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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로마서와 함께(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에페3:17-1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31 조회수880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10. 31. 도란도란글방

 

로마서와 함께(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에페3:17-19)

17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 감으로써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사랑)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19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지난 시간까지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확인하게 된 자들의 삶 속에서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도 함께 살펴봤습니다.

사랑은 감정으로만 정의되는 것도 아니고 일시적인 기분도 아닌 선택이며 의지의 발동이라는 것도 공부했지요?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비교해서 설명해 드렸지요.

그리고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고는 절대 그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알아야 하고 복음을 알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해야 하고, 그리고 거기서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3171819절은 모두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살펴 볼 것입니다.

여러분, 1977년에 퓰리쳐 상을 수상한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이 기억나십니까?

뿌리” “Roots" 아프리카에서 끌려 온 자신의 조상 쿤타킨테의 이야기를 소설로 그려 놓은 아주 재미있는 책입니다. 고단한 노예의 하루를 마치고 쿤타킨테의 가족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쿤타킨테의 할머니로부터 자신들의 뿌리,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자신들의 할아버지가 만딩고 족의 얼마나 용맹스러운 용사였으며 이웃 부족과의 전쟁에서도 얼마나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노예 상인에게 잡혀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노예로 팔려오게 된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줍니다.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된 쿤타킨테는 아주 자긍심(自矜心) 있고 용기(勇氣) 있고 지혜(知慧)로운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게 됩니다. 그러한 뿌리에 대한 의식과 소속감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안정감을 주고 자긍심을 줍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의식도 주고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강한 동기를 부여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 소속감을 찾기 위해 많은 애를 씁니다. 그래서 힘없는 어떤 무리를 편을 갈라 소속감을 주고 그 편을 위해 무언가를 하게 만들어 주면 금방 그 무리는 힘이 생기곤 합니다.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뿌리를 찾아 올라가서 우리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밝히 확인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 작업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큰 자긍심(自矜心)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함께 하는 성경공부가 여러분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고 그처럼 이웃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로마서를 처음부터 쭉 리뷰를 해드릴 것입니다. 성경의 백미 하면 누구나 로마서를 듭니다. 이 로마서가 복음에 대해 아주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로마서에 나타난 복음을 간략하게 리뷰하면서 하느님께서 바로 나에게 어떤 사랑으로 어떤 은혜를 부으셨는가를 함께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보낸 로마의 교회는 누가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로마 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글라디오스 황제 때인 AD49년에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로마 교회에는 이방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네로 황제 때 다시 유대인들이 로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는 이렇게 교회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공존하게 되어서 안식일 문제라든지, 할례 문제라든지, 먹는 음식 문제 같은 것들로 다툼이 생 겼을 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도들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닌 로마 교회에 복음을 처음부터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하면 서 이런 은혜로 구원을 받은 너희들이 그런 사소한 것들로 분쟁을 해서 되겠느냐? 하고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17절까지 서론에서 복음에 대해서 개론적인 설명을 합니다.

 

(로마1:1-5)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 2 이 복음은 성서에 있는 바와 같이 일찌기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입니다. 3 그것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4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 그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내가 은총으로 사도직을 받은 것도 그분을 통해서 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을 믿고 복종할 것을 가르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사도(使徒)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전할 그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이다.“라고 서론에서 개론적인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18절부터 왜 인간들에게 구원이 필요한가를 설명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구원받아야 할 자가 어떤 위험에 빠져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것이죠? 어떤 위험입니까? 우리는 어디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죠? saved from what? 하느님의 진노(震怒)입니다.

그럼 하느님은 왜 인간에게 진노하시게 된 것입니까? 인간의 죄 때문이지요? 그 인간의 죄에 대해서 320절까지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 1:18-3:20까지를 조금 세밀하게 나누어 보면, 1:18-32절까지에 이방인들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가?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장 전체와 38절까지 유대인에게는 왜 복음이 필요한가?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21-16까지에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죄가 기록이 되어있고, 2:17-29까지에서는 유대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세세한 죄를 샅샅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1-8까지에는 그러면 하느님이 유대인들을 택해서 유대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해 오셨다. 유대인들의 특권과 할례의 특권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리고 39-20 절까지에서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전부 하느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구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의인(義人)이 없기 때문이다하고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 구원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로마3:9-12) 9 그러면 우리 유다인이 나은 점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내가 지적했듯이 유다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다 같이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10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이어서 321-331, 3장 마지막까지에서 그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럼 구원을 이루는 방법이 무엇인가?” 거기에 모든 인간들은 반드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면서 그 유명한 그러나 이제는, 누니 데의 구절이 나옵니다.

