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도란도란글방/전도서(코헬렛)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에페3,1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25 조회수994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10. 26.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도란도란글방

 

전도서(코헬렛)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에페3,17-19)

17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 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 감으로써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19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전도서(傳道書)의 제목은 히브리어로 코헬렛입니다. 카할에서 나온 말입니다. “카할이라는 말이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assembly, 집회, 교회, 모임이라는 말입니다. 거기로부터 나온 코헬렛라는 단어는 모임, 회중,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LXX도 제목이 에클레시 아스테스 입니다. 전도자, 설교자, 회중에게 말하는 자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이 전도서의 내용은 설교자, 전도자가 교회에게 주는 설교입니다. 이 전도서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솔로몬? 어떻게 아시죠? 전도서에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한번이라도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그렇지만 솔로몬으로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전도1:1) 1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의 말이다.

다윗의 아들이면 당연히 솔로몬이지요? 그렇지만 여기서 아들이라는 말이라는 말은 자손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입니다. 주다 벤허는 훌의 자손 유다라는 뜻이라 했지요? 그래서 그 말만 가지고는 저자가 솔로몬이라는 것을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전도1:12) 12 나 설교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으며

 

이 글을 쓴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었다고 하지요? 예루살렘은 남 유대의 수도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었는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남 유대와 북 이스라엘로 갈리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왕이 된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이 되지요? 그러면 바로 솔로몬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의 왕으로 르호보암이 남 유대의 왕으로 갈라졌으니까요. 그리고 전도서 여러 곳에서 전도자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지혜를 소유한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전도1:16) 16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왕노릇한 어른치고 나만큼 지혜를 깊이 깨친 사람이 없다. 나만큼 인생을 깨쳐 지혜를 얻은 사람이 없다.' 나는 이렇게 자신을 가지고

 

잠언 공부할 때 배웠지요? 누구입니까? 솔로몬입니다.

(전도12:9) 9 설교자는 스스로 지혜를 깨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민중에게 인생의 길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는 분이었다. 그분은 많은 잠언들을 마음 속으로 저울질해 보고 그 뜻을 더듬어 보고 엮어 주었다.

 

솔로몬이 잠언 3,000을 지었다는 말씀을 열왕기상 4장에서 보았지요? 이렇게 전도서의 저자 전도자는 솔로몬이라는 것을 금방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전도서는 다윗 왕의 아들인 솔로몬 왕이 이스라엘의 전도자, 설교자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책입니다. 이것 은 참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 이스라엘, 교회에게 참 지혜를 가르치는 모습의 protype입니다. 그러니까 전도서도 역시 복음입니다.

이 전도서는 솔로몬의 생애 말기인 BC935년경에 쓰인 책입니다.

전도서의 주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헛되다”“헤벨이라는 단어입니다.

헤벨은 수증기, 이라는 뜻입니다. 한번 불어 내면 없어져 버리는 헛된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이 헛되다라는 의미인 헤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아벨입니다. 아벨은 등장하자마자 형 카가인에 의해서 허무하게 죽었지요? 이렇게 헤벨공허, 덧없음, 헛됨, 목적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서두에 그 주제가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전도1:2-3) 2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3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이것이 바로 전도서의 주제입니다.

왜 모든 것이 이렇게 헛되게 된 것이지요? 인간의 타락 때문입니다. 인간이 타락을 한 이후에 인간의 모든 추구는 다 헛된 것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인간에게서 나오는 착한 일, 선한 일 조차도 헛된 것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에도 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로마8:18-22) 18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21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0절에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에서의 마타이오테스가 바로 헤벨“”헛됨입니다. 헬라어 성경 LXX에서 히브리어 헤벨마타이오테스로 번역을 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헛된 것에 굴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허무한 것의 종착역이 어디입니까? 바로 죽음(死亡)“입니다. 모든 자들이 허무함에 굴복하여 살다가 결국 최후의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 바로 타락한 죄인들의 인생입니다.

전도서는 그렇게 인생의 허무함을 계속해서 나열하면서 너희들 그런데도 그렇게 허무한 것을 쫓으며 살래?”하고 열두 장 내내 독자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전도12:13~14) 13 들을 만한 말을 다 들었을 테지만,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키라는 말 한 마디만 결론으로 하고 싶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다. 14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심지어 남몰래 한 일까지도 사람이 한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는 심판에 붙이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여라.

