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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누구 옆에 설 것인가? (로마6,15-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19 조회수1,021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10. 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도란도란글방

 

누구 옆에 설 것인가?

 

(로마6,15-18)

15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맡겨서 복종하면 곧 자기가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종이 되어 죽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17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18 그리고 여러분은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화두(話頭)처럼 안고 사는 질문이, ‘Who am I ?’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현주소를 확인하며, 주위와 비교하죠. 그래서 나를 구축해가요. 그 비교의 내용은 소유(所有)일 수도 있고, 관계(關係)일 수도 있고, 됨됨이일 수도 있어요. 종교생활(宗敎生活)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수시로 꺼내 확인해 보면서, 나의 정체성(正體性)을 확립하고, 나를 평가(評價)해요. ‘Who I am.’ 내가 누구인가의 그 를 구축(構築)하고 정립하기 위해서 우리는 ‘What I did.’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하나하나 쌓아서 쌓죠. 그러나 성경은 ‘Who am I?’를 묻지 않습니다. 사실은! ‘Whose am I?’ ‘난 도대체 누구의 것이냐?’. 그러니까 하느님의 심판의 근거는 ‘Whose you are, 넌 누구 거야예요.

엄밀히 말하면, 이 세상은 딱 두 부류(部類)로 나누어져 있어요. 의 종의 종!’ 이렇게 딱 두 부류입니다. 중간은 없어요. 제발 미리 추측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기존에 배웠던 것처럼, 죄의 종도 죄만 짓고, 의의 종은 선한 일만 하는 이들일 거라는, 그런 선입견(先入見)부터 부수시고, 오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그 두 종류의 종이 나오죠? ()의 종과 순종(順從)의 종! 이라는 단어가 둘로스예요. 그리고 또 중요한 단어가 순종이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가 휘파코스예요. 그 두 단어를 중심으로 오늘 본문을 해석해 갈 건데, 그 두 단어를 중심으로 오늘 본문을 얼핏 보면, 이제 ()의 종()’이 되었으니까, 그 의에 절대 순종해서 의의 종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권고(勸告)처럼 보이잖아요? ‘너는 이제 正義의 종이잖아? 그러니까 죄에게 너희들 드리지 말고, 정의의 종다운 삶을 살아!’ 이렇게 하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죠?

우리는 종이라는 단어와, 순종(順從)이란 단어를, 그런 의미로 쓰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보이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러한 종류의 내용이 아니라,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이라는 말부터 이해를 하고 가야겠어요.

 

휘파코스라는 단어를, 헬라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우리말로 순종(順從)이라는 의미는 없고, 경청(敬聽), 응낙(應諾)’이라고 되어 있어요. 사전에도! 경청, 응락! 그 단어는 휘파코어의 명사형이라고 친절하게 거기에 쓰여 있는데, 휘파코어라는 단어를 이제 찾아가 보면, 그 단어는, ‘주의 깊게 듣다라고 쓰여 있어요.

그 단어를 분석하면, 전치사 휘포아쿠오라는 동사의 합성어거든요. ‘아쿠오너희가 들었다. 너희가 이렇게 들었다.’할 때의 그 단어예요. 들었다, 아쿠오’ ‘휘포아래니까 아래에서 들었다. 잘 들었다!’ 아래에서 듣는 건, 윗사람이 이야기할 때 잘 들어야 되는 거잖아요? 경청이에요. 그걸 이제 순종이라고 그렇게 번역을 한 거죠.

그러니까 경계 아래에서 들어서, 경계 위의 사람이 되는 것! 요게 순종이에요. 그러니까 경계가 있고요. 요걸 하늘이라고 해 보자고요. 경계가 있고, 그 아래 사람 인() 자가 있는 게 아래 하()자예요. 그것이! 경계 위에 사람 인 자가 있으면, 윗 상()자란 말예요. 경계를 중심으로, 아래에서 들어, 아랫사람이 아랫것으로 들어, 위의 것으로 이해하여 윗사람이 되는 거! 이게 순종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그 순종이라는 단어는, 먼저 들음을 전제하는 거예요. ‘듣다!’ 이 들음을 전제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들음에 내용대로 호이에오, 되이지는 거그게 완전한 순종이에요. 내가 들은 것대로 내가 되어지는 것!’ 그걸 순종이라 그래요.

 

예를 들어, 진리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이, 구구절절이 다 진리로 보이면, 그 사람이 순종의 상태인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성경이 들려주려한, 구구절절이 다 진리라 그랬잖아요? 그러한 성경이 들려주려한 진리를 깨달아서, 모든 말씀을, 그것을 이제 간직한 이가 된 거잖아요? 그 말은, 그의 눈에는 이제 모든 게, 그 내용인 진리로 보이게 되었다는 거죠.

그 말은, 그가 진리가 되게 하고자 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잖아요? 고걸 순종이라 그래요. 성경이 한 말을 여러분의 행위로 다 지켜내는 걸 순종이라고 하지 않는다니까요.

 

순종이란, 자기 마음까지 자발적이 되었을 때, 순종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대부분이 하기 싫은 것 억지로 하고, 그걸 순종이라 그런다니까요. 성경은 그걸 순종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건 벼른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그 존재보다 힘이 세면, 언제든지 죽일 거야! 이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순종이라니까요. 이렇게 순종은, 내가 들은 걸 내 방식, 내 마음으로 깨달아서, 그것으로 간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귀가 잘못 되면, 엉뚱한 순종을 하게 되고, 그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종은 뭔가? 헬라어 둘로스라는 단어는, 영어의 그 서번트(servant)란 개념이 아니라, 슬레이브(slave) 개념으로 이해를 하셔야 돼요. 우리말로 적당한 단어가 없는데, 굳이 한 단어를 찾으라면 노예라고 번역을 하면 돼요. 노예! 엄밀히 말해 둘로스는 노예 정도가 아니라, 그 주인의 부속품이란 뜻이에요. 부속품! 한 부분! 자칼과 네케바처럼 이렇게 하나로 묶여 있어서, 주인과 하나로 존재하는 거! 떨어질 수 없는 거! 이게 둘로스예요. 사실은!

고대의 수중전(水中戰)에는 배 밑의 함선에서 항상 노를 젓는 노예들이 있죠. 그 노예들은 벤허 같은 영화를 봐서 아시겠지만, 쇠사슬로 배에다 딱 묶어놓습니다. 그리고 배가 침몰할 때, 그걸 안 풀어 줍니다. ? 그 노예는 그 배의 부속품이거든요. 그런데 배가 침몰하는데, 부속품이 도망가면 안 된다고 해서 안 풀어준단 말이에요. 그걸 노예라 그래요. 그걸 둘로스라고 그래요. 그렇게 하나로 묶여, 부속품이 되어 버린 상태!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죄의 종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죄가 시키는 대로, 죄만 짓는 사람이라는 의미보다는, 죄 자체를 가리키는 거예요. 죄와 연합이 되어서, 죄의 한 부분, 죄로 존재하는 것을, 죄의 종, 둘로스라 그래요. 우리가 그냥 죄의 종 그러면 죄라는 아주 나쁜 놈이 있고, 그 나쁜 놈이 시키는 일을 마지못해서 하는 덜 나쁜 .’ 요렇게 이해를 한단 말예요. 죄의 종을! 그게 아니라고요. 죄의 그 부분! 그거예요. 종이라는 건.