 

(로마3:21.28-30)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28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29 하느님은 유다인만의 하느님이신 줄 압니까? 이방인의 하느님이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과연 이방인의 하느님도 되십니다. 30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어서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나 다 같이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4장으로 넘어가서 선민이라고 자처해 왔던 유대인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유대인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로마4:9-13.23-25) 9 이러한 행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만이 누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누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고 하였습니다. 10 언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입니까? 받기 전입니까? 할례를 받은 후가 아니라 받기 전의 일입니다. 11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것을 확인하는 표로 그는 할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음으로써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2 또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사람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할례받은 사람이란 그저 할례를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보여 준 믿음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23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다' 는 말씀은 비단 아브라함만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24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4장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에 관해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5:1-11까지 에서는 그 구원의 결과에 대해서 진술(陳述)을 합니다. 그렇게 구원이 필요한 자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주어지게 되면 그들이 어떤 것을 누리게 되는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진술을 해 줍니다.

 

(로마5:1-5,11) 1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를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11 게다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12로부터 마지막 21절까지에서 그럼 어떻게 하다가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까지 빠졌는가? 어떻게 우리는 그렇게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인가?” 에 대한 대답을 해 줍니다. 그 답인 즉은 아담 안에서 그렇게 되었다입니다. ”한 사람 아담 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렇게 구원이 필요한 타락한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그렇게 대표의 원리를 설명하고서 그러므로 그 대표의 원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이 의롭게 된다.5장 후반부입니다.

 

(로마5:17-19) 17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이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은총의 경우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풍성한 은총을 입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거저 얻은 사람들이 생명의 나라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은총의 힘이 얼마나 더 큽니까! 18 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하고 바울이 5장까지에서 강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당장 어떤 질문이 나오게 되겠습니까? 그럼 그렇게 믿음으로,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네?”이런 질문이 나오겠지요? 거기에 대한 대답이 6장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그럴 수 없느니라.”

그 이야기가 6:1-14까지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는데 어떻게 계속해서 죄를 짓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냐?“ 바울은 단호하게 거기에 대해 대답을 합니다.

 

(로마6:2,11-13) 2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어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12 그러므로 결국 죽어 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13 또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그리고 6:15-76절까지 거기에 대해서 자세하게 부연 설명을 해 줍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죄가 시키는 대로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의의 길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우리가 율법과 혼인한 사이였으나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어 버렸기 때문에 합법적인 이혼관계가 되었고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을 한 사이가 되었으니까 절대 정욕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이것이 7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로마6:15-19) 15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맡겨서 복종하면 곧 자기가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종이 되어 죽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17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18 그리고 여러분은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할까 하여 이렇게 인간사에 비추어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온 몸을 더러운 일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기어 불법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온 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로마7:2-6) 2 결혼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자기 남편에게 법적으로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3 따라서 자기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와 사는 여자는 간음한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그 법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더라도 간음하는 것이 아닙니다. 4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한 몸이 되어 죽음으로써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른 분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유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5 전에 우리가 육적인 사랑을 하고 있을 때에는 율법 때문에 우리의 온 몸에 죄스러운 욕정이 발동하여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6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죽어서 그 계약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77절부터 마지막25절까지에서 옛 본성과 새 본성의 싸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았는데도 왜 아직도 우리 안에서는 이러한 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가? 왜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이 나오지 않고 왜 내가 원치 않는 악한 것들이 내게서 나오는가?

그러니까 로마서는 구원(救援)받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질문(質問)들에 대해 속속들이 다 대답(對答)을 해 주는 책입니다. 그렇게 거듭난 자들의 안에서 일어나는 새 본성과 옛 본성의 싸움에 대해서 신랄하게 묘사를 한 다음에 그럼에도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 대한 감사를 쏟아 놓습니다.

