 의()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율법이 완전히 폐기가 되었다는 게 아녜요. 율법은, 예수라는 목적지로 향하게 만들어 주는, 몽학선생으로 주어진 거예요. 따라서 인간이 율법을 통하여 배워야 했던 건, 말씀을 통하여 배워야 했던 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必然性)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그 율법을, 자기 치장의 도구로 끌어당긴 거죠. 그래 지켜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여줄게!’로 끌어당긴 거요. 그걸 지켜서, 자신의 명성과 자격과 평판과 가치를 챙겨보겠다고 나선 거죠. 그렇게 율법으로는, 인간은 죄인이며, 하느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배워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이, 인간 치장과 역사 성숙의 도구로 사용되어지자, 하느님은 진짜 그 율법의 원형이신 진짜 예수를 직접 내려 보내버리신 거예요.

성경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느님의 ()’라고 기록하고 있는 거예요. 로마서에서도 나와요. 율법이 나쁜 거 아니란 말이에요. 너희들이 오해하고 있는 그 율법의 원형이 여기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하느님의 ()’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로로 하여, 그 대상에게 입혀지게 된다, 그래요. , 율법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거였군요.’ 하면 끝이에요. 그게 22절이에요.

그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게 되는 하느님의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거기 때문에, 인간들의 성숙의 정도나, 깊이 등에 상관없이, ‘차별이 없느니라!’의 모습으로 주어진다 말이에요. 이게 22절이에요. ‘차별이 없느니라!’

성숙의 정도에 따라 하느님이 칭찬하는 강도가 달라진다면, 차별이 없으면 안 돼요. 차별이 있어야 돼요. 그런 업적과 공로와 성숙의 정도에 따라, 차별 있게 주어지는 걸, ‘()’이라고 하고, 차별 없이 하느님이 그냥 선물로 주근 걸 은혜(恩惠)’라고 하는 거예요. 구원이라고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도 상, , 하실 거예요, 계속? 성경은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는데, 차별을 두어서, 나를 인정해 달라는 거 아녜요, 이 인간들이 지금?

 

(로마서 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24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그래요. 그 말은 모든 자들이, 하느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도 될 수 없는 상태였음을 말해 주고 있는 거예요. 계속 현재진행이에요. 지금 이거요! 그렇게 자신의 영광과 가치를 챙기기 위해서, 하느님의 은혜로부터 떠나 있는 상태! 고게 죄예요.

그 상태에서는, 하느님의 그 생명력! ‘루와흐!’ 즉 성령이 떠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이 일부러, ‘루와흐,’ ‘생기,’ 성령이, 하느님의 영이, 떠났다는 표현들을 하는 거예요. 하느님의 영이 어떻게 누구에게 떠나고, 말고 해요? 모든 건 다, 하느님의 장중(掌中)에 있는데, 우리 때문에, 우리의 이해의 한계 때문에, 그렇게 설명을 해주는 거란 말이에요.

성령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게 아녜요. 모든 건 다 성령의 장중에 있는 거예요. 그게 라하프예요. ‘운행하다!’ 그렇게 하느님의 생명력! 성령이 떠나 있는 상태에서는,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죠.

 

하느님이 떠나버렸어요 눈과 귀를 막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을 못 알아 봐요. 그래서 말씀을 던져도, 예수로 못 알아보는 거란 말입니다. 그걸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라는 거예요. ‘영광이 뭐라 그랬어요? 하느님의 것, 하늘의 것이, ‘가시적인 것으로 드러나 있는 상태를, 영광이라잖아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자기 주체가 되어 살게 되면, 내가 주체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못 보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느님의 영광은 늘 항존(恒存)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느님의 자리에서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가서, 하느님의 생명력을 받는 걸, 자존심 상해하며 거부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성품과 능력과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 내가 하느님이니까. 이걸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무리에게 구속(救贖)의 은혜가 임해요. 구속이라는 건, 노예로, 포로로 잡혀 있는 무력자(無力者), (노예와 종의 모습) 자유롭게 풀어내기 위해, 어떤 이가 그 몸값을 정확하게 지불하고, 그 묶임의 자리에서 풀어내는 걸 이야기해요.

 

불교의 방생(放生)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빨라요. 이미 포로로 잡혀 있는, 죽어야 할 물고기들을, 돈을 주고 사서, 강과 바다에 풀어주는 걸, 방생이라 그러죠? 그런 거예요. 그 때 물고기나 거북이가 그들의 자격과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가, 선택을 받는 건가요? 방생할 때 찾아다녀요? 좀 더 튼실한 물고기, 성실한 거북이, 이런 거? 그냥 멍하니 있는데 누군가 사서 풀어주는 걸, 방생이라 그래요. 그걸 구속(救贖)이라 그래요.

그들이 다시 바다로 돌아가서, 열심히 헤엄을 치면서도, 그들에게 임()한 구원(救援)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요. ‘이거 어떻게 된 거지?’ 이렇게 된다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여기를 지금 다시 들어와 헤엄치고 있지? 누가? ? 무엇 때문에, 나를 구원해 줬지? 옆에 있는 철수 거북이는 왜 그냥 놔둔 거야? 이런 거!

도대체 자신은 어떤 자격이 있어서, 그러한 혜택을 받게 된 것인지, 오랜 시간 고민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살게 되는 걸, 신앙생활(信仰生活)이라 그래요. 난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훌륭한 거북이, 성실한 거북이, 착한 거북이가 되고야 말리라가 신앙생활이 아니라, 도대체 누가, , 이런 나를 구원해준 걸 알아 가는 과정을 신앙생활이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하고 공부하고 찾아봐도 답이 없어요. 몰라요. 결국 찾게 되는 답은, 하느님의 은혜로, 값없이 풀려난 거라는, 아주 궁색해 보이는 답뿐이에요. 그러나 그게 정답이에요. 풀려나긴 풀려났는데, 그게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은혜로 풀려난 거예요. 은혜! ’카리스라는 것은, 받을 자격도 없고, 갚을 능력도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게 카리스예요.

