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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살고 싶은 자들의 죽음과 죽고 싶은 자들의 부활 (로마4,7-2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18 조회수554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10. 18.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도란도란글방

 

살고 싶은 자들의 죽음과 죽고 싶은 자들의 부활

 

(로마4,7-25)

17 성서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고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 이 되었습니다. 19 그의 나이가 백 세에 가까와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 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23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다' 는 말씀은 비단 아브라함만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24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 역사는 실제가 아녜요. 실제이며 원형인 건, 하늘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나라입니다. 그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이미 완료된 창조의 나라예요. 런데 재미있는 건, 하느님께서 이 모형으로서의 역사를, 이 세상을, 당신의 백성에게 주셨고,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섬기라고 하셨어요.

이 세상이 누림의 대상이 아니고, 섬김의 대상이 아니면, 애초에 안 주셨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주시느냐고요? 마치 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과를, 동산 중앙, 가장 눈에 잘 띠는 곳에 심어두시고, ‘먹어봐!’라고 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이 세상을 섬기고, 누리고, 건설해 보라고 하셨단 말예요.

, 여러분이 지금, 가을이라는 계절 한 복판에 와 있는데, 이걸로 감동하십니까? 그런데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서는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어요. 농촌의 일몰(日沒)이라는 현실은, 우리를 감동시키기는커녕, 진짜 가보면 고단함으로만 인식이 돼요. 왜 그럴까요? 우리는 왜 실제보다는 허상에 더 감동하고 있는 걸까요. 실제를 보고 감동하지 못하고, 허상에 감동하는 인간들의 속성은, 그건 속성이에요.

실제를 근사하게 포장하고 위장해내는 인간들의 위장실력을 입증해내는 것임과 동시에, 자기가 안 보고 싶은 건, 안 보겠다는 거예요. 실제가 담고 있는 가치와 의미를, 파악(把握)하거나 포착(捕捉)할 수 없는, 인간들의 무지와 억지를, 증명하는 거예요.

하물며, 보이지 않는 그 실제의 묵시는, 어떻겠어요? 묵시! 그건 아예 보이지가 않는데!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이, 보이지 않는 실제를 감지하고 그걸 소망으로 붙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왜냐하면? 나를 비롯한, 눈에 보이는 이 존재하는 모든 보이는 존재들은, 곧 나에게 있어서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잖아요, 그죠?

여러분과 내가 여기에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만큼 진실이 어디 있어요? 이건 우리에게 진실로 인식이 된단 말이에요. 그것만큼 생생한 실존감각은 없어요. 그래서 모든 존재는, ‘라는 존재의 이 현실! 즉 내가 존재하고, 내가 중심이 된 현실이 존재한다는, 그 실존 감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래서 하느님의 은혜 밖에 있는 모든 인간은, 그 현실과 역사라는 자아의 감옥 속에 갇혀서, 평생 종노릇 하다가, 가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느님의 자기 백성 구별하기의 리트머스 시험지예요. 성경은 그걸 걸림돌이라고도 표현해요.

 

하느님은 허상에 묶여서, 허상만을 보는 자가 아니라, 역사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묵시(默示)라는 실제를, 인식하고 보는 자만, 내 백성이다.’라는 커트라인(cut line)을 정해놓고, 걸림돌을 계속 던지시는 거예요. ‘좋니? 좋아?’ 하느님은 모든 존재들에게, 자아와 환경이라는 현실을 부여하세요. 물론 그건 모형이에요.

존재는, 그 모형 속에서, 열심히 인간의 능력과 자원을 바탕으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상나라를 건설(建設)해요. 그들의 눈에는, 모형으로서의 인간과 세상 밖에는 안 보여요. 그러니까 당연한 거요. 그런데 그 중 어떤 무리에게, 보이지 않는 묵시를 볼 수 있는 눈과 귀를 주세요. 그리고 그 묵시가, 어떻게 완료(完了)가 되게 되었는지도 알게 하세요. 말씀으로! 계시(啓示)!

그들에게 있어서 이 역사와 인생은, 발전시키고, 성숙시키고, 번영시켜야 할 것이 아니고, 바로 세워야 할 것이 아니고, 부수어지고, 죽임당하고, 부정당해야 할 것으로, 인식이 되기 시작한다 말예요. 나부터! 나란 존재부터! 그리고 그 일이 실제의 삶 속에서, 이제 경험이 된 거예요.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부수어지는 거예요.

깨지는 거예요. 그걸 고난(苦難)이라고 하고, 환난(患難)이라고 그래요. 그게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자기 부인의 삶이고, 십자가 지는 삶인 거예요. 십자가는 여러분이 죽는 거예요.

하느님의 나라는, 창조의 은혜로만 지어지고, 운영되는 나라라 했어요. 그 창조라는 단어는, 잘 생각해 보세요. 창조라는 단어는, 아무 것도 없음이라는 환경 속에서만, 그 빛을 발휘하는 단어예요. 뭐가 요만큼이라도 있으면 그건, 수정(修訂)이고 보완이지, 창조가 아니란 말예요. 창조라는 단어 자체가, 아무 것도 없음이라는 환경을 전제하는 거예요.

하느님의 창조의 은혜가 발산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처음 조건이, 필연적으로 필요해요. 그 창조의 은혜가, 천국에서 계속 부어지는 거거든요. 그 창조의 은혜는, 피조된 자가, 보고, 느끼고, 쌓아내어,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 측에서, 그냥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으로 부으시는, 피동적 간섭(干涉)이라는 거요.

그게 창조의 은혜이며 능력인 거예요. 그런데 그 하느님나라 백성이, ‘그래도 난 뭔가 조금 있어!’ 뭔가 조금 있음의, 자기 가능성과, 자기 능력 증명의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겠어요? ‘넌 죽은 자야!’란 그들의 처음 자리를, 확인시키는 방법으로, 그들과 동행(同行)한단 말이에요. 성도는 이걸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야 창조의 하느님만, 영광을 받으시잖습니까?