 

(로마7:21-25) 21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23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25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고 그 구원은 그럼에도 취소되지 않는다니 아!, 나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이냐 이게 7장 후반부입니다. 그리고 8장으로 이어집니다. 8장이 성경의 진수라는 로마서 안에서의 진수입니다.

 

(로마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8장에서 그 구원은 창세전부터 계획된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구원은 확실한 것이다라고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신 일과 하실 일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記述)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체험이나 경험 같은 것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 역사적 사실인 하느님의 하신 일을 앎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다라 고 강조합니다.

 

(로마8:31-35) 31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32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33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34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35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그 확실하신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은 뭐냐? 하느님께서 구약을 통해 유대인에게 하신 약속은 뭐냐?’ 그런 질문이 나오겠지요?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 등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수많은 약속을 해 오셨다. 만일 그 약속 도 안 지키시는 분이라면 지금 당신이 말하고 있는 그 약속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렇게 하느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도전이 당연히 생기겠지요?

그 때 사도 바울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약의 모든 약속은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녀에게 한 것이 아니라 영적 이 스라엘 약속의 자녀에게 약속하신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9장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증거로 이사악과 이스마엘을 들어서 설명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 장남인 이스마엘은 버리고 이사악만을 택하지 않았느냐? 하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혹시 이렇게 반문할 사람들이 있겠죠? ”그건 이스마엘이 적자(嫡子)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냐?“ ”이스마엘은 서자(庶子)라서 하느님이 택하지 않으신 것 아니냐? ”라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바울은 이어서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야곱과 에사오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 줍니다. ”야곱과 에사오는 쌍둥이다. 서자니 적자니 따질 게재가 없는 쌍둥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사악의 자손 중에 야곱만 택하시지 않았는가?“하고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신학 용어로 그것을 예정(豫定)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로마9:10-16) 10 뿐만 아니라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사악과의 사이에서 한번에 두 아들을 잉태했을 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1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13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 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14 그렇다고 하느님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5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고 싶은 사람에게 동정한다' 고 말씀하셨듯이 16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럼 또 이런 질문이 나오겠지요? “아니 뱃속에서 아무런 행위를 하지도 않았을 때 하느나님께서 누구를 택하신다면 그 하느님의 행사(行事)는 불공평한 것 아니냐?” 라는 질문이 당연히 들겠지요?

그 때 바울은 모든 인류는 원죄가 있어서 날 때부터 다 죄인이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다 죽어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어떤 무리를 거기서 건져내셨다면 그게 왜 불공평한 것이냐? 그리고 옹기장이 비유를 들어서 하느님의 주권(主權)과 은혜(恩惠)를 설명해 줍니다.

 

(로마9:19-21) 19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을 책망하십니까? 누가 능히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1 옹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그럼 하느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도 주셨고 약속도 주셨고 그들을 이끌어 오셨는데 그들은 왜 실패했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이 930절에서 10장 마지막까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의()를 의지(依支)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를 의지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로마9:30-32) 30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이 오히려 그 올바른 관계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31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법을 추구하였지만 끝내 그 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32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얻으려 하지 않고 공로를 쌓음으로써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9장과 10장을 전혀 다른 이야기로 해석을 하시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9장은 보다시피 하느님의 은혜에 관해서, 하느님의 주권에 대해서 철저하게 강조합니다. 그런데 10장을 언뜻 보면 마치 알매니안 주의를 지지하는 것같이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성경이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로마10:8-10) 8 하느님께서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고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9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9 장에서는 하느님의 전적인 주권과 은혜를 강조했는데 10장에서는 믿어라“”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그럽니다. 알매니안 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입니다. 그러나 그 밑의 구절들을 잘 보면 10장이 절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로마10:13-15) 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4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 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전도자로서 파견 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말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보세요. 맞다.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그런데 듣지 못하고 어찌 믿겠는가? 그리고 누군가가 보내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들이 와서 전하겠는가? 그 사람들은 누가 보냈는가? 하느님이게 어떻게 알매니안 주의입니까? 하느님이 보내시지 않으시면 전하는 자도 없을 것이고 전하는 자가 없으면 들음도 없을 것이고 들음이 없이 어떻게 믿음이 생기겠는가?