갚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는 건, ‘거래라 그래요. 갚을 능력이 있는 자에게 주는 건, 거래라고 한다니까요. 은혜라고 안 그래요. 카리스는 갚을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주는 걸, ‘카리스, 은혜라고 해요. 은혜라는 말 자체가, 그 수혜자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확증해버리는 단어예요. 반면에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걸, 뭐라 그런다? ()~! 성경은 우리의 구원과 영화(靈化)까지, 전부 하느님의 은혜로 성취가 되는 거라 그래요.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영화까지 은혜란 말예요.

우리는 영화로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당도해서도, 여전히 신랑의 은혜만을 찬송하게 되는 거예요. 영화까지 다 은혜로 주어진 거니까, 그 은혜만을 찬송한다는 건, 끝까지의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수긍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 앞에서 상을 요구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자일까요? 구원에서 영화까지의 그 과정에서, 어떤 지점에서든,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획득했다는, 자신감이 있는 사람만, 상을 요구할 수 있어요.

그들이 진짜, 은혜라는 단어를 이해한 사람일까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 나는 이제 성화가 너무 진전이 되어서, 죄를 짓는 게, 죄를 안 짓는 거보다 더 힘들어!’ 이 사람이 진짜 은혜를 아는 사람일까요? 아니, 난 그 사람이, 죄가 진짜 뭔지 아는 사람인지 한 번 물어보고 싶어요. 그 사람은 죄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개혁주의의 수장(首長)이었으니, 말 다했죠.

25절로 가면, 그 은혜의 구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값없이 주어지는 그 의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어려워요.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로마서 3:25) 25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 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굉장히 해석하기가 까다로운 구절이에요. 바울로는 24절에서,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구속이, 앤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라 그랬어요. 무조건! 값없이! 은혜로 주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앤 크리스토!’

그리고는 25절에서, 어떠한 모양으로, 그 하느님의 구속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표피적으로 보면, 상당히 오해(誤解)의 소지가 있어요.

잘 보면 24절과 25절이 상충이 되는 것 같아요. 모순이 되는 것 같아요. 하느님께서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셨고, 아담들 중 누군가가 그것을 믿어주면, 그걸 믿어주는 그 사람의 믿음으로, 그 구속이 성취되는 것처럼 보이죠? 25절을 보면. 그건 곧 구원의 주도권이 인간 측에 있다는 말과 같은 거요. 인간 측의 믿음에 의해서, 하느님의 구속 사역의 성패(成敗)가 달려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24절과 25절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된다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성경 번역본들을, 독일어 성경까지 포함해서, 열두 권을 펴 놓고 샅샅이 뒤져 봤는데, 거기에 대해서 명쾌하게 번역을 해 놓은 성경이 없어요. 킹 제임스 버전이, 조금 원어에 맞게 번역이 되어 있는 듯싶은데, 그것도 좀 명쾌하지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원어 성경을 펴놓고 파싱을 해 보았는데요, 25절을 좀 더 풀어서 파싱을 해 보면 이래요.

 

먼저 제물로 번역이 된 단어, ‘휠라스테리온, 법궤 위에 씌운 시은좌(施恩座), 멀시씨트(mercy seat), 속죄소! 성경에 딱 두 번 나오는 단어예요. 히브리서에서 속죄소라고 번역이 된 그 단어! 이게 제물로 번역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 단어는 속죄소, mercy seat이에요. 그리고 내주셨다라고 번역이 된, ‘프로티테미야라는 단어는, ‘set before’예요. ‘~앞에 세우다, 막다, ~앞을 가로막아 버리다, 세우다.’ 성경은 그걸 제물로 내주셨다,’ 그러니까 제물로 바쳐졌다.’ 이런 의미로 번역을 해 놓은 거예요.

 

그걸 지성소의 구조와, 법궤와, 시은좌의 형태와, 기능과 역할을 참고하여, 직역을 한 번 해 보자고요. 하느님께서 이 예수를 시은좌(mercy seat), 법궤 앞에 세우셨다. 시은좌는 법궤 뚜껑 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피가 뿌려지는 그 곳. 법궤 전체가 시은좌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건, 예수의 피 안에서 성취된,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예요. 직역을 하면! 아직도 조금 헷갈리죠?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단어 앞에 쓰인 전치사가, ‘리아예요. ‘리아‘~에 의해서라는 의미이고, ‘앞에 쓰인 전치사는 이고, ‘앤 크리스토에서 쓰인 그 단어! ‘~안에서, 그 안에서 성취된이란 뜻까지 있어요. ‘앤 크리스토,’ ‘앤 블러드.’

그러니까 이런 그림이에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가 일어나는 유일한 장소인, 시은좌 앞에 ‘set before’, ‘세우셨어요, 두셨어요.’ 그 시은좌 앞에, 예수를! 그건 그 시은죄 밑에, 인간들의 불가능함과, 추악함과 무력함이 예수에 의해서 가려졌다는 거요. 하느님과 그 추악함 사이에 예수가 서서, 그걸 가렸단 뜻이에요. ‘set before!’ 그 말은, 다른 말로, 예수의 피가, 그 시은좌를 덮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인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거기에서 나타난, ‘예수의 믿음에 의해, 그 일이 성취가 되었다.’예요. 여기서의 믿음은, 성도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이에요.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 일을 벌이신 이유를, 25절 후반부에서 설명을 하는데,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 주심으로 그냥 지나가심 파레시스이게 과월절의 패스오버(pass over), 그냥 간과하심으로, 그 분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예수의 믿음! 그의 피 안에서 성취된 예수의 믿음에 의해, 속죄소(贖罪所)! 인간들의 죄를 가리게 거기다 하느님이 세우셨다는 뜻이에요.

성경에서, ‘()’ ‘디카이오수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그 관계가 요구하는 걸, 서로가 성실하고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상태를 (), 디카이오수네라 한다, 그랬죠? 그러니까 이 모든 걸 바탕으로, 25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돼요.