 

인간들은 정서적 동물들입니다. 그래서 먼저 반응하고, 그걸 해석을 해요. 그래서 웃는 여자는 다 예쁘다 그래요. 웃는 여자를 보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어요. 웃는 여자를 보고 내가 웃죠. 그러면 내가 왜 웃었지 즉시 해석하거든요. 그러면 얘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예뻐서라고 해석하는 거요. (자주 웃으세요.) 의미를 부여해요.

그렇게 역사라는 허상에 시선이 모아지고 집중이 되면, 정작 보아야할 것들이, 그 이미지의 틀 속에 갇혀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못 보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이미지화된 그림자에, 열광을 하는 거고, 성경은 그걸 세상이라 그래요.

그런데 그림자인 이 인본의 세상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 인본주의니까! 휴머니즘이니까! 아주 지극히 인간적이고, 따뜻하고, 충실하고, 성실하고, 예의가 있고, 옳아요. 그래야 하느님처럼 되어 버린 위대한 인간들의 자존심이 서는 세상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신을 거부한 인간들의 시체 화장놀이!’ ‘자기공백 메우기!’ ‘자기결핍 채우기!’ 연극인 겁니다. 훌륭한 위장술인 거예요.

반면에, 신본의 묵시를 보게 된 자들의, 그 올바른 그 허상 인식에 의한 그 허상 깨기와, 허상 부수기는, 하느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끌고 가세요. 이게 자기부인이에요. 세상부인! 역사부인! 자기부인! 다 같은 말이에요.

그 삶은, 인본의 세상의 사람들이 볼 때, 인간적이지 못하고, ? 신본이기 때문에! 저급하고, 방관자적이며, 냉소적이며, 소극적이 될 수 있어요. ? 인간의 세상이 허상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굉장히 냉소적이고, 소극적으로 보인다니까요. 마땅한 보편적 인간들의 가치와 행위를, ‘가치 없음과, 부실과, 허망함으로 인식해 내게 되는, 그들의 삶 속에서 나오는 게 오죽하겠어요?

그래서 이 역사가 객관적으로 그들을 판단할 때, 불성실함! 더러움! 여전히 추악함! 게으름! 이렇게 판단할 수 있어요. 역사가 여러분을 볼 때에. 심지어 허상(虛像), 거짓 것을, 실제로 느끼게 하는 힘까지 있어요. 이게 마귀의 힘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실제는, 그걸 비밀로 감추고 있는 거예요. 힘을 무스테리온으로 감추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환장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 백성 이외의 모든 존재들은, 이 역사에만 열광하고 집중하는 거예요. 나에게만 집중하는 거예요. 당연히 진짜 하느님의 백성들은, 역사와 세상의 눈에, 가짜처럼 보이게 되는 거고, 인본의 역사를 숭배하는 가짜들이, 열심 있는 진짜로 둔갑하게 되는 거요.

그래서 가짜들 중에, 의인이 많고, 잘난 이들도 많은 거고, 착한 이들이 많은 거예요. 진짜 세상이 존경하는 그런 위인들은, 그리스도교 밖에 다 있잖아요? 열심히 노력해서, 자기의 결핍과 공백을 메워내야 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그들은 여전히 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하죠? 성도는,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성도예요. 거듭 말하지만,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은혜로만 완성이 되고, 하느님의 은혜로만 운영이 되는 곳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창조주의 자리에 앉아 계셔야 되고, 제자리에 앉는 게, 사밧스(Sabbath)예요. 존재가 제자리에 앉는 것! 그걸 안식(安息)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존재가 제자리에 있어야,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걸 안식이라 그래요.

 

그렇게 하느님은 창조주의 자리에 앉아 계셔야 하고, 피조물은, 그 창조주의 은혜와 생명력과 복을 받아,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찬송하며 사는 곳이, 하느님나라예요. 그런데 다 내가 있음의 흉내를 내고 있으면, 하느님의 창조의 은혜가 아닌, 그들의 능력으로 살게 하는데, 거기가 지옥(地獄)이라는 거예요.

그 상태! 그렇게 존재가 제자리에 앉아서, 자기의 처음 자리를 올바로 확인하고, 열심히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일을 하는 걸, ‘()’라고 하죠, 그게 의 나라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곳은 각 개체의, 개체성이 차압을 당하는 나라가 되는 거요. 각 존재의 개체성이, 차압(差押)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각 개체가, 개체성을 소유한 채, 각자의 능력과 성숙의 정도에 따라, 정의도 되고, 인정도 되고, 판단도 되는, 그런 곳이 아닌 거예요. ‘없음위에, 하느님의 창조의 은혜가 부어져서, 운영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개체성이, 인정이 안 된다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이, 하느님나라 백성을, ‘한 몸이라고 하는 거예요. 한 몸!

바울로는 그 후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후손! 즉 하느님나라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지체(肢體)로서 구원받는 거란 말이에요. ‘너희는 지체다!’ 그래서 성도는, 머리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장악당하여, 움직이는 것이지, 자기의 개별적 자아의 개체성을 챙겨서, 다른 이들과 성숙과 변화의 경쟁을 하는 이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건 역사 속 모형 인간들이 하는 짓이에요. 성경은 그걸 죄라 그런다니까요.

그리고 그 죄의 삯으로,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게, 죽음(死亡)이에요. 그게 죽은 거란 말예요. 살겠다고 나선 그게 바로, 죽은 거란 말예요.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의 개별적 자아 챙기기의 장으로 나셨죠? 그 전에는 아니었어요.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 살았단 말이에요. 그러나 먹지 마라 하는 걸 거역하고 먹으면서, 선악판단의 주체가 되었어요. 내가 이제 역사에 기여를 하겠다고 하잖아요? 그 때, 아담의 시계! 역사의 시계가 그 때 start! 출발한 거예요.

