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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 율법(律法)에서 탈출(脫出)하라 (로마6,19-2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22 조회수1,027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10. 22. [연중 제29주간 목요일독서] 도란도란글방

 

 율법(律法)에서 탈출(脫出)하라

 

(로마6,19-23)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할까 하여 이렇게 인간사에 비추어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온 몸을 더러운 일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기어 불법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온 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는 여러분은 정의에 예속되지 않고 제멋대로 놀아났었습니다. 21 그 때에 여러분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들밖에는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활은 결국 죽음을 안겨 줍니다. 22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느님은 진리의 복음을 주시면서 자유의 나라로, 내 아들의 나라로, 탈출하라 하시는데, 진리의 말씀을 받아 듣고도, 그 자유가 익숙하지 않아서, 여전히 율법의 나라 종으로 살고 있는 게, 성도라는 사람들의 현실(現實)이에요. 새 신랑을 주시면서, 그 새 신랑 곁에 서서 영원한 안식으로, 영원으로 안식을 누리라고 했더니, 이미 죽어서 시체가 되어 버린, 율법의 신랑 곁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더라는 거예요.

하느님은 그 신랑을 죽여 버렸는데,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인생을 통해서, 반드시 누군가와 혼인을 하여, 이 세상을 떠나가 되어 있어요. 뭐 독신주의자들을 뭐라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런 결혼 말하는 거 아녜요. 반드시 모든 인간은, 혼인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건 하느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정하신 원칙이었어요. “존재는 절대 獨處, 獨居해서는 안 된다. 그게 악하다’”라고 했단 말예요. 악이란 말을 처음 쓰신단 말예요. 존재는 독처하면 안 돼. 반드시 짝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이 땅의 모든 만물이, 다 짝을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모형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해가 있으면 달이 있고, 실체와 그림자, 하늘과 땅, 바다와 뭍, 물과 불, 여자와 남자, 새와 물고기, 신랑과 신부! 이렇게 전부 짝이 있단 말예요. 하느님께서 그렇게 독처하는 것들이, 악하다고 원칙을 정한 건, 홀로 독처하고 계신 당신의 그 신부로, 반드시 교회를 세우고야 말겠다는 언약의 선언이었단 말예요.

그것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악할 수 없으므로, 나는 반드시, 내 신부들을 내 옆에 세우고야 말거라는 언약의 선언이었단 말예요. 그리고 그들을 당신과 연합시켜서, 영원으로 사는 존재로 만드는 거! 이게 하느님의 위대한 작정이었어요.

그런데 미리 언급했던 것처럼,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신랑이, 그리스도로 오신 하느님 말고, 하나가 더 있어요. 그게 바로 라는 신랑이에요. 호 코스모스, 세상이라고 불러도 상관이 없어요. 라는 신랑은, 율법이라는 것을 통하여 구축이 돼요. 하나하나 구축이 돼요. 그래서 그 라는 신랑은, 호 코스모스전체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걸 세상을 사랑한다!’라고도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 신랑, 그 세상을 사랑하면, 반드시 를 낳게 되어 있어요. 나를 증명하고, 나의 가치를 위해 살게 되어 있단 이야기예요. 호 코스모스의 세상에만 묶이면, 그 호 코스모스의 세상에서, 완전한 현실, 진짜 현실로, 받아들여지는 게 뭐죠? ‘잖아요, ‘!’ 이것만큼 확실한 현실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반드시 얘를 낳게 된다니까요. 거기에만 묶여 버리면!

그렇게 우리는 라는 신랑과, 그리스도 예수라는 신랑 중 하나를 택하여, 우리에게 허락된 숨이 끝날 때, 완전한 혼인(婚姻)을 하게 돼요. 둘 중의 하나와. 모든 인간은 이 둘 중의 하나와 혼인을 하게 돼요. 그걸 다른 말로 바꾸면 라고도 바꿀 수 있어요. 죄와 혼인하는 자! 의와 혼인하는 자!

 

그렇게 혼인이 성사되면, 그들은 그 혼인의 열매로 반드시 아들을 낳아요. 후손을 낳아요. 그런데 죄와, ‘와 혼인을 한, 세상과 혼인을 한 이는, ‘를 아들로 낳고, 그리스도와 혼인을 한 이들은, 진리만 낳아요. 그리스도를 낳아요! 그리고는 자기가 낳은 아들과 함께, 그 아들이 가야할 곳으로 갑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내용이에요. 너희가 옆에, 진리의 겉옷을 입고 굳게 서면, ‘파리스테미,’ 굳게 서면, 이미 서 있는 언약의 기둥 그 옆에, ‘파라, 이스테미옆에 굳게 서면, 너희들은 영생이라는 열매를 얻게 되고, 영생이라는 아들을 낳게 되고, 죄 옆에 파리스테미, 굳게 서게되면, 사망이라는 열매를 얻게 되니, 너희가 서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 확인해 보아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마지막이,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나는 지금 신앙생활을 통하여, 나를 증명하고 나를 낳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빼앗기고, 나를 차압당하고, 내 안에 진리, 그리스도를 낳고 있는가? 그걸 자기부인이라고 하잖아요? 요걸 확인하면 돼요.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느님, 내가 이렇게 잘 하고 있어요. 나 잘했죠?’라는 나를 낳고 있어요? 아니면, ‘하느님, 나는 죄인 중에 죄인이예요. 내 안에 가치 있는 거라고는, 내 안의 진리! 성령 밖에 없네요.’ 이리로 가고 있냐고요? 뭘 낳고 계시냐고요? 그런데 오늘날 시중에서는 전자(前者)를 훌륭한 신앙인이라 그래요.

 

성경에 보면,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들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자주 표현합니다. 그건 당시, 그들이 약속한, 그들이 익숙한, 약속으로 만들어 놓은, 그런 혼인 풍습을 사용해서, 하늘의 언약을 설명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시청각 재료였어요. 당시 고대 혼은 풍습은, 7일간 치러졌습니다.

