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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 믿음을 보시고 (에페3,17-1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29 조회수711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10. 29.

 

 믿음을 보시고

 

(에페3,17-19)

17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 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 감으로써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19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빈다.“는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공부해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성령으로 교회 안에 와 계심에도 불구하고 교회인 에페소 신자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하기를 기도(祈禱) 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통하여 자기 안에 와 계신 그리스도를 조금씩 알아 가는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신자가 된 교회를 향해서 그러한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성숙해 가면서 아 주님은 그런 분이구나. 그리고 그 분이 내 안에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는 것이지요. 거기에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더 잘 알게 되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명확하게 드러나게 해 주지요.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공부를 한 것입니다. 정말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만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함께 확인을 했습니다.

 

오늘의 본론으로 넘어가지요. 사도 바울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 것 을 확인하는 방법을 믿음을 통해서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다시 번역을 하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신 것을 알게 된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알아 가는 그 과정이 믿음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믿음에 대한 바른 정의만 내려진다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쉽게 해결이 될 것입니다.

(로마1:17) 17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로마서 117절에서 복음(good news)이 어떻게 정의가 되고 있냐하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의()”라는 것이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라는 것이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인격이나 존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을 ‘ ’짜다크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책임을, 하느님의 약속을 성실히 수행해 내시는 하느님의 의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나서 하느님의 백성들이 믿음이라는 것을 갖게 만드시는 것을 우리가 복음(福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의 의()‘의 결과 즉, 하느님이 시작하셔서 하느님이 끝내시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은 우리가 국어사전에서 정의(正意)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어떤 존재나 대상을 받들고 따르는 것내가 행하는 나의 행위로 정의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시고 실행에 옮기시고 완성시키는 전과정을 믿음‘’객관적 믿음이라고 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신자들이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게 되는 주관적인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의 정확한 해석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오늘은 거기에 대해서 좀 더 확실하게 부연 설명을 해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 믿음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머물게 하는 방법이요 수단이 되는지도 아울러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는 국어사전에서의 믿음의 정의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교 대 백과사전(百科事典)에는 믿음이 어떻게 정의가 되어 있는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믿음은 어떤 사물에 대한 신념과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학에서 믿음이란 인간이 절대자 또는 초월자를 이해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믿음은 계시(啓示)에 응답하는 것이다. 성경에 있어서 신앙의 대상은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성경(聖經)에서의 믿음이란 일차적으로 신념이라기보다는 신뢰(信賴)이며 추상적인 지식이기보다는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이다

이 그리스도교 대 백과사전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에 대한 신념이나 신뢰라기보다는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 즉, 하느님이라는 인격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기 위해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는 그 계시에 반응하는 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합니다.

시중에서 믿음이 좋다라고 하면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하고 방언이나 예언이나 신유의 은사를 한 두개 정도는 가지고 있고 기도할 때도 입만 열면 청산유수로 좔좔 읊어대는 사람들을 우리가 믿음이 좋다라고 하지요?

혹은 그 사람의 그러한 열성적인 종교행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게 되면 저 사람은 참 믿음이 좋아, 믿음이 좋으니까 하느님께서 축복을 하셔서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 거야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聖經)은 그런 것을 믿음이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하던 자들에게 위선자(僞善者), 독사의 새끼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교 대 백과사전에서 읽었던 것처럼 기계나 무생물, 혹은 어떤 사실이나 지식, 혹은 알 수 없는 거대한 힘 같은 것에 보내는 신념이나 신뢰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느님이라는 인격과 인간이라는 인격 사이에서 생성되는 보다 깊고 고급한 어떤 것입니다.

믿음이 인격과 인격이 만나 그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는 말은 믿음이란 강제나 조정이나 억지를 동원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설득과 기대와 신뢰와 사랑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자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상대방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이 만나 상대방에 대해 올바른 지식(知識)을 습득하고 그 것을 근거로 , 이런 사람이라면 내가 정말 나의 모든 것을 맡겨도 되겠다.’라고 신뢰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상대방을 향한 나의 믿음의 행위 이전에 그 상대방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상대방은 강한 힘을 갖고 있고 나는 그 힘을 필요로 하는 약자이기 때문에 나는 무작정 그 상대방을 의지(依支) 한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대상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무조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어떤 질서나 법칙으로 취급을 하게 되면 그 대상은 내가 죄를 지으면 나를 자동적으로 벌하는 존재, 내가 조금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내면 나에게 상을 주는 존재이런 식의 기계적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욥과 세 친구들의 처음 신앙이 그런 것이었죠? 우리는 기계에게 설득 당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기계를 설득하지 않습니다. 엔진이 말을 안 들으면 엔진 오일을 갈아줍니다.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가 안 나오면 발로 세 번 정도 차지 그 자판기를 설득하지 않습니다. ”자판기야 내가 가진 동전이 딱 그거밖에 없다, 그러니 내 사정을 좀 봐 주라. 좀 힘이 들더라도 마지막 힘을 내서 내 커피만은 좀 내려 줄 수 없겠니?“ 이러지 않습니다.