 

아담은 처음부터, 에덴을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 할 수 있는 완전한 성인으로 창조되었어요. 애기로 창조 안 됐단 말입니다. 자라고 성숙해야 할 아기로 창조된 게 아네요. 하느님나라 백성은, 그렇게 영 단번에 완료의 상태로 창조된 거라는 걸, 보여주는 거란 말입니다.

아기로 태어나서, 시간에 종속이 되어서, 자라고 성숙되고 발전한 게 아녜요. 그러면 죽어요. 그 흐름이, 시간이고, 그게 사망으로 달리는 거란 말입니다. 그건 하느님나라 백성의 출생과 존재 양식을 힌트한 건데, 하느님나라 백성은, 하느님에 의해 그렇게 영 단번에 완료요, 완성으로 출생하는 거지, 시간에 의존하여, 자라고 성숙되는 게 아니란 걸, 보여준 거란 말이에요.

이게 역사가 추구하는 거예요. 그렇게 창조주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느님만을 의존하며 사는 거, 그게 ()’란 말이에요. 하느님만을 의존하며, 그 분이 살게 하면 살고, 그 분이 망하게 하면 망하고, 죽게 하면 죽고, 요걸 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걸 안식(安息)이라 하고, 그 상태가 하느님과의 화목(和睦)의 상태예요. 그것이! 거기엔 죽음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느님의 창조 은혜 속에 있는 곳이, 시간이 없다는 영원이라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시간이 없으면, 죽음이 없는 거란 말예요.

객관적 실체가 아닌 시간이라는 게, 흐를 수가 없어요. 반면에 객관적 실체로서의, 인간! 객체로서의 인간은, 흘러요. 그런데 하느님의 창조의 은혜 아래에서, 자신의 처음 자리를 올바로 인식하며, 하느님의 능력으로 존재하는 이들은, 자기가 달려서 흐르지 않아도 돼요. 이게 사는 거라니까요. 예수 안!’이라는 그 지체의 자리에서, 객체로서의 흐름을, 시도하거나 생산하지 않는 그들을, 성도라 그래요. 그걸 안식이라고 하고, 자유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구원의 자리예요.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처럼, 자신들이 선악판단의 주체가 되고, 스스로의 능력과 힘을 발휘해서, 변화와 성장과 성숙과 발전과 번영을 꾀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사람이 흐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악과 먹자마자 죽음이 왔고, 그가 달린 결과가, 930 세에 죽음으로 끝나는 거예요. 시간이 그때 시작되는 거예요. 사망을 향하여 달리는 거예요. 우리가 달리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다, 그러죠.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늙음이 오고, 썩어짐이 오고, 종국에는, 죽음으로 끝이 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이 역사를 달리는 거예요. 그리고 죽음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반드시 죽어야 돼요. 그러니까 시간이 사람을 후패케 하고, 늙게 하고, 썩게하고,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열심히 달려서, 늙고, 후패하고 썩고, 죽는 거예요.

성경의 표현대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들은, 열심히 노력하여, 썩어짐에 종노릇 한다 그러죠? 열심히 노력하여, 율법을 지켜, 썩어지는 거예요. 그게 시간이 가는 거예요. 인간이 달리는 거예요. 그렇게 썩어짐에 종노릇하다가 결국, 사망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그걸 지옥이라 그래요.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역사라는 모형을 통하여, 바로 그러한 하느님나라의 올바른 형성과정과 그 곳에서의 삶의 양식을 설명해 주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 2장으로 가면, 그러한 하느님의 의도를 조금 엿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8-9) 8 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 9 야훼 하느님께서는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그 땅에서 돋아나게 하셨다. 또 그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돋아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다고 그러죠. 동방의 에덴에,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게 아녜요. 동방의 에덴에 동산이 잠깐 섰다가 사라지는 거요. 여기서 동방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영원이란 뜻의 케뎀입니다. ‘영원이에요. 에덴이란 단어는 기쁨이죠. 따라서 동방의 에덴이란, ‘영원한 기쁨의 나라를 말하는 거요. 하느님나라입니다.

그 영원한 기쁨의 나라, 묵시 속에 완료된 하느님나라를 가리키는 거예요. 이게 동방의 에덴이에요. 거기에 동산이 잠깐 서는 거죠. 영원한 묵시의 역사가, 동산이 잠깐 서서, 그 동산 속에서 아담과 하와라는 사람이, 어떤 역할극을 하고 사라지는 거예요. 그게 묵시와 역사의 모습이라 말입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인간의 악마적 실체를 고발하고, 그들을 덮는 하느님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그 설명용 교보재로서의 그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에덴이 아닌, 동산에 심겨져 있다는 걸 주의깊게 봐야 돼요. 그래야 여러분이 역사를 이해할 수 있어요. 동산에 심겨져 있단 말입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영원한 에덴을 설명하기 위한, 무대 장치였단 말이에요. 그래서 동산에 그게 등장하는 거요.

선악과는, 인간의 처음 자리 폭로용으로 마련된 하느님의 리트머스 시험지였고, 생명나무는, 하느님의 은혜인, 하느님의 생명력과 복을 상징하는 거죠? 한마디로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에덴이 아닌, 영원한 기쁨의 나라가 아닌, 동산에 나와서 심겨져 있는 거예요.

뭘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거기서부터 나오는 거예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즉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가, 모형인 세상으로 출동을 하여, 영원한 나라를 계시해내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은 율법으로 계속 흐르고, 인간의 가능성으로 계속 흐르고, 자기의 실체를 폭로 당하며, 거기에 예수가 그걸 덮는 존재로, 이 역사 속에서, 지금 뭔가, 계속 설명해내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 동산이란 말입니다.