혼인잔치가! 7일일까요? 모든 건 진리를 설명하고 있어요. 7일간 치러져요. ? 신랑이 언제 올지 몰라. 신랑이 떠났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와도, 당시에는 뭐 전철이 시간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사고도 잦고 그래서, 언제 신랑이 도착할지 몰라요. 그래서 7일간 잔치를 벌여요. 그 날 중에 아무 때나 신랑이 오면 되는 거예요.

신랑이 부모를 떠나서 홀로, 신부의 집으로 가요. 장인과 장모가 있는 집으로 가는 거예요. 그걸 장가간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내가 이스라엘에게 장가간다.’라고 한 건, 내가 먼저 너희들에게 찾아가겠다는 뜻이에요. 장가를 먼저 가야 돼요. 신랑이! 그리고 신부는, 그 신랑이 언제 올 줄 모르니까, 목을 길게 뻗고 기다리고 있어야 돼요. 7일 동안! 그런데 들러리들과 함께 기다리죠? 열 처녀의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예요. 그런데 어떻게 신랑이 자기 신부를 찾아요? 내가 미리 보낸 빙패물! 믿음을 그가 갖고 있어야 돼요. 그걸 갖고 있는 자가 신부예요. 딱 찾아요.

그리고 집으로 데려 갑니다. 누구 집이에요? 장가예요. 장인 장모의 집! 그곳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밤에 혼인 예식을 치러요. 밤 같은 세상에, 신랑이 와서, 그 신부의 집에서 같이 산다니까요. 먼저! 그리고 바로 자기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첫 아이를 낳을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아야 돼요.

 

똑같은 거예요. 하느님이 오셔서, 우리와 혼인을 하세요. 그리고는 우리가 그 예수라는, 그리스도라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여기서 사세요. 그게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기간이에요. 그게! 그리고 첫 아들을 낳으면, 신부를 데리고 이제, 자기 집으로 가는 거예요.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계신 시집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장가를 하느님이 오시면, 우리가 그 신랑과 함께, 열매를 열심히 맺어, 아들! 그리스도라는 열매를 낳아, 시집을 가면, 그 때 혼인잔치가 완료되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구원의 서정이에요. 굳이 이야기하자면!

 

신랑(新郞)이라는 말은, 여러분, 새 신()자에, 나라 이름 랑()자예요. 원래의 뜻이에요. 신랑이 뭐예요? 새 나라를 받는 거예요. 내가! 새 신랑을 맞이하게 되면. 원래 뜻이 그렇단 말예요. 새 나라가 되는 거예요. 내가 새 나라를 받는 거라니까요. 원래가! 혼인이라는 것이! 그걸 가져다가 하느님이 그대로 시청각 재료로 써서, 언약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들에게 익숙한, 고대 사람들에게 익숙한 재료를 써서요!

그렇게 하느님께서 밤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당신 신부를 찾아, 장가가시면, 신부는, 그 진리의 말씀으로 오신 신랑과 함께, 열심히 열매를 생산하게 돼요. 둘이 함께 낳을 아들을 준비하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가 맞아들인 신랑과 함께 열심히 아들을 준비하다가, 마침내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을 낳은 여자는, 삭제되고, 그 아들이 되어, 아버지의 나라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신랑이, 그리스도가 아닌, 진리가 아닌, 법으로 나에게 인식이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가짜 남편과 함께, 열심히 라는 아들을 낳게 되어 있어요. 그걸 잘 지키고, 나를 계발하고, 성숙시켜서, 근사한 나를 낳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걸 법으로 인식하게 되면! 그 신랑을! 그리고 그 낳은 라는 아들과 함께, 영원한 흙의 세계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걸 지옥이라 그래요. 흙에서 온 건, 그냥 흙으로 가!

그런데 문제는, 선악과를 입에 문 아담들의 한계는, 진리로 오시는 그리스도라는 신랑을, 하나같이 알아보지 못한다는 거예요. 아무도 못 알아봐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모든 아담들은, 그 신랑을, 다 법으로 인식하게 되어 있어요. 처음에는! 그리고는 그 신랑을 통하여, 나를 낳는 것에 몰두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처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에,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내 몸이라도 불살라서 하느님께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까? 하느님나라는 그거 아니라니까요. 하느님이 우리를 섬기는 나라지! 그러니까 집 팔아, 논 팔아,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잘하는 건줄 알고!

그런데 하느님께서 당신의 신부들이, 당신을 그렇게 오해(誤解)하도록 놔두지 않으세요. 그래서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껍데기의 신랑! 율법의 신랑! 그 신랑을 어떻게 해야 돼요? 죽여야 돼요! 그게 예수의 십자가란 말예요. 무엇과 함께 죽여요? 그들이 진리인 신랑을 껍데기로, 법으로 오해한, 그 오해와 함께 죽이는 거예요. 그걸 ()’라 그래요.

그래서 우리의 죄가 거기서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누구와? 껍데기 신랑과 함께! 오해되어진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거예요. 그게 언약이라니까요! 그래야, 그 껍데기가 죽어야, 진리이신, 진짜 신랑이 새 남편으로 나에게 주어지게 돼요. 그리고 새 남편과 함께 그리스도라는 아들을 낳게 되는 거예요.

성경은 그렇게 율법의 신랑과 함께, 나를 낳는 모든 행위와 사유를, ‘라 그래요. 그런데 그 율법의 남편과 함께 보내던 시간을, 성경이요, 부정하지 않아요. 그냥 가치 있다그래요.

 

오늘 본문을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 곳이 바로 다음 장인 로마서 7장이에요. 제가 왜 로마서 6장을 자꾸 신부와 신랑의 이야기로, 옷의 이야기로, 예복의 이야기로 설명을 해드리느냐 하면, 바오로가 그렇게 끌고 가기 때문이에요. 7장에서 이 이야기를, 신랑과 신부의 이야기로 예를 들어, 마쳐버린다 말예요. 7장으로 가 보세요.