그러니까 그의 모든 행위(行爲)와 사유(思惟), 다 죄일 수밖에 없는 거죠. 그 죄의 종이니까! 그 죄의 부분이니까! 아무리 착해 보이는 일,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세상을 구제하고, 재산 수백억을 기부해서 기부 왕이 된다거나, 아침마다 나와서 밥을 퍼 준다거나, 아무리 착해 보이는 일을 해도, 죄의 둘로스인 상태에서 그걸 하면, 그 자체가 다 죄()예요. 인정하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그게 전부 죄라니까요.

 

반면에 주님()의 종은, 주인이신 하느님과, 주는 항상 그리스도로 번역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큐리오스아도나이를 번역한 거니까. 주님은 하느님이란 말예요. 주님의 종이라는 건, 주님(하느님)과 하나 된 부속품이잖아요? 그래서 그 둘로스, 아들이라고 읽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둘로스가 그런 단어라니까요. 종은 종인데, 그게 의()의 종, ()의 종이 될 때에는 아들이 되고, 죄의 종이 될 때에는 죄 자체가 되는 거예요. 죄 자체의 부속품, 부분이니까. 종이라는 단어 자체가, 자기의 주권을 상실한 단어란 말예요. 종은 주인이 이리 와!’하면 끌려가야 되고, ‘저리 가!’ 그러면 저리로 끌려가야 돼요. 자기의 선택은 없어요. 결정도 없어요.

 

여기에서 드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의 무기로 너희를 드려라, 몸을 드려라.’ 할 때의 그 단어예요. 파리스테미.’ ‘파라, 옆에’ ‘이스테미, 곧게[굳게] 서다, 똑 바로 서라는 말이라 그랬잖아요? 이스테미에서 스타우로스라는 단어가 나온 거예요. ‘스타우로스란 단어가 뭐예요? 십자가. 굳게 서버리는 거. ‘언약, 기둥이렇게. 그러나 그 십자가의 원래의 뜻은, ‘세워진 것, 언약!’이라 그랬어요. 기둥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열십 자 형태의 십자가에)가 아닌 이렇게(그냥 일자 기둥에) 박혔을 가능성이 큰 거예요.

 

그렇게 그 이스테미라는 단어와 함께, ‘세우다라는 뜻으로 사용이 되는 게, ‘티데미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세우다라는 뜻인데, 횡으로 차례대로 세우는 걸 의미해요. ‘티데미!’ 그러니까 하느님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 성전! ‘호 코스모스질서를 가지고, 차례차례 설명을 하여, 그 지성소의 하느님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게,’ 호 코스모스! 이걸 세상이라 하죠. 그렇게 차례차례 세워 설명하는 고걸, ‘티데미라 그러고, 요렇게 세워서, 설명하려고 하는 걸 내가 다 이해를 하여, 깨달았을 때, 위로 세우는 거예요. 종으로 세우는 걸, ‘이스테미라 그래요. 그러니까 언약이 이거라니까요. 십자가가 이거라고요.

 

이 세상에, 이 우주 만물, 인간, 성전, 성경. 이런 그 호 코스모스! 차례대로 티데미하여, 세워 놓아, 설명하려고 한 걸 누군가가 깨달아서, 굳게 세우면, 그가 바로 십자가(十字架)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굳게 선 기둥! 십자가! 이 언약이, 바로 이 티데미를 다 설명하고 있는 거란 말예요.

설명하고 있는 게, 이 십자가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란 뜻이에요. 그래서 티데미를 다 이해해서, ‘, 이거!’ 했을 때 굳게 서는 걸, ‘이스티미, 스타우로스, 십자가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런 말이에요. 하느님께서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늘, 호 우라노스, 성전이라고 그랬죠, 그런데 그 성전을 통하여, ‘아 이게 묵시구나. 이게 하늘이구나! 이게 진리구나!’라고 이해를 했을 때, 그가 언약(言約)이 되는 거예요. 그 때, 그 십자가가 그의 것이 되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그 십자가를 이해한 사람을, ‘아나스타시스, 부활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단어도 아나이스테미의 합성어거든요. ‘에피가 공간적 !’ ‘아나는 존재적 위의 것! 위에서 나다어딘지는 몰라요. 그런데 공간적 위 일 때는 에피인데, ‘아나는 그 존재적 위! 위의 것으로 굳게 서버리는 걸, 성경이 아나스타시스, 부활이라 그래요. 그 단어가 오늘 본문에 에 드려에 쓰여 있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 그 드리는, 언약에 의해 내가 되어지는 거란 말예요.

따라서 드려란 말은, 우리의 의지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세전 언약 속에 들어 있는 그 분의 백성들이, 진리의 눈과 귀를 선물 받아서, 땅의 것 속에서, 깨닫고 살아나서, 위의 존재로 우뚝 서는 것! 이 모든 걸 함의(含意)하는 거란 말예요.

파리스테미, 그가 드려짐이 되어라란 뜻이에요. ‘네가 드려짐이 되어라.’ 그래서 오늘 본문에 반복하여 휘파쿠오, 휘파코스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게 뭐라 그랬어요? ‘아쿠오, 듣다, 들음이란 뜻이라 그랬죠? ‘듣고, 되어짐이게 순종이란 말예요. 그걸 순종이라 번역한 거예요. ‘듣고 되어지는 거.’

하느님께서, 아래의 말로, 위의 것을 설명해 주세요. 그게 성경이고, 자연이고, 사람이고, 자연의 법칙이고, 다 그런 거죠. 다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아래의 것 수준 그대로 보고 이해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아래에 속한 거예요. 그냥 그것대로 보고 그것대로 이해하면, 그걸 아래에 속했다 그래요. 그리고 그 사람은, 아래에서 났다 그런단 말예요. 그걸 아래의 종, 죄의 종이라 그래요. 율법의 종, 옛 성전의 종.

그러니까 그렇게 아래 것으로 보고들은 걸 그것 그대로 내가 갖게 되면, 그것 자체가 순종이라 그랬죠? ‘아쿠오가 경청이니까. ‘듣다란 말이니까. 아래 것으로 듣다. 그런데 그건 나쁜 순종이란 말예요. 나쁘게 되어지는 거니까요. 그러니 아랫것을, 아랫것으로 듣고, 아래로 이해를 하여, 그 아래화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냥 흙이에요. 그냥 더스트(dust)라 그래요.