 

그 그림을, 성막으로 그대로 옮겨서, 성막의 구조와 한 번 오버랩(overlap)시켜 보세요. 성막에는, 지성소라는 곳이 있어요. 거기에는, 하느님의 은혜가, 죽은 흙들에게 무상으로 부어지는 시은좌(Mercy Seat)가 있죠? 그게 하느님나라예요. 하느님나라는, 그렇게 존재하고 운영이 돼요. 하느님은 창조의 하느님으로, 당신의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 창조주 앞에 피조물은 죽은 자의 자리에서 그 분의 은혜를 무상으로 받는 모습이에요. 이게 지성소예요.

그리고 그 지성소 밖은, 성소라고 부르는 곳이죠? 자 에덴! 그리고 동산! 그리고 동산 밖! 창세기에서는 이렇게 에덴과 동산과 동산 밖으로, 이 전체를 세 부분으로 구별해내죠? 그래서 하늘을 삼층천이라고 하는 거요. 그런데 성전도, 지성소와 성소와 뜰,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별이 된다 말이에요. 그러면 성소는, 창세기에서의 동산의 역할을 하겠죠? 그러면 거기에 무슨 나무가 심겨져 있어야 될 게 아녜요? 성소에 뭐가 있죠? 떡 상! 향단! 촛대!

출애굽기에 가보면, 이 촛대를 어떻게 만들라고 설명을 하는데, ‘나무예요. 그죠? 나무가 지성소가 아닌, 생명나무가 지성소가 아닌, 성소로, 동산으로 출격한 거예요. 그리고는 지성소를 설명하는 거요. 거기에 있는 떡 상이나, 향단이나, 촛대가, 다 예수님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 예수가 세상으로 출격해 온 거예요. 이걸 성육신이라 그래요. 성도는 그걸 알아먹는 거예요. 세상 속에서!

이 모습을, 이스라엘의 출애굽 현실과, 또 한 번 오버랩(overlap)시켜 보겠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의 나라인 가나안이 있고, 그리고 그 하느님나라인 가나안의 삶을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한, 광야 40년이 있고, 광야가 있어요. 그리고 애굽이라는, 이방나라가 있어요. 성전 뜰에는 이방인도 막 들어오는 거 아시죠?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가나안은 하느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사는 나라예요. 거기는 자기가 심지 않은 걸 먹고, 자기가 건축하지 않은 집에서, 사는 곳이에요. 일부러 하느님이 그렇게 설명하세요.

 

(신명기 6:10-14) 10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로써 너에게 주겠다고 하신 그 땅에 너희를 이끌어 들이실 때가 되었다. 거기에는 너희가 세우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읍들이 있고, 11 너희가 채우지 않은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찬 집들이 있고 너희가 파지 않은 우물이 있고 너희가 가꾸지 않은 포도원과 올리브밭이 있다. 너희는 그것을 마음껏 먹게 되리라. 12 그리 되더라도 너희는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지 않도록 하여라. 13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맹세할 일이 있으면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여라. 14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서 어떤 신이든지 그 신을 따라 가면 안 된다.

 

그죠? 가나안 땅! 약속의 나라가 어떤 나라다? 하느님이 다 준비하신, 준비해 놓으신 그 곳에 가서, 그냥 누리는 것. 하느님이 주신 걸!

 

(여호수아 24:13-14) 13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을 주었고 너희가 세우지 않은 도시들을 주어 살게 하였다. 너희로 하여금 가꾸지 않은 포도와 무화과를 따 먹게 해 주었다.' 14 그러니 여러분은 이제 야훼를 경외하며 일편단심으로 그를 섬기시오. 여러분의 조상들이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도 섬겼고 에집트에서도 섬겼던 다른 신들을 버리고 야훼를 섬기시오.

 

보다시피, 하느님나라, 약속의 땅은, 그 나라 백성들의 손이 조금도 기여(寄與)되거나, 공헌(貢獻)되거나, 가입(加入)하지 않은 그런 은혜의 나라예요. 그런데 잘 보면, 그 은혜의 나라를 설명하면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래요. 그게 뭐겠어요? ‘!’ 인간이에요,’ 인본! 율법! 이게 하느님이 경고하신 우상(偶像)이에요. 실체! 내가 다 준비해 놓는 곳에, 너는 들어가서 누리면 되는데, 너는 반드시 너의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거기에 망치질이라도 한 번 하겠다고 나설 거라는 거예요. 그걸 우상(偶像)’이라 그러는 거요. 그래서 거기에, 우상 섬기지 말라가 항상 붙어 나오는 거예요.

 

하느님나라는 창조의 나라이며, 완료된 나라인데, 인간들이 자꾸 거기에 자기들의 율법적 행위를 보태서, 자기들의 자존심도 챙기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가짜 하느님을 섬기는 우상섬기기라는 말이에요. 하느님은 그걸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자마자 십계명을 주시는데, 그 시작이 전부, 다른 신! 우상!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놓고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좍 나열하시는 거예요. 마지막이 뭐죠?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 마음을 어떻게 제어(制御)해요? 우리가. 훔치지 말아라가 아니라, 탐내지 마라예요. 안 훔치는 건 할 수 있는데, 탐내는 건, 어떻게 어거(馭車)가 안 되잖아요? 지키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그게 다른 신인 거예요.