욥이 인과율에 근거하여 나는 아무 죄를 안 지었는데 왜 나에게 이러십니까?” 하고 대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대뜸 너 악어를 이길 수 있니? 너 하마를 보았니? 그 풀만 먹는 하마가 어떻게 그렇게 힘이 센지 아니? 너 이슬은 누가 만드는지 아니? 서리는 누가 만드는지 아니? 너 우박창고를 봤니?” 이런 것을 물어보십니다.

하느님을 그저 잘하면 상주고 못 하면 벌을 주는 어떤 힘이요, 법칙이요, 질서로 이해하고 있던 욥에게 하느님은

나는 무정한 법 개념이 아니다, 나는 의지를 가지고 선과 의를 이루기 위해 자연과 모든 생물의 인격에 개입하는 하느님이다.

나는 네 인생에 있어서 그저 심판관이고 무정한 법칙이 아니라 너를 복되게 하기 위해 네 인격과 네 인생에 개입하는 아버지이고 인도자이고 복 주시는 하느님이다.

그러니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인격자인 나 하느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너에게 허락하는 너에게 최고로 좋은, 참 복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너는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욥기를 통해 우리 교회에게 바른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어떤 힘 있는 대상에게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도 아니고 방법도 아니고 나에게서 나오는 어떤 훌륭한 행위도 아닙니다. 믿음은 인격과 인격이 만나 그 인격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상호 신뢰입니다.

히브리서 11장으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히브11:4-7) 4 아벨은 믿음으로 카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 믿음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5 에녹은 믿음으로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 가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게서 데려 가시기 전부터 그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7 노아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하느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 경고하셨을 때 그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 들이고 방주를 마련해서 자기 가족을 구했으며 그 믿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은 세상은 단죄를 받았습니다.

4절을 보면 아벨이 믿음으로 카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많이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벨은 양 치던 자였기 때문에 피 있는 제사를 드렸고, 카인은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곡식으로 제사를 지내서 카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들 많이 생각합니다. 구속사(救贖史)적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벨이 피 있는 제물로 제사를 드린 행위를 믿음의 행위라고들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행위를 어여삐 여기시고 하느님이 그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다(열납)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제사 중에는 짐승을 죽여서 태우는 번제(燔祭)도 있지만 곡식을 태워서 드리는 소제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안 됩니다. 그러면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창세4:4-5) 4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5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지 않으셨다. 카인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야훼께서 이것을 보시고

 

보세요, 창세기의 설명은 제물의 종류나 제사의 방법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 제물을 드린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벨을 반기시며(열납) 그 제물도 함께 반기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카인을 반기시지 않으심으로 그의 제사도 함께 반기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이 땅의 보이는 것으로 하느님께 선뜻 드려지는 우리의 열심이라든지 행위의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이 땅의 것으로 보상을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히브11,4-7) 4 아벨은 믿음으로 카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 믿음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5 에녹은 믿음으로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 가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게서 데려 가시기 전부터 그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7 노아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하느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 경고하셨을 때 그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 들이고 방주를 마련해서 자기 가족을 구했으며 그 믿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은 세상은 단죄를 받았습니다.

 

믿음이라는 원인이 이 땅의 어떤 것으로 보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누구는 믿어서 맞아 죽고 누구는 믿어서 하늘로 그냥 올라갑니다. 누가 더 훌륭한 신앙인 인지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생성이나 믿음의 보상에 이 세상의 것은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명령을 쫓아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다가 거기 등장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자기 믿음의 대가(代價)로 눈에 보이는 보상을 전혀 꿈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힘 있는 대상에게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해 열심을 부리고 노력하고 치성을 드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보상으로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제공되지도 않습니다.