10장도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장입니다. 10장은 9장을 더욱더 확실하게 부연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11장에서 그럼 유대인은 다 버림받은 것이냐?에 대한 대답을 해 줍니다. “아니다하고 사도 바울은 11장에서 전체 구속사(救贖史)의 단계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유대인들을 먼저 택하셔서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느님을 계시하시고 언약을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사와 율법과 할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들에게 온 메시야를 이방인들의 손을 빌어 죽여 버렸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급속히 전파되게 되었고 하느님의 계획은 그렇게 착착 진행되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곧 처음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시기해서 그들도 하느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 11장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을 얻은 너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강령(行動綱領)12장부터입니다. 12장부터 몇 가지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해서 예수를 못 믿게 하는 위정자(爲政者)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종해라. ‘신앙으로 그들에게 본을 보여라, 상전들아 노예들을 형제처럼 대해 줘라, 노예들아 상전의 일을 네 일처럼 해라, 세금도 꼬박 꼬박 내라이런 내용들로 16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하느님의 영광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찬양을 부르고 끝을 맺습니다.

 

(로마16:25-27) 25 하느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 두셨던 그 심오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심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을 굳세게 해 주십니다. 26 그 진리는 이제 예언자들의 글에서 명백하게 드러났고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모든 이방인들에게 알려져 그들도 믿고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27 이러한 능력을 가지시고 지혜로우신 오직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이게 로마서입니다. 이 로마서의 열여섯 장중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속의 원리에 대해 잘 설명해 놓은 11장을 함께 읽으면서 이 복음(福音)이 얼마나 엄청난 하느님의 사랑에 기인(起因)한 것이며 그 구속사의 비밀은 얼마나 신비(神秘)한 것인지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한번 맛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기도(祈禱)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전체를 통해 계속해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9장부터 하느님의 약속과 율법과 예배와 언약을 갖고 있던 육적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로 구원에 이르려 했기 때문에, 행위에 의지했기 때문에 그들은 다 망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언약을 주신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을 천명합니다.

그리고 10장으로 넘어와서 믿음은 그렇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그 10장을 이렇게 마칩니다.

 

(로마10:19-21) 19 나는 다시 묻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말씀을 알아 듣지 못했습니까? 우선 모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희로 하여금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기하게 하겠고 어리석은 백성을 보고 화나게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20 또 이사야는 더욱 대담하게, '나를 찾지 않던 사람들이 나를 만났고 나를 구하지 않던 사람들이 나를 보았다' 고 하였습니다. 21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나는 온종일 내 팔을 벌려 이 백성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거역하고 있다' 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이스라엘에게 손을 내밀고 하느님을 나타내셨는데 이스라엘이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1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을 다 버리신 것이냐?”

 

(로마11:1) 1 나는 또 묻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나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하느님께서 메시야를 거부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덤으로 은혜의 시대를 허락하셔서 이방인들을 건져내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이방인들의 수가 차게 되면 나중에 7년 대 환난을 전기로 민족적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신다는 시나리오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로마서 111절 한 절의 말씀이 세대주의자들의 그러한 주장을 일축해 버릴 수 있는 구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다 버려진 것이 아니다. 날 봐라, 내가 유대인이다. 그런데 내가 구원받았다 그러는 것입니다.

버려진 이스라엘 속에서도 하느님의 택하심을 받은 영적 이스라엘은 계속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때 교인들의 대부분이 누구였습니까?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도2:38-41.46-47) 38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셨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39 이것은 우리 주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곧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그들을 설득시키고 이 사악한 세대가 받을 벌을 면하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41 그들은 베드로의 말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 날에 새로 신도가된 사람은 무려 삼천 명이나 되었다. 46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돌아 가며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47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

 

이 삼천 명은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 신자의 수가 날마다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세 번에 걸친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야고보가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21:18-20) 18 다음 날 우리는 바울로를 따라 야고보를 찾아 갔는데 원로들도 다 거기에 모여 있었다. 19 바울로는 그들에게 인사한 다음 자기의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해 놓으신 일들을 낱낱이 보고하였다. 20 그들은 그 보고를 듣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바울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시겠지만 유다인들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율법을 지키는 데 골몰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몽땅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포함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계속해서 구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바울이 피력하는 것입니다.