하느님은 당신의 ()!’ ‘신실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내가 내 열심으로 너희의 구원! 하느님나라를 이루어내는 거야.’ 요걸 나타내기 위해서, 당신 백성들의 죄를, ‘그냥 지나치시는, 간과, 파레시스, 과월절, pass over!’ 그냥 지나치시는, 값없는 구속을 계획하셨는데!

보세요. 창세기부터 출애굽기가 다 들어가 있잖아요? 일관성(一貫性) 있게, 이 안에 다 들어가 있다 말이에요. 값없는 구속을 계획하셨는데, 그 값없는 은혜의 구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그 예수가 피를 흘렸잖아요? 그 피 안에 나타난 예수의 믿음을 통하여 성취가 되었다. 그 모습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면, 그 예수의 믿음에 의해서, 그 피 안에서, 예수의 믿음이 성취가 되었는데, 어떻게 그게 밖으로 나타났는가 하면, 인간들의 죄가 다 들어가 있는, 그 법궤 위에 예수의 피가 ‘set before, 놓이는모습으로 나타났다는 뜻이에요.

 

이렇게 머릿속에 그려보면 됩니다. 법궤 안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두 번째 십계명 돌 판과,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었어요. 그게 다 뭘 의미하는 거죠? 하느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의 죄를 상징하는 거예요. 율법주의! 인본주의!

이스라엘은 만나를 보면서, 하늘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했어요.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하늘의 양식. 그래야 안식에 들어가요. 그런데 오히려 세상의 떡인 야채와 마늘과 고기와 비교하면서, 예수를 모독(冒瀆)했습니다. 십계명 돌 판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예수를 보아야 했는데, 율법을 자기 치장의 도구로 사용했어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어때요?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렇게 마른 막대기 같이 죽어 있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능력이 임하여, 하느님의 능력으로 싹이 나게 하는, 그런 전적인 하느님의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모세, 너 자격 있어? 아론, 너 자격 있어?’ 인간의 자격을 논했단 말이에요. 그때 하느님이 그들을 싹 죽여 버리고, 구원은 이런 거야. 출애굽의 현실은 이런 거야를 보여 준 게, 아론의 싹 난 지팡이예요.

마른 지팡이에서 어떻게 싹이 납니까? 말리 비틀어진 나무에서?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렇게 말라비틀어진 저주의 나무 십자가에서, 교회! 생명이 탄생한다는 구원의 현실을 드러낸 게, 바로 아론의 싹 난 지팡이예요. 전부가 다 예수를 상징하고 있었는데, 인간들이 못 알아먹은 거죠?

은혜를 못 알아먹은 인간들의 죄를, 예수가 ‘set before,’ 앞에 가리고 서 버리는 거죠. 그래서 제물의 피를 시은좌에 뿌리는 거란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25절이란 말이에요. 고 법궤 뚜껑! 그 뚜껑이 덮고 있는 거니까, 고게 시은좌이거든요. 그리고는 26절이 이렇게 이어져요.

 

(로마서 3:26) 26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의로우심! 그러니까 하느님 측에서의 열심과 노력으로, 당신 백성들에게 줄 를 만들어내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 예수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져요.

보세요, 25절에서는, 자신의 피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해내시는 예수의 믿음이 등장하고, 26절에서는 그러한 예수의 믿음에 의해 성취된, 하느님의 를 믿는 믿음! 즉 성도의 믿음이 등장해요. 두 가지 믿음이 등장하는 거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25, 26절에, 두 종류의 믿음이 나와요. 그렇다면 먼저 예수의 믿음이라는 게 뭔지 한 번 생각해 보자고요.

그 첫 번째 믿음은, 하느님 아버지의 믿음이고, 그걸 굳이 이름 붙이자면, ‘객관적 믿음!’ 이렇게 붙이잔 말이에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믿음을 발휘하셔서, ‘아버지는 너 믿는다!’라는 이 믿음이에요. ‘너 믿어!’ 아버지의 계획과 뜻과 희망이 담긴 거예요.

믿음! ‘너 믿어!’ 믿음을 발휘하셔서, 기필코 당신의 언약의 성취해 내고야 마시는 이야기의 그 예로 아브라함을 들었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음을 받는 건, 아브라함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탁월(卓越)해서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게 어떻게 한 인간에게 일을 시작해서, 주관적인 믿음을 격발(擊發)해내는 가를 보여주는, 아주 선명한 이기 때문에, 그가 믿음의 조상이에요.

 

히브리서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기술하는 건, 아브라함의 믿음을 먼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랬지요. 멍하니 우상 팔아먹으면서, 호의호식하고 잘 살고 있었어요. 하느님의 믿음이, ‘아버지는 너 믿어라는 믿음이, ‘모리아 산에 분명히 세울 거야라는 이 믿음이,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밀어낸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주어는, 믿음이에요. ‘믿음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누구의 믿음이에요? 일차적으로 아버지의 믿음이란 말이에요. 아버지의 믿음! 그래서 하느님의 믿음이 어떤 대상에게 부어지게 되잖아요? 그러면 그 대상에게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밀려난 것처럼, 반드시 부어진 믿음에 의한, ’이끌림의 흔적이 나오게 되는데, 이걸 행함이라 그래요.

야고보가 말한 그 행함이 바로 그 행함인 거예요. ’착하게 잘 살아! 거짓말 하지 마!‘ 이런 게 아니라. 믿음이 누군가에게 부어지게 되면, 그 객관적 믿음이 그를 끌고 가는 흔적이 생기게 되는데, 요걸 행함이라 그래요. 그래서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 했을 때, 그 행함이 바로 하느님의 믿음에 의해 격발이 되는 대상의 삶을, 가리키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주관적 믿음은, 산대마니아니즘(?)식의 지식의 습득이나, 고백 정도가 아니라, 삶 전체를 장악(掌握)당하여, 끌려 나가는 자에게서 터져 나오는, 삶의 흔적, 몸부림, 전체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래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에요.