성경(聖經)이 말하는 믿음은 인격자이신 하느님께서 인격을 가진 인간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시고 인간은 그 계시(啓示)에 반응하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하느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그들의 신을 설명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저 그들의 신은 능력이 있고 초월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신을 믿는 자들은 그 힘을 빌어서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주문(呪文), 혹은 부적(符籍)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다릅니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소개하시고, 설명하시면서 우리를 설득하시고 우리를 이해시키시려 하십니다. 그리고 잘못을 하면 야단을 치시고 어르고 달래시고 때로는 화를 내시고 우시기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감정까지 동원하신 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조종하시지 않으시고 기계나 로봇 취급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진짜 친구 삼으시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를 진짜 자식 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장이 나면 눕혀놓고 회로를 갈아 끼우고 전선을 교체하는 로봇처럼 취급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설득(說得)하십니다. 회유(懷柔)하십니다.

 

(이사1:2-6) 2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자식이라 기르고 키웠더니 도리어 나에게 반항하는구나. 3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만들어 준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 4 ! 탈선한 민족, 불의로 가득찬 백성, 사악한 종자, 부패한 자식들 야훼를 떠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기고 그를 배반하여 돌아 섰구나. 5 아직도 덜 맞아서 엇나기만 하는가? 머리는 상처투성이고 속은 온통 병이 들었으며 6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데가 없이 상하고 멍들고 맞아 터졌는데도 짜내고 싸매고 약을 발라 주는 이도 없구나.

 

보세요, 창조주(創造主)가 피조물이 잘못했다고 해서 이렇게 가슴아파할 이유가 있습니까?

다 죽여 버리고 다시 만들던가 뇌를 개조해서 다시 넣어 신제품으로 만들던가 하시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슬퍼하시고, 화를 내시고, 애원 하시고 하나요? 우리를 인격자로 대우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뭘 잘 못했을 때 어머니가 자식의 버릇을 고치려고 동네 사람들, 다 좀 나와 보시오하는 것 같지 않으세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러분 이런 경험 없으세요?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 교회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강제로 우리 코를 꿰어서 끌고 가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자신을 설명하시면서 나는 이런 하느님이다. 너 그래도 나 안 따라올래?” 이렇게 설득하십니다.

(신명4:32-40) 32 그렇다.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내신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나간 어느 세대에게나 물어 보아라.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는 하늘에도 물어 보아라. 이렇듯이 큰 일이 일찌기 있었더냐? 이런 말을 들어 본 일이 있었더냐? 33 너희처럼,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고도 죽지 않은 백성이 일찌기 있었더냐? 34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에집트를 어떻게 치셨는지 눈으로 보지 않았느냐? 모두들 두려위 떨게 하고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며 억센 손으로 치고 팔을 뻗어 싸우면서 한 민족을 딴 민족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자기 백성으로 삼으려고 나선 신이 있었느냐? 35 야훼께서는 너희로 하여금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요 다른 신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이 일을 보여 주신 것이다. 36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당신의 소리를 들려 주시어 너희를 깨우쳐 주셨고 땅 위에서 당신의 큰 불길을 너희에게 보여 주셨다. 그래서 너희는 불길 가운데서 들려 오는 그의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37 그는 너희 선조들을 사랑하셔서 그 후손을 택하셨고 몸소 위력을 나타내시어 너희를 에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38 그리하여 너희보다 많고 강한 민족을 하나하나 네 앞에서 몰아 내시고 너희를 그리로 이끌어 들이시고는 그 땅을 유산으로 주시어 오늘에 이르게 하신 것이다. 39 그러니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그리고 마음에 새겨 두어라. 야훼 바로 그 분이 위로 하늘에 계시고 아래로 땅 위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분밖에 다른 하느님은 없다. 40 너희는 내가 오늘 명령하는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후손이 잘 될 것이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아주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보세요, 하느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항복할 만한 분이신가를 설명하십니다. 하느님이 어떻게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시며 그 분이 이스라엘의 선조에게 하신 약속을 어떻게 신실하게 지키셨는가, 그리고 그들의 구원이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는 것을 광야 40년을 통해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근거로 하느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을 통해 모든 것을 비교하고 확인해서 하느님, 당신만이 하느님이십니다. 당신만이 저의 사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하는 고백을 받아내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 성경이고요.