애굽은, 나를 우상으로 삼아서, ‘라는 자아의 종으로 사는, 이 세상의 역사를 모형 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거기서 종살이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에게 갇혀 있는 걸 종살이라 거예요.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러한 종의 자리에서 건져서, 하느님만 의존하고, 하느님께만 순종하는, 하느님의 종으로 만들어내는 거요. 하느님의 백성으로! 그래서 이 역사 속에, 당신의 백성들을 던져놓으시고, 애굽의 종으로 살게 하시는 거예요. ‘살아, 살아봐!’라는 거예요. ‘발전해봐! 번영해봐! 성숙해봐!’라고. 율법을 살게 하시는 거예요. 세상을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역사를 바라보는 성도의 올바른 역사 인식이 어떠해야 할까요? 인간들이 열심히 달려서 얻어낼 수 있는 건, 사망과 썩어짐 밖에는 없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을 하고, 목숨 걸고, 하느님의 은혜(恩惠)! ‘()’에만 매달려야 하는, 그 인간 실존을, 처절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십자가, 이거 없으면 죽는구나!’ 이렇게.

그래서 바울로가, 오늘 본문 17절에서,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교회의 올바른 신앙고백을, 이렇게 기술하는 겁니다.

로마4,17 성서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절대 표피적으로 보지 말라 그랬습니다, 이걸 표피적으로 보면, ‘하느님은, 죽은 자도 살려내실 수 있는 하느님이며,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하느님이다라는 하느님의 능력의 차원! 이것으로 이해를 한다 말이에요. 표피적으로 보게 되면!

이건 그런 능력의 이야기가 아녜요. 지금 바울로가 구원의 이야기를 해내고 있단 말이에요. 이 말씀은, 하느님은, 없는 걸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창조의 하느님이므로, 그 앞에서, 산 자인 척할 수 없는 자! 죽은 자만 살아날 수 있다는 뜻이에요. 하느님은 그런 능력 있는 분이니까, ‘열심히 노력해!’가 아니라, 구원이 무엇인지, 하느님나라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내용이라 말이에요. 이거는요! 그래서 4장 마지막 두 절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맺어지는 거예요.

 

(로마서4:24-25) 24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24절 보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느님을 믿는 거라 그래요. 그리고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 단락을 맺고 있어요.

예수의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를 살려낼 수 있는 방법과 도구로서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그 자체가 하느님나라의 창조 섭리와, 존재 양식과, 삶의 원리를, 설명하는 거예요. ‘죽는 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자, 살아나는 거예요. 이게 하느님나라란 말예요.

하느님 앞에서, 존재인 척하는 건, 절대 살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란 말예요. 반드시 죽어야 돼요. 예수는 십자가에서! 예수가 우리를 대표한 분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여러분이 죽지 않으면, 여러분은, 산 자가 안 된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단순히 여러분의 죄를 용서한 게 아니란 말예요. 살아났다니깐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 앞에 죽은 자로 드려져야, 비로소 산 자가 되는, 하느님나라 백성의 출생의 비밀과, 존재 양식에 관한 하나의 모형이었어요. 그것이 필리비서 28절에,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었단 말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죄 사함! 구속! 이러니까 그냥 그걸 무상으로 용서해 주는 이 정도에서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죄 사()함은, 창조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어떻게 너희들이 창조가 되었는지를, 내가 설명해 줄 게에, 죄가 교보재로 등장한 거예요. 하느님나라에 무슨 죄가 있어요, 그건 여러분에게 뭔가 이해를 시키기 위해서, 잠깐 등장한 거란 말입니다. 모형인 역사 속에, 인생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 역사와 인생을, 모두 죽은 것으로 이렇게, 폭로하고 선언해 버린 게, 십자가예요.

 

(요한복음 16:11) 11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실 것이다.'

 

세상 임금은 세상의 대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그가 심판을 받았대요. 그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건, 온 세상이 죽은 자로, 지금 심판을 받았다는 거요. 십자가에 의해서!

 

(갈라디아서 6:14) 14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정확히 번역하면,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세상과, 성도가, 역사와 묵시가, 서로 너희는 죽은 거야!’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정확히 번역하면! 역사는 우리보고, ‘죽었어!’ 그러고, 우리는 역사보고, ‘죽었어!’라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위에서 봤더니, 십자가가, 세상 임금을 심판해버렸네요. 그럼 누가 허상(虛像)이고, 누가 실제(實際)라는 거예요? 묵시가 실제고, 세상이 허상이라는 뜻이에요. 이건 죽은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모든 존재의 끝이 다 죽음이에요. 거북이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어요. 학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어요. ? 역사는 죽는 거예요. 흐르는 건 죽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십자가가 세상을 못 박았다고도 하고, 율법을 못 박았다고도 하고, 우리 육신을 못 박았다고도 하죠? 그러니까 세상과 우리 육신과 율법은, 같은 내용이에요. 그러면 죽어야 할 게, 뭐라는 거예요? 세상이요. 율법이요, 인본주의입니다. 우리의 육신인 거죠. 이건 죽어야 될 거예요.

하느님은, 반드시 당신의 백성을 그리로 몰고 가세요.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세요. 그래서 예수를 올바로 믿으면, 오히려 남들은 잘도 감추고 있는 실수가 폭로되고, 자신의 실체가 공개되며,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도록 놔두시는 거예요. 죽으라고.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 역사 속에서 성취해 내어서,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전리품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게 만드세요. 쓰레기통에 쳐 넣어버리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안팎으로, 자랑할 게 없는 자로, 만들어 버리는 거요. 그게 바로, 하느님 앞에서의 죽은 자여야 하는, 성도의 역사 속 죽음이에요. 그래서 예수께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가 산다!’라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필리비서 3:7-11) 7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입니다.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11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부활은 반드시 죽음을 전제하는 거예요.)

 

바울로가 지금, 자기가 받은 하느님의 ()’에 대해, 이야기를 해요. 하느님께서 그에게 당신의 를 선물해 주시면서, 자각케 한 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모든 게 다, 배설물이고 심지어, 해라는 걸 알게 하셨단 말이에요. 이게 역사 속 죽음이라 그랬어요. 그런데 그렇게 죽고 나니까, 의지할 거라곤, 예수님의 ()’ 밖에 없는 거요.