그런데 그 아래의 것을 가지고, 위의 것을 듣고 보는 이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희생제사 드려!’ 레위기에 수없이 반복되어 나오는 율법입니다. 희생제사 드려. 아래의 말이죠? 분명히. ‘희생제사 드려!(옛 성전의 말이에요.)’라는 이 말을 갖고, ‘희생제사는 하느님이, 하느님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시는, 그 스타우로스, 언약의 영 단번의 제사야!’, 위의 것을 알아듣게 되면, 고게 순종이란 말예요. 고 내용이 하느님이 준비하신 디카이오스, ()’의 종이라고 하는 거예요. 위의 것으로 알아듣는 이를 의의 종이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자 이상의 내용을 갖고 본문 16절을 다시 한 번 해석해 보세요.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세우라. 옆에 세우라.’ ()와 의(). ‘너희들은 이제 드려짐이 될 거야. 드려짐이 되는데, 그래서 양쪽에 서게 되는데,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들이 들은 바대로, 그 들은 것이 되어, 어느 편이건 설 텐데, 그러면 너희는 그 편이 되는 거야!’

혹은 죄의 종으로 죽음(死亡)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그래요. 그러니까 어떤 이는, 죄로 들어서 사망이 되고, 어떤 이는 의로 잘 듣는다.’예요. 여기 여러 가지 단어들이 있는데 그 단어들은 없어요. 그냥 너희는 어떤 이는 죄로 들어, 그 들음을! 죄로 들어 사망이 되고, 그리고 카이. 어떤 이는 잘 듣는다.’예요. ‘의로 듣는다!’

 

(로마서 6,17-18) 17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18 그리고 여러분은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의 ()’디카이오수네인데, 그 헬라어 맨 뒤에 수네가 붙으면, 무조건 그것이 존재란 뜻이에요. 오미크론 시그마와 비슷한 말이죠. ‘-os’가 붙으면 그 존재가 되는 것처럼. ‘디카이오수네디카이오스! 하느님의 그 의가 된 자! 그 의가 된 사람! 거룩하게 구별된 이들!’ 그들에게 지금 이 말을 주고 있는 거란 말이죠. 그들이 원래 죄의 종이었다, 그래요. ‘너희가 본래는 죄의 종이더니.’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의의 종이 되었다 그래요? ‘자기가 그들에게 옮겨준 교훈의 본을 잘 들어서.’ 이야기하잖아요? ‘잘 들어서.’ 17절의 그 순종은 휘파코어, 주의 깊게 듣다예요. 거기에 휘파고스는 아녜요. 거기서는 그냥 듣다라니까요. 잘 들어서! 그러니까 진리의 그 본이라는 건, 도장을 새겨서 푹 찍으면 똑같은 게 찍히잖아요? 그죠? 그런 거예요.

진리를 어떤 것에 담아서주는데, 그건 아닌 것! 그걸 교훈의 본을, 어떻게 잘 들어서, 그 교훈의 진의인, 진리로 깨달아 의가 되더라는 거예요. 어떻게 너희가 의의 종이 되었어? 원래 죄의 종이었잖아? 아 그런데 내가 보니까, 너희가 그 교훈의 본, 그 아래의 말로 설명해 준 걸, 그걸 너희들이 어떻게 진리로 잘 들어, 의의 종, 의의 한 부분이 되었네! ‘디카이오수네, 가 되었네!‘ 이 말이에요.

그런데 마음으로 순종하여들었는데, 그건 에크 카르디아거든요. 너희의 마음, 두 마음이잖아요? ‘에크밖으로!’ ‘너희의 마음 밖으로 들어예요. 마음으로 순종하여가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으로 들으면 어떻게 돼요? 두 마음으로 들으면 이게 다 율법이 된다니까요. 그런데 에크 카르디아’ ‘너희들은 어떻게 그 마음 밖으로 그걸 들었어?’ 그리고는 의에 이르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의 은혜다 그래요.

 

중간 정리를 하자면 이런 말이에요. 하느님은 창세전에 당신 백성들을 택하세요. 그리고 그들에게만 루와흐,’ 당신의 숨, 호흡, 생기, 성령을 불어 넣으시기로 합니다. 그걸 진리라고도 할 수 있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라 해도 좋아요. 왜냐하면 성령을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니까. 그리고 그가 곧 진리(眞理)라고 서신(書信)서가 계속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자 쉽게 말해서, ‘없음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는 그런 하늘을, 인간 수준에 맞게 제시해 주신, 그 본! 그게 본이란 말예요. 티포스본을 인간 수준에 맞게 제시해 주신 그 본을, 진리로 깨달아, 마음으로 갖게 되면, 그걸 호흡, 성령, 생기, , 생명, 진리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예요. 그게 생명이에요. 그게 영생이에요. 그게 살아 있는 거란 말입니다.

하느님은, 그 하늘의 , 르와호, 호흡을 아담에게 제일 먼저 불어넣으셨죠. 사람 만든 다음에 그 네페쉬에다가 생기를 불어넣었다, 생령이 됐다 그러잖아요? 아담은 그 아파르, 아래의 것, 먼지, 티끌! 그 아래의 것이었는데, 그가 그 아래의 것, 선악과라는 죄를 가지고 생명에 도달하잖아요?

그러니까 선악과는, 생명나무, 선악과 이렇게 따로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성경이 항상 단수로 나온다, 그랬어요. 동산 위의 나무는! 계속 단수예요. 영어 성경에도 ‘trees’로 되어 있는데, 잘못 된 거예요.

그러니까 나무가 하나인데, 하느님이 어디에서는 선악과라 그러고 어디서는 생명나무라 그런단 말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하늘의 그 생명은, 네페쉬에게, 원래 가지고 있지 않는 거죠, 먼지니까!

그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없으니까. 뭘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원래 가져보지도 못했고, 그게 뭔지도 몰라. 담을 그릇이 없어요. 그 때 그에게 그 생명을 무엇으로 가르쳐주겠느냐고요? 선악과라는 걸 통해서, 그 죄라는 걸 통해서, 이게 뭔지를 가르치면 그거 안 할 거 아녜요. 그걸 생명(生命)이라 그런다니까요.

하느님이, 진리, 복음을 설명하는 메카니즘이 항상 이래요. 이 땅에 율법을 주시고는, 그 율법이 뭔지를 가르쳐, 진리를 가르쳐요. 성전을 주시고는, 진짜 성전을 가르친다 말예요. 우리가 못 알아먹는 거니까.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에!

자 아담은, 하느님이 고 아담에게 불어넣어준 그 진리를 갖고, (진리는 물이라고 상징) 이걸 계속 아래로 흘려낸단 말예요. 그래서 셋에게 그걸 주고, 그걸 흘려 받은 셋이, 또 진리가 되어, 그 물을 또 흘려주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족보가 하 아담, 하 벤, 인자의 족보. 그게 신약에서는 호 휘오스, 호 안드로포스인자예요. 그게 인자의 족보란 말예요. 말씀으로 낳는 거예요.