믿음은 이렇게 인격적인 이해나 인식이 없이 주문이나 부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절대 강요나 강제가 아닙니다. 끊임없는 설득이며 이해의 작업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때때로 하느님의 백성들이 죄를 짓게 그냥 놔두시는 것입니다.

강제(强制)로 죄 못 짓게 손 발 꽁꽁 묶지 않으십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열매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고 하느님을 알고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의탁하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놔두십니다. 기도한다고 안막아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손발을 움직이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것은 하나도 안 하고 이렇게 기도만 하는 것은 하느님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어서 우리를 조종해 주세요.” 라고 하느님께 부탁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입니다. 하느님은 절 대 강제로 끌고 가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인생을 통해 스스로 그 싸움을 싸우게 하시고 결국 모든게 다 헛됩니다. 저는 하느님만 택하겠습니다.”라는 항복을 하게 만드십니다.

(창세2:15-17) 15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하시며 16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18 야훼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 하시고, 19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하나하나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다 주시고는 그가 무슨 이름을 붙이는가 보고 계셨다. 아담이 동물 하나하나에게 붙여 준 것이 그대로 그 동물의 이름이 되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다스려라그리고 먹지 말아라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아예 하느님의 명령을 입력한 칩을 뇌에다 장착하지 않으시고 명령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십니까?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접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절대 우리를 조종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보고 선택하고 결정하라고 하십니다. ”다스려라, 먹지 말아라라는 명령을 받고 어떻게 다스려야 되는가를 생각하고 노력해야 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저 선악과를 왜 먹으면 안 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먹을 것인지 안 먹을 것인지 스스로 결정을 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잘 이해해야 할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택권(選擇權)을 주셨다는 것을 최종 결재권을 주신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서의 제한적인 선택권입니다. 우리의 운명까지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공부를 열심히 하는 자식으로 키우려고 결정을 하고 아이가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세 번 이사를 합니다. 맹자는 이사 간 곳에서 장사치들 흉내를 내고, 장의사 흉내를 내고 하는 선택을 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훌륭한 학생이 되어야 하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큰 결정은 어머니가 한 것입니다. 맹자는 그 큰 결정 안에서의 작은 선택권을 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억지로 조종하고 입력해서 끌고 가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하느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하느님이 결정(決定)해 놓으신 커다란 운명(運命)의 방향으로, 설득하시고 이해시키셔서 데리고 가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십니다. 결정권을 주십니다. 시행착오를 허락하십니다. 그 속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을 설명해 가십니다.

왜냐하면 인격 적인 존재들은 힘 있는 자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존재들은 더욱 크고 두터운 인격 앞에 굴복합니다. 힘 있는 존재 앞에서는 아부나 약한척 연극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굴복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힘으로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설득하시는 것입니다.

(창세28:10-15) 10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11 한 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 간 뒤였다. 그는 그 곳에서 돌을 하나 주워 베게 삼고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자다가 12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13 야훼께서 그의 옆에 나타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14 네 후손은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서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 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분명 하느님께서 모든 종족이 네 후손으로 인하여 복을 얻는 복을 주시며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렸지요? 20년이나 걸렸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한 인간의 인생을 묵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야곱에게 20년이라는 시간과 기회와 경험의 장을 허락하셔서 인생이 헛되며, 세상에다가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얍복강 가에서 확인 도장을 찍으십니다. 하느님의 우선적인 목적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먼 저 야곱에게서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애정과 열심과 진심을 받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긴 시간과 과정을 통하여 항복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하느님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한시도 야곱에게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20년간 수많은 고생과 오해와 반목과 질시를 받으며 살았던 야곱의 인생이 하느님이 함께 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야곱의 상황들을 섭리하시면서 야곱을 설득하시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형을 만나서 형을 어떻게 부릅니까? “내 주() “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자신은 종()이라고 합니다. 이제 야곱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지키시는 하느님뿐입니다. 야곱이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사기꾼인 나에게 하신 약속을 그대로 지켜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야곱은 안 것입니다.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얍복강을 건넜는데 하느님의 약속대로 엄청난 부를 거머쥐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자식들의 모함으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게 모두 20년 전 베텔에서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그가 그렇게 목숨 걸고 자기 꾀로 긁어모은 재산을 에사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훼를 경외하는 자들의 삶은 원수를 향하여 주()라 부르고 자신이 오히려 종()이 되어주는 삶, 즉 원수를 사랑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야곱이 안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 의 믿음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각하고 심사숙고하고 선택하고 결정을 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신학(神學)에서 구약에 나타난 대표적인 신학적 주제를 계약신학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언약신학이라고도 부릅니다. 창세기서부터 하느님은 계속해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라, 그러면 너는 복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영생을 누릴 것이고 이 명령을 어기면 너는 벌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언약을 어기고 실패했습니다. 하느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과 약속 을 하십니다.