 

이렇게 전도서는 오직 하느님을 경외(敬畏)하는 삶만이 헛되지 않은 삶이고 하느님과의 바른 관계를 떠나서 행해지는 모든 것은 다 헛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라. 오직 그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만이 헛되지 않은 삶이다라고 교회에게 설교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 전도서의 주제인 헛되다라는 말이 주제어답게 전도서에 35번이 나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전도서에 많이 나오는 말이 하늘 아래라는 말입니다. (29) 그 말은 그 헛됨이 미치는 범위가 하늘 아래라는 것입니다.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만물이 다 헛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늘 아래유사 이래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헛됨에 굴복하고 있는데 그 헛됨에서 벗어나서 헛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늘 아래의 삶이 모두 헛된 것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간단합니다. “하늘 위의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늘 위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 실력으로는 절대 안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하늘 위의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하늘 아래 헛됨에 굴복하고 있는 자들을 품어 안으시고 죽어 버리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헛된 삶을 예수님께서 다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 헛된 삶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어버리셨습니다. 그래서 그 하늘 아래에 태어난 헛된 옛 사람이 죽고 하늘 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갈라3:13) 13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 받을 자다' 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예수께서 허무한 삶을 산 자, 헛된 자,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죽으시고 우리를 그 허무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서에서 그 복된 이야기를 전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제 하늘 아래의 헛된 것에 굴복하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 위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전도서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 새롭게 태어난 자들은 삶 의 기쁨과 만족과 목표와 의미도 새로워진 자들이기 때문에 다른 헛된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그렇게 살기를 힘쓰며 우리가 궁극에 가게 될 그 하늘나라만을 소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전도서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전도서의 구조를 살펴보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전도서의 제목 격인 전도서 1:1을 보세요.

(전도1:1) 1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의 말이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 책은 언약의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지난 시간에 잠언을 공부하면서 계속 해서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는 구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시편을 공부하면서도 제 2권이 언약이 아들에게로 이어져서 성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2권이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시편으로 끝나지요? 여기서도 다윗과 그의 아들이 등장함으로 이 책은 언약의 내 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언약의 후손인 교회에게 주는 책이며 그 언약의 후손들에게 참 목자이신, 참 설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목자(牧者)의 설교는 이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의 내용으로 결론이 나야 합니다. 전도서의 내용이 당신들의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예수 잘 믿고 야훼를 경외(敬畏)하며 삽시다.” 항상 이게 결론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우리 강사는 항상 설교의 결론이 같을까?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설교자는 다른 이야기 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설교는 인생은 헛되고 헛된 것이니 야훼를 경외하는 삶으로 돌이켜라항상 이것이 설교의 결론이어야 합니다.

(전도3:18) 18 사람이란 본디가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뭐예요?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는 짐승입니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사는 매주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여러분은 짐승입니다라는 것을 재확인 시켜드리고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바르게 설교를 하는 강사가 인기가 있을 리가 없지요. 강사(講師)가 목자(牧者) 노릇을 바로 한다면 강사는 절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12:11) 11 현자들의 말은 송곳 같은 것, 목자가 든든히 박은 말뚝 같은 것이니라, 금언집은 만민의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전도서의 마지막에서 지금까지 너희에게 한 모든 말씀은 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짐승이다. 짐승의 삶은 모두 헛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라.“ That's it!

그런데 제가 뭐라고 다른 소리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인생을 통해 저는 짐승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그래서 제게는 구원자가 필요 합니다라는 기도를 올리는 자로 변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15:26-28) 26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28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주님 저는 개()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짐승임을 인정하는 곳에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이 (1:2-11)까지입니다. 전도서의 주제가 나오지요? “모든 것이 헛되다. 해하늘아래 새 것이 없다는 주제가 나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이 (1:12-11:8)까지입니다. 전도서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번째 부분에서는 헛된 삶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 전도자가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다 가졌고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된 것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 누가 더 많이 가지고 누가 조금 덜 가지고의 차이도 모두 헛된 것이고, “누가 더 착하고 누가 더 악하고의 차이도 누가 더 많이 배우고 누가 덜 배우고의 차이도 역시 헛된 구분이라는 것을 전도자는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도2:14-17) 14 지혜로우면 제 앞이 보이고 어리석으면 어둠 속을 헤맨다고 했지 만, 그래 보아야 둘 다 같은 운명에 빠진다는 것을 나는 안다. 15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운명에 빠진다면 무엇을 바라고 지혜를 얻으려고 했던가?'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이것도 또한 헛된 일임을 깨달았다. 16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모든 일은 잊혀지고 말리라.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죽지 않는가! 17 그래서 나는 산다는 일이 싫어졌다. 모든 것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라,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나에게는 괴로움일 뿐이다.