 

믿음이란 단어 자체가, 특정한 진술이,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정도로 정의될 수 있는 단어가 아녜요. '믿는다'라는 단어는, 원래 사람이나 신 등의, 눈에 보이는 어떤 대상을, 직접 목적어로 취하는 단어예요.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는 ~를 믿습니다.’라고 할 때, 고백하는 사람은, 고백하는 대상을 믿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믿음이라는 게 생겼을 때, 그 두 대상 사이의 관계 속에서, 어떤 흔적들이 생기게 돼요. 그걸 행함이라 그래요. 그런데 믿는다는 게 정확하게 뭐냐 말예요? 믿는다는 게! 영어로 믿는다는 단어인, ‘believe’‘belove(?)’에서 나온 단어예요. ‘go belove’의 뜻은 친근히 하다 이런 뜻이에요. 거기에서 'beloved'가 나온 거죠. ‘사랑하는, 아주 가장 사랑하는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믿는다는 건, 어떤 사람의 신임(信任)이나, 신뢰(信賴)를 넘어서, 더 근본적으로는, 그를 사랑하는 거요. 그게 원래 believe의 의미예요.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건, 곧 그분에 대한 어떠어떠한 진술이 참이라는 사실을 믿는 게 아니라! 요 지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우리교회에 너무 많단 말이에요. 많이 배우서, 대가리는 그냥 짱구처럼 큰데, 하체가 부실해! 믿음은, 그런 지식의 습득이나 고백 정도가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걸 로마서 5장에서 화목(和睦)’이란 단어로 바꿔 쓴 거예요.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을 믿는다.’라고 하는 건,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 안에 뜻과 계획을 두고, 그를 당신의 희망지점으로 끌고 가는 거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그게 ‘believe’예요. 그게 믿는다.’는 거예요.

 

라틴어로 나는 믿는다크레도(credo)’. 그래서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경, 신조를 크레도(credo)한다 그랬습니다. 나는 믿는다.’ 이 단어가 원래, ‘심장을 내어주다란 뜻이에요. 내가 누구를 믿는다는 건, 그가 그 상대방을 향해 심장을 내어주는 상태를 믿는다라 그래요.

그런데 여러분이 진짜 믿음이 있냐고요? 거짓말들 하지 마세요. 무슨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위해서, 여러분의 심장을 내줘요? 믿음은 여러분에게 사유(私有)되는 게 아녜요. 하느님의 믿음이 여러분을 장악할 때, 여러분이 믿는 자로 끌려가는 거예요. 모리아 산까지 자식의 심장에 칼을 꼽는 자리까지, 그 자리가 내 심장에 칼을 꽂는 자리란 말이에요. 그걸 믿음이라 그래요.

그 전체 과정을 믿음이라 하는 건, 각각의 자리를 잘랐을 때,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이 전체를 통하여, 그가 도달할 목적지, 그게 확실하기 때문에, 믿음이라 하는 거지, 그 과정 속에 있는 자가, 어떻게 성숙 되어서, 하느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말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자기의 심장을 떼어 주는 거예요. 그렇게 나를 위해 심장을 내어준, 그 신랑을 믿는 거예요. 그 때 난 아무것도 아니네!’라고 나의 옛 사람의 심장이 죽잖아요? 이걸 믿음이라 그래요. 이게 믿음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우린 아직 그렇게 안 됐잖아요? 지금? 뭘 우리가 예수를 위해 심장을 꺼내요?

나의 명성과, 후대에 길이 남을 이름과, 이런 걸 위해서는, 심장을 꺼낼 수는 있는데, 예수를 위해 내가 무슨 심장을 꺼내느냐고요? 보이지도 않는 예수를 위해서! 그런데 나에게 무슨 믿음이 있냐 말예요. 그런데 중요한 건, 하느님이 그 자리로 끌고 간다는 겁니다. ‘너는 나 없으면 죽어이거 가르쳐서,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어!’ 그렇게 되려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그 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 분이 먼저 믿어주고, 사랑해주고, 이 사실을 알아야,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함부로 나는 믿음이 있다, 없다.’ 이런 소리 하지 말란 말이에요. 누구 믿음이 크고, 누구 믿음이 작고, 믿음은 한 믿음이라고 그러잖아요? 바울로도! 대충 국어사전의 개념을 머리에 두고서, ‘그래 난 믿는 거야, 믿는 걸 거야, 믿어야 돼!’ 개뿔이나? 우리가 뭘 믿어요. 그걸 믿는 거라 그래요? ‘자기 최면(催眠)’이라 그러지.

 

하늘 신랑이신 예수가, 사망에 갇힌 나를 위해서,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신 걸 명확하게 깨달아 알아서, 그 분을 사랑하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까치가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장님이 된 사실을 알자, 엄지가 놀라서 정신병자가 되는 거요. 까치에게 미쳐버리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날 사랑했단 말이야?’ 이걸 알아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내가 뭔데, 나는 내 행복을 위해서, 마동탁 위해, 까치에게 게임을 져달라고 한 그런 존재인데’, 까치는 그걸 받아들여서 눈알을 빼 주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쳐버리는 겁니다. 그 사랑 앞에서! 그러나 나중에 정신병원에서 마주하잖아요? 이거 만화 얘기를 해도 소통이 안 되고. (하하하)

 

그렇게 나는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우리 신랑이 먼저 고백을 하신 후에, 진짜 자신의 심장을 꺼내서, 우리에게 줬어요. 우리는, 왜 우리 신랑이, 우리 같은 것을 위해서, 자신의 심장을 꺼낼 수밖에 없었는지를, 우리의 죽은 행실과, 좀비 노릇을 통해서, 통렬히 자각해야 하고, ‘, 그래서 예수의 심장이, 내 심장에 와서 교체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구나!’ 요렇게 자각을 해야 돼요.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우리 신랑이,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어, 우리를 살리셨다는 그 과분하고, 지고(至高)한 사랑과 믿음 앞에서 허물어지는 것! 이걸 자기부인이라 하고, 이 상태를 믿음이라 그러는 거예요.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나도 내 신랑을 위해서, 심장도 아끼지 않는 그런 신부가 되고 싶다는, 거룩한 염원(念願)을 하게 되어지는 거예요. 점차, 점차.