하느님이 왜 인간과 약속을 하십니까? 우리가 창세기 15장에서 본 것처럼 하느님은 인간과 약속을 하시지만 늘 혼자 그 약속을 지켜내십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인간과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혼자 지나가십니다. 그건 하느님 혼자 그 약속을 지켜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럴 거면 다 해 놓으시고 나중에 하고 이거 내가 했다하시면 될 것을 왜 굳이 하느님이 인간과 약속을 하시느냔 말입니다. 하느님은 그 약속을 통해서 이루어 내실 어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하느님을 그 자식이 꼭 알아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혼자 이루실 것이면서 하느님이 그 자식들하 고 계속해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명7:6-11) 6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 몸바친 거룩한 백성이 아니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에 민족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너희를 뽑아 당신의 소중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7 야훼께서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들보다 수효가 많아서 거기에 마음이 끌리셨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너희는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민족이다. 8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지키시려고 야훼께서는 당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신 것이다. 그리하여 에집트 왕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건져 내셨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알아야 한다. 너희 하느님 야훼 그분이야말로 참 하느님이시다.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 맺은 계약을 한결같이 지켜 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이시다. 10 그러나 당신을 싫어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려 멸망시키는 분이시다. 당신을 싫어하는 자는 바로 그 본인에게 지체없이 벌을 내리신다. 11 그러니 너희에게 오늘 내가 명령하는 계명에 딸린 규정과 법령을 너희는 지켜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그 약속을 지켜 내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자식들에게 알리시기 위해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인격 적인 두 대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가 꼭 시행되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은 쌍방 간의 믿음이 전제가 되어야 약속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어떤 약속을 하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믿으신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여러분이 과거에 믿음을 정의(正義)할 때 믿음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약한 자가 강한 자에 대한 신뢰요 의뢰인 것으로 정의하셨지요? 그러나 믿음은 그렇게 약자가 강자에게 보내는 신뢰일 뿐 아니라 강자가 약자에게 아무 런 이해관계가 없이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는 인격적인 신뢰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아, 아버지는 너를 믿는다.”라고 이야기할 때 아버지는 아들을 인격적인 차원에서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지, 아들에게 어떤 유익을 원하는 차원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동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버지의 믿음, 강자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히브11:8) 8 아브라함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를 불러 장차 그의 몫으로 물려주실 땅을 향하여 떠나라고 하실 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떠났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표현합니다.

(사도7:2-4) 2 스테파노는 이렇게 말하였다. '부형 여러분,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아직 하란에 자리잡기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살고 있을 때에 영광의 하느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3 '너는 네 고장과 네 친척을 떠나 내가 일러 주는 땅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4 그래서 그는 갈대아 지방을 떠나 하란에서 자리잡고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에 하느님게서 그를 하란에서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땅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 팔던 데라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여호수24:2-3) 2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말씀하셨소. '옛적에 너희 조상들은 유프라테스강 건너 저 편에 살고 있을 때 다른 신들을 섬겼었다.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 데라도 그러했다. 3 그런데 나는 그 강 건너 저 편에서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데려다가 이 땅을 샅샅이 밟게 하고 많은 후손을 보게 해 주었다. 그에게 이사악을 주었고

너희 조상들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그 다른 신들을 섬기던 조상들은 아브라함, 나홀, 데라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아니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우상을 섬기던 집안에서 태어나 우상을 섬기는 아버지와 함께 생활해 오던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이 나타나셔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란에서 머물면서 밍기적 거리다가 아버지 데라가 거기서 죽었고 하란에서 밍기적 거리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십니다. 그게 창세기 12장입니다.

(창세12:1-4) 1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룻도 함께 떠났다. 하란을 떠날 때, 아브람의 나이는 칠십 오 세였다.