 

(로마11:2-5) 2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당신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하느님께 이스라엘을 고발하면서 한 말을 여러분은 성서에서 읽어 보지 못했습니까? 3 그가 '주님, 그들은 주님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주님의 제단을 모조리 헐어 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저 하나뿐인데도 제 목숨마저 노리고 있습니다.' 고 하자 4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나에게는 아직도 바알신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이 칠천 명이나 있다' 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5 이와 같이 지금도 은총으로 뽑힌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예로 들어서 이스라엘이 모두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구약의 한 대목을 예로 들어서 남은 자들, 그러니까 하느님께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자들, 영적 이스라엘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남겨놓으신 사람들은 유대인이 건 이방인이건 계속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은 자들,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 말고 택함을 받지 못하고 남겨진 자들은 어떻게 된 거냐?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라고 바울이 7절부터 설명을 합니다.

 

(로마11:7-10) 7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찾던 것을 얻지 못했는데 뽑힌 사람들은 그것을 얻었습니다. 뽑히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이 완고해져서, 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혼미한 정신을 주셔서 오늘날까지 그들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고 귀를 가지고도 듣지 못하게 되었다' 하신 성서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9 그래서 다윗도, '그들이 벌여 놓은 잔치 자리가 오히려 올가미와 덫이 되어 그들이 걸려 넘어져 패망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0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등은 굽어진 채로 펴 볼 날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 '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남은 자들은 헬라어로레임마입니다. 7절에서도 남은 자가 나오지요? 여기서의 남은 자는 로이포이“(the rest)입니다. 택함을 받지 못하고 남겨진 자들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멀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혼미한 영을 주셨다이 말씀은 신명기29장과 이사야6장의 인용 구절입니다.

(신명29:2-4) 2 그들을 괴롭히시며 굉장한 표적과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너희는 목격하였다. 3 그러나 야훼께서는 이날까지 너희에게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다. 4 그래서 나는 사십 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너희를 이끌고 다녀야 했다. 그러나 너희가 걸친 옷은 해어지지 않았고 발에 신은 신발은 닳아지지 않았다.

 

(이사6:9-10) 9 주께서 이르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말아라.' 10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이게 뭡니까? 마치 하느님께서 굉장히 나쁜 일을 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요?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귀가 멀고, 눈이 멀고, 혼미한 영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그냥 놔두셨다라는 말씀입니다.

타락한 죄인들은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모두 그렇게 눈멀고 귀 막힌 채로 살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 중의 얼 마를 하느님께서 눈을 뜨게 하시고 귀를 열어서 하느님을 듣게 하고 하느님을 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좋으실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밥을 잘 안 먹습니다. 그래서 늘 어머니가 쫓아다니면서 밥 먹어라, 밥 먹어라해야 합니다. 그래도 조금 먹다가 맙니다. 어느 날부터 어머니가 식사 때가 되어도 아이에게 밥을 먹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끼, 두 끼, 세끼, 아이는 계속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사흘 째 되는 날 배가 너무 고파서 자기가 알아서 밥을 찾아 먹었습니다. 그것을 본 옆 집 아주머니가 저녀석 요즘 밥 잘 먹네.” 하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 저 녀석 밥을 사흘 굶겼더니 밥을 잘 먹네하셨습니다. 그 어머니가 밥을 굶긴 것입니까? 아이가 안 먹은 것입니다. 단지 어머니가 쫓아다니면서 밥 먹어라, 밥 먹어라 안 했을 뿐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악하게, 혹은 강퍅하게 하셨다라는 표현도 쓰지만 우리가 강퍅하다. 완악 하다라는 말도 씁니다. 사실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악 하게 하셨다는 말을 사용하는가 하면 지금은 너희가 그런 멸망의 상태이지만 내가 장래에 모종의 조치를 취하겠다.“라는 구원사적인 역사를 예고할 때 하느님께서 완악 하게 하셨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왜 이스라엘은 완악 하게 놔두시고 귀를 멀게 하시고 눈을 멀게 하신 것입니까?

 

(로마11:25) 25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모든 것을 다 알았다고 장담할지 모르지만 아직 깨닫지 못하는 숨은 진리가 하나 있는데 여러분도 그것을 꼭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그 진리란 이런 것입니다.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은 완고하지만 모든 이방인들이 하느님께 돌아 오는 날에는 그 완고한 마음을 버릴 것이고

 

이스라엘이 마음이 완악 하게 되어 그들 가운데서 구원받는 자들이 이렇게 줄어들게 놔두신 것은 이방인의 충만(充滿)한 수가 들어오게 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독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요나를 통해 그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입니다.