그런데 잘 안 되잖아요? 신랑을 위해서, 심장을 꺼내놓기는커녕! 여전히, 날 위해 심장을 빼준, 그 말라비틀어진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 십자가 앞에 가서, 자기의 결핍(缺乏)과 부족분만을 내어 놓고, ‘당신 신랑노릇 이렇게 할 거야?’ 따지는 게 우리 아닙니까? 심장 빼낸, 그 예수의 십자가 앞에 가서, ‘당신 신랑 노릇 이렇게 밖에 못해!’ 이게 단식기도, 백일기도(대입 수험생을 위한), 신자들의 기도(미사 때) 아닙니까?

우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십자가의 필연성을 굳게 붙들게 되는 거고, 결국에는, ‘라는 가짜 신을 죽여 버리고, 하늘 신랑에게 온전히 순종하며, 심장까지도 마다 않고 내어드릴 수 있는, 새 신부로 만들어 내신다는, 그 주님의 약속을, 찬송하게 되는 거예요.

안 되는데, 그 분이 만들어 내신 댄다.’ 이렇게! 그러한 일들이 반복(反復)이 되면서, 우리는 나만을 위해 뛰던 심장을, 이 악마(惡魔) 같은 나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신, 주님의 심장으로, 점차 옮겨내는, 진짜 성숙을 이뤄가게 되는 겁니다. 그게 옛 자아의 죽음이고, 자기 부인!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 하는 거요. 내 심장은, 이렇게 나를 위해 뛰면 안 된다는 걸 인정(認定)하는 거예요. 내 심장이 나를 위해 뛸 때, 그 뜀 자체가 죄()예요. 그걸 아는 걸, 신앙생활(信仰生活)이라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이 심장의 요동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버리는 거요. 그걸 믿음이라 한다, 그랬어요. 그 길로 끌려가는 거요. 그걸 화목(和睦)이라고 하는 거고, 그렇게 하느님과 신랑과 화목한 자는, 형제와 불화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의 예배만, 하느님이 받으신다가, 산상수훈 5장의 살인하지 말라!’의 내러티브란 말이에요.

 

(로마서 3:27-28) 27 그러니 우리가 내세울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되찾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28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보세요. 율법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로 ()’에 이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고, 하나님의 믿음! 즉 하나님의 심장 내어주심에 의해서, 우리에게 거저 선물로 내어주신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 도구라는 거요. 그걸 인정할 때, ‘난 죄인 중에 죄인 맞습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는 한 순간도, 산 자일 수가 없습니다.’라는 자기 부인의 고백을 하게 되는 거고, 그렇게 옛 자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옛 자아의 죽음의 현장이, 주께 심장을 드리는 현장이 되는 거고, 그걸 성도의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본문에서만 믿음이란 단어를 수십 번 쓰고 있는 거예요. 믿음! 믿음! 믿음! 본문 30절을 보세요.

 

(로마서 3:30) 30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어서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나 다 같이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해 주십니다.

 

이게 3장의 결론이에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나 다! 바울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러한 믿음과, 하느님의 에 관한 이야기를,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해요.

 

(갈라디아서 3:5-9) 5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여러분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까? 6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도 믿기만 하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성서는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만백성이 복을 받으리라' 는 복음을 미리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9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는데,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죠? 믿음의 조상이니까! 그럼 아브라함이 간 그 길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가야 믿음의 후손이죠? 그 이야기를 바울로가 지금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뭘 어떻게 믿어서 의롭다함을 받게 된 겁니까? 이 이야기가 창세가 15장이죠?

 

(창세기15:5-6) 5 그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 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단수)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6 그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시어,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왕과, 내가 너의 상급이다, 내가 왕이야!’ 왕과 이 땅을 너에게 주겠다. 땅과 후손을 약속했어요. 너의 백성! 이게 국가의 3요소입니다. 국민, 주권, 영토. 나라를 지금 약속하죠. 하느님나라를!

창세기 15장은!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래요. 뭘 믿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그 뒤로도, 하느님 말씀 믿지 못하고, 바로 그 뒤에서,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아요.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사악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도, 사라와 함께 비웃습니다. 이거 믿은 거예요, 이게?

그런데 15장에서는 믿었다 그런다니까요. 그리고 의롭다고 도장을 찍어 놓고 시작하는 거예요. 심지어 자기 아내 사래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또 다시 팔아먹어요. 그 때는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인데! 심지어 모리아 산에서 그 위대한 경험을 하고도, 또 첩을 들여서 다른 자식들을 낳아요. 그러면 그가 뭘 믿었다는 거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어떤 면을 보고,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는 거예요?

6절에서 믿다라는 동사가 웨헤멘인데요. 이게 와우 계속형이예요. 히브리어에는 그런 게 있는데, 그건 아브라함의 믿음이 지속적(持續的)이었다는 뜻이에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도대체 아브라함이 언제 믿었어요? 그런데 와우 계속형을 써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걸로 표현하고 있어요. 성경이!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겠어요? 아브라함을 지속적으로 장악(掌握)하여 따라오고 있는, ‘하느님의 믿음을 말하는 거예요. 하느님의 믿음이, 아브라함을 지속적으로 장악하고 있기에, 그는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의인으로 여겨지는거예요.

여기서 여기시어라고 그러죠? 요 단어가 중요한 단어예요. 하샤브란 단어는, 실제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는 안 그런데, 그렇게 쳐주는 거예요. 이게 하샤브예요.

그러니까 믿은 것도 아니고, 의롭지도 않은데, 하느님이 그렇게 쳐준 거예요. ? 하느님의 믿음이, 이미 장악하고 있기에, 그가 믿음의 길에 들어서서, 믿음의 완료지점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그가 야훼를 믿으니.’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 여러분의 인생인 거예요.

하느님의 믿음이 빠지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빠지면, 그 즉시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뭐 해 놓고, 그걸 내 것으로 사유화(私有化)해서, 상을 달라는 게 말이 되냐고요? 언제든지 지옥에 갈 수 있는 인간들이.