그리고 12,13,14장에서 여러 사건들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납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가 가뭄이 심하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애굽 왕 파라오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서 팔아먹습니다. 그 때 애굽 왕에게서 받은 노비와 양과 염소 나귀, 낙타, , 금으로 아브라함이 부자가 됩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이 파라오보다는 크신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롯과 헤어지는 사건도 겪습니다. 그리고 롯이 네 임금의 연합군에게 잡혀가게 되고 아브라함이 318명의 머슴들을 데리고 네 왕의 연합군과 싸워서 롯을 구해 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을 만나고 창세기 15장에서 하느님을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창세15:1-6)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야훼께서 환상으로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 주며, 매우 큰 상을 너에게 내리리라.' 2 그러자 아브람이 말씀드렸다. '야훼 나의 주여, 나는 자식이 없는 몸입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다마스커스 사람 엘리에젤밖에 없는데, 나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3 나를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식 하나도 점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내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내 집의 이 종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이렇게 여쭙자, 4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를 이을 사람은 그가 아니다 장차 네 몸에서 날 네 친 아들이 네 대를 이을 것이다.' 5 그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 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6 그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시어,

이렇게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 가서야 야훼를 믿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나왔다고 기술(記述)하고 있습니다.

(히브11:8) 8 아브라함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를 불러 장차 그의 몫으로 물려주실 땅을 향하여 떠나라고 하실 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떠났던 것입니다.

By faith Abraham, when called to go to a place he would later receive as his inheritance, obeyed and went, even though he did not know where he was going.

여기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구절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피스테이 칼루메노스입니다. 수동태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해서(by faith)불림을 당했다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어서,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어서 거기서 나 왔다는 뜻보다는 믿음이라는 것이 아브라함의 부름을 주도한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11장의 이 믿음과 창세기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향해 어떤 목적을 세우시고 그들을 끌고 가시는 이해관계를 떠난 인격적인 대우를 또한 우리는 믿음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그 믿음은 바로 그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상대적으로 열등하고 약한 자가 종속적인 차원에서 강한 자에게 기대고 의지하여 무엇을 얻어내려는 것만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인격 적인 존 재 쌍방 간에 일어나는 인격적인 신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믿을만한 존재여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어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믿으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꼭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만들어 내시고 마시겠다는 사랑과 은혜의 결단을 전제로 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 하느님의 믿음의 행위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끌어내셨고 그로부터 하느님은 열심히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을 설명해 가시는 믿음의 행위를 계속해서 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끌 어 내신 것입니다.

 

(로마1,17) 17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은 하느님의 그 믿음의 행위가 아니면 절대 살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死亡)으로 던져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믿음의 행위가 우리를 살게 하며, 결국에는 그 객관적 믿음이 우리의 주관적 믿음을 이끌어 내시는 것이며, 그래서 이어서 의인(義人)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을 사도 바울이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열심을, 우리가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믿음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열심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 내거나 선택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느님의 열심이 축약되어지고 농축되어져 나타난 것이 그 모든 하느님의 열심이 어떤 한 사건으로 설명이 됩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十字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이지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시며 그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기필코 만드시고야 마시겠다는 그 인간을 향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으신 하느님의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페소서는 이렇게 진술하는 것입니다.

(에페2:8-9) 8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9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은총, 믿음, 구원, 선물은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9절의 행위와 자랑 즉, 인과율과 자랑과 대조해서 기록이 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 즉, 하느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기게 된 하느님의 선물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내용 중에 우리에게서 기인한 것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로 인해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믿음의 행위에 의해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구원에 관해서 조금 더 살펴보자고요.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로마5:9-10) 9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라는 것은 관계를 맺고 있는 네페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것을 라고 하지요. 하느님은 하느님의 책임을 열심히 성실하게 수행해 내시고 인간은 인간의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것을 의로운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를 10절에서 하느님과 화해(和解) 되어진 관계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구원은 하느님과 우리가 의로운 관계 로 회복되어지는 것이고 그것을 다른 말로 화목(和睦) 되어진 관계라고 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그 믿음은 하느님의 열심에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믿음의 행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하느님의 믿음의 행위가 진행되어지면서 우리에게서 믿음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구절이 있는 겁니다.

(로마3:21-26)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24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25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 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26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지금까지 드렸던 말씀이 여기 다 들어있지요? 하느님의 믿음의 행위를 우리가 하느님의 의()라고 하고 하느님의 의()는 여러 번 설명 해 드린 것처럼 하느님의 하느님다우심’, ‘하느님이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책임을 열심히 수행하시는 것’, 그것을 하느님의 의()라고 합니다.