그런데 맨 위의 분은 하느님인데, 루가복음에서 봤잖아요? 하 아담의 위는 하느님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다 소유격이라 하느님의 하 아담, 하 아담의 셋, 셋의 누구.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다가 예수님에서 끝나잖아요. 그 족보가! 그런데 하느님, 그 분은 소리도 없고, 나타남도 없단 말예요. 아니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감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한자의 ()’자는 있을 ()’의 반대말이 아니라니까요. 는 진짜 있는 건데, 아랫것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감지할 수 없는 걸, ‘라고 그래요. 그래서 영원을 무극(無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분은 소리가 필요하잖아요? 나타나는 게 필요하다니까요. 그래서 야훼라는 말 자체가 내 말을 네 말로 좀 쓰자.’예요. 그것도 그 하느님은 아니란 말예요. 진짜 그 하느님은! 우리가 못 알아먹으니까, 우리의 수준에 맞게 내 말을 네 말로 좀 쓰자, ‘야훼란 말예요. 그러니 소리가 필요해요. 그래서 나타나는 게 필요해서 성전을 준 거예요. 그거 봐! 보고 이해하라고.

그러니까 보세요. 그렇게 해서 알아듣는 이들이, 내가 진리의 물을 담아 아래로 흘려요. 그래서 족보가 계속 돼요. 랑과 신부, 자칼과 네케바가 하나가 되어서, 이게 사람이잖아요? 이게 그 진짜 사람의 족보라는 뜻이에요. 혈통으로 나는 족보가 아니라, 고 진짜 하느님의 백성들의 족보, 그걸 완성하는 분이 예수잖아요. 그런 육적 족보는 이제 예수님에게서 끝나요.

그것도 진짜 육적 족보는 아닌데,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그런데 그 자손 중에 하나씩 끌어당기잖아요. 그건 어떤 의미에서 육적 족보인데, 그게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는지를. 왜 나머지 아들들은 다 빠져버렸는지에 대해서 예수님이 설명해주는 거예요. 어떻게? 예수님, 인자의 완성으로 오신 분이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된다니까요. 그건 부정모혈로 잉태되어 탄생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라인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 안에서 진리로 태어나는 우리를, 그 안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란 말예요. 그게! 우리도 진리로 낳아지는 거지, 부정모혈로 낳아지는 게 아녜요.

 

그렇게 하느님은 인자의 족보가 은혜로, 산물로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예수님의 탄생기사와 공생애를 통하여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 진리이신 주님이 말씀을 담고, ‘내가 진리다오죽하면! 그 분이 내가 그걸 담고 온 자야. 아버지를 내가 담고 왔어. 설명하러 왔어. 내가 말로 왔어. 우리 아버지가 너희들에게 말을 던지려 해도 너희들이 못 담으니까, 내가 말씀으로 왔다. 그거 던지러 왔다!’고 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못 담는다니까요.

그러면, 아무도 못 담으면, 하느님은 어떻게 그 일을 성취하셔야 되느냐고요? 하느님의 말씀, 언약으로밖에 성취할 수가 없는 거 아녜요? 그래서 언약이 뭐라 그랬어요? ‘기둥, 스타우로스!’ 그래서 이 땅에, 역사에다가, 내가 언약으로만 너희들을 내 백성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걸, 이렇게 보여줄게 하고, ‘스타우로스, 기둥!’ 하느님이 굳게 세워버린 기둥을, 진리를, 땅에다가 박아버린 거예요. 너희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내 언약을 이 땅에 이렇게 박아, 너희들을 산 자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라 말입니다.

그 언약에 의해, 진리를 무상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마음에 꽂아 넣으신 거예요. 그 땅! 골고다가 우리라니까요. 우리 가슴팍! 거기에다가 언약을 꽂아 세우는 거예요. 그러한 언약의 기둥! 그 십자가를 이해하는 사람들을, 의의 종! 의를 듣는 자! 의에 순종하는 자라 부르는 거고. 그 표를, 표로만 인식을 하고, 여전히 율법으로 말씀을 듣는 자들을, 죄의 종이라고 하는 거요.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종이라 그래요. 그 단어란 말예요. 이게. 그리스도 예수의 종, 파울로스 둘로스 헤수스 크리스토스내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신이 있는 거예요. ‘내가 말씀이다.’ 그러는 거예요. 이제 그 인자의 족보의 라인에, 내가 들어갔다, 내가 흘려 받았다. 그분으로부터! 다마스코에서! 그러니까 내가 흘려보내주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부분이라고 하는 거요. ‘그리스도의 아들이다!’ 그러는 거요. 그리스도의 아들!

보세요. 사울은 베냐민 지파죠? 원래 베냐민 지파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잖아요. 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사울이라는 이름을 그렇게 많이 썼는지? 그 사울왕 처럼 되고 싶었던 거예요. 그게 모든 아담들의 동일한 욕심이라니까요. 그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자기를, ‘파울로스, 작은 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자기 이름을! ‘그 사울? 그거 아니었어!’ 이렇게.

사울이 그걸 포기하고 자기를 파울로스, 작은 자!’ 그 자리로 내려가 버리는 거란 말예요. 러나 하늘의 큰 자가 되는 거예요. 이 땅 위에서의 종은 작은 자이지만, 그 종은 주의 종,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진짜 큰 자라는 걸 바오로(바울)이 안 거예요. 그리고 자기를 그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 부분이다.’

 

창세기 11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다 그러죠? 그 때의 하늘이, ‘하늘들이라 그랬어요. 그 하늘들을 물론, 우리가 보는 이 하늘! 그 위의 대기권의 하늘! 그리고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하늘! 그렇게 이해를 해도 돼요. ‘하늘들이란 단어를! 그러나 이렇게 이해를 한 번 해 보세요. 하느님께서, 이 땅에, 진리, 진짜 그 하늘, 하느님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처음 주신 게 세상이에요 天地!

그러니까 첫 번째 하늘로,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 첫 번째 하늘로, 하느님이 이 땅에 주신 것이 첫 번째 성전이에요. 그건 눈에 보이는 이 호 코스모스, 세상이기도 해요. 그래서 호 코스모스, 호 우라노스 이걸 다, 하늘이라고 부른단 말예요. 성전이라고도 하고.

첫 번째 성전을 줬는데, 그 성전이 진리를 담고는 있는데, 말을 못 해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그 성전을 벙어리라 그래요. 말을 못해요. 못 알아먹어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미루어 추측하여, 그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제사지내면서, ‘이건 가?’하고 있었단 말예요. 두 번째, 말을 하는 성전을 보내야 되잖아요? 예수님이 자기를 뭐라고 그랬어요? ‘내가 성전이다.’ 그랬어요. 요한복음에서! ‘내가 성전이다.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세 번째 것으로 세우리라.’ 그랬단 말예요.