자 그러니까 이 여기시다, 하샤브란 단어 하나만 보더라도, 창세가 156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일차적으로, 아브라함에 의해 생산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믿음이라는 게 자명해지는 거예요. 여기에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게 된 믿음은, 아브라함을 장악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셨던, 밀어내셨던, 하느님의 믿음인 거란 말이에요.

그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끌어내고 있는 중이란 말이에요. 정작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리아 산에서, 그 때, 자식의 심장에, 자기의 심장에 칼을 꽂는 것으로, 완료의 모형으로 한 번 보여지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 전에는 아브라함이 믿지 않았어요. 하느님의 믿음이 끌고 간 거란 말이에요. 잘 이해하세요.

그런데 창세기 15장에서, 벌써 하느님이 아브라함이 믿었다라고, 믿음 운운 하신다 말입니다. 그게 여러분이에요. ‘여겨주시는 거예요. ‘하샤브란 말입니다. 그 하느님의 믿음이, 어떻게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모리아 산에서의 믿음을, 격발해내는지 보세요. 그래야 여러분의 인생이 이해가 간단 말입니다.

 

(창세기 15:13-16) 13 야훼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똑똑히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 되어 얹혀 살며 사백 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 14 그러나, 네 자손을 부리던 민족을 나는 심판하리라. 그런 다음, 네 자손에게 많은 재물을 들려 거기에서 나오게 하리라. 15 그러나 너는 네 명대로 살다가 고이 세상을 떠나 안장 될 것이다 16 네 자손은 아모리족의 죄가 찰 만큼 찬 다음, 사 대만에야 돌아 오게 될 것이다.'

 

땅과 자손을 그냥 덥석 주는 게 아니라, 애굽에 노예로, 그의 자손을 400년 동안 보내서, 종살이를 시킨 다음에, 다시 그 땅! 지금 가나안 땅에서 약속이 주어지는 거예요. ‘이 땅으로 끌어 들이겠다!’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서, 노예로 보냈다가, 다시 그 땅으로 들여보내는 거예요. 약속이, 언약이 이렇게 성취가 된다, 그래요.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요 자손이, 복수가 아니라, 단수라 그러죠? 그 자손은 누구다? 예수 그리스도죠?

 

(갈라디아서 3:16) 16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실 때에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후손들에게' 라는 말 대신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네 후손에게' 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한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 아는 거지만, 여러분이 좀 잘 명확하게, 가슴에 새기라고 읽어드리는 거예요. 그 자손이 그리스도죠? 그러면 400년 동안, 애굽으로 종살이를 시키러 누구를 보내겠다는 뜻이에요? 예수를 보내겠다는 뜻이에요. 그게 이 역사의 실체(實體)란 말이에요, 그것이. 그 예수가 그 길을 갈 건데, 그 안에서 구원 받는 하느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 믿음의 후손은 다 그 길을 가게 될 것이다를 설명하는 거예요.

예수를 보내겠다, 내가 이 땅으로. 노예가 되어 있는, 이 죽음의 땅으로, 내 아들을 보내겠다.’라는 그 약속을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서, 내 아들이 가자마자, 거기에서, 내 백성을 꽁꽁 언약으로, 약속으로 묶어서 거기서 끄집어낼 거야. 그래서 모세에게 속()하여예요. ‘묶어서란 뜻이에요. ‘속하여. 묶을 속().

그렇게 하느님의 자손,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애굽의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가, 승리의 전리품을 갖고, 하느님나라로 복귀(復歸)하시는 그 메시야의 이야기! 이걸 지금 창세기 15장이 이야기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 삶을 이스라엘이라는 하느님나라 백성의 모형이, 그대로 이 땅에서 살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니까 당연히 그 삶을 살아야죠? 창세기 15장의 언약을 들으면서, 아브라함이 딱 떠올렸던 사건이 어디 일까요? 창세기 12! 배고파서! 기근이 일어나서! 흉년이 와서! 애굽으로, 가나안에서 날름 내려갔다가 신부 뺏기고, 결국 하느님이 신부 찾아줘서,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온 그 이야기를, 정확하게 떠 올렸을 거 아닙니까?

내가 그 삶을 살았는데, 내 후손이 그 삶을 똑같이 산단 말이야?’ 그런데 그 후손은 예수래요. ‘, 예수가 살 그 삶을 내가 산거고, 그리고 내 후손들! 믿음의 후손들! 하느님의 백성들이 똑같이 그 삶을 살겠구나.’를 아브라함이 안 거예요. 그걸 알아먹는 걸 믿음이라 그런다니까요.

똑같죠?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뭐예요? 야곱의 식솔 70, 75. 뭐든 괜찮아요. 하나는 여자를 센 것이고, 하나는 여자를 안 센 거니까. 왜 들어갔어요? 7년 흉년 때문에! 아브라함과 똑같이, 배고파서 들어간 거요. 아니면 굶어 죽으니까.

거기서 종! 이스라엘 백성을 뺏긴 거죠. 신부를 뺏긴 거예요. 아브라함이 사라! 신부를 뺏긴 거예요. 하느님이 신부를 마귀에게 준 거예요. 이 역사예요. 이게! 그런데 그 하느님이 보내신 어떤 이가 와서, 자기의 능력을 하나도 발휘하지 못하고, 빈 그릇이 되어, 하느님의 도움으로, 신부를 찾아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게, 이게 역사이며, 구속사(救贖史)의 실체란 말입니다. 그거 알아먹고 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애굽으로 들어가세요. 마태복음2장에서 그걸 뭐라 그래요? 호세아서를 인용해서, '내가 내 아들을 에집트에서 불러 내었다' 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2,15) 하면서 애굽으로 보내셨다가 빼죠? 변화산 상에서, 모세, 엘리야, 예수님이 뭐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죠? 예수님의 별세(別世)! 이게 뭐예요? 디파쳐(Departure)? 헬라어로? 엑소더스예요. 그건 출애굽!예수님이 지금 애굽에 들어가신 이야기를 성경이 계속해서 하고 있는 거예요.