 

(전도7:13-18) 13 하느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보아라. 하느님께서 구부려 놓으신 것을 펼 사람이 어디 있는가? 14 일이 잘 되거든 행복을 누려라. 일이 틀려 가거든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아라. 아무도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라. 15 나는 덧없는 세월을 보내면서 세상만사를 다 겪어 보았다. 착한 사람은 착하게 살다가 망하는데 나쁜 사람은 못되게 살면서도 고이 늙어 가더구나. 16 그러니 너무 착하게 살지 말라. 지나치게 지혜롭게 굴 것도 없다. 그러다가 망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17 그렇다고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라. 어리석게 굴 것도 없다. 그러다가 때도 되기 전에 죽을 까닭이 없지 않는가? 18 한 쪽을 붙잡았다고 다른 쪽을 버리는 것은 좋지 않다.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야 치우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다.

 

(전도8:11-14) 11 아무리 죄를 지어도 당장 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할 생각밖에 없다. 12 백번 죄를 짓고도 버젓하게 살아 있더구나.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하느님 앞에서 조심하며 살아 가는 사람은 잘 되어야 하고 13 하느님 두려운 줄 몰라 하느님 앞에서 함부로 사는 악인은 하루살이처럼 사라져야 될 줄은 나도 확신하지만 14 땅 위에서 되어 가는 꼴을 보면 모두가 헛된 일이다. 나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착한 사람이 받는가 하면 착한 사람이 받아야 할 보상을 나쁜 사람이 받는다. 그래서 나는 이 또한 헛되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부분(11:9-12:8)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일하시는 바를 모두 깨달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분은 주권자이시고 왕이시며 항상 옳으신 분이시므로 그 창조자를 기억하고 그 분에게로 돌아가라라는 것을 세 번째 부분과 연결해서 설명해 줍니다.

욥기나, 잠언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욥기도 하느님이 왜 이렇게 일을 하시는가를 묻지 말고 그 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옳다라고 인정하고 그 분의 주권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그 분을 경외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회복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잠언도 마찬가지고요.

 

(전도11:10-12:1,7,8) 11,10 젊음도 검은 머리도 물거품 같은 것, 네 마음에서 걱정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스러운 일을 흘려 버려라. 12,1 그러니 좋은 날이 다 지나고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구나!' 하는 탄식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오기전, 아직 젊었을 때에 너를 지으신 이를 기억하여라. 7 그렇게 되면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 가고 숨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니 하느님께로 돌아 가리라. 8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또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그리고 다섯 번째 부분인 (12:9-14)까지에서 이제 이 이야기를 다 들었으니 이제 너희들은 하느님을 경외(敬畏)하고 하느님의 명령(命令)을 지켜라하고 끝을 맺습니다. 잠언에서처럼 여기서도 내 아들아하고 언약의 후손인 교회, 바로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전도12:12-14) 12 아들아, 한 가지 더 일러 둘 말이 있다. 책을 쓰려면 한이 없는 것이니, 너무 책에 빠지면 몸에 해롭다. 13 들을 만한 말을 다 들었을 테지만,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키라는 말 한 마디만 결론으로 하고 싶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다. 14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심지어 남몰래 한 일까지도 사람이 한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는 심판에 붙이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여라.

 

이렇게 전도서도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헛된 것에서 돌이켜 하느님을 경외하고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자가 되라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예수를 제시하는 복음이 적혀 있는 책인 것입니다.

성경(聖經)은 전체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허무한 곳에 하느님의 은혜가 임하여 그곳이 빛으로, 충만으로, 질서로, 회복 되는 것을 우리가 새 창조, 재창조, 구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전도서가 바로 그 복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1:2) 2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바로 이 모습이 허무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에서도 창세기 12절의 그 단어들을 그대로 인용해서 타락한 세상을 표현합니다.

(예레4:23) 23 '땅을 내려다보니 끝없이 거칠고 하늘을 쳐다보니 깜깜합니다.

 

그렇죠? 창조 전의 혼돈의 상태와 타락한 세상의 모습을 동일한 단어로 표현을 합니다.

분명 하느님은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그 혼돈함을 바로 잡고 공허함을 채워 주시며 그 것을 치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이 다시 혼돈하고 공허하며 헛된 것이 되어 버렸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창세3:16-19)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17 그리고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 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18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19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 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 가리라.'