두 번째 하늘! 말을 하는 하늘이 왔어요. 말을 하는 성전이 와서 설명을 하는데, 이 인간들은 그것도 담을 능력이 없어요. 못 알아들어요. 그럼 어떻게 해요? 이것도 사라져야 돼요. 그래서 첫 번째 성전 사라지고, 두 번째 성전? 십자가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너희 안에 내 말을 담을까? 내 진리를 담을까? ‘언약!’ 내가 할 거야. 내가 마음 바꿔줄 거야. 네 마음 판에 새길 거야. 어떻게? ‘루와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이게 새 언약이잖아요. 에제키엘서 하고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새 언약의 내용이 그거잖아요.

내가 할 거야그래놓고, 그 두 번째 성전(역시 그것이 율법을 담고 있었으니까!) 말하는 성전까지도 이 세상에서 죽여 버리고, 없애버리고, 거기서 언약을 세워버려요. ‘스타우로스!’ ‘이스테미한다니까요. 굳게 세워버린다 말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에 의해 오는 분이 누구예요? 성령이죠? 그런데 사도 바오로가 고린도서에서 우리를 뭐라 그래요? 성전이라 그래요. 너희 안에 성령이 계신 이 성전은 무엇? 세 번째 성전이죠.

 

그러면 성령이 와서, 내가 첫 번째 성전, 두 번째 성전 이게 뭔지, 첫째 하늘 둘째 하늘이 뭔지를 알았어요. 그러면 세 번째 온 하늘이, 그 성전이 그 셋째 하늘, 진리의 진의!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내가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왔다는 말은 그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갔다 왔다는 말이 아니라, 거긴 못 간다니까요, 검을 현(),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거기는 못 가요. 꿈속에서도 못 간다고요.

셋째 하늘에 갔다 왔다고 이야기한 건, ‘내가 주님으로부터 진리(眞理)를 알게 됐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세도 하느님으로부터 그 진리를 전해 듣고, 그것대로, ‘그러면 그게 그 이야기예요?’라고 그 양식대로 성전을 지었잖아요. 그러니까 모세가 전달 받은 그 어떤 건, 바로 성전이었다는 거 아닙니까? 모세는 알았다니까요. 그걸!

사도 요한 마찬가지예요. 묵시라는 게 뭐예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진리! 그걸 하느님이 그에게 설명해줬어요.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데 알았어요. 그리고 나니까, ‘, 내가 겪은 거나, 내가 알고 있는 이거나,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일상이, 전부 진리네.’ 그걸 적어놓은 게 요한묵시록이란 말예요. 앞으로 일어날 어떤 게 아니라, 그건, 사도 요한 안에서 일어난 일이고, 일어나고 있었던 일이란 말예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진짜 이스라엘이 잖아요? 잘못된 말을 갖고, 남을 발목을 잡아 넘어뜨리던 내가, 이스라엘! 하느님과 함께 승리가 된 자! 우리의 이김은 믿음이라고 하니까, 그 믿음에 의해 성리가 된 이스라엘은 . 저 사람들 아니라니까요.

 

여러분 주님께서 소경을 고치실 때나 귀머거리를 고치실 때는 꼭 침을 뱉죠? 그 침이 뭐예요, 진리인 그 분 안에[서 나오는 유일한 물,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물이 침이란 말예요. 그 침이 눈에 발려지고, 귀에 발려지면, 항상 그게 열려요. 그게 흐르는 물의 의미에요. 그걸 레마라 그래요. ‘흐르다!’

요르단강을 건너서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죠? 요르단이란 뜻이 흐르는 물!’ 그래서 레위기에서 전부 정결예식 때는 흐르는 물로 씻으라 그래요. 고여 있는 물로 씻으라 하지 않는다고요. 그 말씀, 진리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런 거예요. ‘내가 부득불 전한다. 나는 알았어. 나는 가지고 있어.’ 그런데 말을 해도 못 알아듣고, 듣는 사람도 없어. 그러니까 억지로 전하는 거예요. 억지로! 이사야도 그랬어요. 하느님이 불러서 성전에 가서, ‘네가 들은 이거 전해!’ 이사야가 전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어. 다시 와서 하느님께, ‘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걸로 다시 주세요.’ 하느님이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그냥 그 이야기만 해. 듣든지 안 듣든지!’

그러니까 하느님은 들려줄 걸 목적으로 삼는 게 아녜요. 그 때 그런 이야기를 한 누군가가 있었는데, 심판(審判)의 근거로 삼으려고 그래요. 이사야가 그 이야기 한다니까요. 하느님이 그래요, ‘그 때 그 이야기를 했던 예언자가 있었는데그럴 거라고요. ‘그런데 너희들이 안 들었잖아.’

 

그렇게 세상은 감지할 수 없는 세 번째 성전! 세 번째 하늘을 삼층천이라 그래요. 이 말을 알아듣는 여러분은, 삼층천에 갔다 온 거예요. 천국에 어딜 갔다 와요? 그런 소리를 하지도 마세요. 꿈꾼 거 갖고 꼭 실제처럼. 그렇게 삼층천 아니라니까요. 자 진리를 깨닫고 나니까, 그 진리를 깨닫도록 주어진 육신과, 그 육신이 살아내어야 할 일상이, 다르게 보이더라는 거예요. ‘어 이건 그거 아니었구나!’ 이렇게. 그게 일상과 육, 세상이 진리로 함몰되어지는 거예요. 그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그래서 에녹이 하느님과 연합이 되자, 세상에서 없어졌다는 기록이 있는 거죠. ‘아인이란 단어가 없어지다라는 뜻이에요. 동행해서 하늘로 하고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에서, ‘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세상과 이제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진리를 깨닫도록, 그 진리의 껍데기로 몸까지 주어서 이 땅에 왔는데, 얘가 그럴 알아버렸네요.

그래서 엘로힘화가 되니까, 이 몸과도 상관이 없고, 세상과도 상관이 없는 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그가, 에녹이 하느님께 바쳐져, 없어지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렇게 없어지는 거예요. 껍데기의 가치는 사라지고, 내용에 가치가 느껴지는 거! 그렇다고 뭐 그냥 우리가 아무런 성숙도 없이, 뭐 어차피 이 육의 몸 사라질 거니까, 이렇게 된다는 것도 아녜요.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베드로와 바오로, 누가 먼저 복음을 들었어요? 누가 먼저 진리가 됐습니까? 베드로가 먼저 됐어요. 바오로는 한 참 후라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베드로가 바오로에게 찍싸게 욕먹습니다. 이런 수준이었다니까요. 베드로는 율법주의에서 한 동안 못 벗어났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올 때 이방인들과 밥을 먹다가 도망갔다니까요. 그래서 바오로가 네가 그러고도 진리냐, 이놈아? 네가 진리를 전하는 놈이냐?’ 사도였는데. 이런 성숙의 정도가 분명히 있어요.