그동안 내가 의지했던,‘ 착하게 살기, 역사 바로 세우기, 세상에 기여하기,’ 이게 다, 배설물로 되어버리니까, ‘그럼 난 뭐로 인간됨을 챙겨야 돼? 어떻게 살아야 돼?’가 된 거죠. 그 때 하느님이 예수의 를 선뜻 내미시는 거죠. 그 사람만 그거 붙들 수 있는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로가 배설물로 여긴 게, 남의 것 탐내고, 도둑질하고, 이 세상에서 욕심 부리고, 이게 아니었어요. 우리는 대부분, 그걸 사도 바울로가 버렸다고 생각해요. 그 위에서 보세요. 사도 바울로가 뭘 버렸는지. 뭘 배설물로 버렸는지 한 번 보세요.

 

(필리비서 3:4-6) 4 하기야 세속적인 면에서도 나는 내세울 만한 것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 든다면 나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더 많습니다. 5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 진짜 열심히 깨끗하게 살았다.’ 그러는 거예요, 지금요. 누가 뭐라 그래도 나는 흠 없이 살았어.’ 그래놓고 바로 밑에서, 그런데 이게 배설물이래. 하느님이! 그런데 내가 봐도 배설물이어야. ? 하느님이 요구하는 수준에 절대 미치지 못하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예수의 십자가만 의지하기로 했다. 이게 바울로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열심히 산 게, 나에게, 내 구원의 여정에 해가 됐다고 그래요. 율법 잘 지킴이 내 구원의 여정에 해가 됐다 그러는 거요. 그래서 배설물이라고 해도 충분한데, 이걸 해()라고 굳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로가! 너를 살리는 게 아니라, 너를 죽이는 거라고.

바울로는 예수님을 올바로 만난 후에, 그 모든 역사의 짐을 하나하나, 내려놓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그 동안 내 생명으로 여기고 있던 그것들이, 하나하나 배설물로 드러날 때, 바울로가 어떻게 그 현실을 인식하겠어요? 역사 속, 내가 죽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날마다 죽는다.’ 그런 거예요.

 

(고린도전서 15:31) 31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을 나의 자랑으로 생각하며 이 말씀을 드립니다. 나는 날마다 죽음의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 너희에게 자랑할 게 하나 있는데, 난 날마다 죽고 있다.’ 그래요. 그게 뭐 자랑이에요? 그런데 성도는, 그걸 자랑으로 여겨요. 세상이 그를 볼 때 어떻게 보겠느냐고요? ‘저거, 옛날에 굉장히 괜찮게 살았는데, 착하게 절 살았는데, 점점 저렇게 맹해지냐?’ 그걸 거 아니겠어요? 날마다 죽으니. 그런데 사도가 그걸 자랑했다니까요.

사도 바울로가 바리새인들에게 뭐라고 욕을 먹었겠어요? ‘너 옛날에, 네 가족도 다 버리고 뭐 하나 써 주면, 그것 가지고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열심히 달려 하느님을 위해 살던 놈 아니야? 그런데 지금 왜 그래? 걸핏하면 감옥에 들어가 있어!’ 이랬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리스도교 역사는, 사도 바울로만한 인간을 아직 못 내놓고 있단 말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내가 매일 죽는다.’라고 한 건, 자기 의지를 발동해서 하고 싶은 걸 꼭 참고, 해야 할 걸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그런 종류의 죽음이 아니었어요. ‘나는 죄인 중에 죄인이 맞구나!’라고 고백을 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열심에 의한 죽음이었단 말이에요. 그게 성도에게는, 진짜 죽음으로 자각이 돼요.

바울로가 그렇게 자신의 처음 자리를 확인하게 되자, 무얼 알게 되었다 그래요? 고린도전서 15장이 그 유명한 부활장이잖아요? 내가 날마다 죽는 다 그래놓고, 바로 이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 하면? 부활의 이야기를 해요. ‘이게 사는 거야!’라고 이야기 하는 거요. ‘산다는 건, 날마다 조금씩 사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다른 의미로 이야기했겠지만! 성도가 역사를 산 다는 건, 날마다 역사 속에서 죽는데, 날마다 조금씩 사는 거예요. 조금씩, 조금씩. 그걸 부활이라 그래요.

 

(고린도전서 15:35-40) 35 그러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36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37 여러분이 심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그 씨앗을 심는 것 뿐입니다. 38 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지어 주시는 것으로 씨앗 하나 하나에 각각 알맞는 몸을 주십니다. 39 모든 육체가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동물의 육체가 다르고 새의 육체가 다르고 물고기의 육체가 또 다릅니다. 40 하늘에 속한 것들이 있고 또 땅에 속한 것들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들의 영광이 다르고 땅에 속한 것들의 영광도 다릅니다.

 

보세요. 이 이야기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하늘을 살 부활의 몸이 따로 있고, 이 역사 속에서 교훈용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임시로 잠깐 살아야 할, 육신의 몸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바울로가 날마다 죽는다는 그 죽음을 이야기 하는 거란 말예요. 그게 밀알이 죽는 거예요. 여러분의 육신은 죽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거지, 성숙시키고 번영시키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내가 죽을 때, 진짜, 내가 희망하는 게 뭐겠어요? ‘이건 죽어야 할 게 맞구나!’ 하느님이 주신다고 하는 부활의 몸을 희망할 거 아녜요? 이걸 산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교예요.