 

이렇게 인간의 죄의 결과로 그들의 마지막 종착역이 죽음(死亡)”으로 결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든 것이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것은 모든 것이 허무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들도 다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허무해 진 것입니다. 헛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헛되고 허무한 인생의 모습이 죄인(罪人) 아담의 아들들에게서 바로 나타납니다. 아담은 아들을 낳고 그가 자기들을 구원해 줄 여인의 후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키우면서 보니까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둘째를 낳고는 그 아들 이름을 헤벨” “아벨, 허무한 것, 헛된 것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인생이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짐승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허무(虛無)이라는 아들, 아벨은 정말 허무하게 형에게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음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죽은 아들 대신에 다른 아들을 주심으로 하느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힌트하셨습니다.

셋이라는 아들을 주시면서 하느님의 언약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할 인생을(헤벨) 모두 품에 안고 죄 없는 의인(義人)이 죽음으로 아벨은 의인이었죠. 그 허무가 죽고 이제 허무함에 굴복하지 않는 새 생명들이 탄생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힌트하신 것입니다. 그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의 protype인 것입니다.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의 헛된 삶이 되셔서 카인의 후예들에게 맞아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악, 패역함을 말할 때 성경은 헤벨” “허무한 것” “헛된 것으로 표현을 합니다.

(신명32:21) 21 신 아닌 것을 모시어 내 질투심을 터뜨리고 허수아비를 섬겨 내 속을 썩여 주었으니, 나 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을 돌봐 주어 그들로 하여금 질투를 하게하고 무지한 민족을 돌봐 주어 그들의 속을 썩여 주리라.

 

(시편39:6-7) 6 걸어 다닌다지만, 실상은 그림자, 재물을 쌓아도 그것은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으며 그 차지할 자 누구일지 모르는 것을'. 7 그러니, 나의 주여, 이제 무엇을 바라고 살리이까? 당신 외에 또 누구를 믿으리이까?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과 그 것들을 추구하는 삶은 다 헛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한마디로 우상을 섬긴다.“라고 표현합니다.

(열왕상16:13,26) 13 이 일은 바아사와 그의 아들 엘라가 함께 죄를 짓고 나아가서 이스라엘을 죄의 길로 인도하였을 뿐 아니라 우상을 받들어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26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밟아 같은 죄를 지었고,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까지 죄에 빠뜨려 우상을 섬기게 하였으므로 야훼를 크게 노하시게 하였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헛된 것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없이 하는 모든 것은, 우상(偶像)을 섬기는 일은 다 미친 짓이라고 전도서가 강조합니다.

(전도9:3) 3 모든 사람이 같은 운명을 당하는데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 잘못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은 악으로 차고 넘쳐 얼빠진 생각을 하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전부 일생동안 미친 짓만 하다가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의 실존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고린후4:16)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하늘 아래 있는 허무한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후패하나) 새로 창조 된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하늘 위의 삶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under the sun()이 아니라 under the son(아들)의 상태로 들어간 자들입니다.

(묵시21:1,23) 1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3 그 도성에는 태양이나 달이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 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는 천국의 현실이 하늘 아래 사는 우리에게 이미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과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1:2) 2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고린전15:57-58) 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58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전도서에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고 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니까 이제 우리가 하는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닌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헛된 일이 아닌 하므님의 일, 하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이제 우리의 모든 일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 아래 헛 된 것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認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는 분들이 어떻게 여전히 헛된 일에만 몰두하며,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고린전15:17) 17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의 믿음은 헛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야고4:13-17) 13 '오늘이나 내일쯤 아무 아무 도시로 가서 일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어 보겠다' 고 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합니다. 14 당신들은 내일 당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15 그러므로 당신들은 '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일 저런 일을 해 보겠다' 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16 그런데도 당신들은 지금 허영에 들떠서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담은 모두 악한 것입니다. 17 사람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착한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죄가 됩니다.