진리를 안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이, 세상이 아녜요. 세상에 미련도 없어요. 사실은. 언제 불려도 갈 수 있어. 될 수 있으면 빨리 가는 게 좋지.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진리를 보게 되자, 자신이 자신의 몸 밖에 있는 것인지, 몸 안에 있는 것인지, 자기는 상관없었다, 그러는 거예요.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면 이 몸이 전부거든요. 이 몸만큼 확실한 진실이 어디 있어? 만질 수도 있는데. 이것만큼 확실한 실체가 어디 있냐고? 그런데 진리를 알고 나니까, 이것도 자기에게는 아무 가치가 없어지는 거예요. 자기는 이제, 자기 몸에 갇혀 있는 자가 아니란 걸 알았던 거예요. 거기 한 번 보고 가자고요.

 

(고린도후서 12:1-6) 1 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 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2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 사년 전에 세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 간 일이 있었습니다. - 몸째 올라 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 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 3 나는 이 사람을 잘 압니다. - 몸째 올라 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 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 4 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 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5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하며 나 자신에 관해서는 나의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6 내가 다른 것도 자랑할 마음이 있어서 자랑한다 하더라도 사실대로만 말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 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게서 보고 듣고 한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게 될까봐 나는 자랑을 그만 하겠습니다.

 

보세요. 하늘을 본 사람들이, 진짜 하늘의 이야기를 하면, 땅의 사람들은 절대 이해를 못하고, 그를 어리석다고 질타를 할 거라는 거예요. 아래 사람들은, 상선벌악! 인과응보! 이걸 공식으로 정의로 붙들고 있죠. 착한 일 한만큼 상 받아야 되고, 악한 일 한 만큼 벌 받아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원인을 제공한 그대로 결과를 받아야 되는 게, 이 세상 속 정의잖아요. 그게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런데 진리라는 건, 그것을 깨달아 가진 자들의 육을, 그 즉시 삭제해 버려요. 그 육이라는 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면 상 받고 벌 받을 가 없는데, 누가 상을 받느냐고요? 그것 자체가 껍데기로 삭제되는데, 사라지는데, 진리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데, 누가 상을 받고 누가 벌을 받느냐고요?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죄인으로 오셨잖아요. 그리고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그래요. 우리 거 ,죄 다 가져갔잖아요? 우리 모든 백성들이 그에게 안수했다니까요. 그 제물에. 내 죄 가져가라고, 그리고 빨리 빨리 죽으라고. 그럼 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그는 죄인으로 왔으나, 죄는 없으셨다.’ 그래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 분은 우리의 죄를 다 가져가셨고, 뱀이 되어 죽으셨어요. 구리 뱀이 되어서! 그러면 죄인으로 죽었잖아요? 죄 있는 거라고. 그런데 왜 성경이 죄는 없다고 그러느냐고요? 그 분이 진리가 되는 순간, 언약의 기둥! 스타우로스에서 진리가 되는 순간, 그 죄를 가진 육이 삭제되는 거예요. 그래서 죄가 없어지는 거라니까.

여러분이 하느님의 언약을 이해하고, 그 언약 안에서 그 진리가 되면, 여러분의 모든 죄가 없어지는 거예요. 삭제되는 거라고요. 그걸 구원 받았다고 하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인간의 자존심이 그걸 인정할 수 없는 거예요. 몸 안이나 몸 밖이나 아무 상관없다니까요. 이제는 그 몸이 삭제되었는데.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죄의 종이었어요. 죄 자체였단 말에요. 그런데 진리의 말씀이 들려왔어요 아쿠오했어요. 들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깨달아서 진리가 됐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의의 종이 됐어요. 그러면 그는 이미 죄 없는 자가 된 거예요. 그 존재가 삭제된 거란 말예요.

에녹처럼 없어졌다니까요. 바울처럼,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상관없는 자가 되어 버렸다니까요. 없어져버렸다고요. 그건 변할 수 없는 원칙이란 말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에. 이제 진리를 담은 이들은 그렇게 언약으로 굳게 서서, ‘아니스테미, 부활한 자로 사는 거예요.

다시 산자! 의의 것으로 산 자가 되는 거란 말예요.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아멘이라고 하신 분들이 그 순간 천국을 경험하신 거예요. 그게 현재 천국이라 그래요. 그런데 지속되지 않죠? 이게 현재 천국의 한계예요. 이 땅에 와 있는 천국!

 

성경에 보면, ‘천국이 왔다 하느님나라가 왔다!’ 계속 이야기를 하는데, ‘어디 와 있는 거야? 얜 도대체, 네 안에 있다. 이러기도 하고.’ 그러죠? 그거 현재 천국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갈 그 천국은 아녜요. 그런데 그것의 어떤 모형, 그것의 축약, 그것의 핵심을 우리가 이 땅에서 순간순간, 잠깐 잠깐 경험할 때, 고걸 하느님나라라 그래요.

나라라는 단어, 바실레이야는 원래 통치하다라는 단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통치라는 건, 섬김이라는 단어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섬기다라는 것은, 말씀으로 섬기는 거죠.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이 말씀으로 통치하셔서, 우리를 섬겨주시는 곳이 하느님나라고, 세상나라는,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는 곳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섬기고 있으면, 이게 진짜 무시무시한, 그리고 고단하고 힘든, 섬김이 된다 말예요.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되는 거! 그러나 그 분의 섬김을 말씀으로 받을 때, 거기가 진짜 천국이 되는 거라니까요. 자유(自由)에요. 그게! ‘아멘!’하면서 그렇지!’하는 요 순간, 그게 하느님나라라니까요.

그 때 접촉점이 딱 말씀하고 진리하고 접촉점이 만들어졌을 때! 그러나 금방 또 잊어버리잖아요? 그러나 그 사람은 하느님나라라니까요. 말씀이 그 안에 들어가서, 그걸 이야기해 줄 때마다, ‘맞아!’라고, 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 그게 잊어버리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면, 그곳이 천국이에요. 진짜 자유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내가 천국이야!’ 그랬어요. ‘내가 하느님나라야!’ 뭐가 천국이에요. 그게? 구유에 와서 직싸게 고생하고, 친척들이 벼랑에다 밀려고 해! 고향 사람들이 떨어뜨려 죽이려고 해! 제자들이 하나도 못 알아들어! 다 배신하고 도망 가! 가족들이 와서 우리 형이 미쳤나봐!. 이게 무슨 천국이에요?