 

(로마7:1-7)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법률에 정통한 사람들이니 말씀드리겠는데, 법률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2 결혼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자기 남편에게 법적으로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3 따라서 자기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와 사는 여자는 간음한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그 법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더라도 간음하는 것이 아닙니다. 4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한 몸이 되어 죽음으로써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른 분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유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5 전에 우리가 육적인 사랑을 하고 있을 때에는 율법 때문에 우리의 온 몸에 죄스러운 욕정이 발동하여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6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죽어서 그 계약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7 그러면 율법이 곧 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던들 나는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없었더라면 탐욕이 죄라는 것을 나는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주관하다는 말을 한 뒤에, 그러면 그 사람이 죽는 이야기가 나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남편의 죽음을 이야기한단 말에요. 거기에다가! 그러면 그 말은 무엇이겠어요? ‘네가 죽는 건, 바로 네가 오해하고 있는 그 남편이 죽으면, 네가 죽는 거야라고 연결시키는 거예요. ‘너는 죽어야 돼? 그 법에 대해서 자유로워질 거니까. 그런데 네가 죽으면 말짱 도루묵이잖아요? 얘를 살려야 되는데, 그래서 남편을 죽여서 얘를 죽이는 거예요. 얘의 ()’를 죽이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은혜란 말예요. 그것이!

죽어야 할 남편이 죽게 되면 법에 대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가 함께 죽게 된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다른 남자에게 가는 걸 음부(淫婦)라 그래요. 그런데 율법은 나쁜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그 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 그 남편이 아무리 살아 있어도, 야반도주를 해서라도 도망 가!’ 이래야 맞잖아요? 못 가게 한단 말예요.

왜 그러죠? 그 말은, 그 남편을 옹호하는 말이 아니라, 언약 성취의 그 주도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누구도,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남편을 벗어나서, 진리로,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그 남편을 죽이는 방식으로, 그 신부를 구출해내는 것이, 창세전 언약이란 말이에요.

아무튼 그렇게 해서 율법인 남편이 언약의 기둥에서 죽었어요. ‘이스테미언약의 기둥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남편 잃은 여자는 새 남편을 맞아도 아무 문제가 없죠?

, 우리가 모형으로, 율법으로 바라본 예수, 그래서 아무도 안 따랐잖아요. 오해했으니까. 아무도 안 따랐단 말예요. 그 예수가 죽었어요. 언약의 기둥에서! 그러면 이제 새 남편인 진리의 성령이 오신단 말예요.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라는 말씀!’이라고 이야기한단 말예요. 성경이! 그래서 예수는 반드시 죽어야 된다니까요. 4절을 보면 그 새 남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어 있어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자! ‘그리스도의 예수’!. 그 다음부터는 다! 그 죽은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나는 그 분! 진리! 그걸 모형(模型)하는 것이죠.

 

, 그렇게 그 남편과, 이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게 성도인데, 그 전체의 내용이 복음(福音)’이다, 그런 말이에요. 그 열매는 무슨 열매? 성경에서는 열매라 하면, ‘생명의 열매밖에 없어요. 생명나무 열매! 그러면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법과 함께, 사망에 이르는 많은 열매를 맺었다 그러죠. 법과 함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어요.

그럼 법과 함께 열매를 많이 맺는 게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옳다라고 한다니까요. 그런데 바오로는 그걸 사망에 이르는 열매라 그래요. 법과 함께 맺는 열매를! 우리가 법에 묶여 있을 때도 열매는 맺힌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느님이 인정하지 않는, 씨가 없는, 진리의 말씀이 없는, 무화과 같은 열매예요. 그래서 무화과나무는 수정이 안 돼요. 무화과나무는 암술이 없어요. 수술 밖에 없다니까요. 그 사각사각 씹히는 씨! 그러니까 항상 꺾꽂이로 번식을 할 수밖에 없는 나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딱딱 갖다 쓰는 걸 보세요. 성경이!

, 그러니까 우리보고, ‘너희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죽음에 이르는 그런 열매 맺지 말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 그래요. 섬기는 건 말씀을 전해주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을 자유롭게 살려내라는 거예요. 그게 생명을 전해주는 거잖아요? 그게 열매 맺는 거라니까요.

내가 아는 진리를 누구에게 전해 줬더니, 막 살아나. 사람이! 하느님은 그를 네가 살렸다 그런다니까요. 하느님이 하시는 거예요. . 그런데 창세전에 하느님이 택한, 하느님의 백성들, 눈과 귀가 뚫린 사람들이 그걸 듣고, 살아난다 말이에요. ‘그거 해!’ 그러는 거예요. ‘그거 해!’

 

율법의 남편이 죽으면서 라는 육도 죽는 거예요. 그게 로마서 71절의 논리예요. 그러면 라는 존재가, 율법의 남편이 죽으면서 삭제됐으면, 내가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냐고요? 없는데, 죽었는데, 에녹처럼 사라졌는데! 그런데 그것들만 자랑한다니까요. 없는 건데! 하느님은 그거 안 본다는데! ,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남편 안에서, 새 것으로 살아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 새로운 영의 말을 전해주고, 그 새로운 존재로 사는 !’ 그냥 그렇게 살면 돼요.

바오로는 거기까지 설명을 한 후에, 거기에 예를 들어, ‘나를 이끌어준 율법이 그럼 죄냐?’ 이렇게 물어봐요. 수사학적 질문이죠. ‘아니다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건! 그게 죄냐? 여태까지 거기에 묶여 있으면 안 된다고 그래놓고, ‘그게 죄냐?’ 그래요. ? ‘너에게 의()가 뭔지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해 하느님이 허락한 게 그거라면, 그게 죄냐?’ 그럼 그게 죄는 없다는 얘기죠? 아니 삼단논법만 알아도 이해가 되는 거 아녜요? 이거는!

앞 뒤 다 끊어버리고 또 요 얘기만 갖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바오로가 그러잖아요? 여태 그게 죄야! 거기에 묶이면 죽어!’ 그러더니, ‘그게 죄냐?’ 그런다고요. 그럼 우리가 뭐가 죄냐?’ 물어봐야 될 거 아녜요? 우리가! 여태 네가 죄라고 그래놓고, ‘그게 죄냐?’라고 물어보면, ‘그럼 뭐가 죄냐?’라고 물어봐야 되잖아요? 바오로는 계속해서 그걸 설명해요.