애굽에 들어와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요? 자기 신부를 꼭꼭 약속으로 묶어서, 하느님이 당신 끌어 올릴 때, 죽 끌고 올라가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울로서신서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디파쳐(Departure), 엑서더스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신부를 구하러 오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볼품이 없어요. 아브라함이 애굽 왕 파라오 앞에서 벌벌 떨면서 거짓말하는 그런 존재! 나이 많은 노인이에요.

모세? 여든 살이야! 말 어눌해, 예수님? 이사야서 53장을 보면 알잖아요? 뭐냐 말예요? 백마 타고, 철장 들고 안 오고 왜 이런 모습으로 와요? 중보자들이 왜 이런 모습으로 옵니까? 중보자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오기 때문에 그래요. 보세요. 하느님의 신부는, 끌려가서 노예 노릇 하는 거 밖에 없어요.

거기에서, 그가 뭐 자기를 계발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라, 끌려가서 묶여 있는 거예요. 이게 신부들이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신랑이 건져 가는 거거든요? 그런데 신랑이, 도대체 이 신부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또 어떠한 능력에 의해 구원받는 가를, 설명해내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오기 때문에, 자기 힘을 하나라도 쓰면 안 돼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 왔다 그러고, 하느님이 시킨 일만 했다 그러고, 하느님이 시킨 말만 했다 그러는 거예요. 뭐예요? 바보예요? 그래야 하느님이 살려내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는 존재로 와야, 그 일이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신부들아! 너희들이 바로 그런 방법으로 구원받는 거야를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중보자 자신이 그런 무력(無力)한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하느님 중심 신앙과, 인간 중심 신앙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처럼 달라요.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전쟁들을 잘 보면, 다 그 전쟁이 하느님의 전쟁일 때는, 다 공격자들이 보잘 것 없어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래를 건져올 때도 그런 무력한 모습이었지만,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성경이 기록한 조카 롯을 구해올 때도, 5개국 연합군을 쫓아가는 318명으로 드러나죠.

 

여러분, 5개국 연합군은 아시리아, 바벨론, 소돔, 고모라, 다니엘서에 나오는, 그 금 신상에 나오는, 하느님나라와 반대되는 세상 힘을 상징하는 나라들이 그 안에 다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집에서 호미 들고, 작대기 들고, 농사나 짓던, 가솔 318명이, 5개국 연합군을 쫓아가서 어떻게 이겨요?

기드온 300용사도 마찬가지예요. 185천 아시리아! 세계 최강의 군대인데, 300명이 횃불 들고, 꽹과리 들고, 어떻게 이기느냐고요? 아니 이 세상 어떤 존재도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골리앗 앞에, 어떻게 물맷돌 5개를 든 소년이 가냐고요? 그런데, 이 전쟁들이 전부 하느님의 전쟁이라 그래요. 성경은요! 왜 그런 모습이 드러나느냐 하면, 이 전쟁은, 전쟁을 치르는 그 인간에게, 승패가 달려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하느님이 하시는 전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자랑을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을 구해서 돌아오는데, 멜기세덱이 나타나서 미안하다. 잘 했는데, 그건 다 하느님이 하신 거야!’라고 초를 쳐버리는 거예요. 하느님의 것으로 인정해버리는 것입니다. 아니 아브라함이 그걸 인정해요.

 

(창세기 14:20) 20 그대의 원수를 그대의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어라.' 아브람은 자기가 가진 것 전부에서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그 대적을 누가 붙였다 그래요? 하느님이! ‘이 전쟁은 하느님이 붙인 거야.’ 이 멜기세덱을 히브리서에서 뭐라고 하죠? 예수 그리스도라 그러잖아요? 대제사장! 예수님이 나타나더니, ‘그 전쟁은 네가 치른 게 아냐.’ 하느님의 백성이 적의 포로에서, 건져 나올 때는, 항상 이렇게 하느님 혼자 전쟁하시는 거야를, 예수가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10분의 1을 드리죠. 십일조! 십일조는 뭐냐 하면, ‘내 모든 게 다 당신 겁니다라는 고백이잖아요? 나는 당신 겁니다.’라는 고백이 십일조입니다. ‘네 맞네요. 하느님이 치른 전쟁이 맞네요.’하고 전리품을 하나도 안 갖고 다 제자리에 갖다 놓아요. 하느님의 전쟁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없어요. 유일하게 얻어먹은 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이 갖고 온 떡과 포도주! 예수님의 살과 피, 십자가! 뿐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다음 장 151절에서 '무서워하지 말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 주며, 매우 큰 상을 너에게 내리리라.' 라고 하느님이 직접 얘기해 주시는 겁니다. 신랑인 내가 네 것인데 다른 거, 뭐 원해? ‘내가 네 상급이야!’

 

(창세기 15:1)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야훼께서 환상으로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 주며, 매우 큰 상을 너에게 내리리라.'

 

이 하느님과 여러분이, 꽁꽁 묶여서 연합되어, 신랑과 신부로 영원히 사는 그 나라를 여러분이 기다려야지, 거기에서도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신랑에게는 관심도 없어, 그가 가진 능력과 재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이게 무슨 사랑이냐고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전부 그 모양이에요. 지금요. 아녜요? 아니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 프로포즈를 했어요. ‘나는 재산이 참 많습니다. 나는 능력도 있고, 명예도 있어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당신하고 그냥 같이 살지는 않을 게요. 재산, 명예 다 줄게요. 다 줄 테니까, 결혼해 주세요. 그런데 나는 딴 곳에 가서 살 테니까 그것만 이해해 주세요.’ 이거는 결혼 아니죠?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의 결혼 풍속이 요렇게 바뀌고 있대요. 너는 어디 가서 뭐 해먹고 사는 건 아무 상관없는데, 돈하고 네가 가진 명예나 배경! 그것만 나에게 줘! 나도 내 나름대로 즐기면서 살테니까. , 적어도 60대 이상, 이곳에 계신 분들은, 그게 무슨? 아무리 많은 재산을 주고 명예를 준다 해도, 어떻게 그렇게 살아? 하고 생각하겠지만, 아닌 표정인데(하하하)

점점 그래 그렇게 해! 돈만 줘! 내가 원하는 것만 줘! 그럼 결혼해 줄게.’ 요렇게 변해간다는 거요. 요게 이 악마 같은 인간들의, 종교성이라는 거예요. 신랑에게는 관심이 없어! 사랑을 안 하니까요! 그가 가진 능력과, 그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어떤 것에만 관심을 두는 거예요. 이걸 무슨 그리스도교라고 그래요?