하느님께서 아시리아의 도시인 니느웨에 가서 복음(福音)을 전하라 하셨을 때 요나는 거부했습니다. 요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이외에 다른 이방인들에게 하느님께서 은혜(恩惠)를 베푸신다는 것은 그에게는 말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악 하게 놔두시고 이방인들에게 먼저 복음이 충만히 전파되도록 하신 다음에 이스라엘도 구원을 하시는 그런 구속의 단계를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것이 하느님의 깊은 지혜(智慧)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비밀(秘密)”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9절과10절에서도 그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로마11:9-10) 9 그래서 다윗도, '그들이 벌여 놓은 잔치 자리가 오히려 올가미와 덫이 되어 그들이 걸려 넘어져 패망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0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등은 굽어진 채로 펴 볼 날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 '

 

이 구절은 시편69편을 인용한 것이지요?

(시편69:21-23) 21 죽을 달라 하면 독을 타서 주고 목마르다 하면 초를 주는 자들, 22 잔치를 차려 먹다가 그 음식에 걸리고, 친교제물을 나누어 먹다가 망하게 하소서. 23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 보지 못하고 그 허리는 영원히 가누지 못하게 하소서.

 

이 시편은 다윗의 이야기이지만 메시아에 관한 시편입니다. 다윗이 자기의 원수들을 저주하는 장면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지요? 그러니까 이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린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복, 밥상이 즉, 하느님을 계시해 주신 것과 율법과 할례와 제사와 그런 것들이 모두 오히려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 유익한 것들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그저 자기들의 생각대로 그 복된 것들을 오용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지금 그런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한 번 11절에서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전부 회생(回生)가능성이 없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로마11:11) 11 그러면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패망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 때문에 오히려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걸려 넘어져서” “핍토는 회생 불가능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패망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것은 그들이 회생 불가능이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대답이 뭡니까? “아니다입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그들이 잠시 넘어짐으로 해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중에 이스라엘이 , 저거 원래 우리 건데?”하고 시기가 나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시기 위해 하 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신명기에 예언이 되어있던 것입니다.

 

(신명32:21) 21 신 아닌 것을 모시어 내 질투심을 터뜨리고 허수아비를 섬겨 내 속을 썩여 주었으니, 나 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을 돌봐 주어 그들로 하여금 질투를 하게하고 무지한 민족을 돌봐 주어 그들의 속을 썩여 주리라.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셨는데 그들이 안 받아들여서 교회를 덤으로 구원하셨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모독(冒瀆)하는 논리(論理)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이미 계획하시고 그 계획, 하느님의 청사진을 따라 하느님 나라를 차근차근 완성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 내시기 위해 구속사(救贖史)의 단계를 그렇게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하바꾹2:14) 14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 위에는 야훼의 영광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즈카리아14:20-21) 20 그 날이 오면, 말방울까지도 야훼의 것으로 성별되고, 야훼의 전 안에서는 남비도 제단에 피 뿌리는 기구처럼 거룩하게 쓰이리라. 21 그리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모든 솥도 만군의 야훼께 바치려 거룩하게 쓰이리라. 그리하여,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때, 제물 고기는 어느 솥에서나 끓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다시는 만군의 야훼의 전에 장사꾼이 있지 못하리라.

 

이러한 결과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께 돌아와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은 지금 구속의 역사를 이렇게 끌고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지혜가 구속사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6절을 보면

 

(로마11:16) 16 떡 반죽에서 떼 낸 첫 부분을 하느님께 드리면 그 반죽덩어리 전체도 거룩합니다. 또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다 거룩합니다.

 

지금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지만 그들은 원래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 같은 족장(族長)들의 후손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하느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7-24절에 접붙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은 참 올리브나무인 이스라엘의 가지를 잘라내고 돌 무화과나무인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은 단계인데 곧 참 올리브나무인 이스라엘이 다시 줄기에 붙게 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로마11:25-26) 25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모든 것을 다 알았다고 장담할지 모르지만 아직 깨닫지 못하는 숨은 진리가 하나 있는데 여러분도 그것을 꼭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그 진리란 이런 것입니다.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은 완고하지만 모든 이방인들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날에는 그 완고한 마음을 버릴 것이고 26 따라서 온 이스라엘도 구원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성서에도, '시온에서 해방자가 나와 야곱의 후손으로부터 사악을 제거하리라.