그렇게 가 뭔지, ‘이 뭔지, 진리가 뭔지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게, ‘호 코스모스의 세상이라면, 그 율법! 호 코스모스의 세상과 진리가, 결국은 나에게 뭐가 돼요? 라는 거, ‘이라는 것과, 그 진리, 선이라는 것이, 하나로 진리 안에서 나에게 이해되어졌어요. 그래서 이제는 이걸 단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걸 어떻게 추구해야 되는가? 고민하지 않을 수도 있게 되었어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그런 한 마음을 이제 가진 자가 됐다니까요.

가 길에 떨어져야 되는데, 길 가에 떨어지는 걸, ‘라고 하잖아요?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거죠. 씨가 길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냐고요? 밭에 떨어져야지!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한다니까요. 길인 예수에게 떨어져야지! 길 가 양쪽으로 떨어져 버리면, 이게 선악이란 말예요. 그러면 그게 죄라고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치우침이 없이 하나로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모노게네스, 독생자, 아들이 되는 거예요. 스테레오, 모노, 알잖아요? ‘모노 게네스, 한 마음을 가진 자! 하나를 가진 자!’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 뭘 선택할까? 이거 안 해도 되는 자! 그 사람을 성도라 그래요.

 

(출애4:22-26) 22 그러면 너는 파라오에게 말하여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23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일렀건만 너는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들어라, 내가 이제 너의 맏아들을 죽이리라.'' 24 모세가 길을 떠나 가다가 한 곳에 이르러 밤을 묵는데 야훼께서 찾아 오시어 그를 죽이려고 하셨다. 25 시뽀라가 돌칼로 제 아들의 포경을 자르고 그것을 모세의 발에 대며 말하였다. '당신은 피로 얻은 나의 신랑입니다.' 26 그러자 야훼께서 그를 놓아 주셨다. 그래서 시뽀라는 '할례를 베풀어 피 흘려 얻은 신랑' 이라고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건지러 애굽으로 들어갈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 그런 에피소드예요. 그런데 이 에피소드가 어디에 붙어 있는가 하면, 보시다시피, 애굽 왕 파라오에게 전하는 경고의 메시지에 붙어 있어요. 그걸 설명하는 이야기란 말예요. 이게!

그 경고의 내용을 잘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죠? 그리고 내 아들이라고 그래요, 장자라 그래요. 벌써! 그런데 이때는 이스라엘이 아직 열두 지파로 나눠지지도 않았을 때입니다. 열두 지파가 되어 한 국가를 형성했을 때, 그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라 불러요.

그런데 아직 애굽에 있는 이 중대한 잡족! 여기에 있는 이스라엘이 누구란 말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직 애굽을 나가지도 않았는데, 거기에 무슨 이스라엘이 있나고요? 거기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된다니까요. 그럼 이 이스라엘은 뭐냐고요? 야곱의 다른 이름이에요. 이게!

야곱이 뭐예요? 애굽! 야곱! 자기라는 존재 안에 묶여서, 자기만을 위해 열심히 권모술수, 임기응변을 사용하여, 나를 구축하는 존재! 그게 잘못된 말을 가진 자! 그래서 강도, 절도, 발목을 잡는 자! 야곱이에요. 실족케 하는 자! ? 잘못된 진리, 잘못된 말을 가진 자의 모형이잖아요? 그래서 그 이름을 써서 옛 성전을 가리켜 절도며, 강도라고 하는 거예요. 야곱의 이름이거든요. 그것이!

그런데 그 중에 하느님께서 야곱을 아들로 살려내어야 되는데, ? 약속의 자손이니까. 죽을 때까지 얘는 안 바뀔 것 같아. 하느님마저도 이기려고 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죽여야 돼요. 얘를 그리고 다시 살려야 돼요. 그런데 얘를 죽이면 안 된다 그랬어요. 아까! 그럼 누구를 죽여야 돼요? 약속의 씨가 담긴 그릇이 누구라 그랬죠? ‘예수라 그랬습니다.

환도뼈라는 단어의 의미가 그거예요. 남자의 씨가 담긴 그릇! 그걸 부수어버리는 거예요. 예수가 죽는 거예요. 거기서! 예수가 죽고, 하느님이,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자를 살려내어,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줘요.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함께 이긴 자! 승리한 자!’ 혼자는 절대 못 이겨요. 그러니까 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과도 겨루려고 한 자라는 오명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함께 하셔서 살려낸 자, 이기게 한 자라는 위대한 이름이기도 한 거예요.

하느님이 애굽이라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70명이 거기에 들어가서, 70이라는 숫자 자체도, 상징적인 숫자예요. 70명이 아니라. 왜냐하면? 7 곱하기 10이란 말입니다. 70이 들어가서, 이스라엘로 나오는 거예요. 이제! 이스라엘로 나와야 되는데, 그 많은 잡족 중에, 그들은 430년을 거기에서 살았어요. 그러면 그들은 그냥 애굽이에요. ! 그게 다 애굽이란 말예요.

애굽 중에, 많은 잡족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나가!’했더니, 나가는 이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내 아들이라는 거예요. 내 아들! 그런데 전부 애굽이에요. 그 애굽의 대표가 누구? 파라오! 모형이란 말예요. 그 파라오가, ‘, 아들을 낳아야지. 내 아들을 줘! 내 아들!’ 하느님이 그러는 거예요.

내 아들 줘!’ 그런데 애굽이, 야곱이 그거 줘요? 못 줘요? 못 줘요! 그게 내 생명인데 어떻게 줘요? ‘내 아들 줘! 내 장자 내놔!’ 그런단 말이에요. ‘안 줘? 그러면 네 아들 죽일 거야.’ 그러는 거예요. ‘네가 낳고 있는 그 아들 죽일 거야!’ 그런단 말예요. 그래서 나는 내 아들 찾을 거야라는 말이에요. 지금 제가 앞에서 설명해 드린 이야기가 이 이야기란 말예요.

내 아들 줘!’ 애굽에서, 율법에 갇혀 있는. 거기에서 열심히 옛 성전, 옛 예루살렘! 그것! 옛 거룩한 성, 이거 만들고 있는! 그게 출애굽기 1장이에요. 내 아들 줘!’ 안 줘요. 그러면 네가 지금 낳고 있는 그거. 내가 죽여서 내 아들 찾을 거야!’ 이게 파라오에게 한 경고란 말예요. 그러면 모세가 지금 그걸 하러 들어가야 될 거 아닙니까? 그걸 하러 들어가는 모세에게, 지금 그걸 그대로 경험하게 해 주는 거예요.