 

여러분 정말 중요한 건, 여러분을 살리는 건, 신랑과 신랑의 약속밖에 없어요. 보이지 않죠? 약속이 뭐가 보여요? 신랑이 어떻게 보여요? 예수인데.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쓰레기처럼! 그 신랑은 말씀 속에만 들어 있어요. 그런데 이 말씀을 진짜 어떻게 취급하고 있나요? 쓰레기죠 뭐.

그런데 여러분 일본에 쓰나미가 닥쳤을 때, 그 사람들이 무엇을 타고 살아나던가요? 금덩이, 돈 가방, 그거 든 사람 다 죽었어요. 쓰레기통에 쳐 박혀 있던, 스티로폼, 통나무 이런 것을 잡은 사람, 다 살았어요.

진짜 이 마지막 때가 올 때, 이 시대가 쓰레기 취급하는 그 말씀! 약속을 붙들지 않으면 다 죽습니다. 그 외에 여러분이 살려고, 안식하려고 쌓은 놓은 거, 어떤 걸 붙들어도 다 죽습니다. 여러분의 가치, 성숙, 여러분이 쌓은 도덕, 윤리, 그거 붙들어 보세요, 사나? 약속! 말씀! 예수! 붙들어야 살아요.

여러분은 그 예수가 가신 그 길! 자기 걸 하나도 쓰지 못하고, 이 땅에서 온갖 모욕, 조롱, 멸시, 모함, 천대! 결국 그거 다 받고, 십자가에서 죽는 그 길을, 반드시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예수가 그 길 먼저 가게하고, 내 백성 그 길 가게 하겠다.’고 하느님이 약속했기 때문에, 반드시 그 길 가게 되어 있어요. 그 예수의 길을 걸어야, 진짜 성도예요.

하느님의 도성이란 책을 쓴, 아오스딩이 이런 말을 했죠. ‘솔비트레 알블란도’ ‘걸으면 해결된다란 뜻이에요. 우리는 도대체 뭐가 그리 바쁜지, 일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가끔 걸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제주도 올레 길과 지리산 둘레 길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걷다 보면요, 일상에서 벗어나면, 느리게 걸을수록 많이 보는 구나를 알게 돼요.

그런데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걸어야 할 길을 하나 주셨어요. ‘내가 곧 길이요!’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길! 여러분이 일상을 쫓아서 여러분 자신을 챙기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아무것도 못 봐요. 그래서 하느님이 예수의 길을! 그 길을 따라 여러분을 끌고 가시는 거요. 그 길 걸으라고요. 그 때 여러분이, 하늘의 묵시(默示)를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왜 이지경이야!’ 하지 말고, 그 때 걸으세요. ‘나 왜 망했어? 나 왜 이정도 밖에 안 돼지? 그 잘 나갔던 내가 이게 뭐야!’ 아무리 마누라가 구박하고 업신여겨도, ‘괜찮아!’하고 걸으세요. 그냥. ‘하느님이 이 길 걸으라고, 나에게 이 시간 허락했는데, 걷자!’ 하고 걸으세요. 자꾸 달리려고 하지 말라 말입니다. 자꾸 일상으로 들어가서!

 

성경은 분명, 우리가 그 예수라는 길, 그 길만을 쫓아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예수가 어떤 길을 갔어요? 하느님의 뜻을 그려내는 도구의 삶을 산거예요. 결국 죽었다가 살아났더니, 하느님이 찬송 받으시죠? ‘, 예수님 능력 있네요.’가 아녜요. ‘, 하느님이 살리셨네!’ ? 예수는 다 비우고 왔거든!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런데 예수도 그렇게 살다 갔는데, 우리가 뭐라고 뭘 한다는 거예요? 무슨 능력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도 자길 다 비우고 와서, 하느님이 살릴 때까지, 손 펼치고 있었는데, 무얼 하겠다고 그러는 거냐고요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 아녜요. 성도에게서는 반드시 열매가 맺혀요. 분명히 맺혀요. 변화가 있어요. 그런데 성경이 그 열매를 성령의 열매! 그런데 그 성령의가 소유격이 아니라, 주격이에요. 그러면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죠? 성령이 여러분에게 열매를 맺으실 텐데, 사과나무에서 사과 열리고, 배나무에서 배 열리고, 탱자나무에서 탱자 열리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의 열매는 십자가! 그 나무! 그 십자가라는 나무에서 열리는 게 성령의 열매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십자가 진 죽은 자가 되어야 그 열매가 맺히는 거예요. 그 성령의 열매가 다 뭐예요? ‘를 사랑하던 자리에서, 그 사랑을 다른 곳으로 돌려낸, 그 항목들을 몇 개 적어 놓은 거예요. 그건 다 하나예요. 하느님과 이웃을 믿고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 그래서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거기서도 단수예요, 열매! 예수가 맺히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은 인생에서 십자가 지고 죽으면 돼요. 십자가에서만, 성령의 열매가 열려요. 어줍지 않게, 여러분의 성경지식, 봉사, 도덕, 윤리 지킴 이런 거, 자랑하지 마세요. 역겨워요. 십자가 지세요. 죽으시란 말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밝힐 수 없는, 그런 참 무력하고 추악한 일들이,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행사들이 나타날 수 있어요. 누가 예수 믿으면, 그런 거 다 없어진다, 그래요? 있어요. 그러나 성도는 그 때 붙드는 한마디! ‘그러나 이제는, 맞아, 이래서 예수가 오신 거야!’ ‘그러나 이제는하느님이 의()를 준비하셨대! 예수 믿으면 된대. 신랑이 나를 위해 심장을 꺼내주셨대!’ 이거 믿으면 되는 거예요. 그걸 성도라 그래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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