그 하느님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의()라는 말 대신에 믿음이라는 말을 넣어보세요. 하느님의 믿음이 나타나서 우리를 믿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느님이 화목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성경이 구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우리가 만들어 내는 어떤 종교적 열심도 아니고 하느님께 어떤 보상을 받는 근거도 아닙니다. 믿음은 하느님께로부터 시작되어 우리에게서 반응을 받아내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들 간의 인격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종교행위를 믿음의 행위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근거로 나오지 않는 모든 행위들은 전부 쓰레기 같은 것들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더러운 쓰레기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위선자(僞善者)“라고 호되게 꾸짖으셨습니다. 겉으로는 번드르르하게 하느님의 율법(律法)을 지켜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전부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주님이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공생애 첫 설교 때 복과 율법과 거짓 예언자에대해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자기들에게 편리하게 마음대로 뜯어 고쳐서 나는 율법 지켰네, 나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네이렇게 써먹었습니다.

예를 들어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유부녀만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라고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해서 지켰고 부모를 공경하라는율법을 조상들의 전통을 악용해서 코르반, 하느님께 드려질 물건이라고 속여서 부모를 마땅히 봉양하는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부모가 달라고 할까봐 부모 앞에서이건 코르반입니다하고 선포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느님께도 드리지 않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썼다는 것이죠. 아니면 드리긴 드려도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면서 부모에게 봉양해야 할 것을 거기에 포함해서 바치는 행위를 했습니다.

인간들이 믿음의 행위로 내어놓는 사랑도 잘 보면 원수를 만드는 사랑입니다. 인간은 자기편만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자기편만을 사랑하다 보면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믿음의 행위라고 내어놓는 수많은 종교 행위들은 이렇게 가식적이며 이기적인 것들입니다.

(말라1:7-10) 7 너희는 제단 위에 더러운 빵을 바치면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제단을 더럽히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야훼의 젯상쯤이야 아무러면 어떠냐고 하는구나. 8 눈이 먼 짐승을 제단에 바치면서도 잘못이 없다는 말이냐?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바치면서도 잘못이 없다는 말이냐? 그런 것을 너희 고관에게 바쳐 보아라.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그러고도 융성한 대접을 받을 것 같으냐? 9 그 따위를 바치면서 긍휼을 빈다고 너희를 곱게 보아 주겠느냐?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10 너희는 내 제단에 공연히 불을 피운다. 그러지 못하도록 아예 문을 닫아 걸었으면 좋겠구나, 너희가 하는 짓이 나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말라2:3) 3 너희 팔을 자르고, 너희가 제물로 바친 짐승의 내장을 똥째 너희 얼굴에 끼얹고 내 앞에서 들어 내어 버릴테니, 두고 보아라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근거하지 않고 만들어내는 믿음의 행위, 신앙의 행위라는 것이 모두 이런 것들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에게서 시작되는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느님이 끊임없이 자기를 계시하시고 자기를 설명하시며 아울러 우리가 누구인지를 경험하게 하시면서 정말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하느님 한 분 뿐 이라는 것을 설득해 내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가? 이런 질문이 안 드세요?

제가 지금까지 믿음이라는 것은 인격 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상호 신뢰라고 했지요? “인격 적인 관계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인격적인 존재는 상대방의 인격이 강하게 그를 감동시키고 설득시킬 때에 당연히 반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반응이 반드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믿음의 행위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은 반드시 하느님의 인격 앞에 반응을 해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한 자들은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입니다.

 

정리 하겠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들 간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하느님의 백성들을 믿어주시고 그들에게 믿음의 행위를 하심으로 믿음이 시작되고 인간은 그 하느님의 열심에 반응을 하게 되어서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은 ()”라고도 표현 할 수도 있고 그 믿음과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느님과 화목(和睦)하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강제로 주입시키지 않으시고 시간과 경 험과 기회의 장()을 열어주시고 그 속에서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점점 쌓아가면서 그 믿음이 성장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은 한 마디로 인간과 하느님을 아는 지식(知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 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信仰生活)과 성경(聖經)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행위이며 그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에게서 책임이라는 반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는 자랑이 없고 그들에게서는 겸손(謙遜)과 감사(感謝)와 찬양(讚揚)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게 믿음 있는 자들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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