 

모세는 첫 번째 남편이에요. 율법의 모형이니까! 오해되어진 남편! 죽어야 하는 남편! 그런데 얘를 죽이면 안 되잖아요? 그럼 뭘 죽여야 돼요? 그가 낳고 있는 그걸 죽여야 된다니까요. 그래서 아들을 할례하는 거예요. 할례는 쪼개다.’ 그건 죽이는 거예요. 생식기를 잘라버리다는 건, 생명의 근원을 막아버리는, 죽이는 거예요. 아들이 죽어요.

아들을 죽여서, 죽어야할 그 자를 새 남편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새 아들을 낳게 만드는 그게, 출애굽이야를 설명해주고, 애굽으로 들여보내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새 남편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것이 그리스도라니까요. 그것이 말씀이에요. 진리의 말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약속의 씨, 약속의 자손을 주마 그랬어요. 너를 그렇게 만들겠다는 뜻이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의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게 뭐였냐면, ‘나에게 자식을 주시려나?’ 그러면 하느님은 그 수준에서 말을 해 줘야 돼요. 그래서 이사악을 줘요. 그러면 그 이사악을 통하여, 하느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았으면, 이 이사악을 삭제되어야 되는 거예요.

얘가 끝까지 가치로 존재하면 안 되는 거예요. 교회의 그 모형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래서 하느님이 죽이라고 그런 거예요. ‘가서 죽여! 이제 알았지? 죽여!’ 거기서 또 한 번 모형을 설명해 주는 거죠. 그 아이가 죽었다가 산 자의 모형이고, 그것을 통하여 죽어야 할 아브라함! 구원 받을 교회가, 진짜 신부로 서는 모형을 거시서 또 한 번 보여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죽었다가 살았다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거요. 모세도 마찬가지예요.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니까요, 죽어야 하는데 안 죽어요.

그리고는 그가 낳는 것이 죽고, 아들이 죽고,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이삭! 그가 죽고 아브라함이 사는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모세가 아들이 죽으므로 말미암아, 새로운 남편, 피 남편으로 오는 거란 말입니다. 그것이 진리의 말씀이에요. 그리스도의 영!

그렇게 하느님은, 우리가 율법과 혼인하여 낳고 있는 라는 아들을, 반드시 죽이셔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율법이라는 남편이 먼저 죽어야 돼요. (이게 로마서 7장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죽는 거예요. 그리고 진리라는 새 남편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나를 진리로 빨아들여서, 함몰시켜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아들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피 남편 이야기예요. 자 이렇게 그 이스라엘은, 남편의, 오해되어진 남편, 율법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낳고 있는 그 자신이 죽게 되는 것이고, 새로운 남편을 맞아, 새로운 아들! 진리라는, 그리스도라는 아들! 영생이라는 열매를 낳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나중에 이름이 유다로 바뀌어요. 그 유다가, 또 한 번 이걸 설명해 줘요.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습니다. 죽이는 거예요. 그러면 원칙, 공식이 어떻게 돼요? 그 아들이 죽으면, 그 아들을 죽음에 넣은 그 자가, 그 아들의 죽음으로 살아나야 돼요.

 

왜 가룟 유다를 나쁘다고 하느냐 하면, 아들이 죽었어요. 카인 마찬가지예요. 죽어야 할 아벨, ‘하벨이 죽었습니다. ‘, 나는 이렇게 살인자인데, 이 형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살아나는 거구나라고 그 죽음을 찬송하는 거예요. 그런데 카인이 뭐라고 했어요? ‘내 죄가 중하여그래요. 무슨 위대한 박애주의자 하나 나신 거죠.

율법주의가 그래요. ‘내 죄가 중하여.’ 유다 보세요. 아들이 죽었으면, 옛 남편이 죽었으면, 새 남편을 맞아 아들을 낳아야 돼요. 생명을 낳아야 돼요. 살아야 돼요. 예수가 죽었으니 내가 살아야 된다는 말예요. 그런데 예수가 죽자, ‘내 죄가 중하여,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 그러고 죽더라는 거예요. 이걸 율법주의라고 그래요.

이스라엘아, 유다야, 복음이 뭔지 제발 좀 알아먹어라!’를 계속 설명해주는 거예요. ‘왜 죽어? 그가 죽었으면, 이제 네가 살아야지! 왜 네가 죽어? 왜 여전히 네 죄를 네가 책임져? 그가 죽었잖아? 그래 너 같은 인간 때문에 죽었잖아?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예수를 팔아먹는단다.

? 그게 피조물의 한계니까! 진리를 어떻게 알아보니? 그가 너희들이 오해한 죄가 되어서 죽었다면, 너희들이 이제 살아야지! 왜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고 앉아 있는 거야? 내 신부들아 제발 좀 알아먹어라.’고 이야기하는 거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을 용서(容恕)! 네 형제를 용서해!’ 이런 말이 나오는 거요. ‘안 그러면 나, 너희들 용서 안 해!’ 이렇게 오해가 될 만한 이야기들을 계속 반복하여 하시는 거예요. ‘내가 속으로는 저걸 죽이고 싶지만, 참아야지!’ 그게 뭐가 용서예요?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에게 탕감을 받아요. 일만 달란트는, 당시의 이스라엘이 로마에 일 년 동안 바치던 조공이 팔 백 달란트였으니까, 개인이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다는 게 가능해요? 불가능해요. 그건 못 갚는 돈의, 그냥 하나의 상징이에요. 한 나라가 일 년 동안 바치는 조공이 팔백이었는데 일만이 뭐냐고요? 그런데 아무튼 비유니까! 주인이 탕감해줬어요 용서해줬어요. 살려줬다니까요.