 

지금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떠나 완악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은 이방인들을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배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게 되면 이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된다.“ 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입증해 주는 구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전체가 다 하느님께 돌아오게 된다.“라고 해석을 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석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유대인 집단이라고 푸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구원의 대상이 사람의 혈통에 의해 좌우된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두 번 째 견해가 갈라디아6:16말씀에 근거해서 온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온 교회를 말한다는 견해입니다. 그렇지만 9장부터의 이야기 전개 내용이나 11장의 문맥을 보면 여기 11장에서의 온 이스라엘에 이방인이 포함된다는 것이 아주 어색합니다. 특히 11장 상반 절에 보면 이스라엘과 남은 자를 대조하는 여러 구절이 있는데 그런 구절들과 전혀 어우러지지 못합니다.

세 번째 견해가 온 이스라엘선택받은 유대인 전체라는 것입니다. 저도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그렇게 보면 25절의 모든 이방인들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날과도 잘 연결이 됩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날또 아울러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날이 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전체가 교회입니다.

그렇게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간에 우리 인간들 전체는 모두 다 하느님 앞에 불순종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인가? 바울은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한마디로 해 줍니다. 하느님의 자비(慈悲)!“ 하느님의 자비(慈悲)“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임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key point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구원의 발로는 하느님의 자비(慈悲)입니다.

 

(로마11:30-32) 30 전에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순종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 31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를 받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32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비밀인 하느님의 구속사(救贖史), 이 모든 구원의 역사는 결국 하느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에게 자비(慈悲)베푸시기 위한 하느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비(慈悲)’‘엘레오라는 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인 은혜가 죄인들에게 나타난 형태입니다. 은혜는 은혜인데 은혜 안에서도 특별히 죄로 인해 망가지고 더러워진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품어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을 자비(慈悲)‘’엘레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죄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멸망, 저주, 불이익 등을 없애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51: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바쎄바와 동침한 후 예언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1 하느님, 선한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 주소서.

 

다윗이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인 다윗이 하느님 앞에 무엇을 구합니까? 자비(慈悲)를 구합니다. 자비(慈悲)는 그렇게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한량없는 용서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103:8-14) 8 야훼께서는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며 화를 참으시고 사랑이 넘치신다. 9 끝까지 따지지 아니하시고 앙심을 오래 품지 않으신다. 10 우리 죄를 그대로 묻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을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11 높기가 땅과 하늘에 비길 수 있고, 경외하는 자에게는 그 사랑 그지없으시다. 12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우리의 죄를 멀리 치우시고 13 아비가 자식을 어여삐 여기듯이 야훼께서는 당신 경외하는 자를 어여삐 여기시니 14 우리의 됨됨이를 알고 계시며 우리가 한낱 티끌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게 자비(慈悲)입니다. 하느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런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들의 죄를 아예 보지 않으십니다. 아니 그 죄까지도 품어 안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자기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고도 떳떳하게 다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의지해서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과 태도와 감정을 직접 하느님께 투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내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못 마땅함과 수치스러움과 지기 혐오를 하느님께 그대로 투사해서 내가 내 자신이 미워지면 하느님께서도 당연히 자기를 그렇게 미워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닝스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심정이 우리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향해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악을 용인하시지 않으시지만 우리 안에 악이 있다고 해서 그 분의 사랑을 감소시키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 자비(慈悲)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기분 때문이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로마서 전체를 보셔서 알겠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근거를 찾아내셔서 그 것을 근거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서 품에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는 자꾸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妨害)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즉각 적으로 자기 혐오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을 하느님께 투사해서 하느님도 나를 절대 용서치 않으실 거야하고 불안해 하고 숨게 만듭니다. 죄를 짓는 것은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혹 우리가 죄를 지었더라도 잊지 마세요. 하느님은 그 뜨거운 자비(慈悲)의 마음으로 우리를 택하셨고 택하신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좀 더 뻔뻔스러워 지세요.

자기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이렇게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 하느님을 더욱 더 사랑하십시오. 이 복음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아시겠습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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