하늘 아래의 것들, 헛된 것들을 자랑하는 것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고지론이 웬 말입니까? 그리스도교는 내가 무엇을 이루어 내서 하느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 우리는 짐승이요, 그래서 하나느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인의 후예들이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킬 때에 셋의 후손들은 호미 하나도 못 만들게 만드신 것입니다. 호미가 필요하면 카인의 후예들에게 가서 사서 써야합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전적으로 하느님만 의지하며 그 분께 의존(依存)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예를 보세요. 어찌 보면 베드로가 더욱 더 치사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의 불가능함을 가지고 하느님께로 다시 나왔고 유다는 내 죄는 내 가 책임지겠다고 목매달아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그런 건방을 떠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매일 매일 확인하세요. “하느님 나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우리는 하늘 아래의 것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하늘 위의 것들을 하느님께 구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골로3:1-4) 1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면 이제 해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2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3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필립3:20-21)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세주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위의 세상의 시민권자인 것입니다. 하늘 아래 세상에서는 이제 자꾸 눈을 떼세요.

(전도1:9) 9 지금 있는 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이요 지금 생긴 일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라.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하늘 아래 새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고린후5:17)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하늘 아래 새것이 있지요?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무한데 굴복하지 않는 새 것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과 저입니다.

(전도2:22-23) 22 사람이 하늘 아래서 제 아무리 애를 태우며 수고해 본들 돌아올 것이 무엇이겠는가? 23 날마다 낮에는 뼈아프게 일하고 밤에는 마음을 죄어 걱정해 보지만 이 또한 헛된 일이다.

 

(골로1:9-12) 9 우리는 그 소식을 들은 날부터 여러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해 왔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지혜와 판단력으로 하느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게 되기를 빌어 왔습니다. 10 , 우리는 여러분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함으로써 언제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온갖 좋은 일을 행하여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더욱 잘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11 또 우리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권능으로부터 오는 온갖 힘을 받아 강하여져서 모든 일을 참고 견딜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12 아버지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께서는 성도들이 광명의 나라에서 받을 상속에 참여할 자격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데살전5:16-18)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늘 기도하십시오. 18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타락한 하늘 아래의 인생들은 모든 수고가 슬픔으로 결론을 맺게 되지만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제 기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카 전서 518절을 보면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 삶 속에 기쁜 일과 감사한 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주시지도 않고 억지 고 기쁨과 감사를 만들어 내라는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예수로 말미암는 기쁨과 감사의 일들을 항상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겟세마네에서의 대 제사장적 기도에서 우리는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자라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17:13) 13 지금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아직 세상에 있으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아래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신 그 기쁨을 동일하게 가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슬픔과 수고뿐인 삶에서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슬픔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국 그들의 모든 수고가 죽음이라는 결론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헛되고 허무한 죽음(死亡)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만일 이곳에 아직도 그 헛된 것들의 노예로 사는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그 헛되고 허무한 것에서 빨리 돌이키십시오. 나중에 그 불타버릴 헛된 것들과 함께 지옥의 땔감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전도4:1) 1 하늘 아래서 억울한 일 당하는 사람들을 다시 살펴 보았더니, 그 억울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데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더구나. 억압하는 자들이 권력을 휘두르는데 감싸 주는 사람도 없더구나.

 

타락한 인간의 슬픔과 아픔과 고난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습니까? 가족이라고 상대방의 아픔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습니까? 부모 자식 간에도 진정한 위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의 아픔이 제일 큽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모든 위로는 가면일 뿐입니다.

‘in my country’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samuel jackson julliette binoche가 주연을 한 영화입니다. 그 영화는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의 대통령이 되고 데스몬드 투투라는 카톨릭 대 주교가 인도하는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이라는 것이 남아프리카의 인종간의 화해 위원회가 하는 일들을 취재하면서 그 동안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당한 것을 지켜보면서 거의 실성할 정도로 흑인들에 대해 연민을 가집니다. 그들은 흑인들을 위해 목숨도 걸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들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웁니다. 흑인들의 인권에 대해 취재하며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두 유부남, 유부녀가 바람을 피운다는 말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누가 누구를 위로해 줍니까? 자기 곁에 있는 남이 아무리 커다란 아픔 속에 슬퍼한다 해도 자기 앞에 있는 작은 초콜릿 케잌에 눈이 머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위로 자가 생겼습니다.

(고린후1:3-6)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하느님으로서 4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하더라도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하느님의 위로를 받는 우리는 온갖 환난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또한 위로해 줄 수가 있습니다. 5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많은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많습니다. 6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또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우리가 겪는 것과 똑같은 환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견디어 냄으로써 위로를 맛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위로가 되셔야 합니다. 남편에게 자식에게 아내에게 여러분의 위로를 구하지 마세요. 그들은 진정한 여러분의 위로가 못 됩니다.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가 되십니다.