그런데 同官! ‘쉰들레오자기와 똑같은 종이라는 뜻이에요. 동관 하나가 지나가는데,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그러니까 2,000원 빚진 거예요. 수조 원을 탕감 받고 나왔는데, 2,000원 빚진 애가 지나가네. 그런데 걔를 탕감을 못 해줘. 이 사람이! 그래놓고 감옥에 가둬버린다니까요. 이게 무슨 얘기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진짜 용서가 뭔지를 안다면, 그리고 내가 어떤 지경에서 그 용서를 받은 자인지를 안다면, 내 형제의 실수를 봤어요. 그러면 어떤 반응이 먼저 나와야 돼요? ‘그래 나는 너보다 더 더러운 죄인 중에 죄인이였어. 그런데 하느님이 진리의 말씀을 나에게 주어서, 세상에 나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셨단다.

! 걱정하지 마! 내가 너에게 그 용서 받을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을 전해 줄게! 나에게 치료약이 있어! , 걱정하지 마!’라고 반응이 먼저 나와야죠. 내가 진짜 용서 받은 사람이라면. ‘, 걱정하지 마! 난 너보다 더 했어. 그런데 내가 용서 받았다. 탕감 받았어. 그러니까 너도 이걸 깨달으면, 그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면, 너도 그거 탕감, 용서 받을 수 있어.’라고 그에게 전해주려 할 거 아녜요?

그런데 내 안에 그거 없으면 어떻게 돼요? 돌이라도 던져서, 저것과 나는 아무 관계없다는 것을 자꾸 증명해야 돼요. 그래서 그렇게들 욕하는 거예요. 누가 잘못 하나 살짝 하잖아요. 인터넷에다 올리면 수만

 

아녜요. 여러분! 아니, 하느님이 라는 존재를 삭제했다니까요. 언약의 기둥에서. 그런데 내가 지어놓는 죄, 앞으로 지을 죄, 그 죄라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죄도 아니지만, 그게 하느님께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존재가 하느님에게 없어지고 그리스도라는 옷만 보이는데, 그러면 그걸 얘기를 해 줘야 될 거 아녜요? 죄를 지은 사람에게!

아주 죽이려고 작정들을 하더군요. 누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그것 갖고 어떻게 죽이려고. 이 마귀 새끼들이 말이에요. 저희들은 더 더러우면서! 그러니 용서는 무슨 용서냐고요? 용서받은 적이 있어야지. 가둬버리는 거예요.

랬더니 주인이 뭐라 그래요? ‘, 네가 내가 너에게 해준 용서가 뭔지를 이해를 못하는구나. 그러면 너 이리로 와 봐! 일만 달란트 다 갚아. 너 그거 다 갚을 때까지 못나온다.’하고 그를 감옥에 넣어요. 그러면 개인이 일만 달란트를 감옥에서 어떻게 갚아요? 너 죽으라는 거예요. 그 놈이 사망에 들어갈 자다 이야기하는 거요.

그런데 우리가 전부 그 일을 하고 있다니까요. 전부! 그러니 예수 믿는 놈이 어디 있냐고요? 이 세상에 지금!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누가 예수를 믿겠느냐고요? 여전히 진리를 안다고 하는 우리도 그러고 있는데, 그러니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용서가 뭔지 알아, 은혜가 뭔지 알아? 그러니까 돌이라도 던져서 난 너와는 달라이거 해야죠. 돌이라도 던져서! 그러한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분리주의자들! ‘파리사이오스분리하다, 쪼개다예요. 둘로 쪼개는 자들, 바리새인들! 어떻게 이름도 저희들이 지은 거 아니겠어요? 잘 지었어요.

 

(루가5:30-32) 30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입니까?' 하고 트집을 잡았다. 31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어떤 자가 의원을 필요로 해요? 내가 죽을병이 걸린 자라는 걸 아는 자! 그 자가 진짜 생명을 갈구하게 되는 거예요. ‘나에게 의원이 필요한데! 그 분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이렇게 가는 거예요.

32절에서, 주님이 우 엘코마이 칼레오 디카이오스 알라 하르 하마르 돌로스 메타노이아이 말은 직역을 하면, ‘내가 의인을 의를 강권하여, 의인을 데려가려고 온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내가 의인을 강권하러 온 것이 아니다. 너희들 잘 배워서 의인 돼! 그러면 데리고 갈게.’ 이거 하려고 온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나는 죄인을, 다르게 생각하게 하기 위해 온 거야!’ ‘다르게 생각하다. 다른 마음을 가지게 하다메타노이아예요. 그걸 회개라고 하는데, 회개라면 우리는 그냥 반성,’ 이렇게 이해하고 있으니까. ‘메타노이아는 내가 어떤 것을 인식하여, 생각을 하고, 정의를 하고 있는데, 하느님이 , 그거 아니야라고 가르쳐서, 그걸 올바로 보게 해주는 걸, ‘메타노이아라 그래요.

메타노이아.’ 그게 뭔지를 알게, 죄인(罪人)이 뭔지를 알게 해주러 온 거야. 의인(義人), 죄인 그러니까 자꾸 어디 의인이 있나? 죄인이 있나? 뭐 이렇게. 아니잖아요? 여기 바리새인과 세리, 창녀 밖에 없어요. 바리새인, 율법학자가 죄인이에요? 의인이에요? 죄인! 세리 창녀? 당연히 죄인! 그래서 성경도 죄인! 예수님도 죄인이라 그래요. 이놈도 죄인, 너희도 죄인. 의인이 없어요!

그런데 뭐 의인을 부르러 와요? 그런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의인을 强勸하여, 의인된 자를 데리러 온 사람이 아냐.’ ? 의인 없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의인이 없다는 건, 그 지점에 가 없다는 거 아녜요? 그 세상에! ‘가 있으면 당연히 의인이 있겠죠. 당연히.

그 전체 중에 의인은 예수님 한 분이셨어요. 그런데 그 도 감춰져 있어요. 하늘의 를 인간들이 못 알아보니까. 감춰져 있어요. 그러니까 의인은 없어. ‘도 없어요. 주님이 그 안에 있는 를 하늘의 것으로 얘기해 봐야 못 알아들어요. 그러면 그 를 어떻게 설명해야 되냐고요? 그들이 갖고 있는 건 죄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게 가장 익숙해. 그러면 그 하늘의 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되냐고요?