아니면 다른 종교와 다른 게 뭐가 있냐고요? 제발 좀 알아먹으란 말이에요. 사도 바울로가 열심히 살았어요. 최선을 다해 살았어요. 그런데 하느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게 다 쓰레기예요. 그 때 사도 바울로가 진짜 죽는 게 뭐고, 진짜 사는 게 뭔지를 알았단 말이에요. 고린도전서 15장이 그 얘기란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41-44, 49)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며 또 별과 별 사이에도 그 영광이 다릅니다. 42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 납니다. 43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 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44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

 

실제가 있고, 원형이 있고, 그림자가 있는데, 우리는 그림자에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요. 그런데 이것을 열심히 살찌웠더니, 나중에 하느님이 뭘 알게 해주시냐 하면, ‘이게 바로, 썩은 거고, 욕된 거고, 약한 거고, 흙에 속한 거고, 육의 몸이다!’ 그래요. 그러면 뭐예요? 역사는 뭘 중명하는 거예요? ‘이거는 썩어야 되고, 죽어야 될 거구나!’를 아는 거예요. 그리고는, 새로운 것을, 썩지 아니할 거, 새로운 거! 그걸 소망하는 거예요. 그때에, 하느님이 창조의 능력을 쏟아 붓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하느님나라의 존재양식이란 말예요.

부활이라는 건, 새로운 창조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새로운 창조(創造)! 고치는 게 아녜요. 새로운 창조!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피조라는 게, 창조되었다는 뜻 아닙니까? 성숙시켜 이뤄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에다 대고 난 성화가 너무 완전하게 되어서, 이젠 죄짓는 게 죄 안 짓는 거보다 더 힘들다는 이런 소리를 하냐고요? 난 그 사람 예수를 안 믿었다고 봐요.

 

부활신앙은, 이 세상이 진짜 세상이 아니고, 부활의 몸이 살게 되는,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걸, 믿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부활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그 몸으로 사는 나라가 있다는 거, 이게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로가 이야기한 거예요. 그 몸을 사는 나라가 있기 때문에, 부활이 일어난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을 소망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이 세상에서의 역사를 세우려고 하고,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려고 하고, 나를 성숙켜,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부활신앙이냐고요?

 

그래서 하느님이 동행하시며 여러분을 죽여가시는 게 인생이란 말예요. 난 왜 이렇게 안 죽어? 교만 좀 떨지 마세요. 어떻게 내가 날 죽여요? 우리는 끊임없이 살려고 애를 쓰죠. 그런데 하느님이 죽여 가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옳습니다!’라고 인정하게 되는 걸, 신앙이라 그래요.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런 신앙고백! ‘하느님은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라는 신앙고백을 했는지가 잘 설명이 되어 있어요.

 

(로마4,18-22) 18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고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 이 되었습니다. 19 그의 나이가 백세에 가까와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 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우리가 본 아브라함의 인생은 그거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로가 도대체 뭘 근거로 이렇게 이야기하느냐고요? 표피적으로 보면 여러분이 그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한 발짝 더 들어가서 십자가로 풀면, 이게 맞는 소리예요. 그리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을 분명히 알았어요. 인간 측에서의 생산조건과, 가능성이, 완전히 박살이 난 상태죠.

누가 봐도 아브라함 측에서의 생산은, 불가능이에요. 이게 죽은 거예요. 모두가 포기했어요. 당사자인 아브라함도 포기했습니다.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말씀하실 때 웃은 거 아녜요? 죽었어요. 그렇게 아브라함이 죽은 자로 확인이 되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었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러잖아요? 다 포기했는데, ‘믿음이라는 게 나타나서, 믿음이라는 게, 홀로 약해지지 않고, 하느님의 약속을 믿게 만들더라는 거예요. ‘믿음!

 

19절 보세요.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았다!’ 아브라함도 난 안 돼!’ 사라도 난 안 돼!’ 다 약해져 있었는데, 여기서 믿음이 주어란 말이에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 주어예요. 믿음! 홀로 약해지지 않고, 거기서 생산해내더라는 거예요. 여기에서의 믿음, ‘하느님의 열심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느님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자들이, 다 죽은 자로 이제 폭로가 되어서, 다 포기했어요. ‘안 돼!’ 혼돈과 공허예요. 그런데 믿음이 홀로 약해지지 않고, 믿음이 없을 때는, 하느님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의심치 않게 하고, 이 믿음이 홀로 견고하게 서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게 하더라는 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믿음은, 아브라함과 별개로 활동을 하면서, 아브라함 안에서 일을 해요. 아브라함이 사유한 게 아녜요. 그래서 하느님이 변화산 밑에서도, ‘믿음 없는 자들아!’ 그런 거요. 믿음이 없어요. 그 사람들에게는. 사유(私有)된 믿음은 없어요. 하느님이 허락하는 믿음이 있단 말입니다. 그 믿음이 그들을 끌고 가는 거지, 사유해서 귀신을 쫓아내고, 자기가 능력으로 쓰는 게, 믿음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게, 믿음이라는 건, 아브라함과 별개로 활동하면서, 아브라함 안에서 일을 해요. 아브라함의 것은, 아니란 말예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반대편에 서 있었을 때, 홀로 독야청청 일을 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의지하게 만들어 버리는, 죽여 버리는 거예요. ‘왜 약속을 안 믿고, 네 몸의 능력과 에너지와 힘을 의지하느냐?’ 그것이 믿음이 하는 일이라 말예요.

본문 20절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죠? 그 믿음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런데 그 믿음이 일을 하니까, 아브라함이 그 믿음 안에서, 인 페이스(in faith)예요, 여기서! 믿음 안에서, 견고해지더라는 거예요. 믿음이 견고케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자랑할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보세요. 여기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도, 아브라함은 죽은 자로 폭로가 돼요. 그런데, 그 죽은 자 위를 하느님의 믿음이, 덮어내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란 말예요. 그리고는 아브라함에게, ‘믿었다, 확신했다라고, 하느님이 면류관(冕旒冠)을 씌워주시는 거예요. 믿음이 다 하고서는! 아브라함은 그렇게, 죽음으로, 부활(復活)을 경험한 거예요. 그게 모리아 산에서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졌던 거고요.