(전도8:14) 14 땅 위에서 되어 가는 꼴을 보면 모두가 헛된 일이다. 나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착한 사람이 받는가 하면 착한 사람이 받아야 할 보상을 나쁜 사람이 받는다. 그래서 나는 이 또한 헛되다고 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판단하기를 어떤 사람이 돈도 잘 벌고 하는 일이 잘 되면 하느님께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럴만한 이유와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못 살고 못 배우고 일도 지지리 안 풀리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 무슨 잘 못이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악인이 의인의 대접을 받을 수 있고 의인이 악인의 대접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가?

(요한3:35-36) 35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다. 36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를 의인(義人)이라 하고 아들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자를 악인(惡人)이라고 합니다. 의인(義人)과 악인(惡人)의 구분은 아들 안에 있느냐, 아니냐?“로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전도3:11) 11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 가도록 만드셨더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마음을 주셨지만,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을 시작하여 어떻게 일을 끝내실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전도8:17) 17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서 하시는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래 찾아도 그것을 알 사람은 없다. 이런 일을 안다고 장담할 현자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게 타락한 죄인들은 하느님의 일(행사)을 깨닫지 못하던 자들이었는데 죄인들은 감히 하느님의 뜻을 상상할 수도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깨달은 자들은 그 하느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로마12:2) 2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이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사귐이 가능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께서 감추어진 분, 노여워하시는 분, 구름, ,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묘사가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느님이 죄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편18:11-14) 11 몸을 어둠으로 감싸시고 비를 머금은 구름을 두루고 나서시니, 12 그 앞에선 환한 빛이 터져 나오며 짙은 구름이 밀리고 우박이 쏟아지며 불길이 뻗어났다. 13 지극히 높으신 분, 야훼께서 천둥소리로 하늘에서 고함치셨다. 14 번개가 번쩍번쩍, 화살을 마구 쏘아대시어 원수들을 흩어 쫓으셨다.

 

(시편97:1-3) 1 야훼께서 왕위에 오르셨다. 온 땅은 춤을 추어라.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 2 안개에, 구름에 둘러 싸이고 정의와 공정이 그 옥좌의 바탕이요 3 불길이 그를 앞서 가며 에워 싼 원수들을 살라 버린다.

 

(신명5:22-27) 22 야훼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캄캄한 구름이 덮인 그 산 위 불길 속에서 너희 온 회중에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을 조금도 보태지 않으시고 그대로 두 돌판에 새겨 나에게 주셨다. 23 산이 불타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들리는 그 소리를 듣고 너희는 나에게 왔었다. 너희 각 지파의 어른들과 장로들이 모두 와서 24 말하였다. ',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그 크신 위엄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불길 속에서 울려 나오는 그의 목소리를 우리는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알았습니다. 25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죽어야 합니까? 이 무서운 불길이 우리를 막 삼키려고 합니다. 우리 하느님 야훼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날에는 우리가 죽을 것입니다. 26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불길 속에서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고도 산 사람이 육체를 가진 사람 가운데 어디에 있습니까? 27 그러니 당신이 나가서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십시오.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죄가 거룩 앞에 서면 그냥 녹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자신을 감추신 것입니다.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는 너무나 깊고 넓은 구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리가 되셔서 둘 사이에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 분과 사귐이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일1:5-7) 5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그대들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살아 가면서 하느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좇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7 그러나 하느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줍니다.

 

우리가 이제는 감히 하느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 된 것입니다. 아니 정도가 아니라 하나가 되었습니다.

(요한17,11,22-23) 11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 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2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하나가 되어 갑니다. 하나라는 것은 이제 하느님께서 대등한 차원에서의 교제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고 계신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 하느님과 대등한 차원에서의, 하나로서의 교제와 사귐을 원하시기에 우리를 억지로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신 것입니다.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해서 하느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신 것이고 궁극에는 그렇게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고 교제하고 사귈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전도서가 우리의 구원을 어떻게 값나고 빛나게 밝혀 주는지 아시겠지요?

(전도9:3-4) 3 모든 사람이 같은 운명을 당하는데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 잘못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은 악으로 차고 넘쳐 얼빠진 생각을 하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4 그렇다. 사람이란 산 자들과 어울려 지내는 동안 희망이 있다. 그래서 죽은 사자보다 살아 있는 강아지가 낫다고 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평생 미친 마음을 품다가 결국에는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들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개처럼 산다 할지라도 이승에서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개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잖아요.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끝이며 영원한 형벌의 시작이니까요.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들은 다릅니다.