그 죄가 뭔지를 가르쳐서, 그게 뭔지를 올바로 깨달아, ‘아 이게 죄야? 이게 진짜 죄야? 그러면 그거 하지 말아야지!’()’란 말예요. 죄인들을 다시 보게 하는, 율법! 이걸 내가 없애러 온 게 아니라, 그 율법이 뭔지를 다시 보게 하는이게 메타노이아예요. ‘다시 보게 하는 일을 하여, 너희가 다시는 선악과 안 따먹도록, 의인 되도록 하러 온 게 나야!’ 이 말이란 말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니까 뭐, 그러면 다 죄인인데 다 불러 가겠네! 죄와 죄인이란 개념을 다르게 생각하게 만들어서 구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죄와 죄인이라는 걸 다르게 생각하면, ‘, 어떻게 저런 죄를 지었어? 저거! 내가 저런 인간과 같이 천국에 간다면 난 거긴 안 간다.’ 그렇게들 많이 생각하잖아요? 차등상급론(差等賞給論)이 그거 아닙니까? 인간들의 행위를 차등으로 나누어서, 쟤는 조금 괜찮은 사람, 쟤는 조금 못한 사람, 얘는 더 더러운 사람, 아주 더러운 사람. 뭐 이렇게 나누는 것. 그것에 따라 상도 주고 벌도 준다는 게, 차등상급론이잖아요?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행위는 하느님에게 하나도 카운트가 안 돼요. 여러분이 그 용서를 이해하느냐, 못 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말라기에 이런 말이 나오고 400년 암흑기가 이어져요. 암흑기란, 하느님의 말씀이 한 마디도 안 떨어지는 시대.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모든 하느님의 구약이, 율법으로 곡해되어지는 시대가 되는 거요. 400년 암흑! 밤이 되는 거요. ! 말라기 이후로. 말라기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구약이 닫히는 겁니다.

 

(말라3: 23-24) 23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24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

 

이게 메타노이아예요. ‘마음을 돌이킨다!’ 이게 슈브라는 단어가, 마음을 돌이키게 해서, 뭐 못된 놈을 착하게 만들고, 이런 말이 아니라, ‘그 마음을 부수고 다시 세우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아비의 마음,’ 아비의 마음은 뭐예요? 원래 하느님은 어떻게 하셔야 돼요? 거룩하신 분이니까. 더러움을 죽여야 되는 거거든요.

저주하셔야 되는데, 그 마음을 부수고 다시 세우겠다. 원래 하느님은 그런 분이라 말예요. 그게 언약의 내용이란 말예요. 그리고 아들의 마음을 부수고 다시 세우는 게 뭐예요? 내가 이런 일을 했으니까 하느님이 나 벌주겠지? 내가 이렇게 잘 했으니 하느님이 나를 상 주겠지? 이거 부수고 다시 세우는 걸, 엘리야가 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말라기에서 왜 엘리야가 나오느냐고요?

엘리야는 세 번 옵니다. 구약의 그 엘리야! 세례 요한이라는 엘리야! 그리고 예수라는 엘리야가 오죠.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예요. 예수님도 자기를 엘리야라 그러고, 세례요한도 엘리야라 그런단 말예요. 그런데 엘리야가 뭐 하는 거예요? 부수고 다시 세우는 거!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겉옷을 넘겨주죠? 겉옷이 진리의 말씀이에요.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겉옷을 넘겨주고 가셨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속옷과 함께 겉옷을 덧입어 구원을 받은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그 율법, 호 코스모스의 세상을 진리로 이해하여! 구원 받은 거잖아요?

엘리사, 엘리야 마찬가지예요. 엘리사가 엘리야를 아버지라 부르잖아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마병과 군대여!’ 그래요. (), 그걸 이스라엘은 가지면 안 된다 솔로몬은 말을 이렇게 많이 가졌는데.’ 그래서 그가 예수가 아닌 거예요. 여자 갖지 말랐더니, 마누라 천 명, 말 갖지 말랐더니, 말 만 이천 마리, 금 많이 갖지 말랐더니, 이거 세 개가 이스라엘 왕의 조건이거든요.

그런데 다윗,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완성하는 모형이지만, 그들도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주기 위해, 그들이 많이 갖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그 진리의 말씀! 그 겉옷이, 그것이 하느님의 힘이라는 얘기예요. 그리고 그걸 전해준 그 분이 바로 내 아비라는 거예요. 요아스가 또 엘리야에게 나의 아비여, 병거와 마병이여!’ 이야기한다니까요. 그 엘리야가 한 일이 그거란 말예요. 돌이키는 거예요. 아비의 마음을 돌이키고, 아들의 마음을 돌이켜서, 진리의 말씀을 주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와서 뭐라 그랬어요? 회개하라, 메타노이아, 마음 바꿔!’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회개하라. 마음 바꿔!’ 그런데 아무 설명도 안 해주고 갔어요. 뭘 어떻게 바꾸라는 거야? ‘그거 안 바꾸면 죽어!’ 거기까지만 얘기했단 말예요. 제자들을 보냈어도 그 얘기만 전했어요.

그런데 뭘 어떻게 바꾸라는 거야? 안 가르쳐줘요. 그리고 여러 가지 표적들을 복음을 담아 행하고도, 가서 말하지 마! 그래요. ? 못 알아먹으니까! 말해 봐야 그 껍데기로만 이해할 테니까. 그러면 죽는 거거든요. 그건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뚫고 들어와, 나에게 강하여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란 말입니다.

 

마음을 돌이키는 거예요. 400년 암흑기 동안에, 율법주의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어요. 꽉 채웠어요. 말씀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려 400년 동안! 어두움이에요. 이제 다! 거기에 빛이 오는 거요. 성경이 빛을 어두움을 드러내는 거라 그러죠. 어두움을 나타내는 게 빛입니다. 그러면 어두움을 드러내어 나타내는 게 빛이라면, 빛이 뭐예요? 어두움이라니까요.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어요. 빛으로 오셔서, 율법 아래에 율법으로 오세요. 빛을 세상에 비추어 그들의 더러움을 확 폭로시켜내는데, 이 빛이 율법이 되어 죽는다니까요.

그러면 어두움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게 빛이고, 그 내용이 원래 하나라면, 뭘 보고 우리가 이렇게 파르르 떨어야 되냐고요? , 구약에서, ‘너희들 안식일 날 일하지 마! 일하면 돌로 때려 다 죽일 거야.’ 그랬어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랬어요.