아브라함은, 언약성취의 과정에서, 자신의 무용함을 깨닫게 되죠? 아무리 도우려고 해도, 도움이 아니라 자기는 자꾸 하느님을 방해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이, 죽이라면 죽이자. 얘 죽이면 하느님이 살려내시든지, 다른 애를 주시든지 알아서 하시겠지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게, 심장에 칼 꽂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 일로 인해, 아브라함이 죽었더니, 후손이 살죠, 이사악이?

그런데 그 약속의 후손! 이사악은 예수의 모형! 그러니 예수가 사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내 안에 계시는 예수가 살게 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의 지체로 연합이 되어 살게 되는, 이게 묵시의 관계이며 그 내용이란 말이에요. 이것만 잘 이해하면, 여러분이 어딜 가서 무슨 얘기를 들어도, 절에 가서 스님의 설법을 들어도, 은혜 받을 수 있어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니까요.

이렇게 성도의 부활(復活), 죽음을 전제로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세요? 예수의 부활이 여러분의 부활임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이 역사 속에서, 여러분이 반드시 겪어내야 할 게 십자가예요! 누명! 모함! 배신! 욕먹음! 살해당함! 이게 다 여러분 거란 말입니다. 하느님이 이리로 밀어 넣어, 여러분을 아무 것도 아님! 자랑할 게 없는 자로 몰아가시는 걸, 그리스도교라 그래요.

 

여러분이 그걸 자각하고 지금 예수! 예수! 하고 있냐고요?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인간들의 자존심을 챙겨주기 위해, 이 과정을 생략하고, 엉뚱한 예수를 부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진짜 죽어야 할 죄인(罪人)임을 여러분이 알고 있냐고요? 그걸 인생 속에서 지금 살고 있냐 말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예수의 지체로 연합(聯合)이 돼요.

살아서 펄펄 뛰고 있는 건, 그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건, 예수의 지체로 갖다 붙일 수가 없어요. 붙여 놔봐야, 자기 마음대로 살기 때문에! 그러면 하느님의 교회 전체가 박살나기 때문에, 얘는 못 붙인다니까요. 죽여서 갖다 붙여야 돼요.

여자가 보기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던 것은, 선악과, 율법, 역사였어요. 하느님이 그걸 ()’라고 했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붙드셔야 되는 거요. 그런데 예수를 붙들려면, 나의 개체성이 차압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죽음이란 말입니다. 예수께서 홀로 살아 펄펄 뛰는 암 덩어리를, 당신의 지체로 받아들이겠어요? 절대 아닙니다.

 

(골로사이서 3:3) 3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너희가 죽었대요. 죽어야 살기 때문에, 십자가(十字架)에서 우리를 죽여 버렸어요.

 

(로마서 7:4-6) 4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한 몸이 되어 죽음으로써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른 분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유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5 전에 우리가 육적인 사랑을 하고 있을 때에는 율법 때문에 우리의 온 몸에 죄스러운 욕정이 발동하여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6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죽어서 그 계약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율법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자아에 대해서, 죽은 분들이에요. 그래서 내 안의 자존심도, 내 것이 아녜요. 자존심 상하신다고요? 여러분, 아직 안 죽은 거예요. 죽은 자가 무슨 자존심이 있어요?

세상의 비난이나, 평가나 비아냥도 여러분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죽었어요. 그리고 원래 그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죽어야 할 정도로, 더럽고 추악한 인간이었단 말예요. 뭐 그 정도로 비아냥거려 주는 거,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죽었다니까요. 그런 거에, 귀 막으세요. 대응할 필요도 없어요. 여러분 굳이 자살할 필요도 없어요. 이미 죽은 거, 뭘 또 죽여? 그냥 사세요. 억울합니까? 그냥 세상과 인간이, 그렇게 추악하고 더럽다는 거, 그 상황에서 배우세요.

잘 생각하세요. 여러분, 마귀가 이 세상 속에서 발광을 하면서, 뭘 하려 할까요? 타임머신이 생기면 마귀가 어디로 돌아가려 할까요? 십자가로 돌아가겠죠? 절대 예수님을 거기서 못 죽게 만들 거요.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의 무장을 해제시켰다고 하는데, 마귀를 이겼다고 하는데, 십자가에서 부순 게 뭐예요, 예수님이? 율법과 세상과 잖아요? 그걸 십자가에 못 박았다며요?

그럼 마귀가 역사 속에서, 율법과 세상과 인간의 가치를 다시 세우려고 하겠죠? 이게 마귀의 일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교회가, 보세요, 항상 이리로 돌아가요. 개혁(改革)이 일어났는데 또 그리로 돌아가고, 개혁이 일어났는데, 또 그리로 돌아가고, 항상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인 걸, 건설(建設)해 내는 거죠.

 

(고린도전서 2:2) 2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18) 18 만일 내가 전에 헐어 바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나는 스스로 법을 어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우는 게, 마귀예요. 이 세상이란 말이에요. 그걸 내가 전()한다면 내가 죄짓는 거다 그러는 거요. 사도 바울로가. 그런데 오늘날 이게 건강한 거고, 건전한 교회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예수가 헐은 걸, 다시 세우고 있는 게, 잘 하는 거라고 하잖아요, 지금 요 역사 바로 세우고, 사회에 참여(參與)하고, 착한 사람 되어서, 인간의 자존심을 챙기자! 이거 아닙니까? 아니 하세요. 열심히 하세요.

아무 것도 안하고 예수 믿지 말고, 열심히 살아서, 실패하며, 절망하며 예수 믿으란 말이에요. 언제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말자 그랬습니까? 하자니깐요. 최선을 다하세요. 그런 고귀한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인기(人氣)와 명성(名聲)을 챙기는, 이 죽어야 할 나! 인정하고, 십자가로 가세요. 그게 예수 믿는 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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