(요한일5:11-12) 11 그 증언은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과 그 생명이 당신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12 하느님의 아들을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그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으며 미친 짓을 하다가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사람들에 비해 하느님의 백성들은 새 생명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복이 되어 버렸습니다.

(묵시14:13) 13 나는 또 ''이제부터는 주님을 섬기다가 죽는 사람들이 행복하다' 고 기록하여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서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옳은 말이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헛된 삶을 모두 가져가시고 우리가 새로운 자가 되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하느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이 되었고, 헛된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되었고, 모두 다 미친 짓을 하다가 죽어 가는 세상에서 새 생명을 소유하고 복된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전도자, 참 설교자가 우리 교회에게 지금 이 시간 하느님 없는 인생들의 허무함을 가르치시고 계신 책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헛된 것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헛되지 않게 사용하는 것일까? 어차피 우리 도 이 세상 것들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방법을 알아야겠지요? 마지막으로 거기에 대해 살펴보고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 땅의 헛된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표현한다면 ()”입니다. 물질계의 모든 것은 으로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헛됨의 상징인 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걸 잘 정리하고 있으면 헛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지요?

여러분은 왜 돈을 버십니까? 예수를 믿기 전에는 우리 배()를 위해, 나만 잘 먹고 잘살기 위해 그리고 세상에 자랑을 하기 위해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서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이웃과 교회를 위해 쓰기 위해 돈을 법니다. 돈을 버는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서 아무리 선()하고 아름답게 쓴다고 해도 그 돈의 소유주가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면 그는 지금 헛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루가복음에 나오지요? 불의 한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다가 주인한테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가서 무엇을 해서 먹고살까 생각해 보니 도대체 먹고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생각 해 낸 것이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그 빚을 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기름 백말을 빚진 사람을 불러서 50말로 감해 주었습니다. 100석을 빚진 사람은 80석으로 감해 주었습니다. 아주 얍삽한 행동입니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남의 재산을 축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 불의 한 청지기의 행동을 지혜롭다고 칭찬을 합니다.

당시에는 율법 상 고리대금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나 레위기나 신명기에 보면 정확히 나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물건을 꾸어주거나 돈을 꾸어주고 절대 이자를 받을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자 없이 누가 돈이나 곡식을 꾸어줍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이 생각해 낸 것이 차용 문서에다가 아예 이자까지 보태서 차용금액을 적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에 기름은 연 이자가 80%에 보험료가 20%였습니다. 그래서 이자가 합이 100%였습니다. 그러니 기름50말을 빌린 사람은 일 년 후에 기름 100말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문서에 100말을 빌렸다고 적은 것입니다. 채권자가 율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합법적으로 채무자와 합의하에 그렇게 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밀은 이자20%에 보험료 5% 해서 합이 25%의 이자를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밀 80석을 빌리게 되면 문서에는 100석이라고 적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불의 한 청지기가 쫓겨나기 전에 행한 일은 주인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사후예방을 한 것입니다. 이자를 빼고 빌려준 그대로 적게 만든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함으로 채무자들에게는 많은 짐을 덜어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머리를 써서 자신의 미래를 긴박함을 가지고 준비했다는 점에서 그는 칭찬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루가16:8) 8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지혜롭다).'

 

그 불의 한 청지기는 이 세대의 아들들을 대표하는 것이고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제자들이 빛의 아들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불의 한 청지기의 비유는 이 세대의 아들들도 자기가 속한 나라의 원리를 따라 열심히 자기의 내일을 준비하는데 너희들은 빛의 아들들이면서도 왜 너희가 속한 나라의 원리를 따라 너희의 내일을 긴박하게 준비하지 않느냐?” 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빛의 아들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 돈이라는 것이 자기의 삶 속에서 () 정의(定意)” 되지 않고, 패러다임shift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 돈으로 좋은 일을 한다 해도 역시 그는 불의한 자, 이 세대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허무하고 헛된 일을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돈을 가지고 옳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야고5:1-5) 1 이번에는 부자들에게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당신들에게 닥쳐 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통곡하십시오. 2 당신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 많은 옷가지들은 좀먹어 버렸습니다. 3 당신들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고 그 녹은 장차 당신들을 고발할 증거가 되며 불과 같이 당신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와 같은 말세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4 잘 들으시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밭에서 곡식을 거두어 들인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가로챘습니다. 그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또 추수할 일꾼들의 아우성이 반군의 주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5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리며 지냈고 도살당할 날을 눈 앞에 두고도 마음은 욕심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돈을 가지고 자기만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결국 다른 이들을 울게 만드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불의하고 악한 청지기입니다. 하느님은 물질을 인간에게 맡기실 때 주인과 청지기의 관계로 맡기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배만 불리는 데 쓰는 사람은 결국 다른 이들의 몫까지 혼자 먹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울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청지기도 있습니다.