그 말은 뭐예요? ‘내 제자들아, 너희들은 일해야 돼!’ 그랬어요. 그런데 무슨 일? 아버지의 일이에요. 그러면 이걸 깨달은 이는, 구약의 안식일날 일하지 마!’라는 그 계명을 가지고, 어떻게 이해를 하게 되겠습니까? ‘! 안식일에는 네 일하지 마! 율법 지켜 열매 맺겠다고 하는, 네 일 하지 마! 그리고 아버지의 일을 해!’라고 알아들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아버지의 일이 뭐예요? 내 새끼들 진리로, 신부로 만들어 내 옆에 세우는 거! 그 일 해! 그래서 이 안식일의 정신이 흐르는 이 주일에, 우리는 말씀을 흘리고 받고 하는 거란 말예요. 그러면 안식일 날 일하지 마!’ ‘안식일 날 일 해!’ 이 둘이 뭐예요? 결국 하나란 말입니다. 그러면 안식일 날 일하지 마라고 한 그 계명을, 계명으로만 받으면, 그 날 일한 사람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어요. 그 일을 한 게 바리새인이라니까요.

그런데 오늘 날 성경을 그렇게 율법으로만 보면 그걸 전부 명령으로 받게 된다 말입니다. 그리고는 넌 왜 아직 이 수준에 못 올라와?’라고 바리새인과 똑같은 신앙생활을 한다 말이죠. 그걸 무슨 그리스도교라 그래요? 다른 종교도 똑같이 하잖아요, 여러분? 그러니까 여러분이 빨리 그 선악의 감옥에서 빠져 나와야 돼요. 안 그러면 자기도 용서(容恕)하지 못 하고, 형제는 더더욱 용서 못해요. 뭘 알아야 용서를 하지, 용서라는 치료약이 내 안에 있어야 주지.

 

(1요한2:7-12) 7 내가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고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옛 계명입니다. 그 옛 계명은 여러분이 줄곧 들어 온 그 말씀입니다. 8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사실은 새 계명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이미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계명이 참되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고 또 그대들의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9 자가가 빛 속에서 산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자입니다. 10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11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으며 어둠 속에서 살아 가기 때문에 그 눈이 어둠에 가리워져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12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요한이 새 계명(誡命)을 이야기 하면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내가 새 계명을 말하는데, 새 계명이 아니라, 원래 그냥 옛 계명이야. 그런데 그 옛 계명이 뭔지를 깨달아 알게 하여, 새 계명을 주고 있다는 거요.

그러면 그 율법의 진의가 이러 이러한 거라서, 그것은 이렇게 진리로 이해를 해야 되는데, 너희가 그 율법에 묶여, 여전히 너도 용서 못하고 너희 형제도 용서를 못 한다면, 그 말씀을 못 준다면 너희들은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는 거잖아? 그리고 마지막에 뭐라 그래요? 너희들은 용서를 받았잖아? 너희들은 용서를 받았잖아?

 

희생제사 드려희생제사 드리지 마! 내가 할 게.’ 이렇게 읽혀지더라는 거예요. 진리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좌로나 우로나 안 치우친다니깐요. 그게 영원(永遠)’이라는 단어의 뜻이에요. 움직임이 없는 것. 요동이 없는 것! 그래서 주님이 반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세요. ‘너희는 가만히 있어 제발. 길 가로 떨어지지 마! 가만히 있어! 두 다리 굳게 박아!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뭐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도 하나예요. 하느님이 우리 안에 준 그 마음! 원래 우리는 두 마음을 받잖아요? 그걸로 진짜 하나만 가진 게 뭔지를 알라고 준 것! 그래서 이에 그리로 쓰여지면, 그것도 선한 거라고 이야기하는 게, 성선설이에요. 성악설은, 그걸 그대로 가지고 율법으로 판단을 해 버려서, 악하게 사용하는 걸, ‘그럼 그건 악한 거야.’가 성악설이에요. 그러면 그 둘은 결국은 뭐예요? 같은 거란 말예요.

 

여러분은 반드시 그 선악의 남편! 율법의 남편을 죽여야 돼요. 아니 이미 죽었어요. 그걸 말씀 속에서 자꾸 깨달아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이제 삶으로 나타날 때, 그 삶을 말씀을 적용하여 자꾸 이해를 해야 돼요.

자기부인(自己否認)이 뭐예요?’ 여러분이 아 나는 왜 이렇게 부인이 안 돼? 여전히 왜 이 모양이야.’ , 좋은 고민이에요. 그러나 거기에서 머물러서 낙담하고 절망하면 유다처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이미 부정됐다니까요. 여러분이 힘써서 부정하는 게 아녜요. 그렇게 힘써서 부정(否定)하려고 하면, 그 의도(意圖)가 뭐겠어요? 하느님과 다른 이들에게 내가 이만큼 진보(進步)한 걸 보여주겠다는 욕망(慾望)에서 그러는 거예요. 그걸 죄라 그래요.

자기 증명의 죄!’ 아니 다 그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또 ! 나는 그렇게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야. 다 하고 있는 데.’ 말씀을 잘 이해하란 말예요. ‘그래, 그러니까, 나는 이런 존재니까, 예수님이 내가 되어, 내가 낳은 율법이란 아들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거구나!’로 가시면 되는 거예요. 그게 자기부인이에요.

이렇게 진리의 말씀이 던져져도, ‘, 그래도 난 여기가 익숙해.’ ? 날 때도 그렇게 낳거든요. ‘, 난 안 나갈래요. 나 머리로만 알고 있을래요. 안 나갈래요.’ 그래서 자기가 여전히 스스로를 묶어버리는 거예요. 자기를! 용서하시라니까요. 나를 먼저 용서하시라고요. 나를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려요. 그 말은 하늘에서 푼 자는 반드시 이 땅에서 자기를 풀게 되어 있단 말예요. 그렇게 풀린 자가, 형제를 풀 수 있는 말을 줄 수 있단 말예요. 그 율법의 감옥! 에서 탈출(脫出)하십시오.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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