천국은, 하느님이 그를 말씀으로 통치하여, 그 하느님이 모든 걸 책임져주시는 게 천국, 하느님나라예요. 너희들이 이렇게 될 거야를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주님이 자기보고, ‘내가 천국이야.’ 그런 거예요. ‘내가 하느님나라야.’라고 한 거예요. 그러나 그건, 이 땅에서 잠깐 보여지는 현재 천국이란 말예요.

그래서 하느님은, 베드로를 시켜 우리에게, ‘너희들이 천국이야!’ 쓰라고 주신 거예요. 우리를 거룩한 나라라 그러잖아요? 베드로가! 천국이란 뜻이고, 하느님나라란 말이거든요. ‘너희들이 하느님나라야!’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나라냐고요? 그 말이,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그 말씀대로, 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아니 이미 되게 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네가 하느님나라야! 네가 섬김 받는 자야! 네가 통치 받는 자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말로, 자기가 된 진리로, 그걸 흘려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걸, ‘디콘(deacon), 집사라고 한다, 그랬죠?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원로보다 집사가 높은 거예요. 그건 원래가 같은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같이 교회에서 리더로 뽑아서, 그가 말씀을 전하여, 고아와 과부를 섬길 수준이 됐을 때, 그걸 디아코노스, 집사라 그래요. 그래서 일곱 집사! 일곱 번 말하다, 말씀을 전하는 일곱 집사를 채우는 거예요. 그래놓고 일곱 집사의 대표가, 하나는 구약 설교하다가 죽고, 하나는 신약으로 완성하고, 집사들은 사라지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하늘이라는 말을 주시고, 그 하늘의 자리를, 텅 비워두셨어요. 검게 비워두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려고 올라가면, 우리는 그 하늘을 찾을 수 없어요. 끝까지 검어요. 잡히지 않아요. 그렇다고 하늘이 없는 건가요? 그러면 우리 뭐 하러 예수 믿어요? 있어요. 그 하늘은 있다고요. 그런데 우리가 그 하늘을 담을 수 없기 때문에 텅 비워뒀어요.

하느님도 마찬가지예요. 그 하느님이 누구인지 우리의 수준으로, ‘엘로힘으로 이렇게 설명은 해 주는데, 그 하느님은 우리가 몰라요. 감지가 안 돼요. 그렇게 있는데, 없는 거예요. 없어요. 이 세상에는! 그러니 하느님이 있다? 없다? 이거 불가지론자들 하고, 무신론자들 하고, 싸울 필요가 없어요.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해요.

그렇게 진짜 있는데, 우리의 눈과 귀가 어두워서 감지가 안 되는 걸 무()라 하죠. 그런데 그걸 진리로 깨달아 알아서 ! 그거!’라고 했을 때, 그걸 소유한 걸 뭐라 그랬어요, 노자에서? 무소유(無所有)라 그래요.

그 어떤 스님이 이야기한 무소유는, 노자에게서 끌어다 썼지만, 그건 무소유가 아녜요. 노자를 잘못 이해하신 거예요. 무소유라는 건, 아무 것도 안 갖는 게 무소유가 아녜요. 이미 몸뚱이도 갖고 있는 데, 어떻게 무소유라 해요? 그냥 열심히 노력하자, 추구하자 이거예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노자가 이야기한 무소유는, 노자의 핵심은 위 무위(爲 無爲) 하지 않는 걸 하는 게노자의 핵심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진짜 있는 걸 사람들은 몰라요. 그러나 진리의 도를 아는 그들은 그 진짜 있는, 그 무()를 알아, 마음에 갖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걸 무소유라 그래요.

 

그러니까 진짜 무를 소유하게 되면, 내가 뭘 좀 많이 갖고 못 갖고, 그리고 남이 뭘 많이 가지고 못 가지고에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왜 남에게 , 너는 너무 많이 가졌어, 그거 좀 나눠 줘!’ 뭐하러 이걸 이야기하냐고, 내가? 내가 이미 무소유가 됐는데! ()를 내가 소유했는데. 왜 그 없음인 그걸 갖고 남에게 너 너무 많이 가졌어!, 너 조금 가진 사람들에게 나눠 줘!’ ‘, 나는 왜 이렇게 없어? 나는 왜 이렇게 부자야!’ 이게 왜 우리에게 문제가 되어야 되냐고요?

전부 그 무소유까지도 소유하려고 하니까! 무소유해야 돼! 청렴(淸廉)하게 살아야 돼. 청빈(淸貧)해야 돼. 이러고 앉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상 줄까봐, 그건 자학(自虐)이라 그래요. 수도원에 가서 자기를 채찍으로 때리는 거와 똑같다니까요. ‘이렇게 가난하게 고통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으니, 쟤보다는 나를 좀 낫게 여겨주세요.’ 이거 아녜요?

아니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잘 사세요. 그리고 일했는데도 그 수준 밖에 안 되면, 그냥 그렇게 살다 가는 거예요. 그렇다고 뭐 우리가 진짜 굶어죽고 이런 건 없잖아요? 아니 밥이 없어서 정말 굶어 죽을 정도면 제게 이야기하라니까요. 내가 그 정도는 안 되게 도와드릴 테니까요. 어디 지금 다리품만 조금 팔면, 공짜로 밥 주는데 부지기수예요. 그것도 골라먹는다고 그러던데요. (하하하)

그런데 우리가 왜 그렇게 걱정하느냐 하면, 우리가 그 진리 안에서 이 세상을 깨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요. 여전히 호 코스모스에 묶여 있기 때문에 그런다 말입니다. 여러분 진리가 되면, 반드시 버려야 할 것들이 있어요. 알았으니까 이렇게 살다 가면 되나? 이걸 영지주의라 그래요. 천만의 말씀. 지식으로 갖고 있다고 해서 진리가 된 게 아니라니까요. 들었으면 으로 가야 돼요.

 

부자 청년이 어떻게 영생(永生)을 얻습니까? 그랬을 때 예수님이 일부러 율법 이야기를 꺼낸다고요. 부자 청년이 나 다 지켰습니다.’ 그러죠? 다 지켰습니다.’ ‘그러면 네 소유(所有)를 가난한 자들에게, 그 가난한 자가, 산상수훈을 통해서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자, 말씀이 없으면 곧 죽는 자, 그 단어란 말에요. 가난한 자에게, 네가 지금 가지고 있다는 그 소유! 어려서부터 열심히 지켜서, 네 재신뿐만이 아니라, 하여튼 네가 네 가치로 챙겨서 갖고 있는 그거 한번 나누어주고 와 봐!’ 그래요. 주고 오라고 그래요.

청년이 못 줘요. ? 일차적으로 진짜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흘려 내려줄 진리가 없고, 정말 율법주의자들은요, 자기가 행한 행위들을 하나하나씩 쌓아서 이걸 상으로 가져가야하기 때문에, 이걸 못 나눠줘요. 못 준다니까요. 아까워서. 그 둘을 다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 너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네 스스로 노력해서 획득했다고 나에게 얘기했잖아? 그러면 금방 버려져야 할 게 있는데, 너는 그것은 못 버리고 있네. 그러니 네가 낙타야! 바늘 귀 문으로 절대 못 들어가는 네가 낙타야!’라고 한 거란 말예요.