(호세12,9) 9 '나는 정말 부자가 되었다. 한 몫 단단히 잡았거든. 이 손이 닳도록 벌었는데, 누가 나를 부정축재했다고 하랴' 라고 에브라임은 말한다마는,

 

(예제28,4-5) 4 너는 슬기롭고 현명하여 재산을 모아 창고를 금은으로 가득 채웠다. 5 무역기술이 썩 좋아 재산이 많이 모이니까 그 재산 때문에 그만 네 마음은 거만해졌다.

모든 인간은 재물을 가지게 되면 남이 울든 말든 이기적으로 자기 배만 채우게 되거나 아니면 선한 일에 쓰면서 스스로 교만하게 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돈이나 지식이나 힘을 써야 헛되지 않게 잘 쓰는 것인가? 선한 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착한 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데 어떻게 사는 것이 헛되지 않은 삶인가? 불의 한 청지기 비유의 말미가 어떻게 맺어지는지 보세요.

(루가16:10-11) 10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 11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충실하지 못한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불의한 재물에 충성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최선을 다해서 벌어서 최선의 방법으로 쓰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쓰는 것이 과연 바르게 쓰는 것인가?

(루가16:12) 12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 주겠느냐?'

 

우리가 불의한 재물에 충성을 하고 헛되지 않게 쓰기 위한 첫 번째 주지사항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다 남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것누구 것입니까?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게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근검절약해서 남을 돕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 마음에 은근한 자랑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랑은 교만이며 교만(驕慢)은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벌어서 선한 일을 하면서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헛되고 허무한 것들을 남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 주인이 시키는 대로 잘 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선한 청지기들입니다. ()한 청지기들은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가난한 자입니다. “아무 것도 자기 것이 없으니까그래서 가난 한 자는 복이 있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가난한 자들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만 생존할 수 있는 아주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이 있건 없건, 지식이 많건 적건, 힘이 세건 약하건 늘 주인의 도움을 구하며 삽니다. 그 게 기도(祈禱)입니다.

그러니까 헛되지 않은 삶을 사는 자들, 선한 청지기들은 절대 이 땅의 헛된 것들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하느님 말고 우리가 우리의 안전의 근거를 삼고 있는 것은 모두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마태6:19-24) 19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 와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적이 뚫고 들어 와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하느님과 맘몬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의 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도 결론을 이렇게 내리는 것입니다.

(루가16:13) 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잠언23:4-5) 4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마저 버려라. 5 재물은, 한눈파는 동안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가는 독수리처럼 사라지고 만다.

 

(티모전6:9-10) 9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 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구 절들은 돈을 많이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게 무슨 돈이든 지식이든 건강이든 힘이든 자식이 든)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나의 목적이 아니라 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이고 결국에는 완성이 될 것이라는 정확한 정의 아래 그 것들을 너희 인생의 목표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칭 부자가 없습니다. 모두 다 가난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 정의(定意)”가 된 사람들은 그게 조금 없어져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나의 그리스도인 됨을 위해 하느님은 그 상태를 필요로 하시는 것이니까요, 그들은 돈이 많아도 절대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 상태도 하느님께서 나의 거룩에 필요하니까 허락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헛된 곳에서, 허무한 곳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모든 피조물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회복을 기다립니다. 그 물질계의 대표가 바로 돈입니다. 우리의 돈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서 세상이 정의하고 있는 그 가치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시 새롭게 남의 것으로 정의되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개, 돼지의 삶을 사는 것이요, 허무한 데 굴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의 소유로 정의(正義)된 돈이 아무리 선한 곳에 쓰여도 그것은 허무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확실하게 정의가 된 사람은 열심히 수재(水災)의연금도 내고 구제사업(救濟事業)도 하고 하세요. 그러나 아직 그것이 확실하게 정의되지 못하신 분들은 조금 더 참으시고 자기 의()를 쌓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허무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제 그 허무한 것에 굴복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이제 허무한 것에서 벗어나 당당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기쁘게 살아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