진주 장사가 진짜 값진 진주를 발견하면, ‘자기 소유를 다 팔아예요. 다 팔아! 행위와 진리를 바꾸는 거라니깐요. ‘밭에 감추인 보화(寶貨)를 발견하면, 가진 소유를 다 팔아라니깐요. 일부만 팔아가 아니라, 다 팔아!

아나니아와 삽비라 보세요. 일부만 팔아, ‘요게 내 신앙생활이에요.’라고 자랑하려고 하니까, 하느님이 죽이잖아요. ‘그건 안 받아!’ 그랬다고요. 그것도 다 팔아서 내라는 것도 아니고,

 

당시에 열다섯개국 이상의 사람들이, 오순절 날에 와서 진리를 들었다고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집으로 안 가네. 디아스포라로 퍼져 있던 사람들이, 불같은 성령, 진리의 말씀을 베드로로부터 듣고 가기가 싫은 거예요. 계속 있었어요. 그게 초대 교회예요. 그 사람들이.

그러니까 노자(路資)는 과월절부터 오순절까지의 노자만 갖고 왔을 거 아녜요. 200만명 중에 진리를 들은 사람이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사람들이 집에 안 가고 있으면, 먹여 살려야 될 게 아녜요? 그래서 그 중에 예루살렘 사람 중에 부동산이 있던 사람들이 그걸 팔아서, 그 사람들을 먹인 게 유무상통이에요. 여러분은 안 그러겠느냐고요? 교회는 뭐 재산 다 내놓고, 이렇게 해야 돼! 이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다가 하느님이 흩으니까 각자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교회를 세운 거예요. 열다섯 명, 스무 명 요렇게. 사도 바오로가 그곳에 돌아다닌 거라니깐요. 가보니까 금방 개판이야. 그래서 쓴 게 서신서(書信書)들이에요. 몇 명 안 됐다니까요. 그 당시에도! 그렇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하는 순간, 우리의 행위를 버리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처럼 한 번에 그렇게 다 버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차근차근, 차근차근, 거기에 묶여 있던 것에서 조금씩, 조금씩 풀려난다고요. 그리고 거기서 자유를 느끼게 된다 말예요. 그게 셋째 하늘이에요.

그런데 호 코스모스! 성경! 성전!’ 이걸 그 수준으로만 보고, 그 첫 번째 하늘! 그걸 그냥 섬겨버리면 그 검은 하늘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지옥이라 그래요. 그 검은 하늘! 첫 번째 하늘! 그리고 그 검은 하늘에서 섬기는 이를, ‘마귀라 그래요.

하느님은 우리를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가면 갈수로 요렇게 줄어들 거예요. 지금 다 알아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여기서도 이제 많이 털릴 거라고요. 저렇게 줄어든다 말에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너는 내 신부야.’로 찍은 사람은 반드시 그리로 끌고 가세요. 그게 하느님의 원칙이에요.

하느님이 사람을 만들면서 하나의 원칙을 세우셨는데, 뭐냐 하면? ‘사람이 독처(獨處)하는 건, 좋지 못하다.’인데, 그게 악하다거든요. 악이라는 것을 거기서 처음 말씀하세요. 악이 뭐냐 하면? 홀로 독처(獨處)하는 거!’ 그러면 거기에 제일 먼저 걸리는 분이 누구예요. 홀로 사시는 분은 하느님이라고요. 그러면 사람을 만들어 놓고, 하느님이 제일 먼저 하셔야 될 일이 뭐예요? 얘에게 루와흐, 생기를 넣어 빨리 진리로 만들어, 내 신부 삼는 걸 하느님이 먼저 하셔야 된다니까요. 그래야 하느님이 악에 안 걸려요.

? 하느님은 악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게 그 말이란 말예요. 그러면, 하느님이 창세전에 여러분을 택했다면, 반드시 여러분은 그리로 가게 되어 있어요. 하느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그것을 원칙(原則)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그러면 진리는 하나예요. 그걸 깨서 율법으로 갖게 되면, 복수의 책! 심판의 책! 저주의 책을 갖게 되는 거예요. 하나예요.

그래서 말은 자꾸 하나로 수렴이 되어야 돼요. 뭐로? ‘아가페! 은혜! 하느님! 진리!’ 이렇게 수렴이 되어야 돼요. 하여튼 짐승들 중에 말이 제일 많은 게 사람이에요. 오죽하면 사전(辭典)이 다 필요하겠어요? 짐승들 중에 사전 갖고 있는 것들 봤어요? 왜 이렇게 말이 많이 필요하죠? 삶이 복잡해서 그래요. 되고 싶은 목표가 너무 많으니까, 뭐 많이 만들어내고 발전시켜야 되거든요.

개들에게, 의복, 신발, 회비, 도덕, 윤리 이런 말 필요해요?. 필요 없어요. 걔네들은 단순하거든요. ‘멍멍, 밥 먹자! 멍멍멍 누구야?’ (하하하) 뭐 이런 거 몇 개만 있으면 산다니까요. 개는. 그래서 개팔자 상팔자라는 게, 틀린 말이 아니라고요. 그게!

그런데 우리를 보세요. 사전을 두어야 할 만큼, 점점 또 말이 늘어나요. 이게! 그렇게 말이 많은데, 이렇게 힘들어요. 매년 자살하는 사람은 늘어나고, 고단하고 힘들다니까요. 그 많은 말을 갖고, 그 진리를 못 알고 가면, 그게 개보다 못한 인간이에요. 주님이 그랬잖아요. 너는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 나지 않는 게 제일 좋은 거예요. 그런데 났는데 이거 어떻게 해요? 진리라도 알고 가야지.

개만도 못하게 갈 수 있다니까요. 우리가! 그 많은 말을 갖고! 그거 율법이라고요. 말을 깨어서 부스러기로 갖고 있으면, 그게 율법이에요. 성경을 깨서 그렇게 부스러기로 갖고 있으면 그게 율법이란 말입니다.

캘리포니아는, 1365일 중에 300일 이상 청명(晴明)해요. 구름이 한 점이 없어도 하늘이 그래서 캘리포니아에서는, 썬 글래스를 안 끼면 눈을 버려요. 백내장 걸리고. 멋으로 쓰는 게 아니라, 진짜 써야 되거든요.

그런데 나는 거기서 단 한 번도 그 세상이 회색이 아닌 적이 없었어요. 눈을 뜨면 늘 회색이야! 사실 세상은 그래요. 여기에서 뭐 대단하게 밝은 광명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하나 놓아가는, 그 삶을 경주하시면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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